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화
원작자가 작품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작품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이 수정을 잘하는 것으로 이어지 지는 않았다.
오히려 작품에 대해 잘 알고,무한 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이 수정에는 방해 요소가 될 수 있었다.
“이 구조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됩 니다.”
“이 장면은 무조건 있어야 합니 다.”
“이 대사는 건드리면 안 됩니다.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 대사 이니까.”
“이 캐릭터는 절대 없애면 안 돼 요. 조연이긴 하지만 작품에서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는 캐릭터이니까.” 원작자들이 각색 전에 하는 이야기 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고집들은 작
품의 수정을 방해한다.
‘기존의 작품을 완전히 뜯어 고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접근해야만 원작 자가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을 캐치 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단칼에 잘라 거절하 고 싶었다.
그렇지만 배정훈 감독은 소심한 편 이었다.
또,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이 무 척 큰 편이었다.
각색을 다른 작가에게 맡기려는 이 유에 대해 납득을 시켜 주는 것이
필요했다.
“작품의 장르를 바꿀 생각입니다.”
“장르를 바꾼다니요?”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를 들은 배정 훈 감독이 두 눈을 치켜떴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첩보 액션 장르인 ‘스파이들’에 휴먼 드라마 장르의 색깔을 입힐 생각입니다.”
이규한이 각색의 방향에 대한 계획 을 밝혔다.
“왜요?”
배정훈 감독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더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판단한 기준은 무엇입니
까?
“기준은 없습니다. 주관적인 판단 이죠.”
이규한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배정훈 감독이 언성을 높였다.
“저는 반대입니다.”
“왜 반대하시는 겁니까?”
“작품이 산으로 갈 가능성이 높습 니다.”
첩보 액션에서 휴먼 드라마로. 장르가 바뀌는 것은 무척 큰 변화 이다.
이렇게 큰 변화를 주면,작품의 색 깔이 변하면서 산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배정훈 감독이 반대를 외치는 이유 였다.
‘역시 작품에 대한 애정이 깊어!’ 감독 이전에 ‘스파이들’ 시나리오 를 쓴 작가답게 배정훈은 작품에 대 한 애정이 깊었다. 그렇지만 이규한 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아까 말씀드렸던 방향으로 각색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스파이들’을 더 큰 흥행작으로 만들기 위해서입 니다.”
“그렇지만……
“왜 각색을 했을 때,작품이 더 나 빠질 거라고만 생각하십니까? 더 좋 아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배정훈 감독의 말문이 막힌 순간, 이규한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덧붙 였다.
“작품이 더 좋아지는 방향을 찾기 위해서 시도는 해 봐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게 제가 가진 원칙입니 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그 래도…… 배정훈 감독의 표정에는 여전히 마 뜩찮은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할 만큼 했다!’
이규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충분히 설득했다고 판단한 이 규한은 자신의 뜻을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계약서 3조 4항, 기억하시죠?”
“3조 4항이라면… 기억합니다.”
“분명히 작품의 수정은 협의가 아니 라 일임이라는 부분이 명시되어 있 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 뜻을 따라 주시죠.”
배정훈 감독과 계약 당시,이규한 은 계약서에 이 문구를 삽입했었다. 그때,문구를 삽입했던 이유가 이런 일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서명한 계약서에 협의가 아 니라 일임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상 황.
배정훈 감독도 이규한의 뜻을 따르 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수긍한 배정훈 감독이 다 시 물었다.
“그럼 저는 이제 뭘 할까요?”
“감독님은 캐스팅 작업을 진행하시
죠 “벌써 캐스팅 작업을 합니까?”
“감독님이 배우들과 관계가 돈독하 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스파이 들’에 출연하겠다는 약속 정도는 받 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규한이 배정훈 감독과의 계약을 필사적으로 성사시켰던 이유 중 하 나.
그의 넓은 인맥 때문이었다.
연출부 막내부터 시작해서 오랫동 안 조감독 생활을 한 배정훈 감독은 배우들과의 관계가 돈독한 편이었 다.
송강오와 임동완.
‘스파이들’에 각 세대를 대표하는 톱배우들이 출연한 것은 작품도 나 쁘지 않았지만, 배정훈 감독과의 의 리 때문이 컸다.
“혹시 염두에 두고 계신 배우가 있 습니까?”
이규한이 대답했다.
“송강오와 임동완이 투톱 주연으로 어울릴 것 같습니다.” 송강오와 임동완의 캐스팅 여부.
‘스파이들’이 투자를 받는데 있어
그 사실을 배정훈 감독도 모를 리 없었다.
확실한 미션이 주어진 만큼,배정 훈 감독은 두 배우를 ‘스파이들’에 캐스팅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 이었다.
‘이건 배정훈 감독에게 맡기자!’
캐스팅을 배정훈 감독에게 일임한 이규한이 ‘스파이들’의 시나리오 책 을 바라보았다.
“누가 좋을까?”
이미 배정훈 감독에게 각색을 하겠 다고 선언한 상황.
계약서에 적힌 조항 때문에 수락하 긴 했지만,그는 여전히 불만을 갖 고 있었다.
그 불만을 확실히 잠재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훌륭한 결과물이었다.
각색을 한 ‘스파이들’이 각색 전보 다 더 낫다면?
배정훈 감독도 더는 불만을 가지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좋은 결과물 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실력 있는 각색 작가였다.
‘안유천?’
이규한이 가장 먼저 떠올린 작가는 안유천이었다.
이미 몇 차례 작업을 함께 해서일 까.
당연하다는 둣이 안유천의 얼굴부 터 떠올랐던 것이었다.
