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화
숫자가 줄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몸의 이상을 느끼고 병원에 찾아갔 을 때는 너무 늦었다.
췌장암 말기.
수술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
너무 늦었습니다.
의사가 사형을 선고하는 판사처럼 무심한 목소리로 던졌던 말을 이규 한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 었다.
“고맙네!”
스카이 엔터테인먼트를 빠져나온 이규한이 작게 혼잣말을 꺼냈다.
다시 과거로 돌아오고 난 후, 이규 한은 무척 바빴다.
‘과속 삼대 스캔들’ 제작을 시작으 로 자신의 제작사를 차리고, 첫 번
째 작품과 차기작 준비까지.
말 그대로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래서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겨를 이 없었고,그사이에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했었는데.
“참,부모님은 잘 계시지?”
김기현이 던졌던 질문 덕분에 이규 한은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규한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건강검진을 받으셔야 당시 너무 늦었다고 말했던 의사는 미리 건강검진을 받게 하지 않았던 무심한 들인 이규한을 탓했다.
만약 건강 검진만 제때 받았으면 어머니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도 덧붙였었고.
그러니 이규한에게 주어진 미션은 하나였다.
최대한 빨리 어머니를 병원으로 모 시고 가서 건강검진을 받도록 만드 는 것.
얼핏 들으면 쉬워 보였다.
그렇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 이규한이 처한 상황의 특수성 때문 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규한이 휴대전화 를 꺼내 여동생인 이규리에게 전화 를 걸었다.
“아직 퇴근 전이지?”
“응. 30분쯤 남았어.”
“퇴근하고 잠깐 만나자.”
“왜?”
“부탁할 게 있어서 그래.”
“무슨 부탁인데?”
“그건 만나서 얘기하자.”
약 한 시간 후,이규한은 커피전문 점에서 이규리를 만났다.
“불안해.”
“뭐가 불안한데?”
“나한테 하려는 부탁이 호인 씨와 헤어지라는 건 아니지?”
“아냐.”
이규한이 대답하고 나서야 이규리 가 긴장을 풀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규한이 물었다.
“요즘도 자주 만나?”
“아니,자주 못 봐. 많이 바쁘대.”
“그래? 뭐 때문에 바쁜지는 말 안 했어?”
“영화 촬영 현장에 조감독으로 투 입됐다고 하던데.”
“그게 다야?”
“응? 응.”
‘내가 강형진 감독을 소개했다는 말은 안 했구나!’
이규한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일단 조감독 생활을 시작했으니, 최호인이 이번 기회에 많은 것을 배 우고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 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보자고 했어?”
“이것 때문에.”
이규한이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 내서 내밀었다.
“이게 뭔데?”
“열어 봐.”
의아한 시선을 던지던 이규리가 봉 투를 열어 내용물을 살폈다.
“건강검진?”
“그래,내가 엄마 건강검진을 예약 했어.”
“갑자기 왜 이런 걸 예약했어? 엄 마 어디 아프대?”
이규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은 괜찮지만,엄마가 곧 아플 거다.
그것도 무려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 난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이규한이 입을 뗐다.
“그냥 걱정이 돼서 그래.”
“그러니까 갑자기 왜?”
“실은 어제 꿈을 꿨어.”
“꿈?”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는 꿈을 꾸고 나니까 불안해져서 예약 한 거야.”
그제야 이규리가 납득한 표정을 지 었다.
“그럼 직접 엄마에게 전하지 그 래?”
“그게 안 된다는 거,너도 알잖아.”
이규한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자, 이규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 때문에?”
“그래. 내가 찾아가면 집안이 시끄 러워질 거야.”
“그렇긴 하지.”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네 가 월차 하루 내고 엄마 모시고 병 원으로 찾아가서 건강검진 좀 받아 줘.” ‘알았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됐다!’
이규리의 약속을 받아 낸 순간,이 규한이 비로소 안도했다.
