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화
순서의 문제 (2)
이규한이 거침없이 이야기를 쏟아 냈다.
굳어진 표정으로 그 이야기들을 모 두 듣고 있던 양승일 대표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 대표는 직업을 잘못 택한 것 같군.”
“무슨 뜻입니까?” “영화 제작자보다는 작가로서 재능 이 더 많은 것 같다는 뜻이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전부 네가 지어낸 헛소리일 뿐이 다.
양승일 대표가 방금 꺼낸 말 속에 숨은 뜻이었다.
발뺌하고 있는 양승일 대표를 확인 했음에도,딱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이런 반응이 돌아올 것을 어느 정 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규한이 양승일 대표에게 매서운 시선을 던지고 있을 때,조 용히 듣고 있던 황병기 감독이 나섰
“더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 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이네.”
황병기 감독의 이야기에 양승일 대 표 역시 동조했다.
그 순간,이규한이 입을 뗐다.
“제 충고를 듣지 않으실 생각이시 군요.”
“충고가 충고 같아야 고민을 해 보 고 자시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이규한이 백팩을 열었다. 그리고 백팩에서 꺼낸 ‘수상한 여자’의 저
작권 등록증 사본과 ‘수상한 여자’ 의 시나리오 책을 탁자 위에 올려놓 았다.
“이게 뭔가?”
“일종의 내용증명입니다.”
“내용증명?”
“나중에 직접 보시죠.”
“ 용……?"
“소송을 할 생각입니다. 그때 법원 에 제출할 증거 자료이거든요.”
이규한이 소송을 할 것이라는 의사 를 피력한 순간,양승일이 다시 물 었다.
“진짜 소송을 할 생각인가?”
“네. 할 겁니다.”
이규한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한 순간,양승일 대표와 황병기 감독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내가 장담하지. 계속 그렇게 나오 다가는 크게 다칠 거야.”
양승일 대표가 협박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당당한 목소리 로 대꾸했다
“누가 다칠지는 곧 알게 되겠죠.”
“세상 물정 모르고 그렇게 설치다 가는
“대표님 말씀처럼 세상 물정을 몰
라서 설치는 겁니다.”
“......?"
“그렇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 다. 이게 옳은 일이라는 것이요.”
양승일과 황병기.
두 사람과 더 이야기를 할 필요성 을 느끼지 못한 이규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아까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수상한 여자’의 저작권 등록증 사 본 위에 곱게 내려놓았다.
“이건 왜 내려놓는 건가?”
양승일 대표가 사나운 목소리로 물 은 순간,이규한이 대답했다.
“혹시 생각이 바뀌면 이 번호로 전 화하십시오.”
이규한이 사무실을 빠져나올 때, 양승일 대표가 등 뒤에 대고 소리쳤 다.
“내가 먼저 연락하는 일은 절대 없 을 거야.” “커피가 오늘따라 쓰네요.”
이규한이 하소연하자,지인경이 살 짝 웃으며 입을 뗐다.
“사는 게 힘드신가 보네요.” “솔직히 쉽지는 않네요.”
“왜인지 알려 드릴까요?”
이규한이 쓰게 웃으며 대답한 순 간,지인경이 제안했다.
“제가 사는 게 힘든 이유가 뭔가 요?”
“이 대표님이 좋은 분이라서 그래 요. 영화판은 좋은 사람이 성공을 거두기에는 너무 힘든 곳이니까요.”
지인경이 꺼낸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기꾼과 양아치들이 판을 치고, 또 권력을 잡고 있는 영화계에서 이 규한은 너무 양심적인 편이었다. 그 래서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이규한은 힘주어 말했다.
“계속 힘들게 살 겁니다.”
“왜요?”
“그게 옳다고 생각하니까요.”
이규한이 소신을 밝히자,지인경이 새삼스런 시선을 던졌다.
‘바뀌었네!’
그런 그녀가 던지는 눈빛은 이전과 는 달랐다.
불신이 사라진 자리를 신뢰가 대신 채우고 있었다.
잠시 후,그녀가 물었다.
“양승일 대표와 황병기 감독을 만 났다고 하셨죠?”
“네,만났습니다.”
“어떻게 됐나요?”
“소송을 할 생각입니다.”
이규한이 대답하자,지인경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규한이 그들을 만 나서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간략하 게 알려 주었다.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지인경이 물었다.
“진짜 소송을 하실 생각인가요?”
“네,해 볼 생각입니다.” “부럽네요.”
지인경의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왜 부럽다는 건가요?”
“저는 소송을 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거든요.”
‘힘없는 약자이니까!’
그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인경은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약 자.
빼앗겼던 자신의 작품을 되찾기 위 해서 감히 비싼 돈과 많은 시간이 드는 소송을 할 생각을 하기 힘들었 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양승일 대표와 황병기 감독이 자신만만한 이유 중 하나였다.
‘네가 소송을 할 거야? 뭘 어쩔 거 야?’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욱 거침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었다.
그때, 지인경이 우려 섞인 표정으 로 물었다.
“소송을 하시면 승산은 있으신 건 가요?”
이규한이 대답했다.
“그건 지 작가님에게 달려 있습니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 작가님이 어떤 선택을 내리느 냐에 따라서 결과가 바찔 것이라는 뜻입니다.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지 작가님이니까요.”
지인경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 는 표정이었다.
해서 이규한이 부연 설명을 더했 다.
