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화
저렇게 밝았었구나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그때, 우리’라는 영화 제목. 정확 히 어느 시점을 못 박은 게 아니잖 아요. 제가 배운 바로는 제목은 상 징성이 강해야 하고,라켓층에 명확 하게 어필해야 한다고 그랬어요. 그 런 부분에서 좀 아쉬운 것 같아요.”
이규한이 콧잔등을 찜그렸다.
제목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 었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었다.
‘과속 가족 스캔들’에서 ‘과속 삼대 스캔들’로.
단지 제목 두 글자를 바꾼 것이 다였다.
그렇지만 예상 관객수는 5,083,825 에서 5,221,004로.
무려 15만 명 가까이 예상 관객수 가 늘어났었다.
그리고 처음 영화의 제목이었던 ‘삼대 가족사’에서 ‘과속 삼대 스캔 들’로 변하는 과정에서는 약 50만 명 가까이 예상 관객수가 늘었다.
이것이 제목이 중요하다는 증거.
그래서 이규한은 서지연이 꺼내는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 릴 수 없었다.
“혹시 생각해 둔 제목이 있어?”
“타켓층이 명확한 제목이 좋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청춘’ 같은 느낌 이요.”
“청춘?”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서지연이 덧붙였다.
“그런데 ‘청춘’이란 제목만으로는 너무 광범위한 느낌이잖아요. 그래 서 부제를 붙였으면 좋겠어요.”
“음,‘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 간’. 이런 식으로요.”
‘나쁘지 않다. 아니,좋다!’
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다.
‘그때,우리’의 장르는 청춘물.
그렇지만 기존의 제목으로는 청춘 물이라는 장르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제목을 ‘청춘,우 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이라고 바꾸 자,영화의 장르가 청춘물임을 명확 하게 알 수 있었다.
“조언 고마워.”
“뭘요.”
이규한이 서지연에게 새삼스런 시 선을 던졌다.
즉석에서 이런 제목을 떠올린 것이 아니었다.
서지연은 미리 준비를 해서 찾아왔 을 것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일부러 차갑게 굴었던 것이 미안하게 느껴 졌다.
“밥 먹고 갈래?”
해서 이규한이 물은 순간, 서지연 이 고개를 흔들었다.
“밥은 다음에 먹어요.”
“다음에?”
“그때는 오빠가 만나는 여자분도
소개시켜 주세요.”
서지연이 먼저 일어났다.
커피전문점에 혼자 남은 이규한이 가방에서 ‘그때,우리’의 시나리오 책을 꺼냈다.
잠시 시나리오 책을 내려다보던 이 규한이 펜을 꺼냈다.
확렉M
기존의 영화 제목인 ‘그때,우리’ 위에 펜으로 두 줄을 긋고 난 후, 다른 제목을 적었다.
‘청춘,우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
서지연이 알려준 새 제목을 기입한 후,이규한이 시나리오 책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바1까?’
이규한이 내심 기대하고 잇을 때, 눈앞에 숫자가 떠올랐다.
- 2,129,875.
“늘었다!”
2,015,589에서 2,129,875로.
‘그때,우리’에서 ‘청춘,우리가 가 장 빛났던 순간’으로 제목을 바꾸고 감정한 결과,예상 관객수가 늘어나 있었다.
늘어난 숫자는 약 11만 명.
‘과속 삼대 스캔들’은 약 50만 명.
당시와 비교하면 제목을 바꾼 것으 로 인해 늘어난 관객수가 많지 않았 다.
그렇지만 엄연히 기준이 달랐다.
장르가 청춘물인 만큼 이번 작품의 맥시멈 관객수는 약 300만 명.
그런 상황에서 11만 명의 관객수 가 늘어난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제목을 바꾼다!”
제목이 바뀌면서 예상 관객수가 약 11만 명가량 더 늘어난 것을 확인 한 상황.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고맙네.”
