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94화 (94/272)

94 화

정신 나간 제작자 “사실 요즘 고민이 많아. 이 대표 도 알겠지만, 내가 요새 좀 하향세 거든. 송강오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송강오라는 배우가 아직 티켓 파워 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스파이들’이 그런 작품이 됐으면 좋겠어.”

송강오의 분석은 틀리지 않았다. 꾸준히 작품에 출연하면서 좋은 연

기를 펼치던 송강오는 ‘괴물,한강 에 그놈이 산다’로 배우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그렇지만 그 후로 송강오가 출연한 작품들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물론 손익분기점은 넘겼지만,송강 오라는 배우의 이름값을 감안하면 흥행 성적이 아쉬운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까 이 대표에게 술 마시 지 말고 서울로 가라고 했던 거야. 배정훈 감독을 대신할 새 감독도 구 해야 하고,동완이를 대신할 새 주 연 배우 캐스팅도 해야 하니까 바쁠 것 아냐?” 나는 ‘스파이들’로 인해 티켓 파워 가 있는 배우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니 이 대표가 지금 나와 여기서 한가하게 술을 마 시고 있을 때가 아니다.

송강오가 던진 말에 숨은 의미였 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규한이 더 고집을 피우지 않고 일어섰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갈 채 비를 마친 이규한에게 송강오가 덧 붙였다.

“나중에 준비 끝나고 난 다음에 서 울에서 찐하게 한잔하자고. 내가 한

잔 사지.’ 감독 교체,그리고 임동완을 대신 할 주연 배우 캐스팅.

이규한에게 주어진 두 가지 숙제였 다.

그렇지만 숙제를 서둘러 해치울 생 각은 없었다.

‘빨리 숙제를 해결하고 영화를 제 작해서 개봉해야 한다!’

이렇게 서두르다 보면 오히려 안 좋은 결과가 도출된다는 것.

이미 경험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 었다.

“주변 정리부터 하자!”

이규한이 결심했다.

‘스파이들’의 제작을 준비하는 과 정에서 연출 계약을 맺었던 배정훈 감독이 계약을 파기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 불상사의 배후에는 스카이 엔터 테인먼트의 대표인 김기현이 존재했 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이번 사건을 겪 으면서 느낀 게 많았다.

“결국 내 잘못이야.” 현재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는 기 획 피디가 따로 없었다.

이규한이 제작자 겸 기획 피디 역 할까지 맡고 있는 상황이었다.

혼자서 먹고 자는 시간까지 줄여 가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프로 젝트가 늘어나면서 항상 시간이 부 족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배정훈 감독의 계약 해지 건.

만약 이규한이 좀 더 자주 연락하 고 얼굴을 마주한 채 작품 진행 상 황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면?

이런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

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것이 이규한이 자신의 잘못이라 고 스스로를 탓했던 이유였다. 그리 고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했다.

‘직원을 뽑자!’

이규한이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 해서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할 새 직원을 충원하기로 결심했다.

“누가 적임자일까?”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함께 근 무할 새 직원을 채용하기로 결심했 지만,마땅한 적임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규한이 고심하고 있을 때 였다.

“망했네요.”

컴퓨터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던 김 미주가 불쑥 말했다.

“갑자기 뭐가 망했다는 거야?”

“며칠 전에 본 영화요. 개봉하는 날 가서 관람하면서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극장이 바로 지옥이란 생각 이 들 지경이어서 무조건 망할 거라 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 내 예상이 적중했네요.”

“그 영화의 제목이 뭔데?”

“‘지옥도’란 영화요.” “방금 제목이 뭐라 그랬어?”

“‘지옥도’요. 왜요? 대표님도 보셨 어요?”

물론 이규한은 ‘지옥도’란 영화를 보지 못했다.

배정훈 감독이 ‘스파이들’의 감독 계약을 해지한 사건의 뒷수습을 하 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화관에 찾아가서 영화를 관람하 기는커녕 요새 어떤 영화가 개봉했 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한이 놀란 이유.

‘지옥도’라는 제목이 익숙했기 때

문이었다.

‘진호 형이 만든 영화다!’

‘지옥도’라는 영화 제목을 들은 순 간,이규한이 황진호를 떠올렸다.

영화 ‘만월’이 흥행참패를 기록한 후,이규한은 재기가 불가능한 상황 에 처했다.

영화판에서는 재활용조차 불가능한 폐물 취급을 받았고,아내가 내밀었 던 이혼 서류에 도장까지 찍은 상황 이었다.

술로 간신히 버렸던 비참한 나날 들.

그때 이규한을 찾아와 준 유일한 사람이 바로 황진호였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 어요?”

“낮부터 계속 찾아다녔어. 술 한잔 사 주려고.”

“위로주요?”

“그래. 너도 나한테 위로주 여러 번 사 줬잖아.”

“이놈의 위로주 인생. 지긋지긋하 네. 우린 언제 축하주를 마셔 보죠?

아니,축하주를 마실 수 있긴 한 건 가?”

“언젠가는 축하주 마셔야지.”

“언제요?”

“머잖아. 그러니까… 나쁜 마음 먹 지 마.” 그날,포장마차로 용케 찾아왔던 황진호와 나누었던 대화는 아직도 이규한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황진호가 떠나기 전, 기어이 이규한의 주머니 속에 넣어 주었던 봉투 속의 십만 원도 잊지 않았다.

당시 봉투 속에 들어 있던 십만 원을 확인하고 이규한은 코끝이 찡 했었다.

황진호 역시 실패한 영화 제작자.

그가 건네고 떠났던 십만 원이 얼 마나 큰돈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형,내가 갚을게. 이자 제대로 쳐 서 꼭 갚을게.”

