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흙수저가 금수저를 이기는 기적 개봉 시기 역시 영화의 흥행에 적 잖은 영향을 미쳤다.
굳이 멀리서 예를 찾을 필요도 것 도 없었다.
‘과속 삼대 스캔들’이 증거였다.
‘추적자’와 엇비슷한 시기에 개봉 한 탓에 ‘과속 삼대 스캔들’은 피해 를 봤다.
매스컴에서는 ‘쌍끌이 흥행’이란 표현을 썼지만,미래의 기억을 갖고 있는 이규한은 확실히 알 수 있었 다.
‘추적자’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탓에 ‘과속 삼대 스캔들’의 관객수 가 백만 명 가까이 줄었다는 것을.
그리고.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에서 준비하고 있는 ‘광안리’는 ‘추격자’에 비해서 흥행에서 더 성공한 작품이었다.
이규한이 ‘수상한 여자’를 겨울 성 수기 시장에 맞춰서 개봉해서 ‘광안 리’와 맞불을 놓겠다고 선언한 것으 로 최소 백만 명 이상의 관객을 잃
어버린 셈이었다.
이것이 이규한이 아까 세 치 혀를 조심하지 못해서 ‘청춘,우리가 가 장 빛났던 순간’의 흥행으로 힘겹게 번 돈을 모두 날렸다고 말했던 이유 였다.
예상대로 이규한에게서 현 상황에 대해서 전해들은 권지영 팀장의 표 정도 어둡게 변해 있었다.
“내가 잘못했다. 그리고 권 팀장을 이리로 부른 것은 한배를 탔기 때문 이야.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이규한이 사과한 순간,권지영이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내려놓은 권 지영이 입을 뗐다.
“왜 그러셨어요? 좀 참았으면 좋았 을걸.”
“그래. 내가 더 참았어야 했는 데……
“여기까지는 로터스 엔터테인먼트 투자팀장으로서 드린 말씀이었습니 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로터스 엔터테 인먼트 투자팀장 권지영이 아닌 개 인 권지영 자격으로 드리는 말씀입 니다. 잘하셨어요.” 이규한이 소주잔을 들어 입으로 가 져가다가 멈칫하며 다시 내려놓았 다.
“잘했다고?”
“네,저도 아버지 잘 둔 덕에 잘난 척 거들먹거리는 김기현 대표가 줄 곧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권지영이 웃으며 던진 말을 들은 이규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을 때였다.
“제가 이래서 이 대표님을 좋아합 니다.”
“나중에 후회할걸.”
“그건 나중의 일이고요.”
“진짜 걱정 안 돼?”
‘수상한 여자’는 로터스 엔터테인 먼트에서 투자와 배급을 맡은 작품. 김기현이 제작하고,씨제스 엔터테 인먼트에서 투자와 배급을 맡을 ‘광 안리’라는 강적을 만난 셈이었다.
그러니 걱정이 돼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권지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걱정 안 되는데요.”
“왜 걱정이 안 돼?”
“이 대표님을 믿으니까요.”
이규한을 믿는다고 대답하는 권지 영의 두 눈에 깃든 감정은 확신이었 다.
한 점의 의심도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두 눈을 확인한 이규한이 아 까 내려놓았던 소주잔을 들어 입으 로 가져갔다.
‘몰라서 그래!’
이규한과 권지영의 차이점.
미래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였 다.
미래를 알고 있는 이규한은 이미 ‘광안리’가 천만이 넘는 관객을 불 러들이는 흥행작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반면 권지영은 그 사실을 전혀 몰 랐다.
그래서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판단 했을 때였다.
“김기현 대표,아버지는 잘 뒀지만, 실력은 형편없잖아요.”
권지영 팀장이 힘주어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까이서 지 켜보았던 저는 알아요. 블루문 엔터 테인먼트와 스카이 엔터테인먼트가 공동 제작한 ‘청춘,우리가 가장 빛 났던 순간’이 기대 이상의 흥행을 거둔 데는 이 대표님의 활약이 결정 적이었다는 것을.”
그런 그녀가 술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다.
“갑자기 웬 건배야?”
“실력 면에서는 분명히 이규한 대 표님이 김기현 대표를 앞서요. 그러 니까 흙수저가 금수저를 이기는 기 적을 연출해 주세요.”
채앵.
건배를 하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는 이규한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 았다.
권지영의 말이 옳았다.
실력 면에서나,경험 면에서나 이 규한이 김기현에 비해 우위에 서 있 는 것은 맞았다.
그러나 세상은 실력이 더 낫다고 해서 승리자가 되는 단순한 곳이 아 니었다.
흙수저가 금수저를 이기는 것.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거의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해서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을 때,권지영이 다시 말했다.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요?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요. 천천히 준비 하다 보면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비 책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권지영이 자신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 던진 말을 들으며 이규한이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빈 술잔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들어 안주를 집 으려 했던 이규한이 흠칫했다.
‘시간?’
권지영이 방금 꺼낸 말에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왜 지금 개봉하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이규한이 기억을 더듬었다.
이규한이 알고 있는 미래 속,‘광 안리’는 2013년에 개봉했었다.
2013년 여름 성수기 시장에 개봉 했던 ‘광안리’는 경쟁작들을 압도하 면서 독주하면서 천만이 넘는 관객
을 동원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2010년이었다.
‘그럼 2011년에 개봉한다?’
김기현의 장담대로 1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치며 촬영까지 마친다면, ‘광안리’는 2011년 초에 개봉하는 셈이었다.
이규한이 알고 있는 미래의 개봉일 보다 약 2년 6개월 정도 이른 시점 에 개봉을 하는 것이었다.
‘이건… 변수가 될 수 있어!’
