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제 버릇 개 못 준다 ⑴ 권지영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투자 팀 팀장 직책에 올랐다.
유리 천장이 엄연히 존재하는 대한 민국 영화계에서 여자의 몸으로 이 른 나이에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의 투자팀 팀장 직책에 오른 것.
그녀가 워커홀릭에 가까울 정도로 열심히 일해 온 덕분이었다.
또,성공에 대한 야망과 열정이 존 재했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성과 였다.
그래서일까.
“천만 영화로 만들 자신이 있어!”
이규한이 넌지시 덧붙인 말을 들은 권지영의 두 눈에 예상대로 감출 수 없는 욕심이 깃들었다.
‘넘어갔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이렇게 판단했을 때였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권지영이 물었다.
“권 팀장,핵심 소재가 겹치는 영 화가 동시에 제작돼서 엇비슷한 시 기에 개봉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 아?”
“당연히 두 작품 모두에게 마이너 스죠.”
“그래. 두 작품 중 한 작품만 제작 이 돼야 해. 그것을 위해서는 일단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는 게 필요 해.”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빅박스 쪽에 저와 친분이 있는 직원이 있으 니까 한번 물어보고 올게요.”
권지영은 눈치가 빨랐다.
재빨리 휴대전화를 들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약 십여 분 후,그녀가 통화를 마 치고 돌아왔다.
“빅박스 투자팀에서 ‘젊어진 그녀’ 의 투자 심의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 이래요.”
“분위기는 어떻대?”
“저희 쪽과 비슷해요.”
“소재는 재밌지만 시나리오의 디테 일이 부족하다. 그리고 ‘젊어진 그 녀’의 연출을 맡을 황병기 감독의 평판이 좋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린 다. 맞아?” “정확해요.”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권 지영이 덧붙였다.
“그런데 결론은 달라요.”
“어떻게 다르다는 거야?”
“저희는 그런 이유로 ‘젊어진 그 녀’의 투자에 부정적이었던 반면, 빅박스 측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투 자를 검토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유는?”
“아무래도 빅박스 윗선과 반딧불이 양승일 대표의 우호적인 관계가 영 향을 미치면서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아요.” 내심 원하던 정보를 얻어 내는 데 성공한 이규한이 생각에 잠겼다.
‘불리한 건 우리 쪽이다!’
‘젊어진 그녀’의 경우,이미 빅박스 에서 투자 심의가 긍정적인 방향으 로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 ‘수상한 여자’는 아직 투자 심의조차 받기 전이었다.
작품의 진전 상황에 차이가 있었 다.
‘결국 시간 싸움!’
비록 불리한 상황임은 틀림없었지 만,벌써 포기하기는 일렀다.
반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여지는
아직 남아 있었다.
“나 먼저 일어날게.”
이규한이 서둘러 일어나자,권지영 이 물었다.
“저녁 식사는요?”
“다음에 해. 지금 한가하게 권 팀 장이랑 밥 먹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규한이 백팩을 서둘러 둘러댔을 때,권지영이 물었다.
“혹시 제가 더 도울 건 없나요?”
“권 팀장이 도와줄 부분? 당연히 있지. 분위기를 한번 조성해 봐.”
“무슨 분위기요?”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을
준비하고 있는 ‘수상한 여자’라는 작품. 분명히 흥행이 된다. 그러니까 다른 투자배급사에게 ‘수상한 여자’ 라는 작품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최 대한 투자 심의를 서둘러야 한다. 이렇게 분위기를 조성해 달란 뜻이 야.”
이규한이 꺼낸 말뜻을 알아들은 권 지영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맡겨 두세요.”
“그래. 권 팀장만 믿을게.”
그 말을 끝으로 이규한이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서두르면 안 돼!’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급하다고 해서 너무 서두르 다 보면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었다.
로터스 엔터테인먼트를 빠져나온 이규한은 사무실로 향했다.
