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화
순서가 잘못됐다 “아닙니다. 저는 약속은 지키는 사 람입니다.”
이규한이 힘주어 말하자,배정훈 감독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그의 두 눈에 깃들어 있 던 불신이란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 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계약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살펴보시죠.”
배정훈 감독이 계약서를 들어올렸 다.
잠시 후,그의 두 눈에 이채가 떠 올랐다.
“정말… 저와 계약하실 겁니까?”
“일전에 감독님과 꼭 계약할 거라 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꽤 힘들었습니 다. 다크 서클이 생긴 거 보이시죠? 감독님과 계약할 계약금을 구하기 위해서 지난 열홀 동안 절말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배정훈 감독과 계약할 계약금을 마 련하기 위해서 이규한은 ‘수상한 여 자’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발 벗 고 뛰었다.
덕분에 가까스로 늦지 않게 계약금 을 마련할 수 있었고.
“왜 그렇게까지……?”
“그만큼 감독님을 잡고 싶었으니까 요.”
“…감사합니다.”
배정훈 감독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 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고개를 흔들었 다.
“제게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감독 님에게서 가능성을 봤고,꼭 함께하 고 싶은 욕심을 냈던 것은 저이니까 요.”
“그렇지만……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죠. 부족 한 저를 믿고 저희 회사와 계약하기 로 어려운 결심을 하셨으니까요.”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 은데……
배정훈 감독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땐 순간,이규한이 도중에 끼
어들었다.
“제 안목을 믿으십시오. 제가 감독 님을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톱클래 스 감독님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 다. 그러니까 일전에도 말씀드렸지 만, 조금 더 감독님 본인에게 자신 감을 가져 주십시오.”
그 조언을 건넸을 때와 지금.
상황은 또 달랐다.
계약을 앞두고 있는 만큼,배정훈 감독에 대한 애정이 더 커졌기 때문 이었다. 그래서 이규한은 진심을 담 아서 충고했다.
“감독님이 자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셔야만,현장에서 배우들과 스템 들도 감독님을 믿고 따르게 됩니다. 제가 지금 드린 조언,꼭 기억해 주 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좋은 감독님과 함께 작품 을 할 수 있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배정훈 감독의 표정이 한층 밝아진 것을 확인한 이규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르듯,영화 감독들의 성향도 다 달랐다. 그리고 함께 작품을 하는 영화감독의 성향 을 파악해서 가진바 능력의 최대치 를 뽑아내는 것이 영화 제작자가 해 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였다.
‘워낙 신중한 성격이라 연출의 디 테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문제는 두 가지. 현장에서 카리스마가 없다 는 것과 작업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거야!’
비록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이었지 만,이규한은 배정훈 감독과 계약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해서 이미 배정훈 감독의 성향과 장단점에 대한 파악을 마친 상태였 다.
“감독님,계약서를 보시죠.”
이규한이 계약서를 다시 확인하라 고 말했다. 그러나 배정훈 감독은 계약서를 다시 살피지 않고 대답했 다.
“조건은 이미 확인했습니다. 이 정 도면 만족합니다.”
각본료 사천만 원.
연출료 오천만 원.
총액 구천만 원.
이규한이 준비한 계약서의 조건이 었다.
신인 감독의 경우 보통 각본료 삼 천만 원,연출료 사천만 원 선에서 계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에 비해 총액이 이천만 원 많은 계약 조건을 제시했기에 배정훈 감 독은 만족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이 규한이 계약서를 다시 확인하라고 제안한 이유는 계약 조건 때문이 아 니었다.
“계약서 3조 4항을 봐 주십시오.”
“3조 4항이요?”
“3조 4항을 보시면 작품의 수정에 대한 권한은 제작사에 일임한다는 조항이 적혀 있습니다.”
이규한의 설명을 듣고 계약서를 다 시 살피던 배정훈 감독이 의아한 시 선을 던졌다.
“협의가 아니라 일임이네요.”
“맞습니다.”
“왜 일임이라는 조항을 굳이 넣으 셨습니까?”
이규한이 대답했다.
“작품의 수정 방향에 대한 답을 제 가 갖고 있거든요.” 3,079,765 명.
영화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의 최종 관객수였다.
로터스 엔터테인먼트 투자팀장 권
지영의 예상처럼 최종 관객수가 350만 명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300만 명은 돌파했다.
그리고 관객수가 300만 명을 돌파 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예상보다 더 들었어!’
이규한이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예 상 관객수는 약 210만 명.
그에 비해 약 100만 명가량 관객 이 더 들어온 셈이었다.
‘도경민 덕분이야!’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이 예상보다 더 큰 흥행을 기록한 데는 주연 배우 도경민의 열연이 큰 역할 을 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도경민의 팬층이 두터웠던 것도 흥행에 일조했다.
그로 인해 만족한 표정을 짓던 이 규한이 호텔로 들어섰다.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이 300만 관객을 돌파한 것을 기념하 여 공동제작자인 김기현과 술을 한 잔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김기현과의 술자리.
딱히 내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마땅히 거절할 명분이 없 었다.
그래서 호텔 지하에 위치한 바로 들어서자,미리 도착해 있던 김기현 이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야!”
김기현이 앉아 있는 바 테이블 옆 좌석에 앉으며 이규한이 속으로 혀 를 내둘렀다.
로얄 살루트 21년산.
김기현의 앞에 놓여 있는 술이었 다.
‘대체 가격이 얼마나 할까?’
일전에 백화점에서 확인했던 가격 이 약 20만 원 대 후반이었다. 그렇 지만 호텔 바에서 마시면 가격이 치 솟는 것이 당연했다.
‘얼마인지 한번 물어볼까?’
잠시 고민하던 이규한이 고개를 흔 들었다.
