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화
장사 못 하는 건 여전하네 (1) ‘사초 살인 사건’이라는 소설책. 베스트셀러에 오른 적도 없었고, 윤규진이란 작가의 이름도 알지 못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한이 ‘사초 살인 사건’을 책장에서 꺼내서 읽기 시작했던 이유는 제목에 끌려서였 다.
사초는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
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관이 기록한 문건.
사초를 둘러싼 살인 사건이 발생했 다는 소설책의 제목이 이규한의 흥 미를 잡아끌었던 것이었다.
호기심을 느끼며 ‘사초 살인 사건’ 을 읽어 내려갔던 이규한은 선 자리 에서 단숨에 완독했다. 그리고 ‘사 초 살인 사건’을 완독하고 난 후, 이규한은 이 소설을 꼭 영화로 만들 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소설을 영화 로 만든다.’ 당시 이규한이 서점에서 했던 결심 이었다. 그리고 이규한이 했던 결심 은 단순히 결심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규한은 소설의 판권을 구입한 후,‘사초 살인 사건’을 영화로 만들 기 위한 준비에 본격적으로 돌입했 었다.
여러 편의 사극 영화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남기일 감독과 연출 계약을 맺었고,각색 작가도 구해서 기존의 소설을 시나리오 형식으로 바꾸었 다.
그렇지만 ‘사초 살인 사건’이라는 제목의 영화는 결국 극장에 걸리지 못했다.
제작 단계에서 영화가 엎어졌기 때 문이었다.
당시 영화의 제작이 무산됐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감독이 너무 약해요. 소설 원작도 베스트셸러가 아니라서 딱히 플러스 요인이 되기 힘들고요. 그리 고 결정적으로 요새 사극 영화가 개 봉하는 족족 죽을 쑤고 있다는 것, 모르세요? 더 손해 보기 전에 빨리 접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당시 투자를 받기 위해 찾아갔던 투자사 직원이 난색을 표하며 꺼냈 던 이유들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투자사에서 ‘사
초 살인 사건’의 투자를 거부했던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사초 살인 사건’을 제작하려 는 것이 이규한이었기 때문이었다.
사극 영화를 촬영하려면 세트장을 대여해야 했다.
흔히 관광지로 알려져 있는 민속촌 에서 사극 영화를 촬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그 시대에 맞는 의상과 소품, 무기들을 제작해야 했고,엑스트라 로 출연해야 하는 배우들도 현대극 에 비해서 훨씬 많이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사극 영화는 제작비가 많이 들었다.
최소 70억.
대규모 전투신을 배제하더라도 일 단 사극 영화를 제작하면 최소 70 억 정도의 제작비가 투입됐다.
제작비가 많이 투입되는 만큼,투 자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투자 결정 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의 이규한은 딱히 내세 울 것이 없는 제작자였다.
크게 성공시킨 작품도 없었고, 이 전에 사극 영화를 제작해 본 경험도 없었다.
계가 뭘 믿고 당신이 만드는 사극 영화에 투자를 해?”
당시 투자사 직원이 진짜 하고 싶 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었을 터였다.
그렇지만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많 이 달라졌다.
영화 제작자 이규한의 위상이 달라 졌기 때문이었다.
천만 영화를 만든 제작자 이규한. 이것은 일종의 타이틀이었다.
그 타이틀을 믿고 투자를 하려는 곳들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지금은 사극 영화가 아니라 ‘해리 포터’ 같은 판타지 장르의 영화를
제작한다고 해도 투자가 될 상황이 야.”
이규한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혼잣말을 꺼냈다.
그만큼 이규한이 이끄는 블루문 엔 터테인먼트의 주가가 치솟은 상황.
이규한은 그런 현재 상황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 회를 놓치지 않고 차기작으로 ‘사초 살인 사건’을 준비하려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빨리 투자 결정이 났으
면 좋겠는데.”
이규한이 권지영에게 전화를 걸어 재촉했다. 그리고 재촉하던 도중, 이 규한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 역시 무척 낯설 게 느껴지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 다.
‘내가 투자 결정을 빨리해 달라고 재촉하는 날이 찾아올 줄이야!’
예전에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 던 일이었다.
그저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것만으 로도 감지덕지였다.
그래서 판사의 판결이 내려지길 기
다리는 피고인처럼 전화기를 붙잡고 투자 심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 고만 있었었는데.
“왜요? 급하세요?”
“응,판권 구입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아서.”
이규한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덧붙 였다.
“더 늦어질 것 같으면 다른 투자사 와 얘기해 보고.”
그 이야기를 꺼냈던 이규한이 깜짝 놀랐다.
재촉으로 모자라 협박까지.
점점 더 대담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과했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이규한이 흠칫 했을 때였다.
“에이,그건 안 되죠.”
“ ……?"
“내일까지 무조건 답을 드릴게요.”
권지영은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권지영은 약속을 지켰다.
“투자 결정 났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규한에게 전화를 걸어서 투자 심사 결과를 알려 주었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에서 ‘사초 살 인 사건’의 투자가 확정됐다는 통보 를 들은 순간, 이규한이 오히려 당 황했다.
각색에 윤색,캐스팅고까지 거친 시나리오 완고에 배우 캐스팅,감독 까지 붙이고 나서도 투자 심사에서 물을 먹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시나리오조 차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사초 살인 사건’이라는 작품의 제 목밖에 나와 있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투자가 확정된 것이었다.
그 순간,이규한이 떠올린 것은 김 기현이었다.
‘김기현도 이랬겠지!’
