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화
순서의 문제 (1)
한때 영화 제작자가 갑 중 갑이었 던 시절도 있었지만,이젠 옛날 이 야기 였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와 빅박스,로 터스 엔터테인먼트,그리고 NEXT 엔터테인먼트까지 .
투자 배급사의 규모가 비대해지고, 영화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 면서 영화 산업의 지형도는 빠르게
바뀌었다.
한때 갑 중 갑이었던 영화 제작자 는 이제는 갑의 지위에서 내려왔다.
그나마 을의 지위로 내려왔으면 다 행이었을 텐데.
갑(甲)의 지위를 투자 배급사에게 빼앗긴 영화 제작자의 지위는 을 (Z)도 병 (]치)도 아닌 정 (T)으로 추 락했다.
투자 유치에 결정적인 요인 중 하 나가 된 감독과 배우들에게도 순위 가 밀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화 제작사들이 충무로를 떠난 이유 중 하나가 메이저 투자배급사들과 멀지 않은 곳에 사무실을 얻기 위함이었 이런 사정으로 충무로에 남아 있는 영화 제작사들의 수는 손에 꼽을 정 도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영화사 반 딧불이는 아직까지 충무로에 남아 있는 많지 않은 영화 제작사 가운데 하나였다.
충무로 필동.
방송에도 수차례 출연한 유명한 평 양냉면 전문점인 필동 면옥에서 좌 측으로 꺾어 약 이백 미터가량 걸어 가자,영화사 반딧불이의 간판이 보 였다.
계단을 통해 삼층으로 올라간 이규 한이 벨을 누르자,여직원이 문을 열었다.
“이규한 대표님이신가요?”
“네,맞습니다. 양승일 대표님과 약 속을 했습니다.”
“들어오세요.”
이규한이 앤틱한 분위기의 사무실 을 둘러보고 있을 때,양승일 대표 가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다가왔다.
‘양승일 입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눈 후,양승일은 좀 전에 나왔던 대표실을 향해 소리 쳤다.
“황 감독,나와서 인사해.”
‘황 감독? 황병기와 함께 있었던 건가?’
대한민국에 황씨 성을 가진 감독은 그리 흔치 않았다. 그래서 황병기 감독이 마침 양승일 대표와 함께 있 는 게 아닐까 했던 이규한의 예측은 적중했다.
“자,오신 김에 인사나 나누시죠.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 함께 작품을 이규한이 앞으로 다가오는 황병기 감독을 살폈다.
얄팍한 입술과 살짝 치켜 올라가서 신경질적으로 느껴지는 눈매가 인상 적인 황병기 감독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감독 황병기입니다.”
“영화 제작 일을 하고 있는 이규한 이라고 합니다.”
평소라면 명함을 꺼내서 건넸으리 라.
그렇지만 이규한은 황병기 감독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더구나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황병 기 감독의 표정을 마주하고 나니, 명함을 꺼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 졌다.
“자,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미스 정,여기 차 좀 부탁해.”
양승일이 앞장서서 대표실로 들어 갔다.
약 세 평 정도 되는 대표실로 따 라 들어간 이규한이 양승일이 권한 소파에 앉았다.
여직원이 아이스커피를 내려놓은 순간,양승일이 질문했다.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의 김기현 대
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입니까?”
“대학 동창입니다. 가끔씩 술도 한 잔씩 하는 친구이기도 하고. 그 인 연으로 이번에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이라는 작품을 공동 제 작 했죠.”
“아,친한 친구시로군요. 이거 잘 부탁드립니다.”
“네?”
“나중에 김기현 대표를 만나게 되 면 제 이야기를 잘 좀 해 달라는 부탁하는 겁니다. 씨제스 엔터테인 먼트에서 투자 좀 받게요.”
양승일이 마치 농담처럼 부탁했다.
“아,김기현 대표님과 친구분이셨 군요. 이거 잘 부탁드립니다.”
기회를 놓칠세라 황병기 감독도 이 규한에게 부탁했다.
그런 황병기 감독의 표정.
아까와는 달랐다.
귀찮은 기색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 고,이규한에게 깍듯하게 고개까지 숙이면서 부탁했다. 그리고 황병기 감독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는 뻔했 다.
이규한이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인 김대환의 아들이자 스카 이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인 김기현과 대학 동창이자 친구 사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더 마음에 안 드네!’
그런 황병기 감독의 태세 전환을 확인한 순간,이규한이 속으로 한 생각이었다.
강자에는 약하고,약자에게는 강한 전형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양승일 대표가 물었다.
“그런데 왜 저를 만나자고 하신 겁 니까?”
“영화사 반딧불이에서 준비하고 있 는 ‘젊어진 그녀’라는 작품 때문입 니다.” 이규한이 대답하자,양승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가 ‘젊어진 그녀’라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 습니까?”
“로터스 엔터테인먼트 투자팀 권지 영 팀장에게서 우연히 전해 들었습 니다.”
“아,그렇군요.”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를 받기 위해서 ‘젊어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양 승일 대표가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 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이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그 작품,접으시죠.”
양승일이 두 눈을 연신 깜박였다.
‘젊어진 그녀’라는 작품을 다짜고 짜 접으라고 하는 이규한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 다.
당황한 것은 황병기 감독도 마찬가 지였다.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상황을 파 악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갑자기 뭘 접으라는 겁니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양승일 대
표가 물었다.
“영화사 반딧불이에서 현재 준비하 고 있는 ‘젊어진 그녀’라는 작품의 제작을 중단하라는 뜻입니다.”
