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제 버릇 개 못 준다 (2) “그래?”
이규한이 넌지시 거절 의사를 밝히 자,하태열의 표정은 금세 다시 어 두워졌다.
벌컥벌컥.
갈증이 치미는 둣 잔의 절반쯤 남 아 있던 맥주를 단숨에 비우고 내려 놓는 하태열을 바라보던 이규한이 다시 말했다.
“대신 다른 회사를 소개해 드릴게 요.”
“다른 회사? 어디?”
“램프 엔터테인먼트요.”
이규한의 전 직장이었던 램프 엔터 테인먼트.
얼마 전 이규한은 램프 엔터테인먼 트를 찾아갔었다.
“괜찮은 피디를 소개해 줄게요. 감 각이랑 실력이 괜찮은 편이고,양심 도 있는 피디로요.” 당시 이규한이 램프 엔터테인먼트 의 대표인 박태혁에게 했던 약속이 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아직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는 터라,미처 거기 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 었다.
물론 박태혁은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수시로 이규한에게 전화를 걸고 문 자를 보내와서 대체 언제 약속을 지 킬 것이냐고 재촉했다.
그로 인해 이규한도 나름 스트레스 를 받고 있었던 상황.
괜한 약속을 했던 게 아닌가 하며 후회하던 찰나에 하태열을 만난 것 이었다.
병}태열 선배 정도면 적임자가 아 닐까?’
하태열이 무척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규한이 퍼뜩 떠올렸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런 제안을 건넨 것이었 고.
“램프 엔터테인먼트라면 네가 제작 사 차리기 전까지 일했던 곳이잖 아?”
“맞아요.”
“거기 대표가 박태혁,맞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답게 하태열은 램프 엔터테인먼트에 대해 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박태혁의 이름을 꺼내는 하태열의 표정은 그 다지 밝지 않았다.
그것을 캐치한 이규한이 물었다.
“왜요? 내키지 않으세요?”
“그게……
“편하게 말씀하세요.”
“램프 엔터테인먼트의 박태혁 대표 에 대한 소문이 별로라서.”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데요?”
“피디 무시하고,갑질도 무척 심하 다는 소문.” 이규한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램프 엔터테인먼트에서 꽤 오랫동 안 일했던 덕분에 이규한은 박태혁 대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쪼잔한 구석이 있었고,욱하는 성 격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아랫사 람이라 할 수 있는 피디 이규한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규한의 의견에 자주 귀를 기울였던 편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소문이 퍼졌을 까?’
그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던 이규한 이 떠올린 것은,자신의 퇴사 후 램 프 엔터테인먼트로 입사했던 세 명 의 피디들이었다.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나서겠다 는 목표를 세운 박태혁이 의욕적으 로 영입했던 세 명의 피디들.
그렇지만 램프 엔터테인먼트의 대 표인 박태혁과 세 피디들의 동행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 명의 피디들에게 속았다는 사실 을 이규한이 박태혁에게 알려 주었 기 때문이었다.
이규한의 조언을 들은 박태혁은 일 방적으로 피디들에게 해고 통보를 했다.
‘앙심을 품었을 거야!’ 거기에 앙심을 품은 세 피디들이 박태혁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 뜨렸을 확률이 무척 높았다.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이규한이 입을 뗐다.
“선배,억울하죠?”
“갑자기 무슨 소리야?”
“황병기 감독 때문에 악의적인 소 문이 퍼진 것이요.”
“당연히 억울하지.”
하태열이 언성을 높인 순간,이규 한이 덧붙였다.
“박태혁 대표도 마찬가지에요.”
“마찬가지라니?” “악의적인 소문을 누군가 퍼뜨린 거예요. 제가 경험해 본 박태혁 대 표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에 요.”
“그래?”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하 태열을 확인한 이규한이 덧붙였다.
“영화계에 떠도는 소문보다는 직접 경험했던 사람의 말이 정확하지 않 겠어요?”
하태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그에게 이규한이 다시 말했 다.
“결국 선택은 선배의 몫이에요.”
“그렇지.”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조언은 하 나에요.”
“뭔데?”
이규한이 대답했다.
“박태혁 대표. 최소한 양아치는 아 니에요.”
열에 아홉은 사기꾼과 양아치.
이규한이 경험했던 영화판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박태혁은 양반이 었다.
그의 인품이 훌륭해서가 아니었다.
박태혁은 건축업을 하다가 영화 제 작에 뛰어든 인물.
그래서 아직 때가 덜 묻은 것이었 다.
“해 볼게.”
한참 고민하던 하태열이 대답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지금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이것저 것 가릴 때가 아니지. 어쨌든 고맙 다. 이렇게 신경 써 줘서.”
감사 인사를 건네던 하태열이 물었 다.
1아까 겸사겸사 만났다고 했지?” “날 찾아온 다른 이유는 뭐야?”
“황병기 감독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어서요.”
이규한이 대답하자,하태열이 미간 을 슬쩍 찌푸렸다.
악연으로 얽혀 있는 황병기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내심 불 편하기 때문이리라.
그 사실을 알기에 하태열에게 미안 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규한도 무척 급한 상 황.
계속 망설이면서 미룰 수는 없었 다.
그래서 이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황병기 감독이 반딧불이 양승일 대표와 손잡고 ‘젊어진 그녀’라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데. 혹시 알고 계셨어요?”
“처음 들어보는데?”
