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98화 (98/272)

98 화

- 153,781.

배정훈 감독이 건넸던 ‘사랑이 운 다’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이규한의 눈앞에 떠올랐던 숫자였 다.

상업 영화로서 망작이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닌 적은 예상 관객수.

물론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어 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예상

관객수가 변한다는 것은 이규한도 잘 알고 있었다.

임동완과 박수지가 ‘사랑이 운다’ 의 남녀 주인공으로 합류하고,투자 와 배급을 맡은 씨제스 엔터테인먼 트가 홍보를 집중한다면?

아마 ‘사랑이 운다’의 관객수는 늘 어날 터였다.

“호박에 줄 그어 봐야 수박이 되지 는 않는 법이지.”

그렇지만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영화 제작을 건축으로 비유하자면 가장 중요한 설계가 바로 시나리오 였다.

따라서 이규한의 판단으로는 시나 리오의 완성도가 영화의 작풍성과 흥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 이었다.

그런데 ‘사랑이 운다’의 시나리오 는 많이 미흡한 편이었다.

각색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치다 보 면 시나리오가 더 발전하면서 관객 수가 급격히 늘어날 수도 있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이규한은 판 단했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배정훈 감독 을 겪어 봤기 때문이었다.

배정훈 감독은 자신이 쓴 시나리오 를 다른 작가가 수정하는 것에 거부

감을 갖고 있는 스타일이었다.

배정훈 감독이 썼던 ‘스파이들’의 시나리오를 박한정 작가가 각색해서 훨씬 좋은 결과물이 나왔음에도,영 마뜩찮아 했던 것이 증거였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

사거리 픽처스에서 ‘사랑이 운다’ 를 제작하기로 한 배정훈 감독은 시 나리오 수정에 부정적인 태도를 견 지할 것이었다.

‘미니멈 십오만,맥시멈 백만!’

이규한이 예상하는 ‘사랑이 운다’ 의 관객수였다. 그리고 이규한이 ‘사관,왕을 만든 남자’의 개봉 시기 를 ‘사랑이 운다’와 엇비슷한 시기 로 잡으려는 이유는 더 확실하게 차 이를 벌리기 위해서였다.

“먼저 건드린 건 너야.”

개봉 시기 역시 관객수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가운데 하나.

‘사관,왕을 만든 남자’가 흥행한다 면,‘사랑이 운다’의 관객수는 더 줄 어들 수밖에 없었다.

‘은혜는 잊지 않는다. 그리고 원한 은 더욱 잊지 않는다.’

이규한의 인생 신조였다.

“그러니까 날 원망하지 마라.”

김기현을 떠올리며 이규한이 작게 혼잣말을 꺼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사무실로 돌 아온 이규한이 황진호에게 다가갔 다.

“형. 할 얘기가 있어요.”

“무슨 얘기야?”

“‘사관, 왕을 만든 남자’라는 작품, 형이 맡아서 제작을 진행해 주세 요.”

이규한이 말을 마친 순간,황진호 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사관,왕을 만든 남자"?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준비하는 작품 중 에 그런 작품도 있어? 처음 들어보 는 제목인데?”

그 이야기를 듣고서 이규한은 자신 의 실수를 깨달았다.

‘사초 살인 사건’에서 ‘사관,왕을 만든 남자’로.

작품의 제목이 갑자기 바뀐 상황이 었고,황진호는 아직 제목이 바뀐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이규한이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 명한 후에야 황진호가 두 눈을 빛냈 다.

“바뀐 제목이 훨씬 나은 것 같은 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까 그게 무슨 소리야? 날더러 ‘사관,왕을 만든 남자’의 제 작을 도맡아서 진행하라는 뜻이야?”

“맞습니다.”

황진호가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뭐가 걱정이세요?”

“일단 사극 영화는 처음이란 게 마 음에 걸려.”

황진호가 대답한 순간, 이규한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사극 영화는 해 본 적 없습 니다. 이렇게 경험이 쌓이는 거죠.” “그렇긴 하지만……

“또 뭐가 마음에 걸리세요?”

