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106화 (106/272)

106화

나쁜 놈들 (1) 적당히 취기가 오른 채 택시에 올 랐다.

뒷좌석 의자에 등을 깊이 묻은 채 눈을 감고 있을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이 시간에 누구지?”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이규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냈다. 액정에 떠올라 있는 발신자는 장준 경이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이규한이 물었지만 장준경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지금 어디야?”

“택시 타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야.”

“잠깐 만날 수 있어?”

“지금?” “그래. 좀 급해서 그래. 네게 조언 을 구하고 싶은 게 있거든.”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무척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장준경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기에 이규한이 짤막한 한숨을 내쉰 후 물 었다.

“알았어. 어디로 가면 돼?”

“논현역 쪽인데.”

“대충 이십 분 후면 도착할 수 있 겠네. 이따 보자.”

장준경과의 통화를 마친 이규한이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바꿔 달라 고 부탁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이규한이 고민하는 사이 택시는 논 현역 근처에 도착했다.

택시비를 치르고 차에서 내린 이규 한이 근처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혼자서 소주를 마시고 있는 장준경 을 발견한 이규한이 다가갔다.

“왜 혼자 청승 떨고 있어?”

이규한이 질문한 순간,장준경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눈시울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왔어?”

“무슨 일인데 그래?”

장준경이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대 답했다.

“내 자식 같은 작품을 뱃기게 생겼 다.”

‘장준경이 준비하던 작품이라면?’

이규한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마 전 동창회에서 서로가 준비하 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 기 때문에 장준경이 준비하던 작품 의 제목이 ‘베테랑들’이란 것을 금 세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규한이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나더러 빠지란다.” “누가?”

“백 기원.”

장준경은 다짜고짜 이름 석 자를 꺼냈다.

그렇지만 백기원이 누군지는 이규 한도 알고 있었다.

메이저 투자 배급사 중 한 곳인 빅박스의 투자팀장이었기 때문이었 다.

“‘베테랑들’의 투자를 빅박스에서 받았어?”

“응.”

“그런데 왜 너한테 빠지라는 거 야?”

“문제가 좀 있었거든.”

“어떤 문제?”

“심수창 감독과 트러블이 있었어.” 장준경의 입에서 빅박스 투자팀장 인 백기원에 이어서 심수창 감독의 이름도 흘러나온 순간,이규한이 손 을 번쩍 들었다.

“여기 잔 하나 주세요.”

잔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 고 이규한이 장준경의 앞에 놓여 있 던 잔을 빼앗아 단숨에 비웠다.

“자세히 말해 봐.”

이규한이 재촉하자 장준경이 설명 하기 시작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베테랑들’을 준비한 지 삼 년째야. 그동안은 감 독도 안 붙고,투자도 잘 안 됐어. 그런데 사 개월 전쯤에 시나리오 각 색고가 나온 다음부터 갑자기 진행 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었어.”

“시나리오 각색고가 잘 나왔나 보 네?”

“옹. 내가 봐도 각색고가 괜찮게 나왔어. 전부 네 덕분이야.”

“내 덕분이라니?”

“이거 말이야.”

장준경이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동 그랗게 말며 덧붙였다.

“우리가 이게 없지,가오가 없냐? 네가 알려 줬던 이 대사 덕분에 주 인공 캐릭터가 한층 명확해졌어. 그 래서 시나리오 각색고도 잘 빠진 거 지.”

비로소 말뜻을 이해한 이규한이 고 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이게 없지,가오가 없냐?”

이규한이 동창회에서 장준경에게 알려 주었던 것은 대사 하나가 전부 였다.

그렇지만 짤막한 대사 하나가 작품 의 흥망성쇠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 는 법이었다.

“우선 심수창 감독이 붙었어. 별 기대를 안 하고 시나리오를 건넸는 데,바로 다음 날 본인이 연출을 맡 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거든. 내 입장에서는 무척 고마운 일이었 지.”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수창은 흥행 감독이었다.

총 네 편의 작품을 연출했고,모두 손익 분기점을 넘겼다.

