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화
강의를 하다 (2)
이규한이 객석에 앉아 있는 청중들 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까 서울콘텐츠진흥원의 직원인 정수진 팀장에게 오늘 ‘콘텐츠 콘서 트’에 청중으로 참가한 이들의 직업 에 대해서 물었었다. 그리고 대부분 은 영화와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 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정확한 비율까지는 확신할 수 없지 만,청중들 가운데 대부분은 입봉하 지 못한 시나리오 작가이거나 시나 리오 작가 지망생일 것이었다.
“행사장으로 오는 동안 치열한 경 쟁을 뚫고 오늘 ‘콘텐츠 콘서트’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을 위해서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에 대해서 고민해 봤습니다. 제가 여기 서서 몇 마디 말을 떠드는 것 이 과연 여러분들에게 실질적인 도 움이 될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 결과,아니라는 답이 도출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가지 제안을 드리겠 습니다. 아니,오히려 제가 부탁을 드린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겠네요.” 이규한이 제안이자 부탁을 하겠다 는 이야기를 꺼내자,청중들이 흥미 를 드러냈다.
“내가 쓴 기획안이,내가 쓴 시나 리오가 천만 영화가 될 거다. 이런 자신감을 갖고 있는 작품을 보유하 고 계시다면 제게 보내 주십시오. 제가 판단하기에 이 작품은 천만 영 화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든다면,제 가 연락을 드리고 직접 영화 제작도 하겠습니다. 저희 회사 이메일 주소 ?는 ”
이규한이 회사 이메일 주소를 적은 후,객석의 청중들을 살폈다.
현직 영화 제작자에게 자신의 작품 을 보여 주고 평가를 들을 수 있는 기회.
절대 흔치 않았다.
특히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의 경우 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천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수상한 여자’를 만든 잘나가는 제 작자인 이규한이 작품을 읽고 평가 를 해 줄 뿐 아니라,좋은 작품이 있다면 직접 영화 제작까지 맡겠다 고 제안을 했기 때문일까.
열정이 가득 깃들어 있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청중들에게 이규한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
하겠습니다J
“하아!”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며 한글 파일 을 닫았다.
‘콘텐츠 콘서트’에 참석했던 청중 가운데 한 명이 이메일로 보낸 시나 리오.
어떻게든 참고 읽으려 했지만,쉽 지 않았다.
채 다섯 페이지도 읽기 전에 발견 한 오타만 열 개가 넘었고,비문이 가득해서 가독성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유천이가 쓴 글은 오타와 비문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며 다음 메일 을 확인했다.
‘외계인의 침공에서 살아남는 법’.
메일에 첨부된 시나리오의 제목이 었다.
한글 파일을 열고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이규한이 약 십 분 후,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외계인의 침공에서 살아남는 법’ 이라는 시나리오의 분량은 총 30페
너무 짧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시나리오의 분량이 적은 데는 이유 가 있었다.
완결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승전결 가 운데 기승까지만 있었다.
- 외계인이 침공했다는 것을 알아 챈 순간,당황한 우리의 주인공 남 수가 고민하기 시작한다. 앞으로 어 떻게 살아남아야 할지에 대해서.
시나리오의 마지막 지문이었다.
‘제목이 ‘외계인의 침공에서 살아 남는 법’이면,최소한 살아남을 수 있는 해법 정도는 제시해야 할 것이 아닌가?’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이규한이 답답한 표정을 지 으며 한글 파일을 닫아 버렸을 때, 김미주가 불쑥 질문했다.
“혹시 정치하려는 거세요?”
“갑자기 웬 정치 타령이야?”
이규한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김미주가 대답했다.
“사서 고생을 하고 있으니까요.”
“응? 사서 고생이라니?” “글 잘 쓰는 기성 작가들 많잖아 요? 그런데 왜 기본도 안 된 시나 리오 작가 지망생들 글을 읽으면서 아까부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어 요? 혹시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한 테 인기 얻어서 정치계로 입문하려 는 것 아니에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김미주가 덧붙였다.
“아끼다가 똥 되는 법이에요.”
“무슨 뜻이야?”
“돈 많잖아요. 그냥 기성 작가 쓰 세요.”
김미주가 하려는 이야기.
‘수상한 여자’의 대박 흥행으로 돈 을 많이 벌었으니, 괜히 싼값에 시 나리오 작가 지망생들 쓰려고 하지 말고 기성 작가와 계약하라는 뜻이 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
그렇지만 이규한은 고개를 흔들었 다.
이규한이 쉬운 길을 두고 한숨이 푹푹 새어 나오는 어려운 길을 택한 이유.
정치에 입문하기 위해서도,돈을 아끼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김미주의 지적처럼 기성 시나리오 작가들은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과 비교하면 분명히 글을 잘 썼다.
그렇지만 기성 작가들이 잘해 내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했다.
이전에 ‘사초 살인 사건’의 각색 작업을 맡겼던 최민훈 작가.
그는 꽤 이름이 알려진 기성 작가 였지만, 그가 뽑아낸 결과물은 이규 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최민훈 작가가 작업한 결과물이 기 대 이하였던 것이 당시 투자가 불발 됐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최민훈 작가의 잘못이 아냐!’ 당시에는 최민훈 작가를 원망했다.
그가 각색을 하는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결 과물이 나왔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 도 품었었고.
