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화
개자식 ‘이것… 때문이었나?’
배정훈 감독이 ‘스파이들’의 연출 을 맡지 못하겠다고 갑작스럽게 통 보한 순간, 이규한이 눈살을 찌푸렸 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느 껴지던 이유를 찾기 힘들었던 불안 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는 생 각이 퍼뜩 들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
잠시 후,이규한의 머릿속에 불쑥 떠오른 사자성어였다.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는 뜻.
그동안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는 말 그대로 꽃길을 걸었다. 그리고 좋을 일이 많다 보니 마가 낀 것이란 생 각이 들었다.
‘일단 이유를 파악하자!’
배정훈 감독이 갑자기 일방적인 통 보를 한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급선 무라고 이규한은 판단했다.
일단 이유를 알아야 그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갑자기 ‘스파이들’의 연출을 못 맡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 엇입니까?”
“얼마 전에 보내 주신 각색고를 보 고 난 후,결심했습니다.”
“박한정 작가가 각색한 시나리오가 감독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까?” “네.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박한정 작가가 각색한 ‘스파이들’ 의 시나리오.
분명히 배정훈 감독이 쓴 시나리오 초고보다 발전해 있었다.
무려 150만 명 가까이 늘어난 예 상 관객수가 박한정 작가가 각색한 시나리오가 초고에 비해서 발전했다 는 증거였다.
그렇지만 배정훈 감독은 박한정 작 가가 각색한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 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드시는 겁 니까?”
“각색 방향이 마음에 안 듭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 까?” “제가 연출하고 싶었던 ‘스파이들’
은 첩보 액션에 방점을 두었습니다. 그렇지만 각색고에서는 제가 ‘스파 이들’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첩보 액션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대 로는 연출을 못 하겠다고 결심한 겁 니다.”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없어!’
배정훈 감독을 바라보던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로 찾아 와서 자신을 만났을 당시, 배정훈 감독이 먼저 꺼냈던 시나리오는 ‘스 파이들’이 아니었다.
‘사랑이 운다’라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배정훈 감독이 ‘사랑이 운 다’라는 작품을 ‘스파이들’보다 먼저 꺼냈던 이유는 좀 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정훈은 상업 영화감독.
즉,‘사랑이 운다’가 ‘스파이들’보다 상업성이 더 뛰어나다고 판단한 것 이었다.
그런 배정훈 감독의 판단은 명백한 오판이었다.
153,781 명.
이규한이 확인했던 ‘사랑이 운다’ 의 예상 관객수였다.
2,873,428명.
역시 이규한이 확인했던 ‘스파이
들’의 예상 관객수였다.
배정훈 감독의 판단과 달리 ‘스파 이들’이 ‘사랑에 운다’에 비해서 훨 씬 상업성이 있었다.
그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이 상업 영화감독인 배정훈이 시나리오를 보 는 눈이 없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실력 있는 피디나 제작자 가 곁에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데.’
배정훈 감독은 성공의 문턱에 거의 다다라 있었다.
이규한이라는 실력 있는 피디 겸 제작자와 손을 잡았으니까.
그렇지만 그는 성공으로 향하는 마 지막 문 앞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대신,본인의 의지로 발걸음을 돌리 려 하고 있었다.
그게 무척 안타깝게 느껴졌기에, 이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말씀하시죠.”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로 찾아와서 저를 처음 만났을 때, 배정훈 감독 님은 꼭 입봉하고 싶다고 말씀하셨 습니다. 그리고 ‘스파이들’의 투자가 확정된 만큼,입봉의 기회가 코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그런데 ‘스파이들’ 의 각색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 는 것이 그 입봉의 기회를 포기할
정도의 이유가 됩니까?”
“그렇습니다.”
배정훈 감독은 잠시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이미 결심을 굳혔다!’
그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쉽지 않 겠다고 판단한 이규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 도중에 이규한이 일어서자 배 정훈 감독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갑자기 왜 일어나시는 겁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계약서 를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이규한이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런 그가 꺼낸 것은 계약서가 아 니라 박한정 작가가 각색을 마친 ‘스파이들’의 시나리오 책이었다.
‘확인해 보자!’
만약 특수한 능력이 없었다면?
배정훈 감독이 갑자기 ‘연출을 맡 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순 간,무척 당황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자신이 가진 특 수한 능력 덕분에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일단 배정훈 감독의 영향력을 확 인해 보는 게 우선이야!’
이규한이 확인하려는 것.
배정훈 감독이 ‘스파이들’의 연출 을 맡는 경우와 연출을 맡지 않는 경우의 예상 관객수의 차이였다.
예상 관객수의 차이를 통해서,배 정훈 감독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 었기 때문이었다.
짝악. 좌악.
이규한이 펜을 들어 ‘스파이들’의 시나리오 책에 적혀 있던 배정훈 감 독의 이름 위에 두 줄을 그었다. 그 리고 펜을 내려놓은 이규한이 시나 리오 책을 들어 올렸다.
‘얼마냐?’
잠시 후,이규한의 눈앞에 숫자가
떠올랐다.
- 4,351,158.
배정훈 감독의 이름을 지운 ‘스파 이들’의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든 이 규한의 눈앞에 떠오른 숫자였다.
‘그대로다?’
그 숫자를 확인한 순간,이규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배정훈 감독의 이름을 지웠음에도 숫자가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혹시 실수한 게 있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이규한은 다시 ‘스파이들’의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들었다.
- 4,351,158.
그렇지만 다시 확인해 보았음에도 눈앞에 떠오르는 숫자는 그대로였 다.
드르륵.
