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86화 (86/272)

86화

떳떳한 아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저는 소설을 쓰는 데 재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유비한 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했던 두 작품 이 모두 망한 게 그 증거라고 판단 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부모님 께 떳떳한 아들이 되고 싶어서였습 니다.”

“떳떳한 아들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 부모님께 제가 유비한이라는 필명을 사용해서 책을 냈다는 것을 알리지 못했습니 다.”

“왜 알려 드리지 않았습니까?”

“부끄러워서입니다. 판타지 소설을 쓴다는 것만도 부끄러운데,그조차 도 망하고 나니 더욱 말씀드릴 자신 이 없어지더군요. 부모님은 여전히 제가 백수라고 생각하고 늘 한심하 게 보십니다. 그래서 어느 날,시나 리오를 쓰자고 결심했습니다. 내가 쓴 작품이 개봉한 걸 아시게 되면, 더 이상 절 한심하게 보시지 않으실 테니까요.” 이규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박동선의 처지.

예전의 자신과 무척 흡사하다는 생 각이 들어서였다.

“최고의 영화를 제작할 겁니다.” 이렇게 큰소리를 떵떵 치고,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렇지만 뚜렷한 성과를 만들어 내 지는 못했다.

어렵게 제작한 영화들은 흥행 성적 이 신통치 않았고,부모님께 자신 있게 말씀드릴 정도로 만족스럽지도

그래서 부모님은 항상 이규한에게 미덥지 않은 시선을 던졌는데.

비록 분야는 달랐지만,예전 자신 의 처지와 지금 마주 앉아 있는 박 동선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본인의 처지가 한심하게 느껴 져서 일까.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박동선에게 이규한이 힘주어 말했다.

“판타지 소설을 쓰는 것이 부끄러 운 일은 아닙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그리고 소설 시장 역시 빠르게 변 했다.

순문학에서 장르 문학으로.

소설의 중심이 이동했다.

동네 도서 대여점에서나 간신히 찾 아서 읽을 수 있었던 무협 소설과 판타지 소설은 장르 문학이라는 타 이틀을 달고 스마트폰으로 진출했 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진출한 장 르 소설은 새로운 시장을 형성한다.

바로 웹소설이었다.

그리고 웹소설 작가들은 사회적으 로도 인정을 받고,고소득을 거두는 새로운 직업군을 형성했다.

이것이 이규한이 알고 있는 미래 속 장로소설 작가들의 미래.

그렇지만 웹소설 시장이 본격적으 로 열리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해서 잠시 고민하던 이규한이 입을 뗐다.

“제가 떳떳한 아들로 만들어 드리 겠습니다.”

박동선이 떳떳한 아들이 될 수 있 는 방법.

그가 쓴 시나리오가 개봉하는 것이 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박동선의 두 눈이 커졌다.

그런 그의 두 눈에 깃들어 있는 감정은 불신이었다.

이규한이 그런 박동선의 반응을 힐 끗 살핀 후 입을 뗐다.

“아까 ‘드래곤이 아꼈던 꽃미남 기 사’와 ‘다시 사는 개혁 군주’라는 두 작품을 잊고 싶은 작품이라고 말씀 하셨죠?”

“그렇습니다.”

“작가님께서 부끄러워하고,또 잊

고 싶어 하는 작품들이 있었기 때문 에 오늘 저를 만나게 된 겁니다.”

“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드래곤이 아꼈던 꽃미남 기사’라는 작품을 읽 고 난 후,작가님을 꼭 만나야겠다 고 결심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작가님께서 쓰신 작품들 을 부끄러워하지도,또,잊고 싶어 하지도 마십시오.”

박동선을 위로하기 위해서 꺼낸 말 이 아니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남자’.

박동선이 이규한에게 보낸 메일에 첨부했던 시나리오의 제목이었다.

장르는 코미디 스릴러.

죽었다고 알려졌던 남자가 멀쩡히 살아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일대 소 동을 그려 낸 작품이었다. 그리고 박동선이 쓴 시나리오는 꽤 재미있 었다.

물론 당장 영화로 만들기에는 부족 한 부분이 많았다.

또,기성 작가와 비교해서 뚜렷한 장점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한이 박동 선이란 작가를 눈여겨본 이유는 그

가 소설가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설의 문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시나리오 문법에도 익숙한 작가.

‘사초 살인 사건’의 각색을 맡을 적임자가 갖춰야 할 조건이었다. 그 리고 박동선은 그 조건에 부합하는 작가였다.

“제가 직접 읽었던 ‘드래곤이 아꼈 던 꽃미남 기사’라는 작품은 재미있 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다시 사는 개혁 군주’라 는 작품은 소개글을 읽어 보니 판타 지 설정이 가미된 역사 소설이더군 요. 즉,책을 쓰기 위해서 역사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을 것이라는 뜻 이죠. 그래서 박동선 작가님이 적임 자라고 판단했습니다.”

“어떤 적임자란 말입니까?”

“이 책을 시나리오로 바끌 적임자 입니다.”

이규한이 백팩에서 소설책 ‘사초 살인 사건’을 꺼내서 건네며 덧붙였 다.

“제가 판권을 산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시나리오로 바꾸는 작업을 박동선 작가님에게 맡기고 싶습니 다.”

박동선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소 설책을 집어 든 순간,이규한이 물 었다.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순제작비 100억.

홍보비를 포함한 총제작비 150억. 한국형 재난 SF 블록버스터를 표 방했던 영화 ‘광안리’는 무려 150억 의 제작비를 쏟아부은 대작이었다. 손익분기점은 약 700만 명선.