고개를 갸웃하는 하태열을 확인한 이규한이 살짝 실망했을 때였다.
“아,혹시 그건가?”
“네?”
“‘바람의 기억’을 준비하고 있을 때,황병기가 데려온 작가가 있었어. 그 작가가 쓴 책이라면서 나한테 보 여 준 작품이 있는데. 그 작품 제목 이 ‘노파에서 처녀가 된 그녀’였어. 얼추 제목이 비슷한 것 같은데?”
하태열의 이야기를 듣던 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다.
‘노파에서 처녀가 된 그녀’와 ‘젊어 진 그녀’.
제목이 바뀌었지만,핵심 소재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분명히 같은 작품이었다.
“잠시만요.”
이규한이 휴대전화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리고 로터스 엔터테인먼 트 투자팀 팀장인 권지영에게 전화 를 걸었다.
“이 대표님,이 시간에 어쩐 일로 전화하셨어요?”
“늦게 전화해서 미안해.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어.”
“무슨 부탁인데요?”
“빅박스에 들어가 있는 ‘젊어진 그 녀’라는 작품 말이야. 시나리오를 쓴 게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래. 기다릴게.”
통화를 마치고 약 오 분 후,문자 가 도착했다.
- 각본과 연출 모두 황병기 감독 이라고 하네요.
권지영 팀장이 보낸 문자를 확인한 이규한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예상대로야.’
아까 하태열은 ‘노파에서 처녀가 된 그녀’라는 작품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가 따로 있다고 말했었다.
그렇지만 빅박스에 투자 심의를 받 기 위해서 들어가 있는 ‘젊어진 그 녀’의 각본 크레덧에 이름을 올린 것은 황병기 감독이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황병기 감독이 그 작가의 이름을 빼고 각본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을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니? 그게 무 슨 뜻이야?”
이규한의 혼잣말을 들은 하태열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런 게 있어요. 그보다 혹시 그 작가 이름을 기억하고 계세요?”
“‘노파에서 처녀가 된 그녀’라는 작품을 쓴 작가 말이지?”
“네.”
“이름이 뭐였더라?”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던 하태열이 한참 만에 입을 뗐다.
“지인경 작가야.” 톡. 톡. 토도독.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칠게 흘 러나왔다.
격앙된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난 탓 에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는 무척 컸 다.
그 소리가 신경이 쓰이기 때문일 까.
조용한 작은 카페 안의 다른 손님 들이 노트북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 드리는 지인경을 힐끔거리며 살폈 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다가가서 노 골적으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쿵!”
그녀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휴지로 눈물과 콧물을 연신 닦으면 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지인경을 한참 바라보던 이규한이 그녀의 앞 으로 다가갔다.
“지인경 작가님?”
“누구… 세요?”
“이규한이라고 합니다.”
이규한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서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 명함을 건네받아 살피던 지인경 이 이규한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 다.
“영화 제작자?”
“맞습니다.”
“왜 절 찾아오셨죠?”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어서 찾아왔 습니다.”
“뭐가 궁금한데요?”
지인경의 목소리는 무척 신경질적 이었다.
또,무척 공격적이었다.
그 사실을 간파한 이규한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입을 뗐다.
“사기꾼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을 당한 탓에 영화 일을 하 는 사람들에게 불만과 불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들과 다릅니다. 물 론 믿지 않으시겠지만.”
나는 사기꾼이나 양아치가 아닙니 다.
당신이 그동안 이 바닥에서 경험했 던 영화 제작사 대표들이나 영화감
독들과는 질이 다른 사람입니다.
이규한이 이렇게 주장한다 한들, 지인경이 순순히 믿을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여러 차례 사람에게 속다 보면 사 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 마련이 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자신에게 불신이 가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지인경을 확인 한 이규한이 쓰게 웃었다.
몇 마디 말로 지인경의 불신을 해 소할 수는 없다는 사실.
이규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인경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위 해서는 그녀가 보이고 있는 불신을 해소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네,못 믿겠어요.”
지인경은 이규한의 말을 믿지 못하 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제 말을 믿게 만들 수 있을까요?”
“방법은 없어요.”
“네?”
“계약서도 소용없는 바닥에서 머리 검은 짐승인 사람의 말을 믿는다? 이제 신물이 날 정도니까 그만 꺼져 주시죠.” 지인경의 말투는 여전히 공격적이 고 거칠었다.
그렇지만 그녀를 탓하기는 어려웠 다.
굳이 탓을 할 원인 제공자를 찾자 면,그동안 지인경을 속이고 이용했 던 나쁜 영화계 사람들을 탓해야 했 다.
해서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이 규한이 입을 뗐다.
“아무도 못 믿는 건가요?”
“네,믿지 않아요.”
“단 한 명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나요?” “아무도……
이 바닥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게 대답하려던 지인경이 도중 에 멈칫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누군가 믿는 사람이 있군요.”
“딱 한 사람 있긴 해요.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서 기꺼이 나서서 싸 워 주었던 그 사람은 믿어요.”
“그 사람이 누구죠?”
이규한이 묻자,지인경이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기억을 더듬다가 대답 “하태열 피디님.”
상처가 많은 사람은 자연히 의심도 많아지는 법.
‘지인경 작가는 어느 누구도 쉽게 믿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이규한은 미리 이렇게 예상했다.
해서 지인경을 만나기 위해서 혼자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규한과 함께 지인경을 만나러 찾아온 사람 이 존재했다.
바로 하태열이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