그중 두 작품은 중박을 쳤다.

‘그의 결혼식’은 약 380만 명,‘피 해자들’은 약 420만 명의 관객을 동

원했으니까.

그러니 장준경 입장에서는 심수창 감독이 ‘베테랑들’의 연출을 맡겠다 고 나서 준 것이 고마웠으리라.

“심수창 감독이 ‘베테랑들’의 연출 을 맡기로 한 덕분인지 몰라도 빅박 스에서 투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 어. 그때만 해도 이제 다 됐다. 이 렇게 생각했지.”

장준경이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 가 아니었다.

흥행 감독인 심수창이 ‘베테랑들’ 의 연출을 맡았고,메이저 투자 배 급사 중 한 곳인 빅박스에서 투자를 확정한 상황.

영화 제작 단계에서 큰 산은 대부 분 넘은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거야?”

“심수창 감독이 작가를 데려오면서 꼬이기 시작했어.”

“작가를 데려왔다니?”

“이지희 작가라고 오랫동안 같이 일해 온 작가라고 하더라고. 그리고 심수창 감독이 이지희 작가에게 ‘베 테랑들’의 윤색을 맡겼어.”

“내가 듣기에 크게 문제가 될 부분 은 없는 것 같은데?”

“그래. 네 말대로 원래라면 문제가 될 게 없었어. 그런데 이지희 작가 에게 맡겼던 윤색이, 윤색이 아니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어.”

……?"

“윤색이 아니라 각색을 해 버린 거 지.”

‘윤색을 맡겼는데 각색을 해 왔 다?’

비로소 이규한이 말뜻을 이해했다. 윤색과 각색.

용어는 엇비슷했지만 차이는 컸다. 윤색은 설정이나 캐릭터를 건드리

지 않고,대사와 지문만 가볍게 손 을 보는 작업인 반면,각색은 설정 이나 캐릭터까지 건드리면서 대폭으 로 수정을 하는 것이었으니까.

“더 큰 문제는 이지희 작가가 각색 한 시나리오가 형편없었다는 거야.”

장준경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한 순간,이규한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 었다.

“그게 뭐가 문제야? 이지희 작가가 각색해 온 시나리오가 별로면,기존 에 잘 나왔던 시나리오로 작품을 진 행하면 되잖아?”

“나도 그럴 생각이었지. 그런데 심 수창 감독이 반대했어.” “반대한 이유는?”

“심수창 감독은 이지희 작가가 수 정해 온 시나리오가 더 낫다고 계속 고집을 피웠어. 그리고 이지희 작가 가 수정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촬 영에 들어가겠다고 했지.”

“넌 당연히 반대를 했을 거고. 맞 아?”

“맞아. 그래서 의견이 팽팽하게 맞 섰고,그 사실을 알게 된 빅박스 투 자팀장 백기원이 중재에 나섰어. 그 런데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데 중재가 될 리가 없 잖아? 그 과정에서 심수창 감독이 백기원 팀장에게 선언했어. 나를 택 하든가? 빅스빅 픽처스를 택하든 가? 둘 중 택일하라고,”

빅스빅 픽처스는 장준경이 세운 영 화 제작사의 이름이었다.

“백기원 팀장은 어떤 결정을 내렸 어?”

“어떤 결정을 내렸을 것 같아?”

장준경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 다.

“심수창 감독.”

이규한이 지체 없이 대답하자 장준 경이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왜 그렇게 판단했는데?”

“빅스빅 픽처스는 신생 제작사이니 까.”

“분하긴 한데. 정답이야.”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 실을 깨달은 이규한이 팔짱을 꼈다.

지금까지 장준경에게서 들은 그간 의 과정을 찬찬히 되짚어 보기 위함 이었다.

‘냄새가 나는데?’

수상쩍은 냄새가 난다고 판단한 이 규한이 물었다.

“다른 얘기는 없었어?”

“있었어. 백기원 팀장이 다른 제안 을 했었어.” 끼떤 제안?” “공동 제작을 하는 것을 받아들이 면,심수창 감독이 아니라 빅스빅 픽처스의 손을 들어주겠다고 했어.”

