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화
엿이나 쳐 드세요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인경 작가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화가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 고 지인경 작가가 홧김에 한 말로 인해서 양승일 대표와 황병기 감독 은 더욱 초조해졌으리라.
“그다음에는 저작권 등록한 날짜를 물어봤어요.”
“그랬군요.” 표절 소송이 벌어질 것을 대비해서 던졌을 질문.
지인경 작가가 ‘노파에서 처녀가 된 그녀’의 저작권 등록을 한 시점 이 ‘수상한 여자’의 저작권 등록 시 점보다 더 빨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양승일 대표와 황병기 감독은 크게 안도했으리라.
또,지인경 작가가 더욱 필요해졌 으리라.
“그 뒤는 아까 이 대표님이 말씀하 셨던 대로였어요. 일단 계약서부터 다시 작성하자,‘젊어진 그녀’의 크 레딧에 이름을 올려주고,회사 형편 이 어려워서 지급을 미루었던 돈도 일주일 안에 지급하겠다. 대신 ‘노 파에서 처녀가 된 그녀’의 저작권 등록 확인증을 제출해라. 만약 우리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두 번 다 시 영화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이렇게 말했거든요.”
양승일 대표와 황병기 감독의 대 응.
이규한의 예상 범위를 벗어나지 못 했다.
그로 인해 쓰게 웃던 이규한이 팔 짱을 꼈다.
이제 남은 건 지인경 작가의 선택 이었다.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무척 궁금했지만,이규한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잠 시 후,지인경 작가가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솔깃한 제안이 었어요.”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크레덧이 없고 생계에 곤란을 겪는 무명작가 지인경.
‘젊어진 그녀’라는 작품을 통해 입 봉할 기회를 얻고,아직 지급받지 못했던 원고료까지 받을 수 있다는 제안은 그녀에게 분명히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터였다.
그 제안을 듣고 솔깃했다는 지인경
‘어렵겠구나!’
이규한이 표정을 굳혔을 때였다.
“그래서 많이 고민했어요. 마지막 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떤 선택을 내 리는 게 옳을까에 대해서 고심한 끝 에 이미 대답을 했어요.”
‘수락했구나!’
이규한이 속으로 탄식하며 지인경 을 바라보았다.
미안한 마음이 커서일까.
아니면,그렇게 속고 당하면서도 똑같은 선택을 내린 게 부끄러워서 일까.
지인경은 이규한의 시선을 맞받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규한이 물었다.
“어떤 대답을 했나요?”
지인경이 잠시 후 대답했다.
“엿이나 쳐 드세요.” 〈예상 밖의 선전. ‘청춘,우리가 가 장 빛났던 순간’의 조용한 반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청춘들의 이야기,관객들을 사로잡다〉
〈유쾌한 역전극,‘청춘,우리가 가 장 빛났던 순간’ 박스오피스 1위 등 극〉 이규한이 내심 기대했던 대로였다.
개봉 첫 주차,‘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은 박스오피스 2위로 출발했다. 그렇지만 점차 박스오피 스 1위에 올랐던 작품과의 격차를 좁혔고,결국 개봉 2주차에 접어드 는 주말에 역전에 성공했다.
“기현이가 손을 썼네!”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이 개봉 2주차에 박스오피스 1위를 탈
환하자마자,포털사이트를 중심으로 관련 기사들이 쏟아졌다.
물론 영화와 관련된 기사가 나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 던 순간’이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것만으로 이 정도로 많은 기사가 쏟 아진 것은 분명 이례적이었다.
해서 이번 영화의 공동 제작을 맡 은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의 김기현 대표가 연예 관련 기자들에게 기사 작성을 부탁했다고 이규한은 판단한 것이었다.
“뭐,나쁠 건 없지!”
영화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과 관련된 기사가 많이 쏟아지 면,대중들도 관심을 가지기 마련이 었다.
자연히 홍보가 되면서 관객들이 조 금이라도 더 찾아올 터.
