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72화 (72/272)

72화

왜 안 떠오르지?

하암!

강형진 감독이 입을 가린 채 크게 하품했다.

그의 눈 밑에 다크 서클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한 이 규한이 입을 뗐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집에 무 슨 일이 있습니까?” “집에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제가 요새 피곤한 이유는 임 배우 때문입 니다.”

“임 인권이요?”

“네,이번 작품의 캐스팅 분석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수시로 저를 찾 아와서는 괴롭히고 있습니다.”

임인권이 괴롭힌다고 말하면서도 강형진 감독은 싫은 기색이 아니었 다.

작품에 임하는 배우의 열정적인 태 도를 싫어할 감독은 없기 때문이었 다.

“몰랐습니다. 임 배우가 이렇게 열

정적인 배우였는지.”

강형진 감독이 말한 순간,이규한 이 웃으며 입을 뗐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복수심이요.”

임인권이 열정적인 배우로 거듭난 이유에 대해서 이규한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설명을 모두 들은 강형진 감독 이 환하게 웃었다.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어쨌든 우 리 작품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네 요.” “그렇습니다.”

이규한이 대답한 순간,강형진 감 독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입을 뗐 다.

“저도 의욕이 솟습니다.”

“감독님도요?”

“네. 이 기사 때문에요.”

강형진 감독이 백팩에서 출력한 기 사를 꺼내서 내밀었다.

〈‘과속 삼대 스캔들’과 ‘써니 걸즈’ 로 상종가를 친 강형진 감독의 상승 세는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기사의 내용은 부정적이었다.

후속작으로 ‘수상한 여자’를 택한 강형진 감독이 ‘광안리’를 비롯한 대작 영화들에게 밀릴 것이라는 결 론을 내렸으니까.

“이 기자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라고 표현했더군요. 그래서 다윗 이 골리앗을 이기는 기적을 재현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일단 분위기는 좋네!’

이규한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주연배우에 이어 감독까지.

모두 의욕을 불태우면서 작품에 임 하고 있는 만큼,분위기가 나쁠 수

가 없었다.

“저도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조연 캐스팅에 대해 논의해 볼까요?”

“그러시죠.”

조연 캐스팅에 대한 논의.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제작자인 이규한과 감독인 강형진 의 의견 차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약 한 시간 후,캐스팅 제의를 넣 을 조연 배우들의 리스트가 정해졌 다.

“감독님,저녁 식사를 겸해서 술 한잔하시 겠습니까?” 이규한이 제안했다.

그렇지만 강형진 감독은 아쉬운 표 정으로 제안을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습니다.”

“누구와 선약이 있습니까?”

“아까 말씀드렸던 열정적인 임 배 우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겠 습니다.”

강형진 감독이 먼저 일어섰다.

혼자 남겨진 이규한이 가방에서 ‘수상한 여자’의 시나리오 책을 꺼 냈다. 그리고 펜을 들어 주조연급 배우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 넣기 시작했다.

‘막바지!’

시나리오 작업은 이미 진즉에 끝난 상황.

감독과 주연 배우 캐스팅도 마무리 되었고, 이제 조연 캐스팅만 끝나면 ‘수상한 여자’는 큰 틀에서 촬영만 남겨 두는 상황이었다.

후우.

이규한이 긴장을 풀기 위해서 긴 한숨을 내쉬며 ‘수상한 여자’의 시 나리오 책을 집어 들었다.

‘얼마나 바뀔까?’

잠시 후, 이규한의 표정이 일그러 졌다.

‘왜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 거지?” 서둘러 커피전문점을 나온 이규한 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김미주는 이미 퇴근한 지 오래.

책상 앞에 앉은 이규한이 가방에서 ‘수상한 여자’의 시나리오 책을 꺼 냈다.

자세를 바로 한 이규한이 신중한 기색으로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들었 다.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은연중에 가졌지만, 헛된 기대였다.

역시 눈앞에 숫자는 떠오르지 않았 다.

‘수상한 여자’의 시나리오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이규한이 서랍을 열 었다.

