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화
그 노래 (1)
이규한이 알고 있는 미래에서 개봉 했던 ‘수상한 여자’.
영화도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영 화에 삽입됐던 노래들 역시 많은 사 랑을 받았다.
OST 앨범 역시 발매되어 당시로 는 이례적일 정도로 많은 수익을 올 렸었고.
당시 ‘수상한 여자’의 음악 감독으
그리고 이규한은 황세운이 했던 인 터뷰 내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 다.
- ‘수상한 여자’는 저에게도 무척 의미 있는 작품이자 작업이었습니 다. 작품에 어울리는 음악을 선정하 면서 무척 고심했고,편곡에도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런 제 노력의 결과물들을 좋아해 주셔 서 무척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그렇 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 입니다. 이번 작품에 꼭 사용하고 싶었던 음악이 있었는데,시간상의
제약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사 용하지 못했었거든요.
그 인터뷰를 읽고 난 후,황세운 감독이 사용하지 못했던 음악이 무 엇인지 무척 궁금했었다. 그리고 이 규한은 당시에 해결하지 못했던 호 기심을 풀기 위해서 황세운을 만나 러 찾아갔다.
음악감독 황세운.
그는 충무로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음악감독이었다.
황세운의 가장 큰 장점은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음악을 작곡 하거나,선곡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규한은 ‘수 상한 여자’를 준비하면서 일찌감치 황세운과 음악감독 계약을 맺었다.
이규한이 허름한 건물 반지하에 위 치한 그의 작업실로 찾아갔을 때, 황세운은 ‘수상한 여자’의 시나리오 를 읽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읽고 계셨군요.”
“네,시나리오를 읽고 분석하는 것 이 영화음악의 기본이니까요.”
황세운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물 “어떻습니까?”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까 분석을 하셨다고 했으니 질 문을 드린 겁니다. ‘수상한 여자’라 는 작품이 홍행할 것 같습니까?”
“모르겠습니다.”
황세운이 대답한 순간,이규한이 다시 질문했다.
“모르겠다? 시나리오가 재미가 없 습니까?”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것이 아닙 니다. 아까 제가 분석을 한다고 말 씀드렸지만, 대표님이나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분석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음악적으로만 접근하니까요.”
일리가 있는 대답이라고 판단한 이 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그럼 다른 질문을 드려야겠네요. 혹시 시나리오를 보고 나신 후에 이 거다 하고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습 니까?”
“네,있었습니다.”
“어떤 노래입니까?”
“‘파란 나비’와 ‘그곳에서’라는 곡 들입니다.”
황세운의 대답이 돌아온 순간,이
규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한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수 상한 여자’에 삽입된 노래들.
황세운이 방금 꺼냈던 두 곡이 맞 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규한이 내심 원했 던 대답이 아니기도 했다.
“혹시… 다른 곡이 떠오르지는 않 았습니까?”
그래서 이규한이 재차 묻자,황세 운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당신이 한 인터뷰를 봤으니까!’ 이규한이 진짜 이유 대신 다른 대 답을 꺼냈다.
“그냥 제 느낌입니다. 감독님이 말 씀하시는 도중에 어딘가 아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거든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수상한 여자’의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이거다 싶은 노래가 한 곡 떠올랐습니다.”
“어떤 노래입니까?”
“‘나성에 가거든’이라는 노래입니 다.”
“‘나성에 가거든’이요?”
이규한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지만 ‘나성에 가거든’이라는
노래 제목은 머릿속에 없었다.
또,들어본 기억도 전혀 없었다.
이규한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확 인한 황세운이 제안했다.
“직접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러도록 하죠.”
이규한이 수락하자마자,황세운이 작업실의 기기를 조작했다.
잠시 후,‘나성에 가거든’이라는 노 래가 홀러나오기 시작했다.
두 눈을 감은 채 가사에 귀를 기 울이던 이규한의 심장이 거세게 뛰 기 시작했다.
‘이거다!’ ‘나성에 가거든’이라는 노래를 듣 는 것.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듣는 순 간,이 노래라는 확신이 섰다.
특히 가사가 마음에 들었다.
‘수상한 여자’의 여주인공은 젊은 시절 남편을 이역만리 타국으로 떠 나보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타국으로 떠났던 남편은 다시 한국 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 후로 여주인공은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혼자 몸으로 자식을 키웠었다.
이런 여주인공의 사연과 ‘나성에 가거든’의 가사.
정확히 매치되는 느낌이었다.
“좋네요.”
이규한이 감상평을 남기자,황세운 이 웃으며 대답했다.
“대표님도 음악에 대한 감각이 있 으시네요.”
황세운에게서 칭찬을 받았지만,이 규한은 환하게 웃지 못했다.
결국 ‘나성에 가거든’이라는 노래 는 ‘수상한 여자’의 OST로 삽입되 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감독님,그런데 왜 아까 ‘나성에 가거든’이라는 곡은 후보군에서 제 외하셨던 겁니까?”
“그건 문제가 좀 있기 때문입니 다.”
“어떤 문제입니까?”
“‘나성에 가거든’은 꽤 오래전에 발표된 곡입니다. 1970년대 초에 발 표됐죠. 작곡과 작사,그리고 노래까 지 불렀던 것은 임희영이란 가수입 니다. 그런데 임희영 씨는 약 20년 전에 사망했습니다.”
“그렇군요.”
만약 임희영이 살아 있었다면?
