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화
헛수고 “송강오 선배님.”
이규한이 앞으로 다가가며 먼저 인 사를 건넸다.
“누구……?”
“이규한이라고 합니다.”
이규한이 이름을 밝힌 순간,송강 오가 흥미를 드러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이규한 대 표,맞나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규한은 이름을 밝혔을 뿐이었다. 그런데 송강오는 이규한이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라는 사실까지 유추해 냈다.
그래서 이규한이 놀란 표정으로 묻 자,송강오가 웃으며 대답했다.
“배 감독에게 이 대표에 대한 이야 기를 들었어요.”
송강오가 방금 입에 올린 배 감독. 배정훈 감독을 의미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송강오와 배정훈 감독의 관계가 돈 독할수록,송강오가 ‘스파이들’에 합 류할 확률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 다.
그때,송강오가 덧붙였다.
“그리고 배 감독 때문이 아니더라 도 이규한 대표에 대해서는 알고 있 었어요. 요새 워낙 유명 인사니까.”
“과찬이십니다.”
“마침 나도 한번 만나 보고 싶었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됐네요. 반가워요.”
이규한과 악수를 나눈 후 송강오가 물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찾아왔어 요? 흥 감독과 인연이 있나?”
“아닙니다. 선배님을 만나 뵙기 위 해서 찾아왔습니다.”
“날 만나러 일부러 찾아왔다고요?”
“네.”
“왜 여기까지 찾아왔어요? 나중에 서울에서 약속을 잡아서 만나면 될 텐데.”
‘약속을 못 잡을까 봐 걱정이 돼서 요:
이규한이 속으로 대답했다.
이미 임동완과 미팅조차 못 했던 경험이 있는 상황.
그래서 이규한은 일단 송강오를 만 나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무작 정 ‘파란 소금’의 촬영 현장까지 찾 아온 것이었다.
“더 빨리 뵙고 싶었습니다. 겸사겸 사 선배님이 연기하는 모습도 제 눈 으로 직접 보고 싶었고요.”
그렇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이규한이 대충 둘러 댄 순 간이었다.
“이 대표 마음이 많이 급했나 보네 요.” “이 기사 때문이죠?”
송강오가 휴대전화를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내민 휴대전화 액정에는 기사 가 하나 떠올라 있었다.
〈배우 임동완,영화 ‘사랑이 운다’ 에 합류하기로 결정〉 그 기사 제목을 확인한 순간,이규 한이 쓰게 웃었다. 그리고 더 버티 지 못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마음이 많이 급한 것은 사실입니 다.” 배정훈 감독에 이어 임동완까지.
‘스파이들’의 연출을 맡았던 배정 훈 감독이 갑작스럽게 이탈한 데다 가 주연 배우 중 한 명인 임동완까 지 이탈한 상황이었다.
만약 여기서 송강오의 출연까지 불 발된다면?
‘스파이들’의 제작은 오랫동안 방 향을 잃고 표류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그 정도가 다가 아니었다. 아예 ‘스파이들’의 제작이 무산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송강오 선배 의 출연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
이것이 이규한의 마음이 조급한 이 유였다.
“선배님,술 한잔하시죠?”
“술?”
“제가 안주와 술을 넉넉하게 사 왔 습니다.”
“술과 안주는 왜 사 왔어요?”
“출연을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요.”
이규한이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선배님,말씀 편하게 하십
“그래도 초면이고, 제작사 대표인 데……
“제가 제작사 대표이긴 하지만,선 배님에 비해 한참 나이가 어립니다. 그리고 제작사 대표라는 게 대단한 벼슬도 아니고요.”
“그럼 그래도 될까?”
“됩니다.”
“알았어. 말 편하게 하지. 그런데 뭘 사 왔어?”
송강오가 호기심을 드러낸 순간, 이규한이 대기시켜 두었던 택시로 다가갔다.
돼지목살과 쌈 야채들,그리고 술 과 음료수들이 들어 있는 여러 개의 아이스박스를 확인한 송강오가 놀라 며 물었다.
“이 대표,뭘 이리 많이 사 왔어?”