막 퇴근 준비를 하고 있던 김미주 가 이규한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참 일찍도 출근하셨네요.”
김미주가 슬쩍 비꼬았다.
평소라면 그녀의 상대를 해 주었겠 지만,오늘은 그럴 심적 여유조차 없었다. 그래서 이규한은 그녀를 상 대하는 대신 부탁을 꺼냈다.
“미주 씨,오늘 야근 좀 하자.”
“갑자기 야근이요?”
“왜? 약속 있어?”
“약속은 없지만……
“그럼 뭐가 문제야?”
“시간 외 근무 수당은 챙겨 주실
거죠?”
“당연하지.”
이규한이 지체 없이 대답하자,김 미주가 의욕을 불태우며 곧바로 태 세를 전환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판례를 좀 찾아 봐.”
“판례요?”
예상치 못했던 부탁이기 때문일까. 김미주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변호사는 뒀다가 국 끓여 먹으시 려고요?”
“변호사는 너무 비싸잖아. 그리고 일처리 속도가 너무 느려. 그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그래.”
“너무 막 부려먹으시는 것 아니에 요?”
“부탁 좀 할게.”
“대표님,나중에 성공하면 변호사 부터 한 명 구하세요.”
“왜?”
“제가 노동청에 악덕 사업주로 고 발할 거니까요.”
“충고 새겨들을게.”
“말이나 못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김미주가 물었다.
“어떤 판례를 찾으면 되는데요?”
“저작권 분쟁에 관한 판례를 찾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핵심 소재 가 비슷해서 표절 시비가 불거졌을 경우,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 기 위해서 필요한 증거들이 무엇인 지 알아야 해.”
김미주의 장점 중 하나.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툴툴거리지 만,막상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 무척 속도가 빠르다는 점이었다.
타다다닷.
컴퓨터 앞에 앉은 김미주가 자판을 두드리며 판례 검색을 시작했다. 그 리고 이규한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휴대전화 연락처를 검색하던 이규 한의 눈에 하태열이란 이름이 들어 왔다.
‘태열 선배라면 알 수 있지 않을 까?’
하태열은 대학 선배.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다가 필요 한 것이 있을 때만 하태열에게 연락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 다.
그렇지만 계속 머뭇거릴 여유가 없 었기에,결국 이규한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이규한?” “오랜만이네요,선배님.”
“그래. 이게 얼마만이야? 네 소식 은 들었다. 제작사 차렸다면서?”
‘역시 이 바닥 좁아!’
자신이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를 차 렸다는 사실을 하태열이 알고 있다 는 사실을 깨닫고 이규한이 쓰게 웃 으며 입을 뗐다.
“그렇게 됐습니다.”
“잘됐네. 너라면 성공할 수 있을 거야.”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했어?”
“선배님께 여쭤볼 게 있어서요.” “뭔데?”
“황병기 감독과 같이 일하신 적 있 으시죠?”
“황병기? 그 싸가지 없는 자식 이 야기는 왜 갑자기 꺼내는 거야?”
단지 황병기 감독의 이름을 꺼냈을 뿐이었는데,하태열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자식 이름 들으니까 갑자기 술 생각나네.”
하태열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꺼낸 말을 들은 이규한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안했다.
“그럼 한잔하시겠습니까?”
“네가 살 거야?”
“제가 사겠습니다.”
이규한이 흔쾌히 대답하자마자,하 태열이 소리쳤다.
“콜! 어디서 만날까?” 논현역 인근의 호프집에서 하태열 을 만났다.
채앵.
건배를 마친 하태열이 생맥주를 절 반가량 단숨에 비웠다.
“어,시원하다.”
하태열이 환하게 웃자,가뜩이나 작은 눈이 더욱 작아졌다. 하회탈이란 하태열의 학창 시절 별 명이 문득 떠올라서 이규한이 픽 하 고 실소를 터트린 후 물었다.
“요즘은 어떠세요?”
“뭐,죽을 맛이지.”
“작품은 안 하세요?”
