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화. 시간이 약이다
이 자리에 송하윤을 초대했을 때 이미 이런 상황을 예견했었다. 그리고 이규한은 이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왜일까.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던 서지연을 발견한 순간, 이규한은 가슴이 쓰라렸다.
또, 김기현의 부축을 받으며 나가는 서지연의 모습을 바라보다 보니, 화가 났다.
‘쓰다!’
오늘따라 유난히 술이 썼다.
그렇지만 자꾸 술이 당겼다. 그래 서 이규한이 빈 잔을 채우기 위해서 술주전자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송 하윤이 조금 더 빨랐다.
“내가 따라 줄게.”
“고마워.”
쪼르륵.
술주전자를 기울여 빈잔을 채워 주 면서 송하윤이 말했다.
“지연이 표정이 안 좋네.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아. 아니다,규한이 너 때문인 것 같다.”
“무슨 소리야?”
“지연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은 데?”
“착각일 거야.”
“아냐. 감정은 속일 수 없거든.”
송하윤이 잘라 말한 후 술잔을 들 었다.
“넌 어때? 너도 지연이를 좋아해?”
이규한이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 가려다가 멈칫했다.
잠시 후,술을 입속으로 털어넣은 후 이규한이 대답했다.
“아니.”
그 대답을 들은 송하윤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송하윤이 대답했다.
“경쟁자가 없으니까.”
" ……?"
“네가 좋거든.” 과음을 했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잠에서 깼던 이규한이 침대 아래 바닥에 나뒹굴 고 있던 휴대전화를 집어들었다. 그 리고 송하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들어갔어?”
이규한이 묻자,송하윤이 대답했다.
“그건 내가 던져야 할 질문 같은 데.”
“응?”
“집앞까지는 데려다줬는데 집에 잘 들어갔을까 걱정했거든. 집에 못 들 어가고 현관문 앞에서 잠든 것 아 냐?” ‘다행히 침대에서 눈을 떴다. 고마
워.”
“그럼 밥 한번 사.”
“그래. 밥 살게.”
“기억은 나?”
“드문드문 기억나.”
“그럼 어제 했던 말,기억나?”
“어제 했던 말?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시간이 약이다.”
“응?”
“계속 그 말만 반복했어.”
“내가… 그랬어?”
솔직히 말하면 기억이 잘 나지 않
았다. 그래서 이규한이 쓰게 웃었을 때였다.
“그나저나 부럽다.”
“뭐가 부러워?”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것. 팀장님 이 찾는다. 나 먼저 끊을게. 다음에 밥 사겠다는 약속,꼭 지켜.”
“알았어.”
송하윤과의 짧은 통화를 마친 이규 한이 침대에 등을 기댔다.
어제 술자리에서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필름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했던 이유 는 짐작이 갔다.
‘경험해 봤으니까!’
감정이란 것은 유통기한이 있었다.
죽고 못 살 것 같아서 결혼에 골 인했던 남녀가 원수만도 못 한 사이 가 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 이유는 감정에 유통기한이 존재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힘들어 하는 서지연을 바라 보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지만 시간 이 지나면 그 감정도 무뎌질 터.
그때 였다.
지이잉. 지이잉.
이규한의 손에 들려 있던 휴대전화 가 진동했다.
발신자가 안유천임을 확인한 이규 한이 전화를 받았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아침이라니요. 해가 중천에 떴습 니다. 어제 술 드셨죠?”
“어떻게 알았어?”
“냄새가 납니다.”
“무슨 냄새가 난다는 소리야?”
“술 냄새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진 다는 뜻입니다. 해장하셔야죠?”
“해장?”
“같이 갈비탕 드시죠.”
“내가 왜 너랑 같이 갈비탕을 먹어 야 하지?”
“저도 어제 술 마셨거든요.”
" cy,
“각본 작업이 끝난 기념으로.”
안유천이 덧붙인 말을 들은 이규한 이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을 더했 다.
“진짜 끝났어?”
“제가 갈비탕 먹고 싶어서 거짓말 을 할 정도로 한심한 인간은 아닙니 다.”