이규한이 대답한 순간,황병기 감 독이 발끈했다.
“남의 영화사에 갑자기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준비하고 있는 작품을 접 으라고 말하는 것,너무 무례한 행 동이 아닙니까?”
황병기 감독의 목소리는 살짝 격앙 되어 있었다.
만약 이규한이 김기현과 친구 사이 라는 사실을 몰랐다면,황병기 감독 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으리라.
황병기 감독이 쏘아보는 눈빛.
무척 매서웠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황병기의 시선 을 피하지 않았다.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 서로 노려 보고 있을 때,양승일 대표가 입을 뗐다.
“어디 이유나 들어봅시다. 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겁니까?”
“저희 회사에서 준비하고 있는 작 품 중에 ‘수상한 여자’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작품과 ‘젊어진 그녀’ 의 핵심 소재가 겹칩니다.”
“그래서 우리 쪽에서 준비하는 ‘젊
어진 그녀’를 접어라?”
“맞습니다.”
이규한이 대답하자,양승일이 황당 하단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왜 접어야 합니까?”
“그 편이 맞으니까요.”
“대체 뭐가 맞다는 거요?”
이규한이 대답했다.
“이건 순서의 문제이니까요.”
‘순서의 문제.’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직면한 순 간,이규한은 이렇게 판단했다. 그래 서 김미주에게 지시해서 판례부터 찾았다.
‘좋게 말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만큼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는 것까지 배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김미주가 찾아낸 판례는 이규한이 준비하고 있는 ‘수상한 여자’에 불 리했다.
저작권 등록.
법원의 판례에 따르면 작품들의 핵 심 소재가 겹치면서 표절 시비가 불 거질 경우,저작권 등록 시기를 중 요한 증거로 판단했다.
한국 저작권 위원회에 어느 작품이
더 빨리 저작권 등록을 했느냐?
저작권 등록을 빨리한 작품이 법적 분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섰다. 그리 고 저작권 등록을 한 시기는 ‘노파 에서 처녀가 된 그녀’가 ‘수상한 여 자’보다 더 빨랐다.
‘너무 안일했어!’
법원의 판례에 대해서 알아보고 난 후 이규한이 자책했다.
이규한이 알고 있던 미래에서 ‘수 상한 여자’의 시나리오 초고를 썼던 원안자인 김단비와 작품의 감독인 황병기가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황병기 감독이 ‘수상한 여 자’와 소재가 겹치는 ‘젊어진 그녀’ 라는 작품을 준비할 것을 전혀 예측 하지 못했다.
‘굳이 저작권 등록을 서두를 필요 는 없다!’
그로 인해 너무 안일하게 판단했 고,안유천이 ‘수상한 여자’의 시나 리오 초고를 쓰고 난 후에야 저작권 을 등록했었다.
이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그사이에 지인경 작가가 ‘노파에서 처녀가 된 그녀’의 저작권 등록을 먼저 했기 때문이었다.
저작권 등록을 한 시기가 ‘수상한 여자’가 늦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이규한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 안유천과 김단비.
두 작가와 계약을 하고 각본료를 이미 지불한 상황.
게다가 강형진 감독에게도 거액의 계약금을 지급한 상황이었다.
‘만약 빼앗긴다면?’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입장에서는 큰 손실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 더.
배정훈 감독과의 계약도 물 건너갈 터였다.
‘수상한 여자’에 이어 ‘스파이들’까 지.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커다란 위기에 봉착할 가능성이 높았다.
‘큰일이네!’
‘수상한 여자’의 제작이 무산될 경 우의 파장에 대해서 고민하던 이규 한이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가정하고 있는 최악의 경우 가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때 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였다.
“지금 이 대표 나이가 몇인가?”
양승일 대표가 불쑥 나이를 물었 “제가 그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습 니까?”
“내가 보기에는 아직 꽤 젊어 보이 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바닥 사정 을 잘 모르는 것 같군.”
“제가 무슨 사정을 모른다는 겁니 까?”
“젊은 사람다운 패기는 좋아. 그런 데 패기 하나만 갖고 성공할 정도로 이 바닥이 만만한 곳이 아니야. 그 래서 지금 이 대표의 태도는 무척 위험해.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될 적 을 만들고 있으니까. 그것도 무척 강한 적이지.” 양승일 대표가 충고를 건넸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고개를 혼들었 다.
“착각하고 계시군요.”
“착각?”
“저는 이 바닥 사정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죠. 제가 한 번 말씀드려 볼까 요?”
“……9”
“아이디어가 좋아서 소재를 잘 개 발하는 신인 작가를 발견하고 나서 대표님은 눈이 번쩍 뜨였을 겁니다.
야,이거 돈이 되는 아이디어다. 또, 돈이 되는 작가다. 앞으로 이 신인 작가를 내가 잘 이용해야겠다.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뭐,거기까 지는 괜찮습니다. 가능성이 있는 신 인 작가를 발굴하는 것,영화 제작 자에게는 복이자 능력이니까요. 그 런데 문제는 그 신인 작가에게 정당 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겁니 다.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그럼 너는 머잖아 대단한 흥 행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가 되면 돈과 명예를 모두 손에 거 머쥘 수 있다. 신인 작가와 계약서 를 작성하고 정당한 각본료를 지불 하는 대신 이런 감언이설을 늘어놓 으면서 실컷 이용했죠. 아,감언이설 이 다가 아니겠군요. 모르긴 몰라도 협박도 했을 겁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영화판에서 내게 입보이고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넌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영화판에 발을 붙이지 못한 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