아까 서지연이 앉아 있었던 빈자리 를 바라보던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 었다.
“밥은 다음에 먹어요. 그때는 오빠 가 만나는 여자분도 소개시켜 주세 요.” 서지연이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었 다.
“누굴 데려가야 하나?”
이규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전에 술자리에서 이규한은 서지
연에게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 다고 밝혔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당시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서지 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는 데.
아직 끝이 아니었다.
서지연은 이규한이 만나고 있는 여 자를 직접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 다.
‘의심하는 거야!’
여자의 육감은 무섭다.
이규한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 서지연은 이렇게 의심하고 있기 때 문에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는 것이 었다.
그로 인해 이규한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이규한,맞지?”
누군가 이규한이 앉아 있는 탁자 앞으로 다가왔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이규한이 두 눈을 치켜떴다.
‘송… 하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이 규한은 자신에게 다가와 아는 체를
하고 있는 여자를 알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니 었다.
이름은 송하윤.
지난 생에 이규한의 아내였던 송하 윤이 눈앞에 서 있었다.
“맞네. 이게 얼마만이야?”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이규한의 말문 이 막혔을 때,송하윤이 환하게 웃 었다.
그런 그녀는 허락도 받지 않고 아 까 서지연이 앉아 있었던 맞은편 비 어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왜 일까?
조금 전까지 서지연이 앉아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송하윤으로 인해 이규한의 기분이 슬쩍 상했을 때였다.
“한 이 년 만인가? 여기서 다시 만나네.”
송하윤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긴 어찐 일이야?”
“여기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었는데 바람 맞았어. 그래서 그냥 돌아가려 고 했었는데 마침 네가 보이더라. 진짜 이규한이 맞나? 긴가민가하면 서 와 봤는데……. 맞네.”
“정확히 이 년 육 개월 만이야. 동
창회에서 만났던 게 마지막이니까.”
“오오. 스마트한 건 여전하네.”
송하윤이 웃으며 꺼내는 이야기를 듣던 이규한이 표정을 굳혔다.
‘비슷해!’
예전 아내였던 송하윤과 이규한은 대학 동기였다. 그렇지만 학창 시절 에는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서로 얼굴과 이름만 알던 사이였 다.
그랬던 두 사람의 관계가 본격적으 로 시작된 것은 각자 사회에 진출한 후에 우연히 다시 만나고 난 후부터 였다.
‘그때 우연히 다시 만났던 장소도 커피전문점이 었어 !’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술을 한잔 했었다.
그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본격적 인 관계가 시작됐었다.
‘달라!’
환하게 웃고 있는 송하윤을 바라보 던 이규한의 두 눈에 이채가 떠올랐 다.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 무 슨 기분 나쁜 일 있어?” 밖에서 일이 안 풀리는 게 내 탓
이야?”
“좀 웃어. 누가 보면 초상난 집인 줄 알겠다.”
결혼 후,송하윤은 항상 표정이 어 두웠다. 그래서 이렇게 환하게 웃고 있는 송하운의 모습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왜 그렇게 봐? 다시 만나니 반가 워서?”
“그… 래.”
“너,피디 됐다는 얘기는 들었어. 일은 잘돼?”
“그냥 그래.” “학교 다닐 때 이규한은 진짜 똑똑 했었는데. 그래서 나중에 어마어마 한 영화를 제작할 거라 생각했는 데.”
“사회가 만만치 않네. 그리고 영화 판은 더 그러네.”
이규한이 대답한 순간, 송하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뗐다.
“잘 결정한 것 같네.”
“무슨 뜻이야?”
“나 회사 다니거든. 영화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일반 회사. 영화 쪽에 미 련을 버리고 취직한 게 잘한 결정인 것 같다고.” 이규한이 말귀를 알아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환 건축 설계 사무소.
송하윤이 취직한 회사의 이름을 이 규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
“너처럼 똑똑한 에이스도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걸 보니 더 그렇게 느껴지네.”