그녀를 찾아가서 음원을 사용할 권 리에 대한 계약을 맺으면 될 일이었 다. 그러나 이미 그녀가 사망한 후 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방법이 없는 건 아냐!’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티스트가 사망하더라도 저작권은 남기 때문이었다.
아티스트의 저작권은 사후 70년까 지 보장됐다. 그리고 아티스트가 사 망한 후에는 직계 가족에게 저작권 이 넘어가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 다.
“고인이 된 임희영 씨의 직계가족 을 만나서 ‘나성에 가거든’의 저작 권 관련 협의를 하면 되는 것 아닙 니까?”
그래서 이규한이 물었지만,황세운 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왜 쉽지가 않다는 겁니까?”
“곡의 저작권을 갖고 있는 직계 가 족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나 마 찬가지 입니다.”
황세운이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더 했다.
그의 설명을 요약하면 임희영의 직 계 가족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 거 주하고 있고,전화나 메일을 통해 연락을 여러 차례 시도해 봤지만 전 혀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 직접 찾아가서 만나는 방법 밖에 없군요.”
이규한이 말하자,황세운이 수긍했 다.
“그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런 그가 잠시 후 자신 없는 목 소리로 덧붙였다.
“그런데 과연 이번 일이 미국으로 직접 찾아갈 정도로 가치가 있는 일 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성에 가거든 ‘이란 노래가 ‘수상한 여자’에 삽입 되지 못했던 거구나!’
이규한이 품고 있었던 의문이 비로 소 해소됐다.
음악감독 황세운이 인터뷰에서 밝 혔던 시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제약 이란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나성에 가거든’이라는 노래를 영 화 ‘수상한 여자’에 사용하기 위해 서는 고인이 된 임희영의 직계가족 과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렇지만 음원 사용과 관련한 계약을 맺기 위 해서는 그녀의 직계가족이 살고 있 는 미국으로 직접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미국으로 찾아간다고 하더라 도 음원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낼 수 있을지 여부도 확신할 수 없다. 만약 음원 사용 허락을 받지 못한다면 그냥 헛걸음을 하는 것이 었다. 그럼 아까운 시간과 비용을 모두 허공에 날리게 되는 셈이었다.
‘과연 이런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나성에 가거든’이라는 노래를 ‘수상 한 여자’에 삽입할 가치가 있는 것 입니까?‘
황세운 음악감독이 던졌던 질문의 요지였다.
이 질문을 받은 순간,이규한이 가 장 먼저 떠을렸던 것은 자신만이 갖 고 있는 특수한 능력이었다.
시나리오를 집어 들면 예상 관객수 를 확인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나성에 가거든’이라는 곡을 ‘수상 한 여자’에 삽입하기 위해서 미국으 로 직접 날아갈 가치가 있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었을 터였기 때문이었 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 능력 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미 한 작품에 사용할 수 있는 일곱 번의 기회를 모두 썼기 때문이 었다.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어!’ 해서 이규한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 고 고민에 잠겼다.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좀처럼 확신이 서지 않아서 망설이 던 이규한이 잠시 후 두 눈을 빛냈 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확신이 서 지 않는다면,그만한 가치가 있도록 상황을 바꾸면 될 것이 아닌가?’
생각의 방향이 전환된 순간,이규 한은 마침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 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잠시 후,이규한이 힘주어 대답했 다.
“저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미녀는 힘들어’.
2006년에 개봉했던 영화였다.
김용운 감독이 연출했던 ‘미녀는 힘들어’는 흥행에 실패할 거란 영화 관계자들의 예상을 깨고 600만 명 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그리고 이규한이 ‘미녀는 힘들어’ 라는 작품을 떠올린 이유.
6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제작을 준비하고 있는 ‘수상한 여 자’와 ‘미녀는 힘들어’가 흡사한 점 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음악!’
이규한이 판단하는 유사점은 바로 음악이었다.
당시에 ‘미녀는 힘들어’의 흥행만 큼 주목을 받았던 것은 영화에 삽입 됐던 곡들이었다.
여주인공이 극중에서 불렀던 곡들 은 팬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영화가 개봉하고 난 후,음원사이 트 상위권에 꽤 오랫동안 머물렀을 그렇지만 김용운 감독은 훗날 술자 리에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가 아쉬움을 토로했던 이유는 음 원 수익을 거의 빼앗겼기 때문이었 다.
일전에도 말했듯이 한국 영화 산업 의 지형도는 급변하고 있었다.
영화 제작자가 오랫동안 차지했던 갑의 위치는 이제 투자 배급사가 차 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투자 배급사 들의 파워와 몸집이 커지면서,계약 과정에서도 영화 제작자들은 불리한 위치에 서 있었다.
계약을 잘못했어.” ‘미녀를 힘들어’를 연출했던 김용 운 감독이 아쉬움을 토로했던 것도 이런 부분의 연장선상이었다.
당시에는 작품에 삽입된 영화음악 의 수익에 대한 합의나 계약이 따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투자 배급사가 영화에 삽입 되면서 흥행했던 음원의 수익을 모 두 가져가 버렸던 것이었다.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계약.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아직까지도 불합리한 계약과 관련된 부분이 바
로터스 엔터테인먼트 투자팀 회의 실.
권지영 팀장이 아이스커피를 이규 한의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작품 준비는 잘돼 가시죠?”
“아직까지는 특별한 문제 없이 순 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인데요.”
환하게 웃던 권지영이 다시 물었 다.
“천만 영화가 될 거라는 확신,여 전히 변함없으신 거죠?”
이규한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대답 했다.
“아슬아슬해.”
“네?”
“천만 영화 언저리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거든.”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