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화
연애무식자 이규한이 크레덧에 표기되는 순서 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 다.
그 설명을 듣던 김단비 작가의 표 정은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 그리고 이규한이 설명을 마친 순간,김단비 작가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뗐다.
“그래서 아까 합의했냐고 물었던
것이군요.”
“맞아. 합의한 거야?”
“그게……
김단비가 도중에 말을 멈추고 안유 천을 바라보았다.
이규한의 시선도 안유천에게로 향 했다.
“일전에 내가 알려 줬으니까 넌 크 레딧 순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
“대충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김 작가한테 안 알려 줬어?”
“그냥요.” “그냥?”
“어차피 제 이름이 두 번째로 들어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래서 일부러 설명을 안 했습니다.”
안유천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다 시 물었다.
“왜 네 이름이 각본 크레딧에 두 번째로 들어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 거야?”
“이번 각본 작업에 여기 김 작가의 기여도가 훨씬 더 크다고 판단했거 든요.”
“그래서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았고, 합의도 하지 않았다?”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이규한 이 김단비 작가를 바라보았다.
“김 작가 생각도 같아?”
“아니요.”
“저 녀석과 생각이 다르다는 뜻이 야?”
“네. 초고를 쓰면서 작품의 골격을 잡은 것은 안유천 작가님입니다. 제 가 한 것은 그 골격에 살을 붙인 게 다입니다. 그러니까 각본 크레딧 에 표시되는 순서에서 안유천 작가 님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김단비 작가가 똑 부러지는 목소리 로 대답한 순간,안유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까 봐 제가 설명을 안 한 겁 니다. 그리고 전 아까도 말했듯이 김단비 작가와 생각이 다릅니다. 김 단비 작가가 저보다 훨씬 기여도가 큽니다.”
“아니요. 안유천 작가님의 기여도 가 더 큽니다.”
“글쎄. 아니라니까요. 대표님이 나 중에 시나리오 책을 보시면 아시겠 지만,김단비 작가 덕분에 환골탈태 수준으로 작품이 좋아졌습니다. 직 접 확인해 보세요.”
안유천과 김단비 작가는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로 두 사람의 설전을 지켜보던 이규한이 잠시 후 감상평 을 내놓았다.
“아주 보기 드문 광경이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보통은 크레덧의 앞자리를 차지하 겠다고 싸우거든. 그런데 서로 뒷자 리를 차지하겠다고 싸우니 진귀한 광경이란 뜻이지.”
멋쩍게 웃고 있는 안유천과 김단비 를 향해 이규한이 해결책을 제시했 다.
“이번 작품에는 김 작가의 이름을 앞에 올리는 게 어때?”
“그렇게 하시죠.”
“그렇지만……
안유천은 흔쾌히 수락했다.
반면 김단비 작가는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때,이규한이 재빨리 말을 이었 다.
“아직 내 얘기 안 끝났어. 끝까지 들어봐. 나는 두 사람의 공동 집필. 이번 작업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생 각해. 두 사람만 의향이 있다면 한 번 더 공동 집필을 제안해 볼 생각
“물론 생각 있습니다.”
“저도 좋습니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안유천과 김 단비 작가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규한이 밝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이번 작품에서는 김 작가 이름을 앞에 올리는 대신, 다음 작품을 공 동 집필할 때는 유천이의 이름을 앞 에 올리는 게 어때?”
“저는 아까도 말했듯이 상관없습니 다.”
“네,그렇게 하겠습니다.”
간신히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성공
한 이규한이 안유천을 뻔:히 바라보 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 시선을 느끼고 묻는 안유천에게 이규한이 귓속말을 건넸다.
“점수 좀 땄다.”
“네?”
“무작정 들이대는 것보다 훨씬 점 수를 많이 땄단 뜻이야.”
“제가요? 언제요?”
안유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을 지은 채 되물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연애무식자였어!’
“자,합의는 대충 끝난 것 같으니 이제 메뉴를 정해 볼까?”
이규한이 앞에 놓인 ‘수상한 여자’ 시나리오 책을 바라보며 운을 뗐다.
