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화
강의를 하다 (1)
안유천이 전화를 건 타이밍이 절묘 하다는 생각을 하며 이규한이 전화 를 받았다.
“무슨 일로 전화했어?”
“왜 안 오세요?”
“안 오냐니?”
“설마 잊으셨어요?”
“뭘 말이야?” 안유천이 대답했다.
“오늘 강의하기로 하신 거요.” 서울콘덴츠진흥원에서 개최한 ‘콘 덴츠 콘서트’.
‘콘텐츠 콘서트’라는 명칭이 붙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특강 형식 이었다. 그리고 이규한은 이번 ‘콘 텐츠 콘서트’에 강사로 초청을 받았 다.
이규한이 맡게 된 특강의 제목은 ‘제작자가 바라보는 콘텐츠의 힘’.
강의 제안을 수락하고 난 후,이규 한은 강의를 위해서 파워포인트까지 준비했었다.
그런데 정작 오늘이 바로 ‘콘덴츠 콘서트’ 행사가 열리는 날이라는 것 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초 살인 사건’의 판권 계약을 맺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 었다.
만약 안유천이 전화를 하지 않았다 면 제시간에 맞춰서 ‘콘텐츠 콘서 트’가 열리는 장소에 도착하지 못할 뻔했던 셈이었다.
이규한이 최대한 서둘러 이동했다.
덕분에 이규한은 ‘콘텐츠 콘서트’ 가 열리는 서울콘덴츠진흥원에 특강 시작 약 20여 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셨어요?”
“네,늦지 않게 도착해서 다행이네 요.”
행사의 진행을 맡은 서울콘텐츠진 흥원 정수진 팀장과 인사를 나눈 이 규한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특강 장 소로 향했다.
특강이 진행되는 강당은 꽤 넓은 편이었다.
약 백여 석의 좌석이 청중들로 가 득 들어차 있는 강당의 내부를 이규 한이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할 수 있는 첫 걸음이 무엇일까요?”
낯익은 목소리가 이규한의 귓속으 로 파고들었다.
‘안유천?’
바로 안유천의 목소리임을 알아챈 이규한이 강단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이규한의 눈에 마이크를 잡고 강당 위에 서 있는 안유천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 녀석이 왜 저기 서 있는 거
야?’
아까 통화를 할 때,안유천은 서울 콘덴츠진흥원에서 주최한 ‘콘덴츠 콘서트’에 본인도 참가한다고 말했 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당연히 안유 천이 강사가 아니라,청중으로 참가 할 거라 여겼었다.
그래서 황당한 표정을 짓던 이규한 이 참지 못하고 정수진 팀장에게 물 었다.
“안유천 작가가 왜 저기 서 있는 겁니까?”
그 질문을 받은 정수진 팀장이 대 답했다.
1저희 측에서 강사로 초청했습니 “안유천 작가를요?”
“네.”
“왜요?”
이규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으로 묻자,정수진 팀장이 오히려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요?”
“그야……
“저희 측에서는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해서 초청했습니다.”
“강사로 초빙되기에 안유천 작가의 자격이 충분하다고요?” “네,시나리오 작가로서 이미 능력 을 입증했으니까요.”
정수진 팀장에게서 대답이 돌아온 순간,이규한이 입을 다물었다.
안유천의 시나리오 작가 입봉작인 ‘수상한 여자’는 천만 관객을 돌파 했다.
또,안유천이 각색 작가로 참여했 던 ‘써니 걸즈’ 역시 600만 명이 넘 은 관객을 동원했다.
정수진 팀장의 말처럼 시나리오 작 가로서 능력을 이미 입증한 셈이었 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이규한이
멋쩍게 웃었다.
위상이 달라진 것은 이규한만이 아 니었다.
작가 안유천의 위상 역시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예전의 안유천이 아니구 나!’
이규한이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 을 때,안유천의 강의가 이어졌다.
