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66화 (66/272)

66 화

이규한이 말을 마친 후,박한정 작 가의 반응을 살폈다.

선뜻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걸까.

그는 캐리어에 옷을 정리하던 것을 멈추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기다리자!’

박한정 작가 입장에서는 인생의 행 보가 송두리째 바낄 수도 있는 중요

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이규한이 재촉하지 않고 기 다리고 있을 때였다.

“이규한 대표님이시죠?”

마침내 박한정 작가가 긴 침묵을 깨트렸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박한정 작가가 워낙 적의를 드러냈 던 터라 이규한에게는 명함을 건넬 기회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박한정 작가는 이규한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까 말씀하셨던 ‘과속 삼대 스캔 들’과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 간’. 두 작품 모두 인상 깊게 봤습 니다. 그래서 영화 정보를 확인해서 이규한 대표님의 이름을 알아냈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우선 시간입니다. 저도 이제 나이 가 적지 않습니다. 이대로 더 시간 이 흐르면 작가로서 실패하고 다른 일을 시작할 기회조차 없을 것 같다 는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 년 안에 승부를 보고 싶 습니다.”

이규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한정 감독의 절박함이 이해가 갔 기 때문이었다.

‘삼 년이라.’

삼 년이란 시간.

짧다면 짧고,길다면 긴 시간이었 다.

“정확히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말 씀해 주시겠습니까?”

이규한이 다시 묻자,박한정 감독 이 대답했다.

“삼 년 안에 입봉해서 영화감독 타 이틀을 얻고 싶습니다. 만약 삼 년 안에 감독으로 입봉하지 못한다면 계약에서 풀어 주십시오.”

“네?”

“이따 계약서를 쓸 때 명시하도록 하죠. 만약 삼 년 안에 입봉을 못 하더라도 계약은 종료되는 것으로 말입니다.”

일단 조건을 내걸기는 했지만,그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었기 때문일까.

이규한이 고민하지 않고 대답하는 것을 확인한 박한정 작가는 살짝 당 황한 기색이었다.

“대체 왜 제 조건을 수용해 주시는 겁니까?”

“박한정 작가님의 사정을 들었으니 까요.”

“그렇지만… 손실 비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박한정 작가에게 계약금을 주 고 감독 계약을 맺은 후에, 삼 년 내에 박한정 작가가 입봉을 못 한다 면?

이규한은 계약금을 날리게 될 터였 고,이 비용은 고스란히 회사의 손 실 비용이 될 터였다. 그리고 박한 정 작가가 방금 던진 질문에는 계약 금이 손실 비용이 될 가능성이 있는 데 왜 조건을 수락했느냐는 의구심 이 담겨 있었다.

“저도 압니다.”

“그런데 왜……?”

“손실 비용을 만들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삼 년 안에 박한정 작가 님에게 영화감독 타이틀을 안겨 드 릴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규한이 힘주어 답한 순간, 박한 정 작가가 침을 꿀끽 삼켰다.

그때, 이규한이 다시 물었다.

“아까 두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나머지 하나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영화감독 입봉작의 각본은 제가 쓰겠습니다.” 남이 쓴 시나리오를 연출만 하는 것은 싫다.

내가 쓴 시나리오를 갖고 연출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이건 오히려 내가 바라던 바야!’ 이규한이 속으로 웃었다.

박한정 작가의 장점.

선 굵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잘 쓰 는 능력이었다.

연출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워낙 시나리오가 탄탄하기 때문에 감독으 로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었다.

“그 조건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이규한이 재차 확인해 주었지만, 박한정 작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너무 쉬워서 이상합니다.”

홈……?"

“제가 경험했던 계약 관련 대화는 이렇게 쉬웠던 적이 한 번도 없었거 든요. 이런저런 조건들을 갖다 붙이 느라 서로 감정이 상했었는데.”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 리는 박한정 작가를 살피던 이규한 이 입을 뗐다.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역시… 조건이 있군요.”

“그렇지만 박한정 작가님에게 절대 해가 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뭡니까?”

이규한이 입을 뗐다.

“박 작가님, 저 믿고 일 하나 하시 삼 년 내에 박한정 작가를 영화감 독으로 입봉시키지 못하면, 아무런 조건 없이 계약을 해지한다.

그 전에 ‘스파이들’의 각색 작업을 해 달라.

단,‘스파이들’이라는 작품의 각색 작업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삼 년 이란 시간 안에 포함시킨다.

이규한이 내걸었던 조건이었다.

박한정 작가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상황.

“꼭 뭔가에 홀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흔쾌히 수락하던 박한정 작 가가 꺼냈던 말이었다.

그만큼 이규한이 했던 제안이 마음 에 쏙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이규한 역시 박한정 작가 와의 계약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일석이조!’

박한정 작가와 계약한 순간,이규 한이 떠올린 사자성어였다.

‘스파이들’의 각색을 적임자에게 맡기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박한정이라는 좋은 감독과 계약까지 맺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삼 년이란 계약 기간이 짧은 편이었지만,이규한은 박한정 작가 를 삼 년 내에 감독으로 입봉시킬

그리고 호재는 이게 다가 아니었 다.

두 가지 호재가 더 있었다.

우선 ‘써니 걸즈’가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폭발적인 시사회 반응에 힘입어 예 매율 1위에 올랐던 ‘써니 걸즈’는 마침 불어닥친 복고 열풍을 타고 박 스오피스 1위를 줄곧 지키고 있었 다.

이미 오백만 관객을 돌파한 상황.

조심스럽긴 하지만,천만 관객을 동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리고 ‘써니 걸즈’의 흥행은 이규 한의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었다.