‘얼마나 잘 나왔을까?’
안유천은 여전히 자신만만한 표정 이었다.
김단비 작가 역시 은연중에 자신감 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래서 이규한의 기대치가 한껏 치 솟았을 때였다.
“시나리오가 좋으면 소갈비 사 주 시는 겁니다.” 안유천이 재차 확인했다.
“만약 별로면 냉면으로 메뉴를 변 경할 거야.”
이규한이 받아치자,안유천의 안색 이 헬쓱해졌다.
“냉면… 이요?”
“일한 만큼 먹는 거지.”
“그래도 냉면은 너무 심한 것 아닙 니까? 갈비탕부터 시작하시죠.”
안유천의 주장을 이규한이 일축했 다.
“냉면부터 시작이야.”
“곱배기는?”
“보통.”
“이건 너무 가혹한……
“후식 냉면부터 시작 안 하는 걸 다행으로 여겨.”
일반 냉면의 가격은 6,000원.
후식 냉면의 가격은 3,_원.
메뉴판을 확인한 안유천이 입을 다 문 순간,이규한이 크게 숨을 내쉬 며 시나리오 책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나올까?’
잠시 후,이규한이 고개를 흔들었 다.
‘숫자가 떠오르긴 하겠지?’ 이미 시나리오 책을 집어들었음에 도 불구하고,눈앞에 예상 관객수인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 경험을 한 상 황.
이규한이 더욱 긴장한 채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들었다.
잠시 후,안유천이 물었다.
“냉 면입니까?” “설마 진짜 후식 냉면 시키실 건 아니죠?”
안유천이 다시 질문한 순간,이규 한이 대답했다.
“소고기 먹자!” “정말요?”
“맘껏 시켜. 한우 특등급으로.”
- 9,534,725.
잔뜩 긴장한 채 ‘수상한 여자’ 시 나리오 책을 집어 들었던 이규한의 눈앞에 떠올랐던 숫자였다.
‘혹시 잘못 본 게 아닐까?’
퍼뜩 의심이 들었다.
해서 이규한이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음에도 숫자는 그대로였다.
‘대박!’ 그제야 이규한이 속으로 쾌재를 외 쳤다.
- 2,235,897.
안유천이 시나리오 초고를 써 왔을 때,이규한의 눈앞에 떠올랐던 숫자 였다.
당시에 비해서 무려 700만 명이 넘게 숫자가 늘어나 있었다.
즉, 예상 관객수가 950만 명을 넘 어섰다는 뜻이었다.
‘역시 원작자가 다르네!’
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다.
비록 ‘수상한 여자’의 크레덧에 이 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김단비 작 가는 어엿한 원작자였다.
그래서일까.
안유천이 혼자 시나리오 초고를 썼 을 때와 비교해서 엄청난 차이를 만 들어 냈다.
‘유천이 시나리오도 나쁘지 않았는 데!’
안유천이 썼던 시나리오 초고도 크 게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이규한이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 어서 대략적인 작품의 흐름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한계
는 있었다.
간신히 200만 명을 넘긴 예상 관 객수가 그 중거였다.
역시 원작자가 쓴 것은 확실히 다 르다는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던 이 규한이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만으로는 900만 명을 훌쩍 넘 긴 예상 관객수를 설명하기 어려웠 다.
‘시너지!’
잠시 후,이규한이 떠올린 단어였 다.
원작자인 김단비 작가의 신파에 공 동 작가로 참여한 안유천의 유머가 섞이면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 것 이었다.
어쨌든.
마음 같아서는 만세를 부르고 싶은 것을 이규한이 꾹 눌러 참았다.
‘침착하자. 침착!’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이규한이 지금의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기 위해 애썼다.
‘이번에는 숫자가 떠올랐다!’
김단비와 안유천이 공동집필한 ‘수 상한 여자’ 시나리오 책을 집어들기 전,이규한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눈앞에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 그렇지만 괜한 우려였다.
이번에는 ‘수상한 여자’의 시나리 오 책을 집어 들자,마치 당연하다 는 둣이 눈앞에 숫자가 떠올랐으니 까.
