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화
우리가 가오는 있잖아 ‘이제 끝났다!’
뉴욕까지 직접 날아가서 ‘나성에 가거든’을 삽입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계약을 마치고 돌아 온 순간,퍼뜩 든 생각이었다.
‘수상한 여자’라는 작품을 위해서 자신이 할 일을 마쳤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규한은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동창회
에 참석하기로 했다.
마음이 맞는 대학 동창들이 일 년 에 한 번씩 모여서 가벼운 술자리를 가지는 동창회.
이규한은 가능하면 동창회에 빠지 지 않으려고 애썼다.
우선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 었고, 모두 영화와 관련된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는 터라 얘기도 잘 통했 다. 그리고 대학 동창들과 만나 영 화를 주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 누다 보면,영화계의 최신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그렇지만 이전의 이규한은 꾸준히 동창회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아마 이 무렵부터였을 거야!’
예전 이규한은 바쁘다는 핑계로 불 참했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존감이 하락했던 것이 불참의 원 인이었다.
영화 제작사 레드문 엔터테인먼트 를 세우고 야심차게 제작해서 세상 에 내놓았던 첫 작품인 ‘그때,우 리’.
개봉만 하면 무조건 흥행할 것이라 믿었던 이규한의 확신은 빗나갔다.
‘그때,우리’가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거두고 난 후,영화 제작자 이규한은 패기와 자신감을 동시에 잃어버렸다. 그리고 자신감 을 잃어버리자,자꾸 주변의 시선에 신경이 쓰였다.
“새끼,혼자 잘난 척은 다 하더니 별것도 없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앞에서 는 괜찮다고 위로하지만,뒤에서는 이렇게 수군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지인들과의 만남을 피하게 됐고,동창회 모임에 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불참했던 것이었다.
“내가 범했던 가장 큰 실수 중 하 나야.”
이규한이 자책했다.
한차례 실패한 인생을 경험하고 나 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처럼 남 의 일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그러니 남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
각오를 다진 이규한이 동창회 모임 이 열리는 논현동의 삼겹살집으로 찾아갔다.
동창회 모임 시작 시간은 저녁 7 시.
중간에 길을 한번 헤맨 탓에 이규 한은 약속 시간보다 10분가량 늦게 도착했다.
“어,규한이 왔다!”
이규한이 약속 장소로 들어선 것을 발견한 조상훈이 번쩍 손을 들었다.
“이규한, 이게 얼마만이야!”
“요새 얼굴 좋다.”
“잘나가는 피디는 어디가 달라도 다르네.” “야! 이제 피디 아니라 대표라고 불러. 이규한,제작사 대표된 것 몰 라?”
이규한을 향해 대학 동창들이 한마 디씩 던졌다.
낯익은 얼굴들을 오랜만에 마주한 이규한이 환하게 웃었을 때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장준경이 타박했다.
“겨우 십 분밖에 안 늦었다.”
“겨우 십 분? 혹시 주인공이라서 일부러 늦은 것 아냐?”
“무슨 소리야?”
“‘과속 삼대 스캔들’에 ‘청춘,우리 가 가장 빛났던 순간’까지. 요새 제 일 잘나가는 제작자라서 일부러 늦 게 온 것 아니냐고?”
“그런 게 아니라 길을 헤댔어.”
이규한이 변명했지만,그 변명이 통할 리 없었다.
“됐고. 늦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벌주라도 마시라고?”
“에이,요새 누가 촌스럽게 벌주를 권해?”
“그럼?”
“한턱 쏴!”
장준경이 선창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둣이 다른 동창들도 입 을 모아 소리쳤다.
“한턱 와! 한턱 쏴!”
‘짰네!’
자신이 도착하기 전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아챈 이규한이 쓰게 웃으 며 대답했다.
“알았다. 내가 1차 쏠게.”
요란한 환호성이 터져 나온 후,그 제야 장준경이 자리를 권했다.
“자,앉아.”
장준경이 자신의 옆자리를 권한 순 간,조상훈이 불만을 토로했다.