“일부러 넉넉하게 사 왔습니다. 저 희만 입이 아니니까요.”
“스텝들 몫까지 일부러 준비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이규한이 대답하자,송강오가 흡족 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 이규한이 덧붙였다.
“선배님이 준비하신 거라고 말씀하
“내가 준비한 걸로 하라고?”
“이번 작품 ‘파란 소금’과 아무 연 관이 없는 제가 술과 안주를 샀다고 하면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으니까 요.”
“그래도……
“그렇게 해 주십시오.”
“알았어. 그렇게 하지.”
이규한의 제안을 수락한 송강오가 몸을 돌렸다.
“조감독!”
“네,무슨 일 있습니까?”
“힘 좀 쓰는 스랩들 좀 불러서 이
거 좀 옮겨.”
“이게 다 뭡니까?”
“다들 고생하는 것 같아서 내가 술 이랑 안주 좀 준비했어.”
“선배님께서 준비하신 겁니까?”
“그렇다니까. 넉넉하게 준비했으니 까 이거 옮기고 고기 구워 먹을 준 비도 빨리해 줘.”
“알겠습니다. 남일아, 애들 몇 명 데리고 빨리 이리 튀어 와. 그리고 주석이 넌 회식할 준비 서두르고.”
무척 오래간만의 회식이라서일까.
조감독은 잔뜩 흥이 난 표정으로 스렙들에게 회식 준비를 지시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덩달아 신이 난 스렙들을 바라보던 송강오의 양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 을 확인한 이규한이 속으로 생각했 다.
‘일단 작전 성공이네!’
그때,송강오가 말했다.
“이 대표도 같이 한잔하지?”
“언제 그 말씀을 해 주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몰랐는데,이 대표 재밌는 사람이 구만.”
이규한이 불편해할 수도 있다고 판 단해서일까.
송강오는 스렙들과 조금 떨어진 곳 에 따로 자리를 잡았다.
“자,한 잔 받아.”
“알겠습니다.”
이규한이 앞으로 내밀고 있는 종이 컵에 술을 따르던 송강오가 뒤늦게 떠오른 듯 술을 따르던 것을 멈추고 물었다.
“술 마셔도 돼? 차 갖고 온 것 아 냐?”
“괜찮습니다.”
“왜 괜찮다는 거야?”
“어차피 오늘 서울로 돌아갈 생각 이 없거든요.”
“선배님께 ‘스파이들’ 출연 약속을 받아 내고 난 후에 서울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이규진이 다부진 각오를 밝힌 순 간,송강오가 픽 하고 실소를 흘렸 다.
“만약 내가 내일도 출연 약속을 안 하면?”
“모레까지 버텨야죠.”
“그 후에도 출연 약속을 안 하면?” “계속 여기 머무를 겁니다.”
“응?”
“공기 좋네요. 휴가 왔다 생각하고 이규한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자, 송강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 다.
“이 대표,재밌기만 한 줄 알았는 데,무모한 면도 있구만.”
‘무모하다?’
방금 송강오의 발언.
이규한을 탓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모한 면이 있다고 말하는 송강오 의 얼굴에 기꺼운 웃음이 매달려 있 는 것이 증거였다.
“어쨌든 술을 마셔도 된다는 뜻이 지?” “자,받아.”
송강오가 다시 술병을 들어 이규한 의 종이컵에 소주를 가독 따라 주었 다.
쪼르륵.
이규한이 소주병을 건네받아 송강 오가 내민 종이컵에 따를 때였다.
“공부했지?”
송강오가 불쑥 물었다.
이규한이 흠칫할 때,송강오가 덧 붙였다.
“나에 대해서 공부하고 찾아왔느냐 고 물은 거야.”
“공부까지는 아니지만,나름 알아 보고 오긴 했습니다.”
“그래? 누구에게 뭘 알아봤지?”
“하태열 피디가 제 대학 선배입니 다. 그리고 하태열 피디가 선배님과 작품을 한 적이 있더군요.”
“아,하태열.”
“그래서 하태열 피디에게 선배님께 출연 승낙을 받아 낼 방법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하태열 피디가 뭐라고 하던가?”