커피전문점을 나와서 사무실로 찾 아온 이유.

다른 시나리오 책을 통해 확인할 것이 있어서였다.

‘스파이들’.

이규한이 배정훈 감독이 쓴 시나리 오 책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야!”

눈앞에 숫자가 떠오르는 것을 확인 한 이규한이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시나리오 감정이라는 특수한 능력 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님을 확인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스파이들’ 시나리오 책을 내려놓 은 이규한이 팔짱을 꼈다. 시나리오를 집어 들었을 때, 눈앞

에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 현상.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한차례 이런 경험이 있었 다.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을 제작할 당시,시나리오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숫자가 떠오르지 않았었 다.

당시에는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 이 유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워낙 경황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었 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눈앞에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 이유

와 원인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시나리오 감정이란 능력을 제대로 사용한 건,‘과속 삼대 스캔들’을 제 작할 때가 처음이었어.”

이규한이 빈 종이를 꺼냈다.

‘과속 삼대 스캔들’을 제작하는 과 정에서 하나씩 단계를 거칠 때마다, 이규한은 시나리오 감정을 했던 결 과를 적어두었었다.

- 4,582,546.

- 5,083,825.

- 5,221,004.

- 6,212,349.

- 6,523,457.

- 6,816,577.

- 7,352,234.

당시에 도출됐던 결과를 이규한이 빈종이 위에 옮겨 적었다.

“다음은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 던 순간’이었어.”

이규한이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 던 순간’의 시나리오 책을 꺼내서 당시 기록했던 숫자들을 찾아냈다.

- 983,569.

- 1,229,876.

- 1,827,236.

- 2,015,589.

- 1,054,897.

- 2,015,589.

- 2,129,875.

역시 빈종이 위에 결과들을 옮겨 적은 이규한이 마지막으로 ‘수상한 여자’의 시나리오 책을 꺼냈다.

- 2,235,897.

- 9,134,725.

- 9,225,498.

- 9,858,754.

- 10,121,457.

- 9,670,043.

- 10,713,998.

‘과속 삼대 스캔들’과 ‘청춘,우리 가 가장 빛났던 순간’,그리고 ‘수상 한 여자’까지.

세 작품의 감정 결과를 빈종이 위 에 모두 옮겨 적은 이규한이 팔짱을 꼈다.

“달랐어!”

‘과속 삼대 스캔들’을 제작할 당시 에는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반면,‘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과 ‘수상한 여자’를 제작할 때 는 눈앞에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 상 황이 발생했다.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이것이었다.

“왜 차이가 날까?”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해 보았지만, 답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고개를 흔든 이규한이 생각의 방향을 바꾸 었다.

이규한이 다시 감정 결과를 옮겨 적었던 종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공통점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 리지 않았다.

“모두 일곱 번이었어!”

빈종이 위에 적혀 있는 각 작품들 의 감정 결과.

모두 일곱 개씩이었다.

“혹시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일곱 번까지인가?”

순간 이규한의 머릿속을 퍼뜩 스치 고 지나간 생각이었다.

‘각 작품별로 일곱 번!’

시나리오 감정 결과가 적혀 있는

개수였다.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과 ‘수상한 여자’의 시나리오 책을 집 어 들었을 때,눈앞에 숫자가 떠오 르지 않은 이유.

작품별로 일곱 차례가 가능한 횟수 를 넘겼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규한은 이내 고개를 갸웃 했다.

‘과속 삼대 스캔들’을 제작할 때는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이내 그 이유도 간파해 내는데 성공했다.

‘일곱 번만 감정했어!’

- 7,352,284.

‘과속 삼대 스캔들’의 일곱 번째이 자 마지막 감정 결과였다. 그리고 감정 결과는 ‘과속 삼대 스캔들’의 최종 관객수와 일치했다.

“이거 였어!”

마침내 자신이 가진 시나리오 감정 이라는 능력의 비밀에 대해서 파악 하는 데 성공한 이규한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시나리오 감정이란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다행이란 감정도 동시에 들었다.