어차피 오늘 술값을 계산하기로 한 것이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건배부터 하자!”
김기현이 이규한이 내민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고생했다.”
“너도 애썼다.”
채앵.
잔을 부딪친 후, 이규한이 절반가 량 술을 비웠다.
‘맛있네!’
양주를 많이 마셔 보지는 않았다.
이규한은 주로 소주를 마셨으니까.
그렇지만 일천한 양주 경험에도 불 구하고 로얄 살루트 21년산은 향과 목 넘김이 지금껏 마셔 보았던 다른 양주들에 비해서 더 좋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래서 비싼 술을 마시는 건가?’
이규한이 실소를 머금었을 때,김 기현이 말했다.
“이번 작품은 내게 의미가 있었어. 예상보다 흥행에 더 성공하면서 아 버지한테 면목이 좀 섰거든.”
“다행이네.”
“네 덕분이다.”
‘왜 이래?’
잘되면 내 덕분, 안 되면 남 탓. 김기현의 평소 성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김기현의 반응 을 확인하고 이규한이 의아한 시선 을 던지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에 아버지한테 인정 받으니 까 기분이 좋더라. 그런데 아직 모 자라.”
“뭐가 모자라다는 거야?”
“한 작품은 더 성공시켜야 아버지
에게서 확실한 신임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다음 작품도 같이하자.”
‘이거였군!’
김기현이 꺼낸 이야기를 들은 이규 한이 쓰게 웃었다.
아버지인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대 표 김대환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는 다음 작품도 성공을 거둬야 한 다.
그것을 위해서는 네 도움이 필요하 다.
김기현이 평소와 달리 영화 ‘청춘, 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이 성공한 공을 이규한에게 돌렸던 이유였다.
‘소귀에 경 읽기가 따로 없군!’
이미 몇 차례나 블루문 엔터테인먼 트에서 준비 중인 다음 작품이 있다 고 김기현에게 말했었다.
그렇지만 김기현은 그 이야기를 듣 지 못한 사람처럼 다시 공동 제작을 제안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 을 때였다.
“취하기 전에 이것부터 봐.”
김기현이 미리 준비했던 서류 봉투 를 건넸다.
이규한이 서류 봉투 안에 들어 있 는 계약서를 힐끗 살폈다.
“거의 그대로야. 수익 배분 비율만 육 대 사로 바뀌었어.”
첫 공동 제작 당시 수익 배분 비 율은 칠 대 삼.
당시에 비하면 스카이 엔터테인먼 트 쪽이 수익이 발생했을 때 가져가 는 비율이 더 늘어 있었다.
‘8 대 2라고 해도 안 할 판국이구 만!’
이규한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김기현이 설명했다.
“수익 배분 비율을 바꾼 이유는 이 번에는 내가 기획 개발에도 참여할 생각이라서 그래. 감독과 배우 캐스 팅을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에서 맡을 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혼자 서 김칫국을 마시는 형국.
정작 이규한은 공동 제작을 할 생 각이 전혀 없는데,김기현은 그런 속내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회사에서 개발하고 있는 작 품 가운데 괜찮은 작품이 있어. 현 재 트리트먼트까지 나온 상황인데 최신현 감독한테 보여 줬더니 같이 하고 싶어 하더라고. 그래서 연출은 최신현 감독을 생각하고 있고,주연 배우는 유현석과 변요섭을 캐스팅할 생각이야. 투자는 알다시피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받을 생각인데, 이번에는 좀 넉넉하게 받으려고. 순 제작비만 백억을 넘어갈 정도로 사 이즈가 큰 편이거든.”
김기현이 한껏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규한이 반쯤 남아 있던 술잔을 비웠다.
순제작비가 백억이 넘어가는 대작 영화.
그리고 흥행 감독인 최신현이 연출 을 맡고,연기력과 티켓 파워를 인 정받고 있는 유현석과 변요섭이 투 톱으로 나선다고 했다.
거기에 씨제스 엔터테인먼트가 확 실하게 밀어 준다면?
흥행에 성공할 가능성이 무척 높다 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 다.
“네가 맡아 줄 부분은 시나리오 개 발이야. 이 정도 조건에 수익 배분 비율이 육 대 사면 괜찮지 않아?”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무척이나 좋은 조건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김기현은 확신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조건인데 네가 내 제 안을 거절할 수 있느냐?’
이런 확신이 담긴 표정을 확인한 이규한이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물 었다.
“개봉 예정은 언제야?”
“대작이니까 당연히 성수기를 노려 야지.”
“내년 성수기?”
“아니,올 겨울 성수기를 생각하고 있어!”
이규한이 개봉 예정 시기를 물은 것.
김기현이 제안한 공동 제작에 흥미 를 느껴서가 아니었다.
‘수상한 여자’와 맞붙는 것을 피하 고 싶어서였다.
“올 겨울 성수기라고?”
“응. 작업을 서두르면 시간은 충분 할 것 같은데.”
김기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한숨을 내쉬었 다.
겨울 성수기 시장까지 채 일 년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 김기현의 설명대로라면 아직 트리트먼트 단계 였다.
트리트먼트는 줄거리 요약본.
이 트리트먼트를 바탕으로 시나리 오 초고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리 고 일반적인 경우 트리트먼트 단계 에서 시나리오 완고가 나오는 데까 지만 일 년 가까이 걸렸다.
그런데 김기현은 시나리오 개발은 물론이고, 촬영을 마치는 데까지 일 년의 기간을 잡고 있었다.
‘너무 무리한 일정. 영화를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어!’
자신감이 넘치는 김기현을 살핀 이 규한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 다.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시나리 오 개발 작업을 서두르기 위해서
김기현,순서가 잘못됐어J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