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96화 (96/272)

96 화

“아닙니다. 저는 백진엽 씨가 기획 한 작품을 영화로 제작할 의사를 갖 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나기를 청했 던 겁니다.”

“진심입니까?”

“물론 진심입니다. 특히 ‘인천행 버스’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습 니다.”

이규한이 이렇게 대답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일까.

백진엽의 말문이 일순 막혔다. 그 리고 백진엽을 대신해 황진호가 대 화에 끼어들었다.

“이 대표,나한텐 그런 말 한 적 없었잖아?”

“고민하는데 시간이 좀 오래 걸렸 습니다.”

“그럼 진심이야?”

“네,진심입니다.”

“하지만……

황진호도 이내 말문이 막혔다. 그 러나 이규한은 그가 하려고 했던 말 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백진엽이 기획했던 ‘인천행 버스’ 는 좀비라는 흥행 불가 요소가 등장 하지 않느냐?

또, 허무할 정도로 스토리도 형편 없지 않느냐?

그런데 진짜로 ‘인천행 버스’를 영 화로 제작할 생각이냐?

황진호는 이런 질문들을 쏟아내고 싶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빈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백진엽이 기획을 하고 연출까지 맡 아 단편 영화로 만들었던 ‘인천행 버스’.

좀비가 등장하면 무조건 망한다는 충무로의 불문율이 존재하긴 했지 만,이규한은 그깟 불문율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머잖아 그 불문율이 깨진다는 사실 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불문율을 보기 좋게 깨트린 작품 은 바로 ‘부산행 열차’였다.

‘부산행 열차’와 비교하면 ‘인천행 버스’는 스토리가 많이 허술한 편이 었고,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렇지만 좀비 바이러스로 인해 대 한민국이 좀비 천국이 되고,살아남 기 위해서 항구로 향한다는 발상만 큼은 유사했다.

‘부산행 열차’가 개봉한 것은 2016 년.

대략 4년 후였다.

그런데 ‘부산행 열차’가 개봉하기 4년 전에 비슷한 발상을 하고 작품 을 기획했다는 것이 백진엽의 감각 이 참신하고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조선에 나타난 좀비’,‘레저렉션, 부활한 그놈’,‘죽지 않는 남자’.

백진엽이 그동안 기획했던 다른 작 품들 역시 소재가 참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진엽이 기획 피디나 제작자로서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기 때문 이었다.

‘때를 잘못 타고 태어난 천재!’

이규한이 이렇게 판단을 내리며 백 진엽에게 안쓰러운 시선을 던졌다.

그렇지만 그도 잠시,이규한의 표 정이 밝아졌다.

이규한의 입장에서는 백진엽이 피 디나 제작자로서 성공을 거두지 못 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기 때문이 었다.

덕분에 백진엽을 블루문 엔터테인 먼트의 직원으로 채용할 기회가 생 긴 것이었으니까.

“물론 당장 ‘인천행 버스’라는 작 품의 제작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 다.”

“이유는요?”

“스토리가 많이 허술하고, 설정도 가다듬어야 하니까요.”

이규한이 대답을 마친 순간, 백진 엽이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역시 거짓말이었군요.”

“저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 다.”

“스토리가 허술하다느니,설정에 구멍이 있으니 가다듬어야 한다느니 하는 핑계를 늘어놓으면서 차일피일 제작을 미루다가 그냥 없던 일로 하 려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경험이 여러 차례 있었기 때 문일까.

백진엽이 의심스런 시선을 던지며 질문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대답 대신 반문 했다.

“정말 핑계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당연히……

“왜 버스입니까?”

“네?”

“왜 하필 버스를 선택했느냐고 물 은 겁니다.”

“버스를 택한 이유는……

이규한의 질문이 너무 갑작스러워 서일까.

아니면,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백진엽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 뭇거린 순간,이규한이 다시 물었다.

“기차가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 니까?”

“버스가 아니라… 기차요?”

“한번 출발하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 급행 기차를 탔 다고 가정하면 더 긴박함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럼 엔진 과열로 시동 이 꺼져서 인류가 멸망하는 ‘인천행 버스’처럼 허무한 결말은 나오지 않 을 겁니다.”

백진엽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 겨 있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덧붙였 다.

“게다가 기차는 한 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호 칸에 타고 있던 사람 들이 좀비로 변하고 나서,2호 칸에 타고 있던 주인공 일행을 향해 돌진 하고, 그들을 피해서 마지막 칸으로 이동하면서 필사적으로 막아 내는 과정을 그린다면 이야기가 지금보다 훨씬 더 풍성해지지 않겠습니까?” 백진엽은 두 눈을 크게 치켜뜬 채 이규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에서 기차로 바꾸기만 해도 이야기에 긴박감이 더 생기고 풍성 해집니다. 제가 설정을 가다듬을 필 요가 있다고 말씀드린 게 핑계가 아 니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백진엽은 자존심이 센 편이었다.

그래서 순순히 인정하는 대신,다 른 표현을 했다.

“‘인천행 기차’도 나쁘지 않겠네 요.”

그런 그에게 이규한이 덧붙였다.

“꼭 인천행일 필요는 없죠.” “너무 빨리 도착하니까요.”

“너무 빨리 도착한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앞 으로 시간이 많을 테니까 자세한 이 야기는 천천히 나누시죠.”

이규한이 대충 얼버무린 순간,백 진엽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무슨 시간이 많다는 겁니까?”

“날 믿을 수 있겠습니까?”

"……?"