“…자신이 없어.”

기어 들어갈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황진호가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떠올린 것은 ‘지옥도’였다.

‘지옥도’의 흥행 참패.

황진호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작품의 제작 을 맡으라는 지시를 받자,자신이 없다는 대답을 꺼내는 것이었다.

이규한도 제작했던 영화의 흥행 참 패를 경험했던 적이 있었던 만큼, 황진호의 심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규한은 지시를 철회할 생 각이 없었다.

“다른 일을 할 자신 있으세요?”

“차라리 다른 작품을 맡는 게 나을 것 같아.”

이규한이 질문하자마자, 황진호가 냉큼 대답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황진호가 꺼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시간을 벌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황진호는 아까 이규한이 던 진 질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규한이 질문했던 것.

작품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오해하셨네요. 영화 말고 다른 일, 그러니까 영화와 상관없는 일을 하 면서 살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던 겁 니다.”

이규한이 재차 질문을 던지고 나서 야, 황진호는 제대로 질문의 의미를 이해했다.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야?”

“형이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으니 까요.” “내가?”

“자신 없죠?”

영화에는 매력이 있었다.

박봉과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이 바 닥을 떠나지 못하는 영화 촬영 현장 의 스텝들,언젠가는 스타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조연 배우들, 입봉이 무척 어렵다는 사실 을 알면서도 계속 시나리오를 쓰고 좌절하기를 반복하는 작가와 감독 들,영화의 흥행 참패로 패가망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바닥을 떠나 지 못하고 다시 빚을 내서 영화 제 작에 나서는 제작자들까지.

한번 영화계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쉽게 떠나지 못했다.

황진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 있다는 대답을 못 하고 머뭇 거리는 것이 황진호 역시 앞으로도 영화판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증 거였다.

“그럼 이겨내요.”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는 말 도 있잖아요. 그리고 영화가 망해도 책임은 제가 집니다. 블루문 엔터테 인먼트의 대표는 저니까요.”

“그래서… 더 무서운 거야. 너한테 까지 피해가 갈까 봐.” 황진호가 조심스럽게 대답한 순간, 이규한이 웃으며 입을 뗐다.

“그것 때문이라면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왜 부담을 안 가져도 돼?”

“그동안 계속 성공을 거두었기 때 문에 한 작품 망한다고 해도 회사가 휘청일 정도는 아니니까요.”

“그래도……

“그리고 안 망해요. 망하기에는 너 무 멀리 왔어요.”

박동선 작가가 쓴 ‘사관,왕을 만 든 남자’의 시나리오는 무척 좋았 다.

이규한이 확인했던 320만 명이라 는 예상 관객수가 ‘사관,왕을 만든 남자’의 시나리오가 좋다는 증거였 다.

시나리오라는 기초가 튼튼한 만큼, 몇 가지 실수가 있더라도 작품이 와 르르 무너질 가능성은 낮았다.

이것이 이규한이 ‘사관, 왕을 만든 남자’가 망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이유.

“알았다. 해 볼게.”

그때,황진호가 대답했다.

“잘 생각했어요.”

이규한이 웃으며 그 결정을 반긴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왜 네가 끝까지 맡아서 하지 않고, 도중에 내게 이 작품을 맡기는 거야?”

황진호가 질문했다.

“불안해서요.”

“뭐가 불안하다는 거야?”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요.”

이규한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관,왕을 만든 남자’의 개봉 시 기를 ‘사랑이 운다’의 개봉 시기에 맞춰 달라고 권지영에게 부탁했던 것.

김기현이 제작하는 ‘사랑이 운다’ 와 정면 대결을 펼쳐서 압도적으로 눌러 버리겠다는 욕심이 앞섰기 때 문이었다.