“이 녀석은 안 돼!”
그렇지만 이규한은 이내 선택지에 서 안유천의 이름을 지웠다.
이번 각색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첩보 액션 장르 영화인 ‘스파 이들’의 휴머니즘과 드라마성을 강 화하는 것.
그러나 안유천의 장점은 코미디였 다.
해서 ‘스파이들’ 각색 작업과 안유 천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을 내 린 것이었다.
‘김단비?’
다음으로 떠올린 작가는 김단비였 다. 그러나 이규한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선택지에서 김단비의 이름도 지웠다.
그 이유는 휴머니즘과 드라마성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이 투톱 주연인 송강오와 임동완의 케미였기 때문이었다.
요새 말로 브로맨스.
그런데 김단비 작가의 성별은 여성 이었다.
브로맨스를 작품 내에서 제대로 녹 여 내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새로운 작가를 찾아야 해!”
기존의 작가풀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던 이규한은 새로운 작가를 찾 기로 결심했다.
“브로맨스를 잘 쓰는 작가가 누가 있을까?”
이번 각색의 핵심이 브로맨스라고 판단한 이규한이 고심을 거듭한 끝 에 마침내 떠올린 작가는 박한정이 었다.
‘새로운 세계’,그리고 ‘부정한 거 래’.
박한정 작가는 두 편의 걸출한 작 품으로 충무로에 화려하게 등장했 다.
특히 의리와 배신이 공존하는 남자 들의 세계를 잘 그리는 편이었다.
“박한정 작가라면 각색을 잘할 수 있을 거야.”
박한정 작가가 ‘스파이들’ 각색 작 업의 적임자라는 생각이 딱 든 순 간,이규한이 웃음을 머금었다.
“타이밍도 좋네!”
아까 이규한이 떠올렸던 두 작품, ‘새로운 세계’와 ‘부정한 거래’는 아 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미래를 알고 있는 이규한만이 박한 정이라는 작가의 존재와 능력에 대 해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또 다른 원석을 찾아가 볼
까?”
이규한이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 갔다.
한영대 근처 옥탑방.
박한정 작가가 현재 살고 있는 곳
가파른 계단을 오른 이규한이 옥탑 방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굳이 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박한정 작가는 문을 활짝 열어 놓 은 채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서 자 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목이 축 늘어져 있는 누렇게 변색 된 면티를 입고 덥수룩한 수염을 기 른 박한정 작가는 이규한의 기척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박한정 작가님?”
이규한이 입을 떼고 나서야,박한 정 작가가 자판을 두드리던 것을 멈 추었다.
“누구시죠?”
은테 안경을 추켜올리며 박한정 작 가가 물었다.
“영화 제작사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대표인 이규한이라고 합니다. 제가 작가님을 찾아온 이유는……
“안 합니다.”
이규한이 자기소개를 마치기도 전 에 박한정 작가가 딱 잘라 말했다.
“뭘 안 한다는 겁니까?”
제대로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이규 한이 묻자,박한정 작가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투로 재차 대답했다.
“영화 안 합니다.” 박한정 작가는 아직 입봉하지 못한 무명작가.
이규한이 찾아가서 ‘스파이들’의 각색을 해 달라고 제의하면,무척 기삐하면서 덥석 계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 다.
이규한은 박한정 작가에게 ‘스파이 들’ 각색 작업의 제안조차도 해 보 지 못했다.
“영화 안 합니다.” 박한정 작가는 무심한 어투로 이 말을 툭 던진 후,이규한에게 신경 을 끄고 다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 했다.
‘왜 영화를 안 한다는 거지?’
박한정 작가가 영화를 안 하겠다고 선언한 이유에 대해 고민하면서 이 규한이 그를 자세히 살폈다.
잔뜩 찌푸린 박한정 작가의 미간에 서는 분노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분노하고 있는 대상은 이규한처럼
보였다.
‘날 향한 분노가 아냐!’
그렇지만 이규한은 고개를 흔들었 다.
박한정 작가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 이.
오늘 처음 본 이규한에게 분노할 이유가 없었다.
‘영화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야!’
아까 이규한은 영화 제작사 대표라 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 소개를 듣 던 박한정 작가의 눈썹이 꿈틀대던 것을 이규한은 놓치지 않았다.
‘왜 영화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는 걸까?’
정확한 이유까지는 이규한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규한은 영화를 한 다는 박한정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 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 수 없었 다.
‘스파이들’의 각색을 맡길 적임자 로 박한정 작가를 점찍은 상황.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설득해야 했다.
해서 이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지금도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것 아닙니까?” “시나리오 쓰는 것 아닙니다.”
“그럼요?”
“대본 쓰는 겁니다.”
“드라마 대본이요?”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게 아니라, 드라마 대본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규한이 의아한 시선을 던 졌다.
“왜 드라마 대본을 쓰는 겁니까?”
“사람대접 받으려고 씁니다.”
“사람대접이라니요?”
“영화판 작가는 사람대접을 못 받 는다는 것. 그쪽도 영화 제작사 대 표니까 댁도 알 것 아닙니까? 그래 서 드라마 대본을 쓰는 겁니다. 드 라마판 작가는 사람대접도 받고,작 가 대접도 받는다고 해서요.”
쏘아붙이는 박한정 작가의 목소리 에는 적의가 깃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를 탓하기도 어려웠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
흔히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한 편의 영화가 성공하면 감독이 영광을 독차지한다. 그러다 보니 정 작 작품의 뼈대가 되는 시나리오를 쓴 작가는 주목받지 못한다.
단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이 다
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대우조차도 받지 못한 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