“그동안 영화 제작자들에게 많이 속으셨던 상황이니,저 역시 못 믿 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습니 “뭐,기존에 제가 만났던 영화 제 작자들과 조금 다른 면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백 퍼센트 신뢰할 수 는 없죠.”

백진엽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이규 한의 예상대로였다.

그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덧붙였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직접 확 인하시죠.”

“직접 확인하라니요?”

“내가 과연 백진엽 씨와 했던 약속 을 지키는가를 곁에서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어떻게요?”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로 매일 출근 하시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말귀를 알아들은 백진엽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런 그에게 이규한이 말을 더했 다.

“본인의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 큼 확실한 것은 없는 법이죠. 그리 고… 지금 딱히 할 일도 없지 않습 니까?” 베테랑 피디인 황진호와 젊고 신선 한 감각을 지닌 기획피디 백진엽.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 두 명의 식 구가 늘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이규한이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새 출발을 축하하듯 희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사초 살인 사건’의 시나리오 작업이 끝난 것이었다.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제대로 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초 살인 사건’ 원작 소설을 시 나리오로 바꾸는 작업을 맡았던 박 동선 작가는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 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그에게 힘주어 말했다.

“제대로 했어요. 아니, 최고의 결과 물이 나왔습니다.”

이규한이 극찬을 했음에도 불구하 고,박동선 작가는 순순히 믿는 기 색이 아니었다.

여전히 자신 없는 표정을 짓고 있 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부심을 가져도 됐 다.

박동선 작가가 완성한 ‘사초 살인 사건’의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든 순 간,이규한의 눈앞에 떠오른 예상 관객수가 삼백만에 육박했기 때문이 었다.

로터스 엔터테인먼트 투자팀.

이규한이 사무실로 들어서자,권지 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맞아 주었

“오셨어요?”

그런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어둡다는 사실을 알아챈 이규한이 물었다.

“권 팀장,무슨 일,있어?”

“무슨 일,있죠.”

“무슨 일인데?”

“바람이 났거든요.”

“바람?”

“철석같이 믿었던 남자친구가 바람 이 났어요.”

권지영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남의 연애사에 왈가왈부하 는 것은 금물이었다.

해서 이규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 다.

“나쁜 놈이네.”

“그렇죠?”

“그래. 권 팀장처럼 괜찮은 여자를 만나면서 바람을 폈으니까.”

이규한이 위로의 말을 건넨 순간이 었다.

“알면서 왜 그랬어요?”

“응?”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바람을 피우 셨냐고요?”

권지영이 살짝 언성을 높였다.

그로 인해 사무실 내 직원들의 시 선이 일제히 이규한에게로 쏠렸다.

적잖이 당황한 이규한이 서둘러 입 을 뗐다.

“권 팀장,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 야?”

“NEXT 엔터테인먼트와 투자 계약 체결했잖아요.”

“응?”

“설마 시치미를 뚝 멜 생각은 아니 시죠?”

‘그게 알려졌구나.’

비로소 상황을 파악한 이규한이 쓰 게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해. 미리 말 못 해서.”

“왜 그랬어요? 저희한테 서운한 점 이라도 있었어요?”

“아냐. 서운한 것 없었어.”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권지영의 매서운 추궁에 버티지 못 하고 이규한이 솔직히 대답했다.

“빚이 있었어.”

“무슨 빚이요.”

“마음의 빚.”

‘……?"

“NEXT 엔터테인먼트 투자팀장인 김태훈 선배가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도움을 줬었어. 그런데 마침 도 와달라고 청하길래,거절할 수가 없 었어.”

“언제요?”

“응?”

“언제 빚을 졌는데요?”

“예전에. 너무 자세히는 묻지 마. 당시의 아픈 기억이 자꾸 떠오르니 까.” 이규한이 대충 얼버무리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화 많이 났어?”

“이 대표님이 NEXT 엔터테인먼트 와 투자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 고 나서 화도 나고 서운하기도 했어 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요.”

“어떻게 생각이 바뀌었는데?”

“더 잘하기로.”

“응? 무슨 뜻이야?”

“제가 더 잘하면 앞으로 바람을 안 피우실 테니까요.”

권지영이 두 눈을 빛내며 각오를 밝힌 순간, 이규한이 웃으며 대꾸했

“바람피우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 네.”

“이 대표님!”

도끼눈을 뜨고 있는 권지영을 확인 한 이규한이 서둘러 덧붙였다.

“농담해 본 거야.”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뜨린 권지영 이 다시 말했다.

“약속하세요.”

“갑자기 무슨 약속을 하라는 거 야?”

“NEXT 엔터테인먼트와 투자 계약 을 맺은 작품보다 저희와 계약을 맺

은 작품인 ‘사초 살인 사건’을 더 흥행시키겠다는 약속이요.”

권지영은 약속을 하라고 재촉했다. 그리고 이규한의 입장에서도 나쁠 것은 없었다.

“노력할게.”

“약속한 겁니다?”

이규한이 웃으며 입을 뗐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 팀장의 전폭 적인 지원이 필요해.” “시나리오는 어땠어?’ 회의실로 자리를 옮긴 후,이규한 이 질문했다.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시… 라니?”

“시나리오조차 나와 있지 않은 세 팅이 전무한 상황에서 ‘사초 살인 사건’이라는 작품에 투자를 하는 것,저희 입장에서도 모험이었거든 요. 이 대표님만 믿고 한 모험이었 는데.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역시 모험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 다는 뜻입니다.”

“시나리오가 좋았다는 뜻이지?”

“맞습니다.” 권지영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지 만 이규한은 그녀가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표정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왜 그래?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제목이 좀 걸리네요.”

1억 관객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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