잠시 후,서랍을 열어서 메모지를 확인한 후에야 이규한은 자신이 착 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변하긴 했네.’
4,351,239에서 4,351,158로.
숫자가 바뀌어 있었다.
다만 워낙 변화의 폭이 작아서 숫 자가 달라지지 않았다고 착각했던 것이었다.
‘백 명이 안 되네!’
배정훈 감독이 ‘스파이들’의 연출 을 맡을 때와 비교해서 채 백 명도 차이가 나지 않는 예상 관객수.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연출을 맡은 배정훈 감독이 ‘스파이들’의 흥행에 미치는 영향력이 무척 미미하다는 것이었다.
‘억지로 배정훈 감독의 마음을 돌 리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
로군.’
‘스파이들’의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들고,예상 관객수를 확인한 이규한 이 내린 판단이었다.
비로소 여유를 되찾은 이규한이 다 시 소파 앞으로 다가갔다.
이규한이 빤히 배정훈 감독을 바라 보았다.
그 시선이 불편해서일까.
배정훈 감독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 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입을 뗐 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확인하겠습니 다.”
“무엇입니까?”
“정말 그 이유가 다입니까?”
“네?”
“감독님이 저와 한 계약을 어기고 ‘스파이들’의 연출을 포기하려는 이 유가 정말 그게 다냐고 물은 겁니 다.”
“…그게 다입니다.”
배정훈 감독이 대답했다.
그렇지만 아까 망설임 없이 대답하 던 것과는 달랐다.
이번 대답을 하기 전에 배정훈 감
독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심적 여유가 생겨서일까.
이규한은 그 사실을 놓치지 않았 다.
‘여기까지!’
질문은 이걸로 충분하다고 이규한 은 판단을 내렸다.
배정훈 감독이 ‘스파이들’의 연출 을 맡지 않겠다는 결심을 확실하게 굳힌 채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게 된 상황.
이제는 계약 위반에 관한 부분을 논의해야 했다.
‘조금 전에 계약서를 확인하고 왔 습니다. 일전에 감독님과 계약을 할 당시,이미 계약서 3조 4항에 대해 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감독님이 시 나리오 초고를 쓴 ‘스파이들’을 수 정하는 과정에서 전권을 제작사에 일임한다는 내용입니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네,기억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계약서를 다시 보여 드릴 필요는 없게 됐으니까요.” “따라서 저희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와 맺었던 연출 계약을 성실하고 이 행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려 하는 현 상황의 원인 제공 자는 감독님입니다. 이것도 인정하 십니까?”
“인정합니다.”
“그럼 계약을 파기할 경우,원인 제공자가 계약 금액의 세 배를 배상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시겠군 요.”
연출료 오천만 원.
배정훈 감독이 연출을 맡는 대가로 받은 금액이었다.
따라서 배정훈 감독은 계약 파기를 하기 위해서 일억 오천만 원의 금액 을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 배상해야 했다.
“알고 있습니다.”
일억 오천만 원.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런데 배정훈 감독은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 기색이었다.
이규한이 두 눈을 가늘게 좁힌 채 그런 배정훈 감독의 반응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작품도 가져가겠습니다.”
배정훈 감독이 말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와 각본 계약 을 맺었던 ‘작품인 ’스파이들‘도 회 수해 가시겠다는 뜻입니까?”
“제 작품이니까요.” 배정훈 감독은 당연하다는 둣이 대 답했다.
그런 그는 이미 여기까지 계산하고 찾아온 듯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당시 계약서에 적시된 각본료는 사천만 원이었습니다. 그러니 일억 이천만 원을 배상하고, ‘스파이들’의 권리를 가져가겠습니다.”
배정훈 감독은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틀렸다는 둣 고 개를 흔들었다.
“일억 이천만 원이 다가 아닙니 다.” 그 대답을 들은 배정훈 감독이 처
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스파이들’이란 작품은 이미 각색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블 루문 엔터테인먼트의 기획 개발비를 지불했습니다. 만약 ‘스파이들’이란 작품을 감독님께서 다시 가져가시려 면 기존의 배상금인 일억 이천만 원 만이 아니라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사용한 기획 개발비의 손해에 대한 것도 보상해 주셔야 합니다.”
“그럼 제가 ‘스파이들’이란 작품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 배상금인 일억 이천만 원 외에 얼마를 더 지불해야 하는 겁니까?” “정산을 해 봐야겠지만,대략 이억 이 넘을 것 같습니다.”
“이억… 이요?”
여기까지는 예상치 못했을까?
배정훈 감독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그가 침착함을 되찾을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려 주 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규한이 대답을 재촉하자,고민에 잠겼던 배정훈이 한참 만에 대답했 다.
???포기하겠습니다.” “‘스파이들’이란 작품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배정훈이 ‘스파이들’을 포기하겠다 는 의사를 밝힌 순간,이규한이 속 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4,351,239명.
박한정 작가가 각색한 ‘스파이들’ 의 시나리오를 집어 들었을 때,이 규한의 눈앞에 떠올랐던 예상 관객 수였다.
방금 배정훈 감독이 ‘스파이들’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이규한은 무려 사백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작품을 지킨 셈이었다.
이규한이 만세를 부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애써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은 인연이 되길 기대했는데 무 척 아쉽네요.”
“죄송합니다.”
“각자 생각이 다르니 어쩔 수 없
죠
이 자리가 많이 불편했기 때문일 까.
이규한과 악수한 배정훈 감독은 서 둘러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를 빠져나 갔다. 그리고 배정훈 감독이 떠나자 마자,김미주가 불쑥 한마디를 내뱉 었다.
“개자식.”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