김기현은 국내 최대 투자 배급사인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인 김대 환을 아버지로 두었다. 그래서 김기 현이 제작하기로 결심한 작품은 별 어려움 없이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의 투자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김기 현은 자만심이 생겼다. 그래서 영화 제작이라는 것을 너무 쉽게 봤다.
그 결과가 바로 ‘광안리’의 흥행 참패였다.
“난 그렇게 되면 안 된다!”
굳게 각오를 다진 이규한이 일단
판권을 사기 위해서 움직였다.
‘사초 살인 사건’을 출간했던 출판 사는 단풍나무.
단풍나무 출판사는 경기도 파주에 위치해 있었다.
파주로 찾아간 이규한이 단풍나무 출판사의 대표인 흥달수를 만났다.
단군 이래 출판업계 최대의 불황이 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 벌써 몇 년 전.
그리고 출판업계는 그 후로도 몇
년째 꾸준히 사상 최대 불황 기록을 깨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일까.
이규한과 마주 앉아 있는 단풍나무 출판사 대표인 흥달수의 얼굴에는 고단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희 출판사에서 출간했 던 소설의 판권을 구입하고 싶다는 말씀이신가요?”
흥달수의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고 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어떤 작품의 판권을 구입하시려는 겁니까?”
“‘사초 살인 사건’이라는 작품입니 다.”
“윤규진 작가가 쓴 ‘사초 살인 사 건’이요?”
홍달수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런 그의 반응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규한이 물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고 있습니까?”
“문제라니요?”
“그러니까 판권이 이미 팔렸나 해 서요.”
이규한이 살짝 긴장한 채 묻자,흥 달수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에이,그럴 리가요.”
“판권이 아직 안 팔렸다는 뜻이
죠?”
“맞습니다. ‘사초 살인 사건’의 판 권이 팔렸을 리가 없죠. 오히려 제 가 이 대표님께 묻고 싶습니다.”
“무엇을 묻고 싶으신 겁니까?”
“왜입니까?”
" …?"
“왜 하필 ‘사초 살인 사건’의 판권 을 사려고 하시는 건지 물은 겁니 다.” 흥달수가 이런 질문을 던질 것은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이규한이 바로 대답하지 못
하고 머뭇거릴 때,흥달수가 덧붙였 다.
“윤규진 작가가 쓴 ‘사초 살인 사 건’은 한 번도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 리면 책의 판매 부수도 형편없는 수 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초 살인 사건’이라는 소설의 존재를 알고 있 는 사람조차도 극히 드문 실정입니 다. 그런데 이 대표님께서 갑자기 ‘사초 살인 사건’의 판권을 구입하 기 위해서 저희 출판사로 찾아오셔 서 의아하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비로소 흥달수가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를 알아채는 데 성공한 이규한
이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양반, 장사 못 하는 건 여전하 네!’
이규한이 단풍나무 출판사의 대표 인 홍달수를 만나는 것.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두 번째였 다.
비록 개봉을 하지 못하긴 했지만, 이전에도 ‘사초 살인 사건’의 제작 을 준비했었다.
그 과정에서 소설책 ‘사초 살인 사 건’의 판권을 구매하기 위해서 단풍 나무 출판사로 찾아왔었다.
흥달수를 바라보던 이규한이 쓴웃 음을 머금었다.
이규한은 단풍나무 출판사에서 출 간한 소설책인 ‘사초 살인 사건’의 판권을 구입하기 위해서 찾아온 소 비자.
반면 홍달수는 판매자였다.
흥달수의 입장에서는 ‘사초 살인 사건’의 판권이란 상품을 최대한 비 싼 가격에 팔 궁리를 하는 것이 정 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방금 꺼낸 말로 인해 스스로 상품의 가치를 떨어트린 셈
이었다.
‘작품을 고르는 안목은 어떨지 몰 라도,장사 수완은 꽝이네!’
단풍나무 출판사 내부를 둘러보던 이규한이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딱 봐도 단풍나무 출판사의 형편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긴 대표가 이렇게 장사 수완이 없는데 출판사의 재정 상태가 좋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이규한이 입을 뗐다.
“재밌어서입니다.”
“네?”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가 ‘사초 살
인 사건’이라는 소설을 접하고 읽게 됐습니다. 그리고 소설을 읽고 나서 이 소설을 꼭 영화로 만들어야겠다 고 그 자리에서 바로 결심했을 정도 로 무척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규한이 ‘사초 살인 사건’이라는 소설책의 판권을 사려는 이유에 대 해 밝혔다.
재차 상품을 구매하겠다는 강한 의 지를 피력한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달수는 여전 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 다.
‘만약 저희 출판사에서 출간했던
‘사초 살인 사건’을 영화로 만들면 과연 재밌을까요?”
후우.
이규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회사에서 만든 옷이기는 한 데,이 옷을 손님이 구매해서 입었 을 때 과연 어울릴까요? 제 생각에 는 별로일 것 같은데요.” 지금의 상항을 옷가게로 비유하자 면,판매사원이 옷을 사러 찾아온 손님에게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으니 옷을 구입하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
과 마찬가지였다.
옷을 사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들어왔다가도 그냥 빈손으로 옷가게 를 나가게 만들 정도였다.
‘지금까지 안 망한 게 용하네!’
홍달수의 형편없는 장사 수완을 재 차 확인한 이규한이 고개를 절레절 레 내저으며 입을 뗐다.
“재밌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리고 그 점은 홍 대표님께서 걱 정하실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규한이 딱 잘라 말하고 나서야,
홍달수가 화제를 돌렸다.
“판권을 얼마에 사실 생각입니까?” 이규한이 되물었다.
“얼마에 파실 생각이십니까?”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