공동 제작을 했던 이규한의 입장에 서도 나쁠 건 없었다. 그리고 다행 인 것은 기사에 달려 있는 영화에 대한 평이 좋다는 점이었다.
- 예상보다 더 재밌음. 못 보신 분 들 극장 가서 꼭 보삼.
-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사람 들은 한 번쯤 볼 필요가 있음.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게 아님을 알게
- 꼭 내 이십 대 이야기 같았음. 옛날 생각 나서 좋았음. 참고로 나 는 사십 대임.
- 도경민 연기 잘하네. 원래 배우 출신인 줄 알았다.
- 여자 주인공 진짜 예쁘다. 진짜 대학교 퀸카 느낌인 데다가 연기도 잘함.
남녀 주인공 도경민과 차수련의 연 기에 대한 호평이 있었고,현실을 반영하면서도 내용이 너무 심각하지 않았다는 댓글이 주를 이루고 있었 다.
“내 진단이 적중한 셈이네!”
‘그때,우리’가 흥행에 실패했던 이 유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너무 심각한 이야 기 위주로 풀었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 해서는 심각함을 자제하고, 유머 코 드를 부각시켜야 한다.”
이것이 당시 이규한이 내렸던 진단 이었다. 그리고 진단에 맞춘 처방전 은 효과가 있었다.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으 로 제목을 바꾸고 개봉한 작품이 박 스오피스 1위에 오른 것이 그 증거 였다.
“어쩌면… 내 예상보다 흥행이 더 될 수도 있겠네.”
이규한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최소 200만,최대 300만.
이규한이 예상했던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의 관객수였다. 그런 이규한의 생각이 바뀐 계기는 기사 아래 달린 하나의 댓글이었다.
- 꼭 내 이십 대 이야기 같았음. 옛날 생각 나서 좋았음. 참고로 나
는 사십 대임.
이규한이 주목한 댓글이었다.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의 최대 관객수가 300만 정도일 거라 고 예상했던 이유는 영화의 장르 때 문이었다.
청춘 코미디 로맨스.
굳이 분류하자면 이렇게 영화를 장 르를 규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청 춘물은 관객층이 한계가 있는 편이 었다.
그런데 연령대가 40대인 관객들도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을
보고 만족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전 향수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 리라.
지이엉. 지이잉.
그때,이규한의 휴대전화가 진동했 다.
액정에 떠올라 있는 발신자는 영화 사 반딧불이의 양승일 대표.
그것을 확인한 이규한의 입가에 떠 올라 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내가 먼저 전화하면 손에 장을 지 진다. 장을 지져!”
일전에 영화사 반딧불이를 찾아가 서 양승일 대표를 만났을 때, 이규 한은 혹시 마음이 바뀌면 전화를 하 라며 명함을 남겼었다.
당시에 양승일 대표가 했었던 말이 었다.
그런데 지금 양승일 대표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진짜 손에 장을 지지려나?”
이규한이 씩 웃으며 전화를 받았 다.
충무로 필동에 위치한 영화사 반딧 불이의 대표실.
“자,들게. 특별히 준비한 몸에 아 주 좋은 차야.”
초대를 받고 찾아온 이규한에게 양 승일 대표가 차를 권했다.
“잘 마시겠습니다.”
이규한이 대답했다. 그렇지만 이규 한은 앞에 놓인 찻잔을 향해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양승일 대표를 빤히 바라보았 다.
:엿이나 쳐 드세요J 양승일 대표에게 지인경 작가가 했 던 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양승일 대표가 당황했을 모습을 상상하고 있자니,자꾸 실실 웃음이 났다.
“왜 웃는가?”
그런 이규한에게 양승일 대표가 의 아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사람 취급도 안 하던 지인경 작가 에게 엿이나 쳐 드시라는 이야기를 들은 소감이 어떠십니까?’
이렇게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이규한이 대답했다.
“변호사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요.”
“변호사라니?”
“소송을 하기 위해서 저작권 분야 에서 유명한 변호사를 찾아가서 상 담을 했습니다. 그때 변호사가 했던 말이 무척 재밌었습니다.”
