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화
애정이 있어서입니다 영화 ‘스파이들’은 배정훈 감독의 입봉작이었다.
남한과 북한.
다른 이념과 목적을 갖고 있는 분 단된 두 나라의 요원들이 서로 대결 하는 첩보 액션 영화였다.
송강오와 임동완.
40대와 20대를 대표하는 두 남자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큰 화 제를 불러 모았던 ‘스파이들’은 흥 행에 성공했다.
최종 관객수 341만 명.
이규한이 정확히 최종 관객수를 기 억하는 이유는 ‘스파이들’을 연출했 던 배정훈 감독과 인연이 있었기 때 문이었다.
무척 길었던 조감독 생활을 거친 배정훈 감독은 입봉을 하기 위해서 시나리오 책을 들고 여러 제작사를 찾아다녔다.
그 와중에 레드문 엔터테인먼트에 도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보고 나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당시에 이규한이 배정훈 감독에게 건넸던 약속이었다. 그렇지만 이규 한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을 이 규한은 땅을 치고 후회했었다.
딩동.
밸이 울린 순간,이규한이 헛숨을 들이 켰다.
‘이 무렵이었어!’
배정훈 감독이 레드문 엔터테인먼 트로 시나리오 책을 들고 찾아왔던
정확한 날짜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 았다. 그렇지만 새로 제작사를 차리 고 나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으니 이 무렵이었다.
“혹시 배정훈 감독이 찾아온 게 아 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열었던 이 규한이 두 눈을 빛냈다.
진짜 배정훈 감독이 찾아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와 달라진 것은 제작사명이 레 드문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라는 점이었다 .
어쨌든.
‘다시 기회가 왔다!’
배정훈 감독을 확인한 순간,이규 한이 두 눈을 빛냈다. 그리고 땅을 치고 후회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말 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이규한이 배정훈 감독을 바라보았다.
“저는… 그러니까 저는
바로 용건을 밝히지 못하고 머뭇거 리는 배정훈 감독을 살피던 이규한 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소심한 면을 확인하고 비웃은 것이 아니었다.
예전 그대로라는 생각에 부지불식 간에 웃음이 새어 나온 것이었다.
“배정훈 감독님이시죠?”
“저를… 아십니까?”
“네,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조감독으로 참여하셨던 작품들을 흥미롭게 봤습니다.”
“아,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감사합니다.”
이규한이 비켜서자,배정훈 감독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에게 소파에 앉기를 권한 후, 이 규한이 직접 믹스커피를 타기 시작 하며 물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 대해서 좀 아십니까?”
“네,소문은 들었습니다.”
“소문이요? 저희 회사에 대해서 어 떤 소문이 돌고 있습니까?”
이규한이 흥미를 드러낸 순간,배 정훈 감독이 대답했다.
“투자배급사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 는 제작사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가요?”
“‘과속 삼대 스캔들’을 메이드시켰 던 능력 있는 프로듀서가 독립해서 새로 세운 제작사이니까요.” 그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삶과는 확실히 달랐다.
‘과속 삼대 스캔들’의 흥행을 이끌 어 낸 능력과 감각이 있는 피디.
이규한의 이름 앞에 따라붙는 수식 어 였다.
이것이 만들어 내는 차이는 컸다.
투자배급사는 물론이고 감독들과 배우들에게 일종의 신뢰를 심어 주 기 때문이었다.
“자,드시죠.”
이규한이 믹스 커피가 담긴 종이컵 을 내밀었다.
배정훈 감독이 믹스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없이 믹스 커피를 마시 는 데만 집중하고 있는 배정훈 감독 을 확인한 이규한이 다시 웃음을 머 금었다.
배정훈 감독의 성격.
자존심이 무척 강하고 소심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성격이 빼어난 연출 실력이 있음에도 그가 입봉을 못 하 고 조감독 생활이 길어졌던 이유였
영화는 결국 사람이 만나서 하는 작업.
‘과연 이런 소심한 성격의 사람이 현장을 통제할 수 있을까?’
배정훈 감독을 만난 제작자들은 불 안감을 가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예전의 이규한도 마찬가지 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달랐다.
배정훈 감독의 장점은 신중한 성격 에서 나오는 디테일의 미학.
그가 연출했던 작품들을 통해 그 장점을 파악한 후였기 때문이었다.
“입봉을 준비한다는 소문은 들었습
니다. 그것 때문에 블루문 엔터테인 먼트를 찾아오신 것이죠?”
해서 이규한이 그를 대신해 먼저 용건을 꺼내 주었다.
“맞습니다.”
그제야 배정훈 감독이 미안한 표정 으로 대답했다.
“감독님.”
“말씀하십시오.”
“왜 미안한 표정을 짓고 계십니 까?”
“그게… 너무 갑자기 불쑥 찾아와 서 실례를 범하는 것 같아서요. 아 까운 시간을 빼앗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저는 감독님이 자신감을 좀 더 가 지셨으면 합니다.”
? ??
“감독님이 자신이 없는 표정을 지 으시면,제작자와 투자자들은 더 불 안해지니까요. 또 확신을 가지지 못 하게 되니까요.”
이규한의 조언을 들은 배정훈 감독 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에게 이규한이 덧붙였다.
“일단 책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시나리오 책을 말씀하시는 겁니 까?”
배정훈 감독은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규한은 길게 이 야기를 끌어가는 대신. 시나리오 책 을 먼저 보고 싶다고 요구했다.
이편이 배정훈 감독의 불편함을 덜 어 주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 었다.
“여기 있습니다.”