“갈비탕 먹자.”
해서 이규한이 살짝 언성을 높인 순간,안유천이 화답했다.
“두 그릇 먹을 겁니다.” 딸랑.
이규한이 고기집 문을 열고 들어가 자,안유천과 김단비 작가가 탁자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 보였 다.
“오셨습니까?”
“오셨어요?”
이규한을 발견한 안유천과 김단비 작가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지?”
가볍게 인사를 맞받은 이규한이 안 유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왜 네가 전화했어?”
“뭐가요?”
“‘수상한 여자’의 각본 작업. 김 작 가가 하고 있었잖아?”
안유천이 ‘수상한 여자’의 초고 작 업을 마친 상황에서 김단비 작가가 공동 작가로 시나리오 작업에 합류 했다.
그러니 각본 작업을 김단비 작가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작업을 마쳤다고 보고하기 위해서 전화를 건 것은 안유천이었다.
이규한이 그것에 대해 지적하자, 안유천이 당당하게 대꾸했다.
“저도 공동 집필자 아닙니까?”
“갈비탕 때문에 네가 전화한 거 지?”
“아닌데요.”
“진짜 아냐?”
“제가 갈비탕 때문에 대표님께 전 화할 정도로 치사한 놈처럼 보입니 까? 아직 저에 대한 파악이 다 끝
나지 않으셨네요.”
“ ……?"
“일단 완성된 시나리오부터 확인하 시죠.”
“밥부터 안 먹고?”
“밥은 그다음에 드시죠.”
“왜?”
“메뉴가 바뀔 수도 있으니까요.”
안유천이 당당한 목소리로 대꾸했 다.
그 말뜻을 파악한 이규한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물었다.
“진짜 목적은 갈비탕이 아니었다?” “제가 그렇게 치사한 놈이 아니라 니까요.”
“갈비탕이 아니라 갈비가 목적이란 뜻이지?”
“그냥 갈비가 아니라 소갈비가 목 적이죠.”
“그만큼 시나리오에 자신이 있다는 뜻인가?”
“물론입니다.”
“네가 쓰지도 않았으면서 그걸 어 떻게 알아?”
“같이 썼습니다. 자주 만나서 서로 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다 보니까 어마무시한 작품이 탄생했달까요?”
그렇지만 이규한은 순순히 믿지 않 았다.
안유천의 허풍이 심한 편이라는 것 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규한은 안유천을 더 상대하는 대 신 김단비 작가를 바라보았다.
“김 작가.”
“네,대표님.”
“저 녀석 말이 사실이야?”
“시나리오가 잘 나온 것은 사실입 니다.”
“그래? 둘이서 자주 만났던 것도 사실이고?”
“그게… 자주 만나긴 했습니다.” 김단비 작가가 뺨을 붉힌 채 꺼낸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 다.
“저 녀석이 전화해서 자꾸 만나 달 라고 귀찮게 했던 거야?”
“그건 아닙니다.”
“저 녀석은 신경 쓰지 않고 말해도 돼. 내가 혼쭐을 내서……
“실은 반대입니다.” “제가 안 작가님에게 더 많이 전화 했습니다.”
“왜 그랬어?”
“안 작가님의 아이디어가 좋으신 편이라서요. 시나리오를 진행하다가 막힐 때마다 만나서 도움을 청했습 니다.”
김단비 작가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꺼낸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의미심 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아니지?”
“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사귀는 건 아 니지?”
이규한이 질문한 순간,김단비와 안유천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절대 아닙니다.” “역시 대표님의 이목은 속일 수가 없군요.”
김단비와 안유천의 대답은 엇갈렸 다.
안유천이 서운한 기색으로 김단비 를 바라보았고,김단비는 당황한 기 색으로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재밌네!’
그 두 사람의 반응은 살피던 이규 한이 실소를 홀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안유천과 김단 비는 썸을 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리고 이규한은 더 자세히 추궁하지 않았다.
‘내 코가 석 자인 마당이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혼든 이규한이 안 유천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줘 봐.”