‘과속 삼대 스캔들’에 이어 ‘써니 걸즈’까지.

두 작품을 잇따라 흥행 성공시킨 강형진 감독은 충무로에서 가장 핫 한 감독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모든 제작자들이 계약을 하고 싶어 서 안달이 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강형진 감독의 차기작.

바로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준 비 중인 ‘수상한 여자’였다.

강형진 감독의 인지도가 올라가고 팬층이 두터워지는 것은 ‘수상한 여 자’의 흥행에도 분명히 도움이 될 터였다.

또 하나의 호재는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의 정산금이 입금 됐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이네!”

택시에서 내린 이규한이 동네를 둘 러보았다.

익숙한 동네의 풍광이 이규한의 시

선을 사로잡았다.

자주 들렀던 피시방과 당구장,가 족들과 함께 외식했던 식당들,그리 고 산책 삼아 자주 거닐었던 공원까 지.

추억이 담긴 장소들.

그렇지만 이규한이 예전에 살던 동 네를 찾아온 것은 무척 오래간만이 었다.

아픈 기억 때문에 이 동네를 다시 찾아오는 것이 꺼려졌었기 때문이었 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이규한이 부동 산을 발견하고 걸음을 옮겼다.

딸랑.

이규한이 부동산 사무실로 들어서 자,화장을 옅게 한 40대 중반 정도 로 보이는 여사장이 반갑게 맞아 주 었다.

“원룸 찾아요?”

“아니요.”

“그럼 오피스텔?”

이규한을 미혼의 직장인이라고 판 단한 여사장이 질문을 던졌다.

“아파트를 사려고 합니다.”

주거용 원룸이나 오피스텔을 구하 러 온 게 아니라,아파트를 사기 위 해서 찾아왔다고 밝히자 여사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파트를요?”

부동산 시장이 불황이란 뉴스가 쏟 아지고 있는 상황.

이규한에게서 돈 냄새를 맡은 여사 장이 두 눈을 빛냈다.

“대산 아파트를 사고 싶습니다.”

“왜 하필 대산 아파트에요? 요새 새로 지은 아파트들도 근처에 많이 생겼는데.”

“대산 아파트를 사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요?”

“약속을 했었거든요.” 이규한이 대답한 후 괜한 말을 했 다고 자책했다.

항상 가슴속에 커다란 짐이었던 숙 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찾아온 터라, 이규한도 조금 흥분한 상태였다.

그래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 셈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규 한이 꺼낸 말을 여사장은 이해한 기 색이 아니었다.

그에 대해 더 설명하는 대신,이규 한이 다시 물었다.

“혹시 대산 아파트 2단지에 매물이 있습니까?”

“대산 아파트 2단지? 잠깐만 기다

려 봐요.”

여사장이 컴퓨터 앞에서 검색을 한 후 말했다.

“대산 아파트 2단지에는 현재 매물 이 없어요. 대산 아파트 1단지와 3 단지에는 급매로 나온 매물이 있어 요.”

“그래요?”

대산 아파트 2단지에 매물이 없다 는 소식을 들은 이규한이 아쉬운 기 색을 애써 감추며 다시 물었다.

“아파트 가격은 얼마나 합니까?”

“요새 매매가는……

여사장이 알려 준 매매가를 들은

이곳을 찾아오기 전,이미 인터넷 으로 대산 아파트의 시세를 알아보 고 온 후였다.

인터넷으로 미리 알아봤던 매매가 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규한이 계산을 시작했다.

‘규리에게 맡겼던 이억에 이번 정 산금까지 합하면……

현재 대산 아파트 매매가보다 일억 정도 자금에 여유가 있다는 계산을 마친 이규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알겠습니다.”

“굳이 대산 아파트 2단지여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입지나 교통편은 3 단지가 더 나은 편인데.”

여사장이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 지 못하고 말을 꺼냈지만,이규한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곧 다시 들르겠습니다.”

대산 아파트 2단지 203동 703호. 703호 앞에 도착한 이규한이 잠시 망설이다가 벨을 눌렀다.

딩동. 딩동.

“누구세요?” 철컥.

문이 살짝 열리고 30대 중반의 여 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규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 제 명함입니 다.”

“네? 네.”

엉겁결에 명함을 건네받은 여성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우리 집에는 무슨 일로……?”

“실은 제가 예전에 여기서 살았습 니다. 그리고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제안을 하나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제안… 이요?” 낯선 방문자의 등장으로 인해 여성 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것이 우선 이라고 판단한 이규한이 서둘러 입 을 뗐다.

“명함을 보시면 아시겠지만,저는 영화를 제작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 니다. 혹시 ‘과속 삼대 스캔들’이라 는 영화를 아십니까?”

“알아요. 저도 극장에서 봤어요.”

“다행이네요. 제가 그 영화에 프로 듀서로 참여했습니다.”

“어머,유명한 분이신가 보네요.” 놀란 표정을 짓던 여성이 물었다.

“그럼 혹시 우리 집에 찾아온 이유 가 촬영장으로 빌리기 위함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제가 찾아온 이유 는 이 집을 사고 싶어서입니다.”

“네? 우린 집을 내놓은 적이 없는 데.”

“알고 있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 부동산에 들러서 확인했거든요.”

“그런데 왜……?”

“제가 꼭 이 집을 사고 싶어서입니 다.”

……?"

“제게는 추억이 깃든 곳이거든요.” 이규한이 간절한 표정을 지은 채

덧붙였다.

“물론 그냥 사겠다는 것은 아닙니 다. 현재 시세보다 천만 원 더 비싼 가격에 구입하겠습니다. 또,이사 비 용과 부동산 비용도 모두 제가 부담 하겠습니다.”

1억 관객 제작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