그때,이규리가 물었다.
“계속 집에 안 올 거야?”
“언젠가는 가야지.”
“그 언젠가가 대체 언제인데?”
“일 년만 기다려.”
“진짜 일 년만 기다리면 돼?”
“그래. 그때는 내가 찾아갈 거야.”
이규한이 말한 순간,이규리가 긴 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일 년인데? 일 년 뒤엔 뭐가 달라져?”
이규한이 대답했다.
“그때는 잃어버린 걸 되찾을 수 있 을 거야.” ‘그때,우리’.
영화 제작자 이규한의 제작 입봉작 이라고 알려진 작품이었다.
그렇지만 진짜 입봉작은 따로 있었 다.
‘푸른 소나기’.
이규한이 영화 제작자로서 처음 만 들었던 영화였다.
‘무조건 대박이 날 거야!’
당시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또,세상 물정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자신감이 치기에서 비롯된 오만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또,자신이 제작하는 영화인 ‘푸른 소나기’가 무조건 잘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물론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초보 영화제작자인 이규한에게 여 러 차례 커다란 시련을 안겨 주었 일단 투자가 쉽게 이뤄지지 않았 다.
그리고 당시에 투자를 받지 못했던 이유.
‘푸른 소나기’라는 작품이 흥행할 가망이 없다는 것을 투자사 직원들 이 미리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여러 투자배급사 직원들에게서 잇 따라 외면을 받았을 때,‘푸른 소나 기’의 제작을 멈추었어야 했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했을 텐데.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푸른 소나기’가 투자를 받지 못했
을 때,투자를 거절한 투자사 직원 들이 작품을 보는 눈이 없다고 판단 했다.
해서 이규한은 직접 제작비를 조달 했다. 그리고 당시에 이규한이 기댈 곳은 어머니뿐이었다.
“무조건 대박 납니다. 제가 두 배, 아니,열 배로 갚아 드릴게요.”
당시에 이규한이 어머니에게 했던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규한은 그 약 속을 지키지 못했다.
‘푸른 소나기’는 간신히 촬영과 편 집을 마쳤지만,극장에 걸리지도 못 했다.
바로 IP TV 시장으로 직행했다.
당연히 이규한은 제작비를 하나도 회수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빌려 준 돈이 아 버지 몰래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던 돈이라는 것을 이규한은 나 중에 알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갚는다. 그것도 이자까지 쳐서 갚는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이규한은 각오를 다졌다.
그렇지만 그 후로 십 년이란 시간 이 훌쩍 흐르는 동안,이규한은 빚 을 갚지 못했다.
영화제작자로서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엄마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고,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도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나뿐인 여동생 이규리와는 남보 다도 못한 사이가 됐고.
- 집안에 영화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정이 풍비박산난다.
영화계에 떠도는 속설과 정확히 일
치했던 상황이었다.
“이번엔 바끌 거야.”
이규한이 재차 각오를 다졌다. 그 리고 1년 안에 빚을 갚기 위해서는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인 ‘그때, 우리’가 흥행에 성공해야 했다.
감독: 한성근.
이규한이 ‘그때,우리’ 시나리오 책 에 감독의 이름을 적어 넣은 후 집 어 들었다.
‘얼마나 바절까?’
이규한의 두 눈에 새로운 숫자가
떠올랐다.
- 2,015,589.
맥시멈 300만.
이규한이 판단하는 ‘그때,우리’의 최대 관객수였다.
처음 983,569명에서 2,015,589명 으로.
각색과 캐스팅,감독 선임 단계를 거치면서 ‘그때,우리’의 예상 관객 수는 약 두 배가량 늘어 있었다.
“이제 거의 막바지!”
남은 단계는 남자주인공 캐스팅 정 도가 다였다. 그리고 공동제작을 맡 은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인 김기현의 수완은 이규한의 짐작 이 상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이규한이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 김기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잡았다.”