그렇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익숙하지 않아서야!’
원작 소설을 시나리오로 바꾸는 작 업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오리지널 작품을 쓰는 데 익숙한 최 민훈 작가가 뽑아낸 결과물이 만족 스럽지 않았던 것이었다.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는 게 필 요해!’
소설의 문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시나리오 문법에도 익숙한 작가.
원작 소설을 시나리오로 바꾸는 작 업에 특화된 작가가 갖춰야 할 조건 이었다. 그리고 이런 작가가 이규한 은 꼭 필요했다.
앞으로도 점점 수요가 늘어나기 때 문이었다.
이규한이 알고 있는 미래에서는 소 설은 물론이고,웹툰이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제작 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성 작가로는 힘들다!’
이규한이 내린 판단.
물론 아까 얘기했던 조건을 갖춘 작가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 다. 그래서 이규한은 이런 조건을 갖춘 작가를 찾기 위해서 ‘콘텐츠 콘서트’에서 특강을 하면서 시나리 오 작가 지망생들에게 본인들의 작 품을 보내라고 제안했던 것이었다.
‘진주는 흙 속에 숨어 있는 법이 야!’
작법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시나리 오 작가 지망생들이 보낸 작품을 확 인하는 것.
괜히 이규한이 한숨을 연신 내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한은 진주 는 흙 속에 숨어 있다는 속담을 떠 올리면서 새삼 각오를 다졌다.
“아끼다가 똥 되는 법이라니까요.”
김미주의 비아냥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홀리며 다시 메일을 확인하 기를 한참.
이규한이 두 눈을 빛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드래곤이 아꼈던 꽃미남 기사이
이규한이 커피전문점으로 들어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지 못 찾겠군!’
‘콘텐츠 콘서트’에 참석했던 청중 은 약 백여 명.
그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이규한이 전화를 걸기 위해 서 휴대전화를 꺼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먼저 이규한을 알아본 남자가 다가와 인사했다.
"박동선 작가님?"
"네, 제가 박동선입니다. 연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박동선을 바라보며 이규한이 말했다.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네?"
"좋은 작품을 읽을 기회를 주셨으니까요."
아이스커피 두 잔을 시키고 빈 탁자에 앉았을 때였다.
"대표님, 하나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 니죠?”
“네?”
“‘수상한 여자’를 제작하셨던 이규 한 대표님과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 누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박동선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덧 붙였다.
그제야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냐고 박동선이 물었던 이유를 알아첸 이규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꿈 아닙니다. 그리고 아까 제가 한 말도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유비 한 작가님.”
이규한이 박동선의 필명을 입밖으 로 꺼내자,가뜩이나 달아올랐던 박 동선 작가의 얼굴이 더욱 붉게 변했 다.
“제 필명은 어떻게……?”
“검색해 봤습니다.”
“네? 네.”
“그리고 작가님께서 집필하셨던 ‘드래곤이 아꼈던 꽃미남 기사’라는 작품도 직접 읽어 봤습니다.”
“그걸… 정말 보셨습니까?”
왜 일까.
이규한이 ‘드래곤이 아꼈던 꽃미남 기사’라는 작품을 읽어 봤다고 말하 자,박동선은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 다.
또,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러십니까?”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의 질문하 자,박동선이 대답했다.
“잊고 싶은 작품이거든요.”
“왜 잊고 싶은 작품입니까?”
“…망했거든요.”
박동선이 한참 만에 기어들어갈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서 구하기 어려웠던 거구나!’ 박동선을 만나기로 결심하고 난 후,이규한은 그를 만나기 전에 ‘드 래곤이 아졌던 꽃미남 기사’라는 판 타지 소설을 읽어 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 다.
‘드래곤이 아졌던 꽃미남 기사’라 는 작품이 도저히 결말까지 참고 읽 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일단 책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절판됐다고 나 왔고,동네 서점에 찾아가 봤지만 책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수소문 끝에 집에서 두 정거 장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서 대 여점에 찾아가고 난 후에야,구석에 처박혀 있던 ‘드래곤이 아꼈던 꽃미 남 기사’라는 책을 구해서 간신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럼 ‘다시 사는 개혁 군주’라는 작품도 망했습니까?”
‘다시 사는 개혁 군주’ 역시 박동 선 작가가 쓴 판타지 소설.
그렇지만 이규한은 결국 ‘다시 사 는 개혁 군주’를 읽지 못하고 박동 선을 만났다.
그 이유는 ‘드래곤이 아꼈던 꽃미 남 기사’보다 ’다시 사는 개혁 군주 ‘라는 책이 더 찾기 어려웠기 때문 이었다.
“…그렇습니다.”
역시 박동선이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 순간,이규한이 질 문했다.
“그럼 이제는 유비한이란 필명으로 책을 내시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왜 더 이상 집필을 하지 않으시는 거죠?”
“실은… 책을 내 줄 곳이 없습니 다.”
" ……?" “한 작품도 아니고 두 작품이나 시 원하게 말아먹고 났더니 더 이상 출 간 제의가 들어오지 않더군요.”
‘영화감독이 작품을 시원하게 말아 먹고 나면 더 이상 연출 계약 제의 가 들어오지 않는 것과 비슷한 케이 스인가 보군!’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이규한이 미 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박동선에게 는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이규한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 다.
“그럼 그 후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 작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갑자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습니까?”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