“반딧불이의 양승일 대표,그리고 황병기 감독을 상대로 표절 관련 소 송을 할 겁니다. 그리고 제가 알아 본 바로 표절 소송에서 중요한 증거 는 저작권 등록 시기였습니다. 물론 주고받은 메일의 내용이나 일자,한 글 파일을 작성한 시점 등도 고려 대상이 되지만,가장 결정적인 요인 은 저작권 등록 일자입니다. 그래서 ‘수상한 여자’가 ‘젊어진 그녀’에 비 해 불리한 입장이라는 것은 부인하 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왜 불리한 상황인 거죠?”
“지 작가님이 ‘노파에서 처녀가 된 그녀’의 저작권 등록을 했던 시점이 ‘수상한 여자’에 비해서 더 빨랐으 니까요.”
지인경 작가는 바보가 아니었다.
양승일 대표,황병기 감독, 그 외 여러 영화계 사람들에게 속고 억울 한 일을 당하는 과정에서 교훈을 얻 었다.
그래서 ‘노파에서 처녀가 된 그녀’ 라는 작품을 구상해서 기본적인 줄 거리가 나오자마자,저작권 등록부 터 했다.
비로소 말뜻을 이해한 지인경 작가 가 물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규한이 대답했다.
“아마 황병기 감독과 양승일 대표 에게서 연락이 올 겁니다. 그때,지 작가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시 면 됩니다.” “제 뜻대로 하라는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아마 그들은 부탁을 할 겁니다. 지 작가님이 ‘노파에서 처 녀가 된 그녀’의 저작권 등록을 해 둔 것이 필요할 테니까요.”
지인경 작가를 언제든 뜻대로 움직 일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지인경 작 가는 ‘노파에서 처녀가 된 그녀’라 는 작품의 저작권 등록을 해 둔 상 황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사 반딧불이의 양승일 대표와 황병기 감독은 굳이 ‘젊어진 그녀’ 의 저작권 등록을 따로 해 두지 않 았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규한이 찾아가서 소송을 할 거라고 엄포를 늘어놓았 다.
그로 인해 조급해진 양승일 대표와 황병기 감독은 먼저 지인경 작가에 게 연락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이 지 작가님에게 어떤 약속 을 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크레 딧에 다시 이름을 올려주고,지급하 지 않았던 작가료를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소송 에서 패해서 작품을 접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이득일 테니까요.”
지인경은 아직 크레딧이 없는 작 가.
게다가 생계에도 곤란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일까.
이규한이 예상하고 있는 양승일 대 표와 황병기 감독의 약속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낸 순간,그녀가 두 눈 을 빛냈다.
“어쩌면 협박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영화판에 발을 못 붙이도록 만들어 주겠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하겠죠.”
이미 협박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 문일까.
지인경 작가의 낯빛이 핼쑥하게 변 한 순간,이규한이 덧붙였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결정은 지 작가님의 몫입니다.”
지인경 작가가 어떤 선택을 내리느 냐?
여기에 따라서 ‘수상한 여자’의 제 작 여부가 달려 있었다.
또,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향후 운명도 달라질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그녀의 선택을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지인경 작가의 인생이 었고,또 선택이었으니까.
“그럼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이규한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 다.
“이 대표님.”
“말씀하시죠.”
지인경 작가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 을 뗐다.
“실은 벌써 연락이 왔었습니다.”
스육.
이규한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 짐작대로군!’
지인경 작가에게 두 사람이 먼저 연락을 취했다는 것.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었 다. 그리고 이것은 ‘젊어진 그녀’의 저작권 등록을 따로 해 두지 않았다 는 증거이기도 했다.
‘내 예상보다 더 빠르다?’
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다.
양승일 대표와 황병기 감독이 지인 경 작가에게 연락을 취한 시점.
이규한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랐 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
예상치 못했던 상황 전개와 이규한 이 소송을 하겠다는 협박을 한 것으 로 인해 그들이 무척 당황했다는 증
거였다.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지인경 작가에게 먼저 연락한 그들 이 대체 어떤 이야기를 꺼냈을까? 이규한의 호기심이 치밀었을 때였 다.
지인경 작가가 씁쓸한 웃음을 입가 에 머금은 채 말했다.
“다짜고짜 화를 내더군요.”
“지 작가님에게 화를 냈다고요?”
‘적반하장(賊反荷杖)!’
양승일 대표가 지인경 작가에게 연 락을 해서 다짜고짜 화부터 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이규한이 떠올
린 사자성어였다.
‘화를 낼 자격이 있나?’
이규한이 판단하기에 영화사 반덧 불이의 양승일 대표와 황병기 감독 은 지인경 작가에게 화를 낼 자격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 고 백번 사과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래서 이규한이 의아한 시선을 던 질 때,지인경 작가가 다시 말했다.
“‘노파에서 처녀가 된 그녀’가 진 짜 제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맞느냐 고 추궁하면서 화를 냈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은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번 양승일 대표와 황병기 감독 을 만난 자리에서 이규한은 ‘수상한 여자’의 시나리오 책을 두고 왔었 다.
그들은 ‘수상한 여자’의 내용을 확 인했을 것이고,핵심 소재는 물론이 고 이야기 전개도 엇비슷하다는 것 을 알게 됐을 것이었다. 그래서 ‘노 파에서 처녀가 된 그녀’를 쓴 지인 경 작가가 ‘수상한 여자’를 표절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품었으리라.
그때 였다.
“내가 표절했다고 대답했어요.”
지인경 작가가 꺼낸 말을 들은 이 규한이 두 눈을 치켜떴다.
그녀가 ‘수상한 여자’라는 작품을 표절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규한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대답했습니까?”
“화가 나서요.”
" ……?"
“내 작품을 빼앗아간 사람들이 제 게 그렇게 추궁하는 순간 너무 화가 났어요. 그래서 욱 하는 마음에 그 렇게 대답해 버렸어요.”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