“뭐라고 했나?”
양승일이 호기심을 드러낸 순간, 이규한이 대답했다.
“이런 엿 같은 놈들이 있나?”
" ……?"
“이렇게 말하면서 백 프로 승소할 거라고 말씀해 주시더군요.”
양승일 대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곁에서 조용히 눈치를 살피고 있던 황병기 감독도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안쓰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평소에 작가 대우를 엿같이 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처한 겁니다!’
오히려 자업자득이란 생각이 들었 다.
‘사진을 찍고 싶네!’
이규한이 한 생각이었다.
‘만약 지금 양승일 대표와 황병기 감독의 표정을 사진으로 찍어서 지 인경 작가에게 보여 준다면?’
그녀가 무척 통쾌해했을 거란 생각 이 들어서였다.
그때, 양승일 대표가 입을 뗐다.
“그날,이대표를 만나고 나서 곰곰 이 생각해 봤네. 그러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영화계 선배인 내가 후배를 너무 몰아붙였던 게 아 닌가 하는 생각 말일세. 이렇게 좁 은 바닥에서 창창한 후배의 앞길을 막는 것. 너무 어른답지 못한 일이 라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선배답 게 아량을 베푸는 게 좋겠다는 결론 을 내렸네.”
‘헛소리!’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 이규한이 물었다.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렸다는 겁 니까?”
“자네에게나 나나 소송까지 가는 건 너무 출혈이 커다는 생각이 들었 네. 소문도 안 좋게 날 것이 뻔하고 말일세. 해서 공동 제작을 제안할까 하네.”
“공동제작이요?”
양승일 대표가 준비한 꼼수의 정체 를 알아챈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 다.
너무 한심하고 치졸해 보였기 때문 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의 속내를 알지 못 하는 양승일 대표는 준비한 말을 이 어 나갔다.
“일단 이걸 보고 나서 이야기하 세.”
양승일 대표의 눈짓을 받은 황병기 감독이 책상에서 시나리오 책을 갖 고 돌아왔다.
‘젊어진 그녀’의 시나리오 책임을 이규한이 확인했을 때,양승일 대표 가 재촉했다.
“어서 보게!”
이규한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젊어 진 그녀’의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들 었다.
- 971,544.
이규한의 눈앞에 떠오른 숫자였다.
‘형편없네!’
소재가 겹쳤지만,예상 관객수는 큰 차이가 났다.
이규한이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안 유천과 김단비 작가가 공동 집필한 ‘수상한 여자’의 최종 관객수가 900 만 명이 넘었으니, 무려 열 배 가까 이 차이가 나는 셈이었다.
보는 척이라도 하자!
양승일 대표와 황병기 감독은 이규 한이 가진 특수의 능력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
‘젊어진 그녀’의 시나리오 책을 집 어 들어서 예상 관객수를 확인하고 나서 형편없다는 평가를 내린다면 괜한 오해만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해서 이규한이 책장을 넘겼다.
약 반시간 후,이규한이 ‘젊어진 그녀’ 시나리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 순간,양승일 대표가 기다렸다 는 듯이 물었다.
“직접 보니 어떤가?”
“핵심 소재는 겹치지만 작품의 완 성도 측면에서는 차이가 많이 나네 요. ‘수상한 여자’가 훨씬 낫습니 다.”
“내 판단도 비슷했네.”
이규한이 말을 마치자마자,양승일 대표가 동조했다.
‘왜 이래?’
‘젊어진 그녀’의 시나리오가 ‘수상 한 여자’의 시나리오에 비해서 완성 도가 멸어진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양승일 대표의 태도.
어딘가 수상쩍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규한이 두 눈을 가늘게 좁혔을 때,양승일 대표가 말을 이
“이미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의 김기 현 대표와 공동 제작을 해 본 경험 이 있다고 했으니 요점만 말하겠네. 서로 윈윈하는 게 어떻겠나?”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