“바로 자신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 악하는 겁니다. 시나리오 작가인 내 가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인가? 다 시 말해 내가 가진 장점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시나리오 작가로서 성공하는 지름길인 겁니 안유천이 청중들을 둘러본 후,말 을 이었다.
“쉽게 예를 들어서 캐릭터를 잘 살 리는 능력을 가진 덕분에 코미디 장 르의 작품에 특화된 작가가 있습니 다. 그런데 이 작가가 가진 꿈은 스 릴러 장르의 작품을 써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유주얼 서스펙트’ 못지않 은 대단한 반전이 등장하는 스릴러 장르의 작품을 써서 세상을 깜짝 놀 라게 하겠다. 이런 각오로 이 작가 가 스릴러 장르의 작품을 계속 쓴다 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절대 성공하지 못합니다. 왜냐?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을 배제했기 때문입 니다.”
안유천이 잠시 말을 멈추고 청중들 을 둘러보았다.
‘잘하네!’
그런 안유천을 바라보던 이규한이 내심 감탄했다.
안유천은 적당한 타이밍에 이야기 를 끊으며 청중들에게 뒷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고 있었다.
또, 자신감과 여유가 표정과 동작 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자,그럼 이 작가의 인생은 어떻 게 흘러갈까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지만,이 작가는 혼자서 계속 스 릴러 장르의 글을 씁니다. 어느 누 구도 이 작가가 쓴 스릴러 장르의 작품에 관심이 없지만,그는 생각합 니다. 내 뛰어난 작품과 글솜씨를 알아볼 정도로 안목 있는 사람이 아 직 없다. 언젠가는 내 글을 알아주 는 안목 있는 피디나 제작자가 나타 겠지거니 하는 마음을 가진 채 계속 글을 쓰는 겁니다. 이걸 등산으로 비유하자면 계속 산을 오르긴 하지 만,이 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내려왔다 또 엉뚱한 산을 오르 기를 반복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스 스로 지쳐서 작가 생활을 포기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안유천이 무척 길었던 이야기를 마 친 순간,청중 가운데 한 명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작가로서 자신의 장점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 데,그건 어떻게 알 수 있는 겁니 까?”
꽤 날카로운 질문을 받은 안유천이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작가 개개인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명확한 대답을 드리기가 어렵네요.”
그러나 조금 전 질문을 던졌던 청 중은 안유천이 꺼낸 대답에 만족하 지 못했다.
“그럼 안유천 작가님은 자신의 장 점을 어떻게 파악했습니까?”
그 질문을 받은 안유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다음 강의를 맡아 주시기 위 해서 저기 뒤편에 서 계신 대한민국 최고의 피디이자 제작자이신 이규한 대표님이 알려 주셨습니다.” “대표님,오셨습니까?” 자신의 강의를 성황리에 마친 안유 천이 이규한의 앞으로 다가와 공손 하게 인사했다.
“제 강의,어땠습니까?”
그런 안유천이 이규한에게 자신의 강의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
“고소할 거야.”
“갑자기 웬 고소입니까?”
“내가 했던 이야기를 무단으로 도 용했잖아.”
아까 안유천이 강의 중에 했던 이 야기.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어디서 많 이 들어봤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었다. 그리고 어디서 들어봤던 이야 기인가를 떠올리는 데는 오랜 시간 이 걸리지 않았다.
이규한이 스릴러 장르의 작품을 쓰 겠다고 각오를 다지던 안유천에게 충고했던 내용을 고스란히 옮겼던 것이었다.
그래서 고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 지만,안유천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저작권이 있는 이야기였습니까?”
오히려 당당하게 되묻는 안유천을 바라보던 이규한이 픽 하고 실소를 홀리며 말했다.
“앞으로 시나리오 작업이 안 들어 와도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강의 말이야. 내 생각보다 잘하더 라고. 아예 이 길로 나서는 건 어 때?”
“시나리오 작가 생활을 그만두고 이 길로 나서라고요?”
“내가 보기엔 이쪽에 더 재능이 있 는 것 같아서 말이지.”
