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80화 (80/272)

80 화

모 아니면 도 (3)

“개봉 시기를 늦춰야 합니다. 우선 CG의 완성도를 더 끌어올려야 하 고,영화의 내용도 겨울과는 맞지 않습니다.”

최신현 감독이 ‘광안리’의 개봉을 내년 여름으로 미루어야 한다고 주 장하던 것이 떠올랐다.

당시 김기현은 최신현의 주장에 귀 를 기울이지 않고,‘광안리’의 개봉

시기를 예정대로 밀어붙였다.

“그게… 실수였나?”

‘광안리’는 부산에 위치한 유명 해 수욕장에 쓰나미가 발생하면서 벌어 진 재난에 대처하는 다양한 인간 군 상들에 대한 영화.

최신현만이 아니었다.

투자와 배급을 맡은 씨제스 엔터테 인먼트 내부에서도 한겨울에 여름 배경의 영화를 개봉하는 것은 무리 수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김기현은 그 의견에 귀를 닫고 뚝심 있게 겨울 개봉을 밀어붙 였는데.

그게 실수였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 었다.

“대체 왜 대표님이 겨울 성수기에 여름 해수욕장이 주배경인 ‘광안리’ 의 개봉을 고집하시는지 저는 도무 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와 동시에 최신현 감독이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으로 꺼냈던 하소연 도 귓가에 되살아났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최신현 감독에게는 끝내 알려 주지 않았지만,김기현이 ‘광안리’의 겨울 개봉을 고집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 다.

바로 이규한 때문이었다.

자신이 좋은 조건으로 공동 제작을 하자고 먼저 제안했음에도 불구하 고,이규한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면 대결을 펼치 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정면 대결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또,이규한에게 본인이 얼마나 무 기력한 존재인지 확인시켜 주고 싶 었다.

타다다닷.

김기현이 포털사이트에서 이규한이

제작한 ‘수상한 여자’를 검색했다.

- 네티즌 평점: 8.85

개봉 첫날 확인했던 ‘수상한 여자’ 의 평점은 7점대 초반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8점대 후반까지 평 점이 치솟아 있었다.

평점이 추월당한 상황.

이런 추세라면 평점뿐만 아니라 박 스오피스 순위도 뒤바찔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안 끝났어!”

주먹을 말아 쥔 채 혼잣말을 꺼낸

김기현이 전화기를 들었다.

“네,대표님!”

스카이 엔터테인먼트 홍보팀장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김기현이 소리 쳤다.

“홍보 더 하세요. 지금 영화의 홍 보가 부족해서 흥행세가 주춤하지 않습니까? 기자들에게 연락해서 기 사 내 달라고 독촉하고, 알바를 더 풀던 지인들을 동원하던 ‘광인리’의 평점 다시 끌어을리세요. 내 말,무 슨 뜻인지 알아들었어요?” 빵. 빠앙.

러시아워에 걸린 도로는 거대한 주 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막혔다.

택시에 타고 있던 이규한이 약속시 간에 맞추지 못할 것을 직감하고 휴 대전화를 꺼내 권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이 대표님.”

“권 팀장,미안. 차가 너무 막혀서 좀 늦을 것 같아.”

“괜찮습니다. 천천히 오셔도 됩니 다. 아니, 오늘 안에 도착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권지영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물 었다.

“왜 이래?”

“제가 뭘요?”

“너무 저자세로 나오잖아.”

투자 배급사는 엄연히 갑의 위치였 다.

그래서일까.

투자 배급사 직원들은 콧대가 높기 로 유명했다.

일단 만날 약속을 잡는 것부터가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고,간 신히 약속을 잡는 데 성공했다 해도 약속 시간을 훌쩍 넘기고 느즈막히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정반대라는 생각이 들어서 질문한 것이었다.

“따끈따끈한 천만 영화를 제작하신 이규한 대표님이 미천한 저를 만나 주시는 것만도 영광이죠.”

잠시 후, 권지영에게서 돌아온 대 답을 들은 이규한이 픽 하고 실소를 흘렸다.

“아직 천만 돌파 못 했다.”

“내일 천만 돌파 확실합니다.”