즉,7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야 ‘광안리’에 투입했던 제작비를 회수 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우려의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정작 ‘광안리’를 제작했던 김기현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광안리’가 최소 천만 영화가 될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기현의 확신은 빗나갔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1,941,156명.

영화 ‘광안리’의 최종 관객수였다.

결국 200만 명의 관객도 동원하지 못한 채 ‘광안리’는 쓸쓸히 극장에 서 밀려났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본사.

본사 건물을 올려다보던 김기현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인 김대환이 씨제스 엔터테 인먼트로 찾아오라고 지시했기 때문 이었다.

김기현이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 히기 직전,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 서 근무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명의 직원들이 올라탔다. 그리고 엘리베 이터가 올라가는 동안,그들이 대화 를 나누기 시작했다.

“과장님.”

“왜?”

“이제 최정길 팀장님은 어떻게 되 는 겁니까?”

“뭘 어떻게 돼? 위에서 까라면 까 야지.”

“그럼 진짜 그만두시는 겁니까?”

“그래.”

“퇴사하시고 나면 이제 뭘 하시는 데요?”

“보통 다른 투자사에 재취업을 하 는 게 일반적인 케이스인데,최 팀 장님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 힘들 거 야. 모르긴 몰라도 제작사를 차리실 거야. 제작사를 차린 후에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파란색 넥타이를 맨 사내가 대답하 자마자,뿔테 안경을 쓴 사내가 분 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이건 진짜 너무한 것 아닙니까?”

“뭐가 너무해?”

“‘광안리’에 투자했다가 망한 게 어디 최 팀장님 책임입니까?”

김기현이 ‘광안리’라는 작품 제목 을 듣고 본격적으로 두 사람의 대화 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딱 까놓고 말해서 대표님 아들이 만드는 영화라서 씨제스 엔터테인먼 트에서 투자를 결정한 거잖습니까? 그런데 왜 ‘광안리’의 흥행 참패에 대한 책임을 최 팀장님이 지고 물어 나시는 겁니까?”

“그럼 누가 책임져?”

“그야……

“최 대리.”

“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해. 그래서 최 팀장님이 총대를 맨 거야. 이게 회사야.”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기현이 입을 뗐다.

“투자 실패에 대한 책임을 최정길 팀장이 지는 것,당연한 것 아닙니 까?”

그 이야기를 들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고개를 홱 돌렸다.

“당신은 누군데 그런 이야기를 하 는 겁니까?”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김기 현입니다.”

김기현이 정체를 밝히자,뿔테 안 경을 쓴 사내가 움찔했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직원인 이상 김기현이 김대환의 아들이라는 사실 을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엘리베이터가 11층에 도착했 다.

“다음에 또 보죠.”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린 김기현 이 옷매무새를 고쳤다.

문이 닫히기 직전,당황한 기색으 로 두 직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는 주제 에.”

기분이 더러웠다.

그러나 애써 내색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김기현이 대표실로 향했 다.

“왔냐?”

김대환이 소파에 앉으라고 눈짓으 로 권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김기현이 묻자,김대환이 턱을 끌 어당기며 대답했다.

“궁금해서 불렀다.”

“무엇이 궁금하단 뜻입니까?”

“이규한.”

아버지의 입에서 이규한의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김기현이 슬쩍 미간 을 찌푸렸다.

“왜 이규한에 대해 궁금해지신 겁 니까?”

“요새 이규한이란 이름이 자주 들 리거든.”

‘과속 삼대 스캔들’부터 ‘수상한 여 자’까지.

이규한이 피디 혹은 제작자로 참여 했던 작품들은 잇따라 대박이 난 상 황이었다.

영화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흥행 성적.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규한을 주목 했고,당연히 아버지인 김대환의 귀 에도 이규한의 이름이 자주 들렸을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좀 알아봤더니,너와 대학 동창이더구나.”

“맞습니다.”

“얼마 전에 개봉했던 ‘청춘,우리 가 가장 빛났던 순간’이라는 작품에 서는 너와 공동 제작도 했었고.”

“그렇습니다.”

김기현이 대답한 순간,김대환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광안리’는 이규한과 공동 제작을 하지 않았었지?” “그건……

공동 제작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거 절당했다고 솔직하게 대답하려던 김 기현이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있었습니다.”

김기현이 이를 악물고 대답한 순 간,김대환이 말했다.

“결과적으로는 오만이었지.”

‘……?"

“완패했으니까.”

‘수상한 여자’와 ‘광안리’.

정면 대결을 펼쳤던 두 작품의 대 결에서 승리한 것이 ‘수상한 여자’ 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기현이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지독히 입맛이 썼다.

김기현이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을 때,김대환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덧붙였다.

“선택해라.”

“월 선택하란 말씀이십니까?”

“이규한을 적으로 둘지,친구로 둘 지 선택하란 뜻이다.”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김기현이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친구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 리 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또,먼저 손을 내밀기에는 김기현 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친구로 남기는 어렵습니다.”

해서 김기현이 대답한 순간,김대 환이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다시 입 을 뗐다.

“그럼 증명해라.”

“무엇을 증명할까요?”

김대환이 대답했다.

“네가 이규한보다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거라.” “기회를 주신다면,죽을힘을 다해 한번 해 보겠습니다.” 박동선은 이규한의 제안을 받아들 였다.

“세 달 정도면 가능할 것 같습니 다.”

그런 그는 삼 개월이면 ‘사초 살인 사건’의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의 생각은 조금 달 랐다.

원작이 있으면 시나리오로 바꾸는 작업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1억 관객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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