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화
새 식구가 들어왔습니다 (1) 이규한이 봉투 속에 돈 대신 넣어 온 것은 계약서였다.
황진호가 역시 떨리는 손으로 봉투 속에 들어 있던 계약서를 꺼내서 살 피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향해 이 규한이 말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기탄없이 물 어보셔도 됩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진호가
입을 뗐다.
“이건 너무 과하잖아.”
“뭐가요?”
“지분을 이렇게 많이 주는 법이 어 딨어?”
이규한이 황진호에게 건넨 계약서.
보통의 피디 계약서에 비해 지분의 비율이 두 배 이상 높았다.
그 계약 조항을 확인했기 때문에 황진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었다.
“능력 있는 피디이니까요.”
“능력 있는 피디?”
“형은 영화를 제작한 경험이 있습 니다. 성공했든,실패했든 영화 한 편을 온전히 제작해 본 경험이 있다 는 것은 큰 경험이자 자산이니까 요.”
후우.
황진호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인정해 주 는 사람을 만난 것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올랐기 때문이리라.
“고맙다.”
‘고마울 것 없습니다. 형도 제 입 장이었다면 똑같이 했을 테니까요.’
“진짜 죽을힘을 다해서 열심히 할
게.”
황진호가 각오를 다졌다.
“네,그 약속 지키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그래야 형도 다시 영화 제작 현장 으로 복귀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과 함께 이규한이 속으로 소 리 쳤다.
‘우리 같이 잘 먹고 잘 삽시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이규한이 일찌감치 출근하자,김미 주가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왜 벌써 출근하셨어요?”
“어깨가 무거워서 잠이 안 오네.”
이규한의 대답을 들은 김미주가 충 고했다.
“담 걸렸으면 병원에 가 보세요.” “담 걸린 거 아닌데.”
“그럼 왜 어깨가 무거운데요?”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직원이 한 사람 더 늘었거든.”
새로운 직원을 뽑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김미주가 흥미를 드러냈다.
“언제 채용했는데요?”
“얼마 전에.”
“그런데 왜 저한테 말 안 했어요?” “지금 하고 있잖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김미주가 물었다.
“누군데요?”
그때,사무실 문이 열리고 황진호 가 들어왔다.
“마침 도착했네.”
이규한이 황진호에게 웃으며 눈인 사를 건넨 후,소개했다.
“인사해. 오늘부터 블루문 엔터테
인먼트에서 피디로 일하게 된 진호 형. 형도 인사하세요. 형이 입사하기 전까지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유일 한 직원이었던 김미주 씨예요.”
이규한이 소개를 마치자,황진호가 김미주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 다.
“황진호입니다.”
“김미주예요.”
어색한 인사를 마치자마자,김미주 가 물었다.
“원래 영화 쪽 일을 하셨어요?”
“네,얼마 전까지 영화 제작 일을 했습니다.”
“그럼 제작하셨던 영화도 있으세 요?”
“네,있습니다.”
“제목이 뭔데요?”
김미주의 질문을 받은 황진호가 바 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것을 확인한 이규한이 끼어들었 다.
“미주 씨도 알고 있는 작품이야.”
“어떤 작품인데요?”
“개봉하는 날 가서 보고 나서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극장이 바로 지 옥이란 생각이 들어서 무조건 망할 거라고 예상했었던 작품.”
“미주 씨가 이런 감상평을 남겼었 는데. 기억 안 나?”
김미주는 기억력이 나쁜 편이 아니 었다.
“혹시 제작하셨던 작품이… ‘지옥 도’인가요?”
“맞습니다. 일단 사과부터 해야겠 네요.”
“왜요?”
“지옥을 경험하게 해 드려서 죄송 합니다.”
황진호가 정중하게 사과하자,김미 주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 던 이규한이 제안했다.
“그럼 회의부터 할까요.”
그 제안을 들은 김미주가 깜짝 놀 라며 물었다.
“그런 것도 해요?” 회의를 하자는 제안을 들은 김미주 가 당혹스런 기색을 드러낸 것.
어쩌면 당연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를 세운 후, 지금까지 한 번도 회의를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규한이 한차례도 회의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함께 회의를 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동안 이규한은 혼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실행에 옮겼던 셈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 있 었다.
새 식구인 황진호가 합류했기 때문 이었다.
“오늘 안건은 신입 사원 채용에 대 한 걸로 하죠.” 이규한이 회의의 안건을 입에 올리 기 무섭게 김미주가 황진호를 힐끗 바라보며 질문했다.
“신입 사원은 이미 뽑았잖아요?”
“형은 신입 사원이 아니라 경력 사 원이지. 이번에는 진짜 신입 사원을 뽑을 거야.”
“직원을 또 뽑는다고요?”
김미주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 하고 드러냈다.
“응,더 뽑을 거야.”
“왜요?”
“좀 더 체계적으로 회사를 운영할 때가 됐거든.” 이미 결심을 굳힌 상황이었기에 이 규한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현재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준 비 중인 작품은 두 작품이야. 그중 한 작품은 내가 맡아서 진행하고, 나머지 한 작품은 진호 형이 책임을 지고 맡아서 진행할 거야. 그 외에 작가 관리를 비롯해서 판권 계약, 작품 기획 등을 맡아서 진행해 나갈 신입 피디를 뽑을 생각이야.”
이규한이 계획을 밝힌 후,황진호 를 바라보았다.
“혹시 추천할 만한 사람 있으세 “일단 조건을 들어보는 게 우선일
것 같은데.”
“신입 사원이 갖춰야 할 조건은 한 가지뿐입니다.
“뭐지?”
“감각.”
이규한이 대답한 후,부연설명을 더했다.