김기현은 다짜고짜 말했다.
“뭘 잡았어?”
“이도빈 잡았다고.”
“벌써?”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점.
그래서 이규한이 깜짝 놀라서 물었 “어떻게 잡았어?”
“영업 비밀이다. 어쨌든 잡았다는 게 중요한 것 아냐?”
김기현의 목소리에는 잔뜩 힘이 실 려 있었다.
“개런티는?”
“2억 주기로 했어.”
김기현에게서 대답이 돌아온 순간, 이규한은 또 한 번 놀랐다.
이도빈은 20대 중반 남자 배우들 가운데서는 최상급의 배우였다.
‘최소 3억은 줘야 하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예상하고 있었는데.
김기현은 그보다 훨씬 적은 2억에 이도빈을 캐스팅하는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기쁜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의심이 깃들었다.
“혹시 이면 계약 한 것 아냐?”
“이면 계약?”
“그러니까 개런티 2억 외에 다른 약속을 한 거 아니냐고?”
“당연히 했지.”
“당연히라고?”
“그래야 이도빈을 잡을 수 있으니 까.”
마치 당연하다는 둣이 대답이 돌아
온 순간,이규한이 물었다.
“이도빈에게 무슨 약속을 했는데?” “그건 네가 알 것 없어.”
“왜 내가 알 필요가 없다는 거야?”
“다른 약속을 하긴 했지만,이번 작품인 ‘그때,우리’와는 상관없거
드 ”
이규한이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기현이 아버지가 나섰을 확률이 높아!’
대충 짐작이 갔다.
‘그때, 우리’에 출연하는 대신,이 도빈은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측에서
어떤 약속을 받았을 것이었다.
정확히 어떤 약속을 받았는가 여부 까지는 이규한으로서도 알 수 없었 다. 그리고 김기현의 말이 옳았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이도빈에 게 어떤 약속을 했는가는 중요치 않 았다.
그가 개런티 2억에 ‘그때, 우리’에 출연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고생했다.”
이규한이 말하자,김기현이 물었다. “그게 끝이야?”
“응?”
“술 한잔 사.” “알았다. 코가 삐뜰어질 때까지 사 마.”
“오케이. 연락 기다릴게.” 김기현과의 통화를 마친 이규한이 펜을 들었다.
남자 주인공: 이도빈.
‘그때,우리’의 각색고에 이규한이 캐스팅이 확정된 이도빈을 이름을 적은 후, 이규한이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얼마나 늘었을까?’
잔뜩 기대한 채 책을 들어 올렸던 이규한의 표정이 잠시 후 일그러졌 다.
- 1,054,897.
숫자가 줄었다.
“자,의견을 제시해 봐.” 회의실 탁자 위에 세 권의 시나리 오 책을 올려놓으며 박태혁이 재촉 했다.
새로 램프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한 세 명의 피디들은 박태혁의 재촉이 있었음에도 바로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문 채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 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태혁이 속으 로 혀를 끌끌 찼다.
“야,무슨 의견들 없어? 계속 이렇 게 입 꾹 다물고 있을 거야?”
박태혁이 언성을 높인 후에야 세 명의 피디들이 차례로 입을 떼기 시 작했다.
“저는 ‘푸른 밤,붉은 낮’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피 내리는 하루‘가 제일 나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빗속에서’가 제일 낫다 고 생각합니다.”
피디들의 의견이 갈린 순간, 박태 혁이 다시 질문했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다시 회의실 내에 침묵이 이어졌 다.
그 침묵이 박태혁의 화를 머리꼭대 기까지 치밀게 만들었다.
“야,작품을 선택한 데는 무슨 이
유가 있을 것 아냐? 시나리오가 죽 인다든가,투자가 잘될 것 같다든가. 아니면 시기가 딱 맞아떨어진다든 가. 하다못해 잘될 것 같다는 감이 팍 온다거나.”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