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화
그래도 작품은 지켰으니까 (1) “설마 나한테 한 말은 아니지?”
“당연히 배정훈 감독한테 한 말이 에요.”
분한 표정을 지은 채 김미주가 덧 붙였다.
“내가 그동안 타 준 커피가 아깝 네.”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픽 웃 으며 말했다.
“아마 어떤 사정이 있을 거야.”
“대표님은 참 마음도 좋네요.”
“좋게 생각해.”
“뭘 좋게 생각해요?”
“그래도 작품은 지켰으니까.”
이규한이 웃으며 한마디를 더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맞 네.”
실패를 경험하는 것.
무척 아픈 일이었다.
영화 ‘만월’이 홍행 참패를 기록했 을 때,이규한은 무척 아팠다.
그렇지만 뼈저리게 아픈 실패를 통 해 이규한은 교훈을 얻었다.
바로 순진하게 사람을 너무 믿어서 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겠어?’
이규한은 ‘만월’의 연출을 맡았던 김대만 감독을 믿었다.
그렇지만 그 믿음은 이규한을 절망 의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김 대만 감독에게 ‘만월’을 망작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던 것이 김기현이라 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을 때,이 규한은 깨달았다.
자신이 너무 순진했다는 것을.
또,인간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는 것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때 배웠던 교훈 덕분에 이번에는 의심을 했다 는 것이었다.
‘배정훈 감독이 갑자기 왜 이렇게 나올까?’
의심을 가진 채 바라보자,이상한 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우선 이규한이 알고 있는 배정훈 감독은 소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만 연출 계약을 파기하기 위 해서 일억 오천만 원을 배상해야 한 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배정훈 감독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 더,
정말 계약을 파기하려는 이유가 ‘스파이들’의 각색 시나리오가 마음 에 들지 않는 이유 하나 때문이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배정훈 감독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서 이규한 이 한 의심.
배정훈 감독을 뒤에서 조종하는 누 군가가 있을 거란 것이었다.
‘김기현!’
이규한이 의심하는 누군가의 정체 였다.
물론 아직 증거는 없었다.
그저 의심하는 단계였다.
‘제발… 제발 아니길 빈다!’
이규한이 속으로 생각하며 자리에 서 일어났다.
“또 어디 가세요?”
김미주의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한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배정훈 감독과 계약 파기하기로 했으니 이제 뒷수습을 해야지.”
NEXT 엔터테인먼트 투자팀.
이규한이 테이크아웃 해 온 아이스 커피를 손에 들고 들어서자,김태훈 이 반가운 표정을 지은 채 다가왔 다.
“이 대표,연락도 없이 어찐 일이 야?”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런데 커피는 왜 사 왔어? 내가 살 텐데.”
“비보를 전해 드릴 예정이라 죄송 해서요.”
“비보?”
이규한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
아챈 김태훈의 표정도 굳어졌다.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하 자.”
김태훈이 비어 있는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널찍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자마자,김태훈이 물었다.
“무슨 비보야?”
“세팅이 어그러졌어요.”
“어느 쪽?”
김태훈은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물 었다.
“연출 쪽이요.”
“배정훈 감독?”
“네,‘스파이들’의 연출을 맡고 싶 지 않다고 해서 연출 계약을 해지했 습니다.”
후우.
이규한이 대답한 순간, 김태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침통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안도한 표정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네.”
잠시 후,김태훈이 입을 뗐다. 그 리고 이규한은 그가 불행 중 다행이 라고 표현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 다.
송강오와 임동완.
‘스파이들’에 줄연하기로 했던 배 우들의 출연이 불발된 것이 아니라, 연출 라인 쪽의 세팅이 어그러졌다 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에 조금 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표현한 것이었 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
“배정훈 감독이요?”
“그래. 신인 감독이라서 마음에 걸 렸거든.”
김태훈은 마치 앓던 이가 빠진 것 처럼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여전히 신중한 자세를 견지했다.
“젠가 아시죠?”
“젠가라면… 애들이 갖고 노는 보 드 게임 아냐?”
“아시네요.”
“그런데 젠가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내는 거야?”
“젠가는 하나를 빼 냈을 때 와르르 무너질 경우에 게임에서 패한다는 룰이 있죠. 지금의 상황이 젠가와 비슷합니다.”
“무슨 뜻이야?”
“배정훈 감독이 연출을 맡지 않게 되면서 캐스팅을 비롯한 영화 전반 의 제작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
다는 뜻입니다.”
이규한이 설명을 마쳤지만,김태훈 은 크게 심각성을 느낀 표정이 아니 었다.
“배정훈은 신인 감독이야. 신인 감 독이 그 정도로 영향력이 클 리 가 ”
“영향력이 있습니다.”
" ry,
“송강오와 임동완의 캐스팅이 거의 성사 단계에 다다라 있었던 데는 배 정훈 감독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 대표가 캐스팅을 한 게 아니 라, 배정훈 감독이 배우 캐스팅에
주도적으로 관여를 했다는 뜻이야?”
“맞습니다.”
이규한의 대답을 듣고서야 김태훈 은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했다.
“그럼 송강오와 임동완이 ‘스파이 들’에 출연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 건가?”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이거 문제가 심각하네. 아까 이 대표가 괜히 비보라고 말했던 게 아 니구만.”
김태훈이 까끌까끌하게 자란 턱수 염을 매만졌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때 부지불식
간에 드러나는 습관.
잠시 후, 김태훈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상황을 수습해야 하 지?”