“그래도……

“안주 푸짐하게 시켜 두고 기다리 겠습니다. 그럼 이따 될게요.”

권지영과의 짧은 통화를 마친 이규 한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그때,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가 ‘수상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꺼 냈다.

“이번에 준비한 음악은 요즘 청취 자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신청하시 는 ‘나성에 가거든’이라는 곡입니다. ‘수상한 여자’라는 영화에서 여주인 공인 심인경 씨가 불러서 화제가 된 곡인데요. 저 역시 ‘수상한 여자’를 봤습니다. 웃다가 울다가, 마지막 반 전에서는 깜짝 놀라기까지. 정말 영 화를 재밌게 봤었는데요. 영화를 보 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심인

경 씨가 부른 ‘나성에 가거든’이란 곡이 계속 귓가에 맴돌더라고요. 아 마 여러분들도 그래서 많이 신청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자,그럼 함께 들어볼까요?”

흥겨운 반주와 함께 ‘나성에 가거 든’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기 시작 했다.

그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이규한이 휴대전화를 꺼내서 기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 다.

지인경 작가가 인터뷰했네.’ 〈‘수상한 여자’는 내 가치관을 바 꿔준 작품〉 지인경 작가가 인터뷰를 한 기사의 제목이었다.

이규한이 흥미를 느끼며 기사의 내 용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Q) ‘수상한 여자’가 지인경 작가님 의 입봉작이시죠?

A) 네,제 입봉작입니다.

Q) 입봉작인 만큼,‘수상한 여자’ 가 개봉했을 때 무척 감회가 깊었겠 네요. 또 무척 기쁘셨을 것 같은데

A) 솔직히 말씀드리면 기쁜 감정 보다 부끄러운 감정이 더 컸습니다.

Q) 왜인가요?

A) 저는 ‘수상한 여자’의 각본 크 레덧에 이름이 올라갈 자격이 없는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Q)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A)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수상한 여자’의 각본 작업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저는 무임승 차를 한 셈입니다.

‘굳이 자세히 밝힐 필요는 없는 지인경 작가가 인터뷰를 한 내용을 읽던 이규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중들은 영화를 즐길 뿐이었다.

영화 제작 과정의 자세한 속사정까 지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 었다.

그러니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음에도 불구하고,지인경 작가는 인터뷰에 서 자세한 속사정을 밝히고 있었다.

Q) 이건 전혀 알지 못했던 숨겨진 이야기네요. 지인경 작가님이 ‘수상 한 여자’의 각본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각본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게 된 사연에 대해 설명 해 주시겠어요?

A) 설명하려면 무척 깁니다. 또, 제대로 설명하려면 현직에 계신 영 화 관계자분들의 실명도 거론해야 할 것 같아서 어렵네요. 대신 짧게 설명하자면,‘수상한 여자’를 제작하 신 이규한 대표님 덕분에 각본 크레 딧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必 그럼 혹시 ‘수상한 여자’가 지 인경 작가님의 가치관을 바꿔 준 작 품이라는 것도 이 부분과 관련이 있 나요?

A) 네,맞습니다. 오랫동안 무명작 가 시절을 거치면서 저는 영화계에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 연스레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 람들에게도 실망했죠. 정당한 대가 를 지불하지 않고 시나리오 작업을 지시하고,폭언과 협박까지 수시로 일삼았던 영화계 사람들에게 실망해 서 저는 한때 영화계를 떠날 생각까 지 했습니다. 그때 제가 만났던 것 이 바로 ‘수상한 여자’의 제작자인 이규한 대표님입니다. 그리고 이규 한 대표님을 만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 영화를 하는 사 람 중에서도 괜찮은,아니 좋은 사 람도 있구나. 그동안 영화를 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했던 제게 희 망을 주신 셈이죠. 그래서 ‘수상한 여자’가 제 가치관을 바꿔 준 작품 이라고 말씀드렸던 겁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빌어서 이규한 대표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워낙 바쁘신 분이라,이 인터뷰를 보실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봤어!”

이규한이 웃으며 혼잣말을 꺼냈다.