“손을 잡으라는 겁니까? 혹시 또 그걸 하려는 겁니까?”
“그거라니?”
“감정이란 거요.”
" ……?"
“제 손을 잡으면 감정이란 것을 통 해서 제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겁니 까?”
비로소 말뜻을 이해한 이규한이 한 숨을 내쉬었다.
“유천아! 난 초능력자가 아니다. 네 손을 잡는다고 해서 네 속마음을 알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은 없어.”
“그렇지만……
“그리고 설령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아. 둘 사이 문제는 둘이서 알아서 해.”
이규한이 딱 잘라 말하자, 안유천 이 불만을 드러내며 빨을 부풀렸다. 그러나 이규한은 그 반응에 신경 쓰 지 않고 다시 입을 뗐다.
“내가 충고 하나 해 줄까?”
“어떤 충고요?”
“서두르지 마. 연애도,시나리오 작
업도 마찬가지야. 서두른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더라고.” 이규한이 충고를 마친 순간,안유 천의 얼굴이 다가왔다.
홈칫 놀란 이규한이 뒤로 물러났지 만,안유천은 더 가까이 다가와서 귓속말을 건넸다.
“너무 들이대지 말라는 말씀이시
죠?”
“그래. 밀당 좀 하란 뜻이다.”
“밀당을 하란 말씀,명심,또 명심 하겠습니다.”
‘잘할 수 있으려나?’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유천을 바라보던 이규한의 두 눈에 근심이 어렸다.
이규한이 보기에 안유천은 연애무 식자였다.
그러니 제대로 밀당을 할 수 있을
까?
오히려 어설프게 밀당을 한다고 시 도하다가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이런 우려가 깃든 것이었다. 그러 나 이규한은 이내 상념을 털어 버렸 다.
남의 연애사에 참견하고 싶지도 않 았고,그럴 심적 여유도 없었기 때 문이었다.
“책이나 줘 봐.”
“알겠습니다.”
잠시 후,안유천이 작업을 마친 ‘수상한 여자’ 시나리오 책을 꺼내 서 내밀었다.
- 각본: 김단비,안유천.
시나리오 책 앞장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이규한이 의미심장 한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김 작가,저 녀석과 합의한 거 야?”
“네? 무슨 말씀이세요?”
김단비가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한
순간,이규한이 대답했다.
“순서 말이야.”
“무슨 순서요?”
김단비 작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때가 안 묻었네!’
각본이나 각색 크레덧에 이름을 을 리는 순서는 무척 중요했다.
흔히 영화는 수정의 예술이라고 불 리는 만큼,한 편의 영화가 제작되 는 과정에서 여러 명의 작가들의 손 을 거쳤다.
그 작가들의 기여도는 분명히 달랐 고,그 기여도를 표시하는 방법 가 운데 하나가 바로 크레딧의 순서였 다.
쉽게 말해,주도적으로 각본이나 각색 작업을 하면서 작품에 대한 기 여도가 큰 작가의 이름을 앞에 올리 는 것이었다.
그리고 크레딧의 순서는 무척 중요 했다.
‘만약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다면?’
흥행한 영화를 지켜본 영화 제작자 나 투자배급사 관계자들은 당연히 제작진에게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들을 영입해서 작품 준비를 맡기
려 든다.
이런 과정에서 각본 작가나 각색 작가도 당연히 포함됐고,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순서에 따라서 기여도 를 판단하고 영입 제의를 하기 때문 에 크레덧에 표시되는 순서는 무척 중요한 것이었다.
김단비는 이런 관례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때가 안 묻었다고 생각하며 무심코 넘기려 했던 이규한이 정색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 에 작가들이 이용당하는 거야!’
그냥 넘길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 다.
김단비는 앞으로도 계속 시나리오 작가로 활약할 재원.
이런 관례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다른 제작자들을 상대로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이규한이 입 을 뗐다.
“김 작가.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 야기 잘 들어. 크레덧에 표기되는 각본 작가 혹은 각색 작가의 순서가 왜 중요하느냐면……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