안유천이 고민에 휩싸였을 때였다.
“시간 됐습니다.”
정수진 팀장이 특강을 시작할 시간 이라고 알려 주었다.
“안유천, 잘 봐라.” 이규한이 안유천을 힐끗 바라본 후 강단 위로 올라갔다.
“내가 성공한 이유는 타고난 실력 이 있어서이다. 내가 제작사에 보냈 던 시나리오를 읽고 난 후, 감탄을 금치 못한 피디가 바로 내 실력을 알아보고 먼저 연락을 해 왔던 것이 그 증거다. 아까 안유천 작가가 이 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강단 위에 선 이규한이 희미한 웃 음을 머금은 채 덧붙였다.
“안유천 작가에게 먼저 연락했던 피디가 바로 저입니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제 가 먼저 안유천 작가에게 연락을 했 던 이유는 당시 제가 근무하던 제작 사로 보냈던 시나리오를 읽고 난 후 감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그 시나리오를 제 대로 읽지도 않았습니다.”
강당 구석에서 이규한의 강의를 듣 고 있던 안유천의 표정이 일그러지 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이규한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꽤 오래전 일이라서 정확히 기억 이 나지는 않지만,아마 다섯 페이 지도 읽지 않고 안유천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던져 버렸던 것 같습니 다. 그리고 제가 안유천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던져 버렸던 이유는 재 미가 없어서였습니다. 제가 이 자리 에서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 겠지만… 더럽게 재미가 없었습니 다.”
이규한의 이야기가 끝난 순간,강 당을 가득 메운 청중들이 일제히 웃 음을 터트렸다.
행사의 진행을 맡은 정수진 팀장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 이 보였다.
강당 안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오
직 안유천만이 웃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럽게 재미없는 시나리오 를 제작사로 보냈던 안유천 작가에 게 제가 먼저 연락을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규한이 이번에는 질문을 던지자, 청중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고 대답 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이런 재미없는 시나리오를 보내지 말라고 경고하려고 연락하셨 던 게 아닐까요?”
“번호를 잘못 누른 것 아닙니까?”
“그래도 어떤 가능성을 엿봤기 때 문이 아닐까요?” “더럽게 재미없는 시나리오를 보내 서 아까운 시간을 빼앗을 것에 앙심 을 품고 욕하려고 연락하셨던 것 아 닙니까?”
다양한 대답들이 쏟아졌다.
웃으며 그 대답들을 듣고 있던 이 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더럽게 재미없는 시나리오를 보내 서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에 대 해서 욕하고 싶었던 마음도 아주 없 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안 유천 작가에게 연락했던 진짜 이유 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안유천 작가가 시나리오를 들고 제가 근무 하던 제작사로 찾아와서 했던 말이
무척 인상 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말을 했나요?“
“당시 안유천 작가는 추레한 몰골 로 제작사로 불쑥 쳐들어와서는 이 렇게 말했습니다. 천만 영화를 먼저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다고. 그때 제가 근무하던 제작사 대표님 은 안유천 작가가 떠나고 난 후,저 자식은 돌아이가 틀림없다고 말했습 니다. 그렇지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달랐습니다. 안유천 작가가 제작사 로 찾아와서 꺼냈던 말에서 자신감 이,또 열정이 느껴졌거든요.”
그제야 안유천의 잔뜩 일그러져 있 던 표정이 펴졌다.
양어깨에 힘을 준 채 콧김을 내뿜 고 있은 안유천을 힐끗 살핀 이규한 이 덧붙였다.
“오늘 ‘콘텐츠 콘서트’의 참석자를 추첨으로 뽑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리고 경쟁률이 10대 1이었다는 사 실도 오늘 행사를 주최한 서울콘텐 츠진흥원 관계자분께 전해 들었습니 다. 10 대 1. 결코 낮은 경쟁률이 아닙니다.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콘텐츠 콘서트’에 여러분들이 참석 한 이유가 대체 무엇일지에 대해 고 민해 봤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에 대한 답은… 열정이었습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