송하윤이 덧붙인 순간,이규한이 물었다.
“건축 회사는 다닐 만해?”
“응,초반엔 힘들었는데 이제는 어 느 정도 적응해서……
그 질문에 대답하던 송하윤이 도중 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 고 이규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차!’
뒤늦게 이규한이 자신의 실수를 알 아챘을 때였다.
“내가 건축 회사 다닌다는 걸 어떻 게 알았어?”
“그게……
잠시 고민하던 이규한이 대답했다.
“정호한테 들었어.”
“정호라면… 최정호?” 최정호는 이규한의 대학 후배.
이규한이 급조한 변명을 꺼내 놓 자,송하윤이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 졌다.
“나한테 관심이 있었던 거,아냐?”
“그게 무슨 뜻이야?”
“나한테 관심이 있었으니까,정호 한테 내가 뭘 하는지 물어봤던 거, 아냐?”
“그냥 그렇다고 치자.”
원하던 대답을 얻어서일까.
배시시 웃던 송하윤이 제안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술 한잔할래?” “응. 내가 근처에 괜찮은 횟집을 알거든. 어때?”
이규한이 잠시 고민한 후에 고개를 흔들었다.
“다음에 하자.”
“다음에? 바빠?”
“응. 새로 들어가는 영화 때문에 많이 바쁘네.”
이규한의 대답을 들은 송하윤이 아 쉬운 기색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며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대신 연락처 는 교환하자.” ‘알아!’
대학 시절부터 송하윤의 휴대전화 번호는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무심 코 대답할 뻔했던 것을 이규한이 간 신히 참아 내며 대답했다.
“그래.”
서로의 휴대전화를 꺼내 연락처를 교환한 후,송하윤이 말했다.
“그럼 연락할게. 다음에는 꼭 술 한잔 같이해.”
송하윤이 먼저 커피전문점을 떠났 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 보던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밝았었구나!”
결혼 전 송하윤의 밝은 모습을 보 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결혼 후에 송하윤의 표정이 무척 어둡게 변했던 것.
‘어쩌면 나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시작한다면 이번엔 다를까?’
한차례 경험을 했으니 분명히 다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확신을 갖기는 어려웠다.
“다시 반복된다면?”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던 결혼 생활 을 다시 반복하는 것.
상상하는 것조차도 싫었다.
“어렵네!”
이규한이 재차 한숨을 푹 내쉬었 다.
서지연과의 관계도,송하윤과의 관 계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는 게 정답일까?”
이규한이 정답을 찾지 못하고 혼란 스러워 할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이규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또, 서지연과 송하윤을 잇따라 만 나고 나자,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일까.
술이 당겼다.
근처 포장마차로 들어간 이규한이 간단한 안주를 시키고 소주를 세 잔 째 마시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 있어?”
이규한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
아챈 이규리가 걱정스런 시선을 던 지며 물었다.
“별일 아냐.”
“별일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앉기나 해.”
이규한이 소주병을 들어서 막 잔을 채우려고 했을 때였다.
“형님,제가 따르겠습니다.”
이규리와 함께 포장마차로 들어온 최호인이 소주병을 빼앗아갔다. 쪼르륵.
술을 따르고 있는 최호인에게 이규 한이 물었다.
“촬영 준비는 잘돼 가고 있어?” “네,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조감독으로 강형진 감독 밑에서 일해 보니 어때?”
소주병을 건네받은 이규한이 그의 잔을 채워주며 다시 물었다.
“고깃집에서 불판을 닦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
“그런데 무서워졌습니다.”
“무서워졌다니?”
“자신감이 많이 없어졌거든요.”
“왜 자신감이 없어졌어?”
“영화 한 편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또 얼마나 많은 돈 이 들고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야 하 는 일인지를 알게 됐더니 무서워졌 습니다. 시나리오만 좋으면 영화 만 드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던 제가 한심해지더라고요.”
최호인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희 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많이 배웠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