“일단 만나 볼 생각입니다.”
“배우들을?”
“네,가능한 ‘스파이들’에 출연하도 록 설득해 봐야죠.”
이규한이 대답하자,김태훈이 고개 를 끄덕였다.
이게 최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 리라.
“나는?”
“네?” “그럼 나는 뭘 하면 될까?”
김태훈이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김태훈도 해야 할 일이 있었 다.
“선배님은 배정훈 감독에 대해 좀 알아봐 주십시오.”
“배정훈 감독에 대해서 알아보라 고? 왜?”
이미 배정훈 감독과는 계약 파기를 한 상황이다.
그런데 그의 이후 행보에 대해서 굳이 알아볼 필요가 있느냐?
김태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질문한 이유였다.
“실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요.”
이규한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김태 훈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무슨 뜻이야?”
“계약 해지를 할 당시에 만났던 배 정훈 감독의 모습. 지금까지 제가 알던 모습과 많이 달랐거든요.”
이규한이 배정훈 감독에게 의심을 품은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 다.
그 설명을 들은 김태훈이 두 눈을 빛냈다.
“배정훈 감독이 갑자기 변한 이유
가 있다고 판단하는 거야?”
“네.”
“뭘 의심하는데?”
“배정훈 감독의 배후에 누군가 있 다고 생각합니다.”
“누구?”
“김기현이요.”
“김기현이라면… 혹시 스카이 엔터 테인먼트의 대표인 김기현을 말하는 거야?”
“맞습니다.”
김태훈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왜 김기현 대표가 움직였다고 생
각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배정훈 감독 이 갑자기 너무 많이 변했거든요. 저와 계약을 할 당시 단돈 천만 원 이 아쉬워서 우는 소리를 했었는데, 연출 계약 해지를 위해 일억 오천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 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그 것을 확인하고 난 후,김기현을 의 심했습니다.”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을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김태훈이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이 대표 말처럼 배정훈 감독이 갑 자기 변한 건 분명히 의심스러워.
그렇지만 김기현 대표가 움직였다고 추측하는 것은 너무 섣부른 게 아닐 까?”
김태훈이 반박한 순간,이규한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도 남을 놈입니다.”
“응?”
“선배님은 김기현에 대해 잘 모르 시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 니다.”
김태훈은 더 반박하는 대신,한숨 을 내쉬며 물었다.
“휴,알았다. 그런데 내가 정확히 뭘 알아봐 주면 되는 거야?” 이규한이 대답했다.
“배정훈 감독이 어떤 작품으로 어 느 제작사와 계약을 맺었고,어느 투자 배급사에서 투자를 받았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이규한이 했던 우려.
괜한 기우가 아니었다.
송강오와 임동완.
‘스파이들’에서 투톱 주연을 맡기 로 했던 두 배우 가운데 임동완이 ‘스파이들’에 출연하지 않겠다는 의
물론 이규한도 임동완의 마음을 돌 리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렇지만 헛수고였다.
일단 임동완을 만나야 설득을 해 볼 텐데.
아예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 기 때문이었다.
후우.
이규한이 길게 한숨을 내쉰 후,김 태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말해.”
“임동완은 ‘스파이들’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래?”
임동완의 캐스팅 불발 소식을 전했 음에도 김태훈은 별로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규한이 서둘러 물었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응,알고 있었어.”
“어떻게요?”
“이 대표가 부탁한 것을 알아보다 가 우연히 알게 됐지.”
“임동완은 배정훈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기로 계약했다고 하더군.”
임태훈에게서 돌아온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내 짐작이 맞았다.’
임동완이 배정훈 감독의 작품에 출 연하기로 계약했다는 것.
배정훈 감독이 이미 제작사와 연출 계약을 맺었다는 증거였다.
“어디입니까?”
“응?”
“배정훈 감독 말입니다. 어느 제작 사와 연출 계약을 했습니까?”
“내가 알아본 바로는 사거리 픽처 스라고 해.”
“사거리 픽처스요?”
일단 이규한이 예상했던 스카이 엔 터테인먼트와 배정훈 감독이 연출 계약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자신의 짐작이 틀렸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한 다리를 건녔네!’ 영화 제작사 사거리 픽처스의 대표 는 심규동.
이규한도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투자팀장으로 근무하다가 제작사인 사거리 픽처스를 차려서 독립한 인 물이었다.
그리고 사거리 픽처스에서 제작해
그 두 편의 영화 모두 씨제스 엔 터테인먼트에서 투자를 받았다는 사 실도 이규한은 알고 있었다.
“네 예상이 틀린 것 같다. 배정훈 감독이 김기현이 대표로 있는 스카 이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사거리 픽처스와 계약을 한 걸 보니 말이 야.”
김태훈이 말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단호하게 대답 했다.
“아니요. 제 짐작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배정훈 감독의 작품,투자는 씨제 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받았겠죠?”
“맞아.”
“역시 그렇군요.”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거리 픽처스와 배정훈 감독.
얼핏 살피면 김기현과의 연관점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 기고 속사정을 살펴보면 달랐다.
‘멜래야 델 수 없는 관계.’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투자팀장이었 던 심규동이 독립해서 차린 제작사 가 사거리 픽처스라고 알려져 있었 다.
그렇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완벽한 독립은 아니었다.
사거리 픽처스에서 제작한 영화들 의 투자를 모두 씨제스 엔터테인먼 트에서 투자한 것이 그 증거였다.
‘일종의 자회사 개념이야!’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