“야,내 옆자리도 비었잖아.”
“어허,찬물을 마실 때도 순서가
있는 법이다.”
“무슨 순서가 있다는 거야? 동갑 주제에.”
“엄연히 내가 생일이 빠르거든. 나 3월생이다.”
장준경의 생일이 빠르다는 것을 알 고 있는 조상훈이 분한 표정으로 입 을 다물었다.
“자,얼른 앉아.”
“그래.”
“일단 한 잔 하자.”
이규한의 도착과 함께 본격적인 술 자리가 시작됐다. 그리고 대학 시절 의 추억을 더듬던 대화는 이내 김기
현에게로 향했다.
“야,그런데 기현이는 왜 안 왔 어?”
누군가의 물음에 조상훈이 되물었 다.
“개가 여기 오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니냐?”
“무슨 소리야?”
“신분이 다른데 우리랑 겸상하겠 어? 그나마 규한이 정도는 돼야 억 지로 만나 주는 거지.”
“이야,인도보다 더하면 더하지,덜 하진 않네. 내가 대한민국에 만연한 신분제를 고발하는 영화 한 편 제작
할까?”
양태출이 울분에 찬 목소리를 토해 낸 순간,조상훈이 찬물을 끼얹었다.
“그 소재로 투자 받을 자신 있냐?” “그야… 없지.”
“그럼 조용히 입 다물자.”
“알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을 때였다.
“참,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김기현이랑 서지연,둘이 사권대.” 조상훈이 꺼낸 말을 들은 이규한이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멈칫 했다.
“야,확실한 정보야?”
“확실해.”
“그게 사실일 리 없어. 빨리 사실 이 아니라고 말해.”
양태출이 벌떡 일어나서 조상훈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그렇지만 조상훈은 자신의 말을 정 정하지 않았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는 법이지.”
“진짜구나.”
“그렇다니까.”
양태출이 충격 받은 표정으로 주저 앉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양태출이 소주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그 걸로는 부족한 둣 물컵에 소주를 들 이붓고는 단숨에 비웠다.
“내 짝사랑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 나다니.”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양태출의 표정이 이내 비장하게 바뀌었다.
“오늘부로 김기현을 내 적으로 규 정한다!”
양태출이 출사표를 던졌지만,이번
에도 조상훈이 찬물을 끼얹었다.
“과연 기현이가 널 무서워할까?”
“그야……
“어쩌면 네 존재도 모를 수도 있 어.”
“끄응!”
양태출이 반박하지 못하고 분한 표 정으로 신음성을 내뱉었을 때,장준 경이 이규한에게 물었다.
“넌 둘이 사귀는 걸 알고 있었어?” “아니,나도 몰랐어.”
김기현이 서지연을 좋아한다는 것 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 이 사귄다는 이야기는 이규한도 방
금 처음 들었다.
“지연이 참 인기 많았었는데. 결국 기현이랑 사귀는구나. 역시 금수저 물고 태어난 놈은 못 이기는 건가?”
장준경이 씁쓸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었다.
이규한도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 갔다.
‘쓰네!’
서지연과 김기현이 사귄다는 소식 을 접하고 나자,기분이 묘했다.
‘이런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
이렇게 각오를 했음에도,막상 현 실이 되니 충격이 밀려들었다.
그때 였다.
“딴 얘기 하자.”
장준경이 화제를 돌렸다.
이규한도 내심 바라던 바였기에 입 을 됐다.
“요새 준비하는 작품은 없어?”
“준비 중인 작품 있지.”
“뭔데?”
장준경이 대답했다.
“‘베테랑들’이란 작품이야.”
‘준경이가 준비 중인 작품이 ‘베테 랑들’이라고?’
장준경이 내밀고 있는 빈 잔을 채
워 주기 위해서 소주병을 들어 올렸 던 이규한이 움찔하며 멈추었다. 그 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달라!’
이규한이 기억하고 있는 영화 ‘베 테랑들’은 2015년에 개봉했었다. 그 리고 ‘베테랑들’의 제작자도 달랐다.