배정훈 감독이 가방에서 꺼낸 시나 리오 책을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거기 두고 가세요. 나중에 보고
나서 연락드릴게요J
예전 이규한이 꺼냈던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규한이 바로 시 나리오 책을 집어 들었다.
‘얼마냐?’
이규한이 시나리오 감정을 시작했 다.
잠시 후,눈앞에 숫자가 떠올랐다. - 153,781.
‘사랑이 운다’.
배정훈 감독이 건넨 시나리오 책에 적힌 제목이었다.
아마 그가 입봉작으로 가장 하고 싶은 작품이리라.
또, 시나리오 작업에 가장 공을 들 인 작품이리라.
그렇지만 제작자 입장에서 ‘사랑이 운다’는 기피해야 하는 작품이었다.
작품성은 있을지 몰라도 상업성은 현저히 떨어지는 편이었으니까.
‘이게 배정훈 감독의 입봉이 늦어 진 이유 중 하나야!’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
분명히 달랐다.
그렇지만 영화감독들은 잘하는 것 보다 하고 싶은 것을 먼저 작업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었다.
‘설령 망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나서 망해야 덜 억울하 다.’ 이런 생각들을 은연중에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배정훈 감독이 잘하는 것은 휴먼 드라마였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은 멜로 장르인 ‘사랑이 운다’였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라고 표현하면 될까.
그 괴리가 배정훈 감독을 비롯한 신인 감독들의 입봉이 늦어지거나 실패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어쨌든.
이규한은 지금 배정훈 감독이 건넨 ‘사랑이 운다’의 상업성이 떨어진다 는 사실을 금세 간파했다.
시나리오 책을 들면 눈앞에 예상 관객수가 떠오르는 감정이라는 특이 한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배정훈 감독은 이규한이 가진 특수한 능력에 대해 알지 못했 다.
그래서 ‘사랑이 운다’라는 시나리 오의 상업성이 부족해서 별로라고 지금 이야기를 한다면 기분이 나빠 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무조건 기분이 나쁠 터였다.
시나리오를 보지도 않고 비난부터 한다고 판단할 테니까.
해서 이규한이 입을 뗐다.
“우선 시나리오를 살펴보겠습니 다.”
이규한이 ‘사랑이 운다’ 시나리오 책을 펼쳤다.
팔랑.
한 장씩 책장을 넘기고 있었지만, 이규한은 제대로 읽지 않았다.
이미 감정 결과가 나온 상황인 데 다가,‘사랑이 운다’는 블루문 엔터 테인먼트의 대표인 이규한이 제작하 고 싶은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 다.
“다 읽으셨습니까?”
이규한이 마지막 장을 끝으로 책을 덮자마자, 배정훈 감독이 물었다.
“네,읽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제 평가를 말씀드리기 전에 미리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 ?w
성화 제작자로서 솔직한 평가를 말씀드리는 것이 감독님을 위해서도 좋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러니까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는 않 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작이 어렵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제가 제작이 어렵다 고 판단한 이유는……
“됐습니다.”
이규한은 말을 제대로 꺼내보지도 못했다.
배정훈 감독이 도중에 벌떡 일어났 기 때문이었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탁자 위에 내려놓은 ‘사랑이 운다’ 시나리오 책을 다시 가방에 넣은 배 정훈 감독이 굳어진 표정으로 사무 실을 빠져나가려는 순간,이규한이 소리쳤다.
“입봉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배정훈 감독이 잠시 움찔했다.
그렇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 그가 문 손잡이를 잡고 막 돌린 순간,이규 한이 다시 소리쳤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감독님은 절 대 입봉하지 못합니다. 고생하는 가 족들 생각은 안 하십니까?”
이규한이 던진 마지막 말은 효과가 있었다.
배정훈 감독이 빙글 몸을 돌렸으니 까.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배정훈 감독 이 물었다.
“애정이 있어서입니다.”
이규한이 솔직하게 대답한 순간, 배정훈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이규한이 꺼낸 말뜻을 이해하 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부부싸움을 왜 하는지 아십니까? 애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애정이 남아 있지 않다면 싸움조차 안 하는 법이죠.”
“그 말씀은……
“아깝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아깝다는 겁니까?”
“감독님을 놓치기 아깝습니다. 또, 감독님이 허비하고 계신 시간이 아 깝습니다.”
이규한의 대답을 들은 배정훈 감독 이 굳어졌던 표정을 풀었다.
그런 그에게 이규한이 덧붙였다.
“제가 감독님을 입봉시켜 드리겠습 니다.”
“하지만 아까 제 시나리오를 싫어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습니다.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규한이 재빨리 대답했다.
“감독님이 쓴 시나리오 책,‘사랑 이 운다’가 다가 아닐 테니까요.”
“
“다른 시나리오 책을 보고 싶습니 다.”
배정훈 감독이 다시 가방을 열었 다.
‘스파이들’.
그가 한참 머뭇거리다가 꺼낸 시나 리오 책에 적혀 있는 제목을 확인한 이규한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난 삶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어서였 다.
그렇지만 애써 겉으로 내색하지 않 고 이규한이 시나리오 책을 건네받 았다.
- 2,873,428.
어김없이 눈앞에 숫자가 떠오른 순 간,이규한이 혀를 내밀어 바싹 말 라 버린 입술을 적셨다.
‘달라!’
이규한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스 파이들’의 최종 관객수는 341만 명.
지금 눈앞에 떠오른 숫자와 약 50 만 명가량 차이가 났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당황하거나 실 망하지 않았다.
아직 ‘스파이들’은 본격적인 제작 에 돌입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개봉까지 넘고 거쳐야 할 단계들이 무척 많은 작품.
그 과정에서 예상 관객수가 늘어나
거나 줄어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이었 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