“절박하게 매달리라고 충고해 줬습 니다.”
“절박하게 매달려라?” “선배님이 마음이 약하신 편이니까 그 부분을 공략하라는 말도 덧붙였 습니다.”
이규한이 꺼낸 대답이 마음에 든 걸까.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종이컵에 담긴 소주를 한 모금 마신 송강오가 입을 뗐다.
“괜한 헛수고를 했군.”
‘헛수고를 했다고?’
이규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 다.
그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이규한이 소주가 담긴 잔을 입으로 가져갔을
때였다.
“반잔만 마셔.”
송강오가 명령조로 말했다.
“네?”
“반잔만 마시고 서울로 돌아가란 뜻이야.”
이규한이 더욱 표정을 굳혔다.
송강오가 ‘스파이들’ 출연을 거절 한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이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선배님, 제 이야기를 조금 더 들 어보시고 ”
“충분히 들었어.”
“하지만……
“그러니까 그쯤 하고 서울로 가.”
송강오가 단호하게 축객령을 내렸 다. 그러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이 대로 허무하게 돌아갈 수는 없는 노 릇이었기에 이규한이 이를 악 물고 버렸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선배님에게 서 ‘스파이들’에 출연하겠다는 약속 을 받아 내기 전에는 돌아갈 수 가……
“그래서 올라가란 거야.”
이규한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송강
오가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두 눈 을 빛냈다.
“방금 하신 말씀,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일 것 같아?”
“혹시 ‘스파이들’에 출연하시기로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아니.”
“ 가"
“마음은 바뀌지 않았어. 처음부터 출연할 생각이 었으니까.”
‘처음부터 출연할 생각이었다고?’
이규한이 그 말을 속으로 되뇌일 때,송강오가 웃으며 입을 뗐다.
“그래서 아까 괜한 헛수고를 했다 고 말했던 거야.”
비로소 자신이 단단히 착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규한의 표정이 밝 아졌을 때였다.
“내가 왜 ‘스파이들’ 출연을 긍정 적으로 검토했는지 알아?”
“배정훈 감독과의 친분 때문이 아 닙니까?”
이규한이 대답했지만,송강오는 고 개를 흔들었다.
“틀렸어.”
“배정훈 감독 때문이 아니었단 말 씀입니까?” “그럼 ‘스파이들’ 출연을 긍정적으 로 검토하신 이유가 뭡니까?”
“이 대표.”
“네?”
“자네 때문이었다는 뜻이야.”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 돌아온 순 간,이규한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저 때문에… ‘스파이들’ 출연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셨단 말씀이십니 까?”
“맞아. ‘과속 삼대 스캔들’과 ‘청춘, 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이란 작품 들을 보고 난 후,이 대표가 감각이 있다고 판단했거든. 그래서 한번 작 업을 같이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 대 표가 가장 최근에 제작한 ‘수상한 여자’를 보고 나서 또 한 번 생각이 바뀌었어.”
“어떻게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이 대표와 한번 작업을 같이해 보 는 게 좋지 않을까,에서 꼭 같이 작업을 해 봐야겠다고 바뀌었어.”
송강오의 대답이 돌아온 순간,이 규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동완과 송강오는 달랐다.
임동완이 ‘스파이들’ 출연을 긍정 적으로 검토했던 이유는 배정훈 감 독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그래서 배 정훈 감독이 ‘스파이들’의 연출을 맡지 않기로 결정이 난 순간,임동 완도 출연을 철회했었다.
그렇지만 송강오가 ‘스파이들’의 출연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던 이유는 배정훈 감독 때문이 아니라 이규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배정훈 감독이 ‘스파이들’의 연출을 맡는가 여부와 상관없이 ‘스파이들’에 출연하려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송강오에게서 원하던 대로 출연 약 속을 받아 낸 순간,이규한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가 출연하기로 약속한 덕분에 ‘스파이들’은 제작이 무산될 위기에 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송강오는 손사래를 쳤다.
“오히려 내가 감사할 일이지. 이 대표가 제작하는 좋은 작품에 출연 할 기회를 얻게 됐으니까.”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