이규한의 기억 속 ‘베테랑들’의 제 작자는 영화사 월광의 대표인 김우 주였다.
‘달라진 건 이것만이 아냐!’
이규한이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당장 ‘과속 삼대 스캔들’도 이규한 의 기억과는 다른 점이 존재했다.
바로 개봉일자가 다르다는 것이었 다.
그리고 ‘과속 삼대 스캔들’만이 아 니었다.
김기현이 이끄는 스카이 엔터테인 먼트에서 제작 중인 영화 ‘광안리’ 의 개봉 시기 역시 달라진 것은 마 찬가지 였다.
이규한이 기억하고 있는 개봉 시기 보다 약 2년가량 앞당겨서 ‘광안리’ 의 개봉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 기억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규한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였다.
“왜 그래?”
장준경이 의아한 시선을 던지며 물 었다.
“응?”
“왜 술을 따르다가 말아?”
“잠깐 딴생각 했어.”
“자식. 싱겁긴. 얼른 술 따라 줘.”
“알았다.”
이규한이 다시 술을 따를 때,장준 경이 말했다.
“내가 왜 옆자리에 널 앉히겠다고 고집을 피운 줄 알아?”
“무슨 조언?”
“잘나가는 피디이자 제작자는 뭐가 달라도 다를 것 아냐. 동기 좋은 게 뭐냐? 조언 좀 해 줘.”
장준경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부탁 했다.
“무슨 고민이 있는데?”
“아까 내가 ‘베테랑들’이란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남 자 주인공의 캐릭터가 명확하게 잡 히지를 않아. 아,참,내가 ‘베테랑 들’이 어떤 작품인지에 대해서 아직 설명도 안 했구나. 미안. 내가 너무
마음이 급해서 실수했네. ‘베테랑들’ 이 어떤 이야기나면……
“잠깐만.”
“왜?”
“최대한 짧게 요약해.”
이규한이 장준경에게 부탁했다. 솔직히 말하면 굳이 설명이 필요하 지 않았다.
이미 ‘베테랑들’이란 작품의 주요 내용을 대략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그러나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최대한 짧게 요약해서 설명 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내가 이 작품은 기획하기로 결심 한 계기는 우연히 신문에서 기사를 본 것이었어. 재벌 3세들의 오만방 자한 갑질에 대해서 다룬 기사였는 데……
장준경이 설명을 마친 순간,이규 한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한의 기억 속 ‘베테랑들’과 방 금 장준경이 설명한 ‘베테랑들’.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았다.
아직 초고 단계이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큰 틀에서는 흡사했다.
잠시 후, 이규한이 손가락을 동그 랗게 말며 말했다.
“우리가 이건 없지만,가오는 있잖 아.”
영화 ‘베테랑들’에 등장했던 대사. 그리고 이규한은 이 대사만큼은 토 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 다.
“돈은 없지만,가오는 있다?”
장준경이 술잔을 매만지며 그 말을 되뇌었다.
“적대자인 재벌 3세는 돈이 많다. 그렇지만 우리 주인공은 돈이 없다. 그래도 양심과 가오는 있다. 이거 맞아?”
“맞아.” 이규한이 대답한 순간,장준경이 두 눈을 빛냈다.
“마치 안개가 낀 도로 위에서 운전 하는 것처럼 흐릿하기만 했었는데, 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시야 가 확 트이면서 막연했던 게 명확해 진 느낌이야.”
장준경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 그가 이규한에게 새삼스런 시 선을 던졌다.
“역시 다르긴 다르네.”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해 본 게 다야.”
“고맙다. 이 빚을 어떻게 갚지?”
“안 갚아도 돼.”
“야,그건 아니지.”
잠시 고민하던 장준경이 다시 입을 뗐다.
“요새 준비하는 작품 없어?”
“준비하는 작품? 있지. 그런데 그 건 왜 물어?”
“어떤 작품인지 알려 줘 봐.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장준경이 제안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