‘뭐가 다르지?’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의 시나리오 책을 집어들었을 당시,이 규한의 눈앞에는 숫자가 떠오르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규한은 아직 그 이유를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와 지금.
분명히 차이가 있을 터였다. 그리 고 그 차이를 알아내야만,그 이유 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중에 제대로 고민해 보자!’
이규한이 일단 넘어가기로 결심했 다.
그런 그가 발견한 또 하나의 특이 점은 예상 관객수였다.
- 9,134.725.
아까 확인했던 예상 관객수였다. 그리고 이규한의 기억 속에 남아 있 는 ‘수상한 여자’의 실제 최종 관객 수는 800만을 조금 넘겼었다.
즉,안유천과 김단비가 공동집필한 ‘수상한 여자’의 예상 관객수가 이 규한이 기억하고 있는 ‘수상한 여 자’의 실제 최종 관객수보다 백만 명 이상 더 많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다.
지금까지 감정을 했던 시나리오들.
대부분 이규한이 기억하고 있던 실 제 관객수에 비해서 예상 관객수가 적었다.
그 이유는 시나리오 초고가 대부분 이었기 때문이리라.
각색,윤색, 감독 선임,배우 캐스 팅 등등.
실제 영화 제작 과정들을 하나씩 거치면서 작품의 예상 관객수는 서 서히 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이규한이 기억하고 있던 최종 관객 수에 어느 정도 근접했었고.
해서 이게 당연하다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제 시나리오 초고가 완성된 단계 일 뿐인데,예상 관객수가 900만을 넘기면서 이규한이 기억하는 ‘수상 한 여자’의 실제관객수를 훌쩍 뛰어 넘어 있었다.
만약 제작 단계에서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부족한 부분들을 하나씩 보완하는 데 성공한다면?
충분히 천만 관객을 돌파할 수 있 을 거라는 기대가 생겼다.
그때 였다.
“대표님은 안 드세요?”
안유천의 질문을 받고 이규한이 상 념에서 깨어났다.
그런 이규한의 눈에 고기를 담아 내 왔던 접시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새 많이도 먹었네!’
잔뜩 쌓인 접시를 확인한 이규한이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이제 배가 좀 찼는가 보지?”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먹고 있는가를 신경 쓰는 걸 보고 알았어.”
멋쩍게 웃던 안유천은 그사이에도 불판 위에 올려져 있는 고기를 집어 먹었다. 그렇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 다.
‘배 터질 때까지 먹어라!’
안유천과 김단비의 공동 집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 었다.
그러니 이깟 소고기가 뭐가 아까울 까.
마음 같아서는 소를 한 마리 잡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안유 천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규한이 김단비 작가를 살폈다.
안유천과 달리 김단비 작가는 고기 를 집어먹는 속도가 무척 느렸다.
‘왜 저렇게 못 먹지?’
신경이 쓰인 이규한이 물었다.
“김 작가,왜 그렇게 못 먹어요? 무슨 고민 있어요?”
“그게……
“편하게 말해 봐요.” 잠시 망설이던 김단비 작가가 대답 했다.
“실은 걱정이 돼서요.”
“무슨 걱정이요?”
“나중에 저와 안유천 작가님이 쓴 시나리오를 읽어 보시고 난 후에 속 았다고 생각하시지 않을까 하는 걱 정을 하고 있어요.”
김단비 작가가 조심스럽게 꺼낸 대 답을 들은 이규한이 쓰게 웃었다.
‘모르지!’
김단비 작가는 이규한이 갖고 있는 특수한 능력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런 그녀는 이규한이 시나리오의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비싼 소고기 부터 사 준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 다.
그래서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 는 것이었고.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이규한이 고민에 잠겼을 때였다.
“그건 먼 홋날의 이야기에요.”
안유천이 김단비에게 충고를 건넸 다.
“네?”
“일단 기회가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먹어 둬요. 한우 특등급 고기를 실 컷 먹을 수 있는 이런 기회는 자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나중 일은 나중에 고민해요.”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