소주잔을 쥐고 있던 이규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개봉 시기 역시 작품의 흥행에 영 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임을 이규한 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원래보다 무려 2년 6개월 더 빠른 ‘광안리’의 개봉 시기는 영화의 흥 행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게… 다가 아냐!’
이규한이 소주병을 들어 빈 잔을 채웠다.
“왜 자작하고 그러세요?”
잔이 비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 던 것으로 인해 권지영이 미안한 표 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권 지영의 표정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 었다.
본인이 채운 잔을 들어 입으로 가 져가며 이규한이 생각했다.
‘지레 겁을 먹었어!’
이규한이 알고 있는 미래 속에서 영화 ‘광안리’는 11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었다.
상대가 너무 막강하다는 생각에 지 레 겁을 먹은 탓에 이규한은 미리 패배 의식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개봉 시기라는 하나의 변수 를 찾아내자,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다른 변수들도 잇따라 떠오르기 시 작했다.
‘감독이 달라!’ 이규한이 기억하는 영화 ‘광안리’ 의 연출은 윤대균 감독이 맡았었다. 그러나 김기현은 최신현 감독에게 연출을 맡길 예정이라고 말했다.
‘주연 배우도 달라!’
감독뿐만 아니라 김기현이 캐스팅 을 염두에 두고 있는 주연 배우들은 이규한의 기억 속 주연 배우들과 달 랐다.
“변수가… 많아!”
비로소 이규한의 표정이 밝아졌다.
개봉 시기,감독,주연 배우만이 아니었다.
김기현의 말대로라면 ‘광안리’는
시나리오 초고와 재고,완고, 그리 고 각색과 윤색,감독고까지.
시나리오 개발 단계에서만 수많은 변수들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이자 상황이었다.
각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예상 관 객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규 한은 잘 알고 있었다.
‘미래는 바뀔 수 있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규한이 술 잔을 들었다.
“갑자기 뭘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 는 권지영에게 이규한이 대답했다.
“흙수저가 금수저를 이기는 기적을 만들어 보자고.” “잡은 물고기에는 미끼를 주지 않 는다!”
부부 싸움을 할 때 흔히 쓰는 말 이었다.
연애를 할 당시와 결혼 후.
여자를 대하는 남자의 태도는 많이 바뀌는 편이었다.
연애를 할 때는 하늘에 별이라도 따서 줄 것처럼 굴던 남자가 결혼 후에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태도가 돌변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로 인해 서운함을 느낀 아내가 불만을 토로할 때, 남편들이 흔히 꺼내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부부 사이에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 었다.
영화계에서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영화 제작자와 감독 혹은 작가와 작품 계약을 맺고 나면,갑자기 작 업 진행 속도가 느려진다.
계약을 하기 전에는 작업을 서둘러 금방 개봉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얘 기하던 제작자들은 계약 후 태도가 돌변한다.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작업 속도를 늦추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 이유는 이미 잡은 물고기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기 때문이 었다.
짧으면 3년, 길면 5년.
계약서에 명시된 계약 기간이었다.
즉,계약 기간 동안에는 작가나 감 독이 다른 제작사와 이 작품으로 계 약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5년은
긴 시간이었다.
‘천천히 해도 돼!’
이런 생각을 갖기에 충분한 시간이 기에 작업 진행을 서두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달랐다.
- 잡은 물고기는 최단 시간 안에 요리해야 한다.
영화 제작자 이규한이 가진 철학이 었다.
모든 상품에는 유통 기한이 존재하 듯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작품의 소재가 먹히는 기간이 분명 히 존재했다.
그 타이밍을 놓치게 되면, 작품의 가치는 하락하기 마련이었다. 그래 서 이규한은 배정훈 감독을 다시 만 났다.
각본과 감독 계약을 체결한 후 첫 만남.
배정훈 감독의 표정은 지난번 만났 을 때보다 한층 밝아져 있었다.
또,조급함이 사라진 대신 표정에 여유가 묻어나고 있었다.
아마 계약금을 받아서 급한 불을 꼈기 때문이리라.
“잘 지내셨죠?”
“대표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간단한 인사가 오간 후,이규한이 입을 열었다.
“감독님, 아직 안심하기는 이롭니 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투자를 받아야 잔금을 수령할 수 있으니까요. 너무 여유를 부리시면 안 됩니다. 시간은 금방 흐르니까 요.” 지금 당장이야 목돈을 손에 쥐었으
그러나 시간은 금방 흐르는 법이 고,통장에 들어 있던 목돈도 금세 사라질 터.
그 전에 투자를 받고 촬영에 들어 가야 다시 생활고를 겪지 않을 수 있다.
이규한이 건넨 충고에 담긴 의미였 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다시 긴장의 끈을 조이겠습니다.”
배정훈 감독이 말뜻을 알아듣고 대 답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배정훈 감독의 말을 순순히 믿지 않았다.
배정훈 감독을 못 믿는 것이 아니 었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번 풀어져 버린 긴장의 끈은 쉽 게 다시 조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진행에 대해 서 논의해야겠습니다. 저는 각색 작 업을 바로 시작할 생각입니다.”
이규한이 의중을 밝히자,배정훈 감독이 두 눈을 빛냈다.
“혹시 염두에 두고 계신 각색 작가 가 있습니까?”
“아직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 제가 하는 건 어떨까요?”
“감독님이요? 자신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제가 직접 쓴 작품이다 보니,제가 작품에 대해서 가장 잘 알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은 있습니 다.”
‘착각!’
배정훈 감독이 말을 마친 순간,이 규한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내가 쓴 작품은 내가 가장 잘 안 다. 그러니 수정도 내가 잘할 수 있 다.
시나리오 작가나 영화감독들이 흔 히 하는 착각이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