“앞으로의 영화 시장은 지금까지와 는 무척 많이 달라질 겁니다. 판타 지 소재의 작품은 한국 영화 시장에 서는 통하지 않는다. 인간 이외의 존재가 등장하는 영화는 무조건 망 한다. 이런 불문율들이 모두 깨지게 될 겁니다. 그리고 OSMU가 확대되 면서 시장이 점점 커지게 될 겁니 다. 쉽게 말해서 소설이나 웹툰 같 은 원작의 판권을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급 변하는 영화 시장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존의 패러다임에 갇히지 않은 젊은 감각을 가진 직원이 필요 하기 때문입니다.”
이규한의 이야기를 마친 순간,김 미주가 새삼스런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을 느낀 이규한이 물었다.
“왜 그렇게 봐?”
“갑자기 딴 사람처럼 보여서요.”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규한 이 맞거든.”
이규한이 픽 하고 실소를 홀렸을 때,황진호가 말했다.
“이 대표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한 명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해.”
“누군데요?”
황진호가 대답했다.
“백진엽.”
황진호가 백진엽의 이름 뒤에 직함 을 붙이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워낙 여러 가지 일을 하는 터라, 어떤 직함으로 불러야 할지 난감했 기 때문이었다.
“좀비가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당 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하 나. 인천으로 가서 배를 타고 이 나 라를 떠야 합니다. 인천행 마지막 버스의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5분. 시간이 없습니다.”
이규한이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 고 있을 때,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 우가 인천행 마지막 버스에 오르기 위해서 약혼녀의 손을 잡고 맹렬히 뛰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인천행 버 스에 오르는데 성공하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좀비로 변한 인간들이 몰려들어 인 천행 버스를 에워쌌다.
승객을 태운 버스 기사가 시동을 걸고 서둘러 출발 준비를 마쳤다.
후진 기어를 넣은 버스 기사가 힘 껏 가속 페달을 밟았지만,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좀비들이 둘러쌌기 때문이었다.
부우응. 부우응.
요란한 엔진 소리가 흘러나오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엔진이 과열되면 서 버스의 시동이 꺼졌기 때문이었 다.
퍽. 퍼억.
버스 유리창이 깨졌다.
버스 안 승객들이 필사적으로 항전 했지만,좀비들이 버스에 오르는 것
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 인류의 희망을 실은 버스는 끝 내 인천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인류는 좀비에 의해 멸망했다.
자막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면서 영 화는 끝이 났다.
“설마… 이게 끝입니까?” 이규한이 묻자,황진호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끝이야.”
백진엽이 연출한 단편 영화인 ‘인 천행 버스’가 진짜로 끝이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규한이 한숨을 내 쉬었다.
“연출 쪽 재능은 확실히 없네요.”
“나도 같은 생각을 했어. 그래서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했지.”
황진호의 조언을 받아들인 백진엽 은 기획 피디로 나섰다. 그렇지만 그는 기획 피디로도 성공하지 못했 다.
‘조선에 나타난 좀비’,‘레저렉션, 부활한 그놈’,‘죽지 않는 남자’.
기획 피디로 전향한 백진엽이 기획 한 작품들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기 획한 작품들은 제작을 마치고 개봉 하지 못했다.
“감각은 신선하다. 기획력도 분명 히 있다. 그렇지만 내가 선뜻 제작 에 나서기는 어렵다.”
기존의 제작자들에게서 이런 공통 적인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피디로서도 입봉을 하지 못 “이 친구,지금은 뭘 합니까?”
이규한의 질문을 받은 황진호가 대 답했다.
“제작자로 변신했어.”
“제작자요?”
“그런데 제작사를 차린 건 아냐. 아직 투자를 못 받았거든.”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엽이 제작자로 변신하려는 이 유가 짐작이 갔다.
내가 기획한 참신한 작품들을 기존 의 제작자들은 용기가 없어서 제작 하지 못한다.
그럼 차라리 내가 직접 제작에 뛰 어들겠다.
백진엽은 이렇게 판단을 내렸으리 라.
그렇지만 영화 제작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투자사는 제작사보다 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
그러니 기존의 영화 제작자들이 외 면했던 백진엽이 기획한 작품들을 투자사에서 두 손 벌려 환영했을 가 능성은 없었다.
“한마디로 백수라는 뜻이군요.”
“정확해.” 백진엽이 현재 백수라는 사실을 알 아챈 이규한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입사에 결격 사유는 없는 셈이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규한입니다.”
“백진엽입니다.”
파란색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커피전문점에 도착한 백진엽과 악수 를 나누며 이규한이 유심히 바라볼 때였다.
“복장이 그게 뭐냐?” 동석했던 황진호가 핀잔을 건넸다.
“내 옷이 어때서요?”
“면접을 겸한 자리라고 했잖아? 좀 더 단정하게 입고 왔어야지.”
찢어진 청바지에 목이 늘어진 하얀 색 면티를 입은 본인의 복장 상태를 확인한 백진엽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누가 꼰대 아니랄까 봐.”
“뭐?”
“내가 가진 옷 중에서는 제일 얌전 한 편이거든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황진호를 제지하며 이규한이 나섰 “제가 백진엽 씨를 이렇게 만나자 고 청한 이유는 그동안 기획하셨던 작품들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입니 다.”
“그래서요?”
“네?”
“제가 기획했던 작품들을 영화로 제작하기라도 하실 겁니까?”
백진엽의 태도와 어투는 삐딱했다. 그리고 이규한은 그가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다들 똑같았습니다.”
" ……?" “당신이 기획한 작품이 무척 신선 하고 흥미롭다. 그렇지만 당신이 기 획한 작품을 내가 영화로 만들 생각 은 없다. 그동안 만났던 영화 제작 자들은 백이면 백,똑같은 말을 늘 어놓더군요.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 니까?”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