이규한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공동 제작을 제안한 백기원 팀장 역시 수상쩍기는 마찬가지였으 니까.

“어디와 공동 제작을 하라는 거 야?”

“플래닛 엔터테인먼트라는 제작사 와 공동 제작을 하라고 하더군.”

“수익 배분 비율은?”

“오 대 오.”

“오 대 오?” “어때? 진짜 나쁜 새끼들이지?”

장준경이 울분을 토해 냈다. 그리 고 그가 울분을 토해 내는 것은 당 연했다.

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장준경은 ‘베테랑들’이란 작품을 혼자 준비해 왔었다. 그런데 갑자기 툭 튀어 나 온 플래닛 엔터테인먼트라는 제작사 와 공동 제작을 하라는 백기원 팀장 의 제안을 받고서 화가 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게다가 수익 배분 비율을 오 대 오로 하라는 제안을 들었을 때 미치 고 팔짝 될 노릇이었을 터였다.

화를 주체하기 힘든 걸까.

장준경이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단 숨에 비운 후,다시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빈 잔을 채운 후 연거푸 술을 마 시려는 장준경의 손을 이규한이 막 았다.

“왜 막아?”

“침착해.”

“지금 내가 침착할 수 있겠어?”

“화가 난다는 건 알지만,지금 흥 분하면 오히려 네 손해야. 백기원 팀장은 그걸 바라고 있는 거고.”

이규한의 손을 뿌리치고 술잔을 들 어 올리던 장준경이 멈칫했다.

“백기원 팀장이 바라는 게 내가 흥 분하는 거라고? 그게 무슨 뜻이야?”

“짚이는 게 있어서 그래.”

“뭔데?”

“나중에 얘기하자.”

“나중에 언제?”

“술 깨고 나서 다시 얘기해.”

장준경은 무척 조급해 보였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차분한 목소리 로 덧붙였다.

“하나씩 하자. 일단 확인부터 하는 게 먼저야.”

“뭘 확인하는 게 우선이라는 거 야?”

이규한이 대답했다.

“시나리오.”

“술이 다 깨 버렸네.”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양도윤 감독과 김명인.

이 조합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리면 서 ‘사관,왕을 만든 남자’의 세팅은 거의 완성이 된 셈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스파이들’의 연출도 양도윤 감독 에게 맡기기로 결정하면서 제작이 한참 뒤로 미뤄진 상황이었다.

급한 불은 어느 정도 끈 셈.

그래서 집에 돌아가서 오래간만에 두 발을 쭉 뻗고 푹 잘 계획이었는 데.

늦은 시간에 장준경에게서 불쑥 걸 려 온 전화로 인해 이규한의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져 버렸다.

결국 이규한은 집 대신 사무실로 돌아왔다.

장준경과는 대학 동창인 사이인 만 큼 그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을 알고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걸 까?”

채 혼잣말을 꺼냈다.

심수창 감독과 빅박스 투자팀장 백 기원.

두 사람 모두 수상쩍기는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아직 확증이 없는 상황이었 기에 이규한이 백팩을 열고,세 권 의 시나리오 책을 꺼냈다.

‘베테랑들’이라는 같은 제목을 가 진 세 권의 시나리오 책.

그러나 책의 앞장에 적혀 있는 작 가의 이름은 전부 달랐다.

왼쪽에 놓인 시나리오 책의 앞장에 적힌 작가의 이름은 한강준.

가운데에 놓인 시나리오 책의 앞장 에 적힌 작가의 이름은 강민응.

오른쪽에 놓인 시나리오 책의 앞장 에 적힌 작가의 이름은 이지희였다

“일단… 살펴보자.”

이규한이 먼저 왼쪽에 놓인 시나리 오 책을 바라보았다.

장준경의 설명대로라면 한강준 작 가가 쓴 ‘베테랑들’의 시나리오 초 고를 향해 이규한이 손을 뻗었다.

잠시 후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든 이규한의 눈앞에 숫자가 떠올랐다.

1억 관객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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