이런 감정들이 계속 앞서다 보면 자꾸 욕심이 생길 것이었고, 그 욕 심은 결과적으로 ‘사관, 왕을 만든 남자’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 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김기현 에게 사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황진호에게 ‘사관, 왕을 만든 남자’ 의 제작을 맡기기로 결심한 것이었 고.

“일단은 그렇게만 알고 계세요.”

만약 더 자세히 말한다면?

황진호 역시 ‘사관,왕을 만든 남 자’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사적인 감 정이 생겨서 공과 사를 구분하기 힘 들어질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래서 이규한이 자세한 설명을 피 했을 때였다.

“그럼 이 대표는 뭘 할 거야? ‘스 파이들’에 집중할 거야?”

“‘스파이들’도 준비하겠지만,미뤄 두고 있던 다른 일도 처리할 생각입 니다.”

“다른 일? 뭔데?”

이규한이 대답했다.

“이사 준비요.” ‘조물주 위의 건물주가 될 거야.’ 김미주에게서 ‘수상한 여자’의 정 산금을 어디에 쓸 거냐는 질문을 받 았을 때,이규한이 꺼냈던 대답이었 다.

농담 삼아 그냥 꺼냈던 말이 아니 었다.

이규한은 진짜 건물을 살 생각이었 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적당 한 매물을 보러 다녔었다.

그렇지만 마음에 딱 드는 매물을 찾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규한이 내심 마음에 들어 하고 있던 건물이 때마침 급매로 나왔다.

“오빠!”

건물 1층에 입주해 있는 커피전문 점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있던 이규한이 이규리의 목소리를 듣고서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셨습니까,형님!”

이규리와 함께 들어선 최호인도 인 사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이규한의 맞은편 의자에 앉자마자,

이규리가 물었다.

“왜 이리로 오라고 했는데?”

“보여 줄 게 있어서 불렀어.”

“뭔데?”

“여기.”

이규한이 대답했지만,이규리는 제 대로 알아들은 기색이 아니었다.

“여기라니?”

“이 커피숍,어때?”

“고작 커피숍을 보여 주려고 여기 까지 불렀다고? 여기가 블로그에서 소문난 유명한 커피숍도 아닌 것 같 은데?”

손님이 거의 없는 조용한 커피숍 내부를 둘러보며 이규리가 의문을 표했다.

"여기가 유명한 커피숍은 아냐."

"그런데 왜......?"

"곧 내가 인수할 거라서."

이규한이 이 커피전문점을 인수할 거라고 계획을 밝히자, 이규리가 두눈을 치켜떴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것 맞아? 진짜 오빠가 이 커피숍을 인수할 거야? 왜 갑자기 커피숍을 인수하려는 건데?"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내던 이규리가 잠시 후 표정을 굳혔다.

“혹시… 망했어?”

“응?”

“영화 일이 잘 안 되는 것 아냐? 그래서 영화일 관두고 커피숍 하려 는 것 아니냐고?”

우려 섞인 표정으로 질문하는 이규 리에게 이규한이 대답했다.

“네 오빠 천만 영화인 ‘수상한 여 자’ 제작한 지 채 1년도 안 지났다. 그런데 벌써 망했을 리가 없잖아?”

“그럼 대체 이유가 뭔데?”

“너 주려고.”

“방금 뭐라고 그랬어?”

“네 꿈이 커피숍을 여는 거였잖

아?”

여동생인 이규리는 분위기 있는 커 피숍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라고 입 버릇처럼 말했었다. 그래서 바리스 타 자격증도 취득했었고.

그렇지만 이규리는 꿈을 이루지 못 하고 현실과 타협했다.

현재 이규리는 작은 무역회사에서 경리로 일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비정규직으로.

“그러니까 날더러 회사 관두고 이 커피숍을 운영하라고?”

“맞아.”

본인의 오랜 꿈을 이룰 기회가 찾

아온 상황.

이규한은 당연히 이규리가 기뻐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렇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 나갔다.

“오빠,미쳤어? 제정신이야? 설마 벌써 계약한 건 아니지?”

1억 관객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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