“좀 쉬고 있는 중이야.”
“왜 쉬고 계세요?”
“그 자식 때문에.”
" ……?"
“황병기 말이야.”
이규한이 하태열에게 전화를 걸었 던 이유.
하태열이 황병기 감독과 함께 작품 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태열은 프로듀서,황병기는 감독 으로서 같은 작품에 참여했었다.
작품명은 ‘바람의 기억’.
불륜을 소재로 했던 코미디 영화였 다.
“‘바람의 기억’,스코어는 괜찮았잖 아요?”
“간신히 손익분기점은 넘겼지. 그 런데 황병기 그 자식 때문에 제작을 하는 과정에서 너무 힘들었어.”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하태열이 생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대답했다.
“갑질이 너무 심했어. 투자사 쪽 사람들에게는 납작 엎드려서 알랑방 귀를 뀌면서,힘없는 작가나 스렙들 에게는 온갖 패악질을 부렸지.”
이규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 야기.
이런 일들로 인해 촬영 현장에서 잡음이 불거졌던 것이 ‘바람의 기 억’이 손익분기점을 넘겼음에도 불 구하고 황병기 감독의 평판이 나빠 진 이유였다.
“내가 어지간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황병 기와 대판 싸우고 나서 관뒀어.”
하태열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한 후,손을 들었다.
“여기 생맥 하나 더.”
그런 그를 살피던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이 ‘바람의 기억’에 프로듀서 로 참여했던 하태열의 이름이 정작 크레딧에서 빠졌던 이유였다.
그리고 하태열이 요즘 쉬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작품에 참여했던 프로듀서가 감독 을 비롯한 제작진과 마찰을 일으키 는 것.
결국 마이너스 요소였기 때문이었 다.
그 소문이 퍼지면서 하태열에게는 더 이상 일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 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날 만나자고 한 거야?”
“겸사겸사요.”
“겸사겸사라니?”
새로 주문한 생맥주를 들어 올리며 하태열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다시 현장에 복귀하셔야죠.”
그런 그에게 이규한이 제안했다.
“그래야지.”
하태열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곤 란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런데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
“황병기 감독 때문에요?”
“그래. 소문이 너무 안 좋게 퍼졌 어.”
하태열이 생맥주를 절반쯤 비운 후 대답했다.
굳이 부연 설명은 필요 없었다.
아까 이규한도 생각했듯이 영화판 은 생각보다 훨씬 좁은 바닥이었다.
소문은 금세 퍼졌다.
특히 악의적인 소문이라면 더욱 그 랬다.
그래서 남을 성공하게 만들 순 없 지만,남을 망하게 하는 것은 가능 한 것이 바로 영화판이기도 했다.
아마 황병기는 당시 촬영 현장에서 하태열과 충돌한 것으로 인해 앙심 을 품고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 을 것이었다.
그 악의적인 소문이 빠르게 퍼지며 하태열은 일할 곳을 찾기 어려워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쉬고 있는 것 이리라.
그래서 안타까운 시선을 던지던 이 규한의 눈에 연신 맥주잔을 매만지
고 있는 하태열의 모습이 들어왔다.
한참을 망설이고 또 망설이는 하태 열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느 껴졌다.
그런 이규한의 예상은 적중했다.
잠시 후,하태열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규한아. 아니,이 대표.”
“말씀하세요.”
“이 대표 회사에서 일 좀 시켜 주 면 안 될까? 내가 욱하는 성격이 있어서 그렇지. 일은 깔끔하게 잘한 다는 것,이 대표는 알잖아?”
“잘 알고 있죠.” 하태열은 프로듀서로서 능력이 있 었다. 그리고 이규한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대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간 다고 판단해서일까.
하태열의 표정이 밝아진 순간,이 규한이 입을 뗐다.
“저도 선배와 함께 일하고 싶은데, 아직 제작사를 차린 지 얼마 안 돼 서 제대로 자리를 못 잡았어요.”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