그날,이규한이 했던 다짐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그 다짐을 지키 지 못했다.

그동안 까맣게 그 다짐을 잊고 있 었다.

“나쁜 놈.”

황진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스스로를 탓하던 이규한이 일어섰 다.

그 다짐을 지키는 것.

아직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또 어디 가세요?”

김미주의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대 답했다.

“빚 갚으러.” “지금은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 ??????

일단 전화를 걸어 봤지만,황진호 의 휴대전화 전원은 꺼져 있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포기하지 않았 다.

황진호가 자주 찾아갔던 술집들 위 주로 그를 찾아다녔다.

허탕을 치는 것을 반복하던 이규한 이 포장마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 다.

‘제작자 인생 제목 따라 간다더니,

지옥이 따로 없네.”

신세를 한탄하는 누군가의 목소리 가 포장마차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 목소리가 낯이 익었다.

‘진호 형 목소리 같은데.’

이규한이 휘장을 걷고 포장마차 안 으로 들어갔다.

아까 잘못 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포장마차 안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 고 있는 황진호의 모습이 발견한 순 간,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황진호의 모습과 예전의 자신의 모 습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또,지금 황진호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할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이규한이 황진호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이규한?”

“설마 제 얼굴도 잊은 건 아니죠?”

“잊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왜 여 기 네가 나타난 거야?”

“날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찾아 왔죠.”

아무렇게나 꺼낸 말이 아니었다. 영화 ‘만월’의 흥행참패로 인해 재 기불가 판정을 받고 혼자 술잔을 기 울일 때, 이규한이 가장 간절히 바 랐던 것은 술친구였다.

하소연을 들어줄 수 있는 술친구, 또 괜찮다고 말하며 재기할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 주는 술친구가 필요 했었는데.

황진호가 술친구 역할을 해 주었었 다.

그리고 지금의 황진호도 당시 이규 한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만 큼,술친구가 간절히 필요할 것이었 다.

“이렇게 와 줘서 고맙다.”

이규한의 짐작대로 황진호의 표정 은 아까보다 한층 밝아져 있었다.

그런 그를 살피던 이규한이 재촉했 다.

“술이 아까우세요?”

“응?”

“아직도 술을 안 따라 주시는 것 보니까 아까워하는 게 아닌가 해서 요. 제가 살 테니까 빨리 한 잔 주 세요.”

“응? 미안.”

쪼르륵.

황진호가 술잔을 채워 준 순간,이 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왜 그러셨어요?”

“뭐가?” “제작자 인생이 영화 제목 따라 간 다는 걸 잘 아시는 분이 왜 영화 제목을 그렇게 지으셨냐고요?”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 지.”

“자만하셨네요.”

“그런 셈이지.”

황진호가 쓰디쓴 웃음을 머금은 채,소주가 가득 담긴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규한도 잔을 비운 후 말했다.

“다음에는 자만하지 마세요.”

그 이야기를 들은 황진호가 소주병

을 향해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다음?”

“네,다음이요.”

“내게… 과연 다음 기회가 있을

까?”

황진호가 자조 섞인 표정으로 되물 은 순간,이규한이 힘주어 대답했다.

“분명히 다음 기회가 있을 겁니 다.”

“내 생각은 달라.”

황진호가 다시 잔을 비운 후,입을 뗐다.

“내게 다음 기회는 없을 거야.” 여전히 자조 섞인 표정을 짓고 있

는 황진호를 확인한 순간,이규한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황진호를 탓할 수는 없었 다.

이규한 역시 비슷한 경험한 적이 있었고,지금 황진호처럼 다음 기회 는 없다고 판단했었으니까.

굳이 탓을 할 대상을 찾자면,한번 실패한 영화인에게 다시 재기의 기 회를 주지 않는 영화계의 현재 시스 템을 탓해야 했다.

“당장 제작자로 영화를 제작할 기 회는 주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게 제작자 황진호가 끝났다는 뜻이잖아?”

“네,제작자 황진호는 끝났습니다.”

“……?"

“그렇지만 영화인 황진호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규한이 덧붙인 말을 들은 황진호 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그게 무슨 뜻이야?”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는 뜻입니다.”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라?”

“피디로서 다시 시작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규한이 제안한 순간,황진호가 흥미를 드러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재빨리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 과 ‘수상한 여자’를 제작하는 과정 에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어려움을 넘길 수 있었던 데는 ‘과 속 삼대 스캔들’의 제작에 참여했던 피디라는 타이틀의 도움이 컸습니 다.”

“그러니까… 피디로 참여해서 작품 을 성공시키고 나면,다시 영화를 제 작할 기회가 생길 거라는 뜻이야?”

“그렇습니다.”

이규한이 제시한 해법이 마음에 든 걸까.

잠시 밝아졌던 황진호의 표정은 이 내 다시 어두워졌다.

“마찬가지야.”

“뭐가 마찬가지란 말씀입니까?”

“기회가 없는 건 마찬가지란 뜻이 야. 어느 정신 나간 제작자가 실패 한 제작자인 데다가 나이까지 많은 내게 피디로 일할 기회를 주겠어?”

황진호가 말을 마친 순간,이규한 이 미리 준비한 봉투를 꺼냈다. 그 리고 이규한이 준비한 봉투 속에 들 어 있는 것은 돈이 아니었다.

“받으세요.”

“이건 뭐야?” “제가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응?”

“제가 바로 그 정신 나간 제작자입 니다.”

이규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비로소 말귀를 알아들은 황진호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런 그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심… 이야?”

“물론 진심입니다.”

“그럼 이건 ?”

“계약서입니다.”

1억 관객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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