지인경 작가의 인터뷰를 읽고 나니 새삼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이름을 ‘수상한 여자’의 각 본 크레딧에 올린 것.

이규한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호의 로 행한 일이었지만,지인경 작가는 그 일로 인해서 인생의 가치관이 바 뀌었다고 했으니까.

기사를 다 읽고 난 후,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려던 이규한이 도중에 생각을 바꾸어 스크롤을 아래로 내 렸다.

- 그동안 마음고생이 무척 심하셨 겠네요. 격하게 응원합니다.

- 작가님의 다음 작품도 기대할게 요.

- 각본 크레딧을 제안한 제작자도, 기꺼이 각본 크레딧에 이름을 올려 도 된다고 허락한 기존의 작가분들 도. 다들 멋진 분들이시네요.

- ‘수상한 여자’. 영화만 재밌는 줄 알았는데,영화를 만든 제작자도 멋진 사람이었네요.

- 이 기사 보고 ‘수상한 여자’ 보 러 가기로 결심함.

기사 아래 달려 있는 댓글들이었 다.

지인경 작가를 응원하는 내용과 더 불어 이규한을 칭찬하는 내용도 있 었다.

“이러려고 한 일은 아닌데.”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던 이규한이 잠시 후 두 눈을 빛냈다.

“혹시… 이것 때문이었나?”

지인경 작가의 이름을 ‘수상한 여 자’의 각본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고 난 후,시나리오 책을 무심코 집어 들었을 때 예상 관객수가 변했었다.

9,134,725에서 9,225,498로.

약 10만 명 가까이 예상 관객수가 늘어 있었다.

당시에는 예상 관객수가 늘어난 이 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해서일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무심코 넘겼었는 데.

- 나도 이 기사 보고 나서 ‘수상한 여자’ 보기로 결심함.

- 재밌는데 착하기까지 한 영화 ‘수상한 여자’. 꼭 보삼.

- 영화 제작 과정의 은밀한 속사 정을 알고 나니 영화가 더 궁금해 짐.

- ‘수상한 여자’ 보러 가즈아!

그런데 기사 아래 달려 있는 댓글 들을 확인한 순간, 이규한은 당시 예상 관객수가 늘어났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짐작보다 훨씬 더 정확해!”

새삼 자신이 가진 예상 관객수를 보는 능력이 무척 정확하다는 사실 을 이규한이 깨달은 순간이었다.

부우응.

답답하기 짝이 없던 도로의 흐름이 언제 막혔냐는 둣 풀리기 시작했다.

약 이십여 분 후.

이규한이 약속 장소인 흥대 인근

고기집으로 들어섰다.

“권 팀장!”

“오셨어요?”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권지 영이 벌떡 일어나며 이규한을 반갑 게 맞아 주었다.

“늦어서 미안. 그런데 뭘 하고 있 었어?”

탁자에 혼자 앉아서 휴대전화를 뚫 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권지영의 모 습을 떠올린 이규한이 물었다.

“평점 확인하고 있었어요.”

“9점 넘었던데?”

영화를 만든 제작자도 평점에 민감

이규한 역시 사무실을 나오기 전에 ‘수상한 여자’의 평점을 확인하고 나왔던 참이었다. 그래서 넌지시 알 려 주자, 권지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 작품 말고요.”

“그럼?”

“‘광안리’의 평점을 확인하고 있었 어요.”

이규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면대결을 펼쳤던 ‘수상한 여자’ 와 ‘광안리’.

그렇지만 대결의 승패는 이미 기운 상태였다.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수상한 여자’가 ‘광안리’에 압승을 거두었 다.

‘수상한 여자’가 900만 관객을 돌 파하면서 천만 관객 동원이 확실시 되고 있는 반면,‘광안리’는 관객들 의 혹평과 함께 재미없다는 입소문 이 퍼지면서 현재까지 누적 관객수 가 170만 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좌석 점유율이 낮은 탓에 상영관이 현저히 줄어든 상태.

200만 관객을 돌파하는 것조차 어 려울 거라는 예상이 나오는 것이 ‘광안리’가 처한 비참한 현실이었다.

1억 관객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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