시나리오 감정이라는 능력의 비밀 과 한계에 대해서 늦게라도 명확하 게 알게 된 것.

무척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 감정 능력의 한계에 대해 알게 됐기 때문에 앞으로 능력을 허 비하지 않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 용할 방법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었 다.

“다시 깜깜이 선거 기간에 돌입했 네!” 이규한이 이내 아쉬운 기색을 드러 냈다.

- 10,713,998.

‘수상한 여자’의 마지막 감정 결과 였다.

이정욱 대신 임인권을 남자 주인공 으로 캐스팅했을 때의 예상 관객수.

그리고 ‘수상한 여자’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이미 일곱 차례의 감정을 거쳤으니,더 이상 감정을 한다 해 도 예상 관객수는 보이지 않을 터였 다.

아직 ‘수상한 여자’의 개봉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만큼,개봉 전에 어떤 변수가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꼭 천만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이규한이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 한 채 ‘수상한 여자’의 시나리오 책 을 바라보았다.

다음 날 아침.

사무실 문을 열고 출근했던 김미주 가 이미 사무실에 나와 있는 이규한

을 발견하고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출근하셨어요?” 이규한이 대답했다.

“출근을 일찍 한 게 아니라,퇴근 을 안 했어.”

“갑자기 왜 열심히 일하는 척하시 는 건데요?”

“열심히 일해야 할 이유가 생겼거

드 ”

“그 이유가 뭔데요?”

“시나리오를 들어 올리면 예상 관 객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한동안 사용할 수 없게 됐거든.”

이규한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김미주는 이번에도 그 말 을 순순히 믿지 않았다.

“전에 내가 말했던 정신과 의사 명 함,아직 갖고 있는데 드릴까요?”

“필요없거든.”

“마음 바뀌면 언제든지 말씀하세 요.”

그 말을 끝으로 김미주가 책상 앞 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일할 준비를 하던 김미주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 했다.

**음으으음 으으음 "

그 콧노래를 듣던 이규한이 물었

다.

“미주 씨,기분 좋은 일 있어?”

“물론 있죠.”

“뭔데?”

“머잖아 인센티브 받을 거잖아요.”

“인센티브?”

“저한테 제작사 수익의 1%를 주기 로 했던 것,기억하시죠? ‘수상한 여자’가 개봉해서 천만 관객을 돌파 하면 저도 목돈을 만질 수 있을 테 니 어떻게 기분이 안 좋을 수 있겠 어요?”

비로소 말뜻을 이해한 이규한이 대 답했다.

“‘수상한 여자’가 천만 관객을 동 원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라.”

“전에는 무조건 천만 영화 만들 거 라면서요.”

“내가 그랬어?”

“네,그런데 갑자기 왜 말이 바뀌 었어요?

“그게……

“그러지 마세요. 대표님의 유일한 매력이 근자감에 가까운 자신감이었 거든요. 그런데 유일한 매력까지 잃 어버리면 평생 혼자 살 수도 있어 요.” “악담을 퍼붓는 거야?” “악담이 아니라 조언이죠. 그리고 밤새서 피곤해 보이니까 일찍 집에 들어가서 쉬세요.”

“내가 피곤해 보여?”

“네,아주 많이요.”

김미주의 추측은 틀렸다.

이규한이 피곤한 이유는 밤을 새서 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개봉 전에 ‘수상한 여 자’가 더 많은 관객을 불러들일 수 있도록 만들 방법을 찾기 위해서 머 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민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반박하기도 귀찮았다.

해서 이규한이 소파에 등을 깊숙이 묻고 눈을 감았을 때였다.

“으으으음. 음음음!”

김미주가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 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콧노래에 귀를 기울이 던 이규한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거 노래는 아니지?”

“노래 맞거든요. 우리 할머니가 제 일 좋아하셨던 노래에요.”

“그래? 제목이 뭔데?”

“제목이 뭐였더라?”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던 김미주 가 결국 포기했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나네요.”

“그래? 어쨌든 진짜 노래가 맞긴 했구나.”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이규한이 잠시 후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래. 노래다!”

1억 관객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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