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화
손익분기점을 낮춰라 이규한이 미리 구상했던 계약 조건 을 밝힌 순간,강형진 감독이 손사 래를 쳤다.
“너무 많습니다. 5%만 주시죠.”
“나중에 후회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네?”
“제가 후회한다는 것은 저희 영화 가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이 아닙니 까?”
“그렇죠.”
“그래서 나쁘지 않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리고 하나 더,후회나 미 련이 남아야 다시 대표님과 함께 작 품을 할 테니까요.”
“저야 언제나 환영입니다.”
이규한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계약 서에서 감독 지분을 제작사 수익의 10%에서 5%로 바꾼 후 출력했다.
‘꼭 손해 보는 건 아니야.’
계약서를 건네받고 살펴보는 강형 진 감독을 응시하던 이규한이 떠올
린 생각이었다.
감독 지분으로 제작사 수익의 10%가 아닌 5%만 받는 것으로 조 건을 수정하면서,강형진 감독은 최 소 수억의 손해를 볼 터였다.
그렇지만 아주 손해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이규한이 강형진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려는 작품은 ‘수상한 여자’.
‘과속 삼대 스캔들’과 ‘써니 걸즈’ 에 이어 ‘수상한 여자’까지.
이규한의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강형진 감독은 세 작품 연속으로 흥 행작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야구로 비유하자면,타자가 3연타 석 홈런을 때려 내는 것과 마찬가지 였다.
강형진 감독은 당연히 홍행 감독으 로서 입지를 굳히게 될 터였고,자 연히 몸값이 치솟을 것이었다.
“자,그럼 사인하시죠.”
이규한이 내민 펜을 받아 든 강형 진 감독이 꼼꼼하게 서명을 하기 시 작했다. 그리고 서명을 마친 순간, 이규한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감독님,일단은 ‘써니 걸즈’에 집 중하십시오. 저희 프로젝트는 급하 지 않으니까요.”
“배려 감사합니다.”
이규한과 강형진 감독이 힘주어 손 을 맞잡은 채 악수를 나누었다.
잠시 후,이규한이 말했다.
“실은 감독님께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어떤 부탁입니까?”
이규한이 대답했다.
“괜찮은 감독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남자는 남자가 봐야 정확하다.’ 이런 말이 존재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자도 같은 여자가 봐야 정확히 알 수 있는 법이다.
이규한이 강형진 감독에게 괜찮은 감독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한 이유 도 엇비슷했다.
감독을 보는 눈.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감독이 가장 정확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무 조건이나 설명 없이 강 형진 감독에게 다른 감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은 아니었다.
“코미디에 대한 감각이 있고,연출 감각이 젊고 세련된 감독을 추천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아직 입봉을 못한 신인 감독이라도 상관없습니 다.” 이것이 이규한이 덧붙인 조건이었 다. 그리고 강형진 감독은 오래 고 민하지 않고 한성근 감독을 추천했 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한성근 조감 독을 추천했다.
“어떤 것 같아?”
이규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우리’는 블루문 엔터테인먼 트와 스카이 엔터테인먼트가 공동 제작하는 작품.
단계가 진행될 때마다 상호 간 협 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규한은 감독 선임을 앞두 고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인 김기현을 찾아온 것이었다.
한성근 감독이 찍었던 단편 영화를 본 후,그의 프로필이 적힌 서류를 바라보던 김기현이 슬쩍 미간을 찌 푸렸다.
“연출 감각은 있네.”
“그런데 표정은 별로인데?”
“티 나?”
“친구로서 충고하자면 절대 도박은 하지 마라.”
“새겨듣지.”
픽 웃은 김기현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좀 약하지 않아?”
“신인 감독이란 게 마음에 걸려?”
“응. 굳이 신인 감독을 쓸 필요가 없잖아. 제작비 때문이라면 신경 쓸 것 없어. 투자를 좀 더 받으면 되니 까.” 김기현이 당연하다는 듯이 꺼낸 이 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쓰게 웃었다.
예전에 제작자로 첫발을 뗐을 당 시,이규한이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투자를 받아서 제작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규한만이 아니었다.
모든 제작자들이 투자를 받아서 제 작비를 마련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 었다.
1억,아니 천만 원이라도 더 투자 를 받기 위해서 투자배급사의 문턱 이 닮을 정도로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런데 눈앞의 김기현은 달랐다.
기성 감독,그들 가운데서도 흥행 감독과 감독 계약을 맺으려면 거액 의 계약금이 필요했다.
“감독 지망생은 많지만,믿고 쓸 만한 감독은 없다!” 영화계에 감독 품귀 현상이 벌어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닌 만큼,최 소 억 단위의 계약금이 필요했다.
당연히 제작비가 상승할 수밖에 없 는 요인.
그러나 김기현은 그런 부분에 신경 을 쓰지 않았다.
투자는 내가 무조건 받아올 자신이 있다.
그러니 제작비가 상승하는 것에 신 경 쓸 것 없다.
방금 김기현이 꺼낸 말의 요지였 다.
‘부럽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규한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또 한 번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김기현과 흙수저인 자 신의 차이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윤제건? 박정욱? 그래, 양우석은 어때?” 윤제건과 박정욱,그리고 양우석까 지.
방금 김기현이 입에 올린 이름들은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톱클래스로 분 류되는 감독들이었다.
수많은 제작자들이 함께 일해 보고 싶어 하는 감독들.
이규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고로 손꼽히는 감독들과 함께 작 업해 보고 싶은 욕심이 왜 없을까?
그래서 잠시 솔깃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굳이 필요가 없어!’
‘그때,우리’는 코미디 요소가 강한
청춘물이었다.
이번 영화의 특성과 아까 김기현이 열거했던 감독들의 궁합.
잘 맞는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었다.
그리고 하나 더.
‘너무 늦어!’
톱클래스 감독들은 인기가 많았다.
당연히 계약이 여럿 되어 있는 경 우가 태반이었다.
그들이 기존에 계약된 작품들을 모 두 연출하고 ‘그때,우리’ 작품을 연 출할 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오랜 시 간이 걸렸다.
해서 이규한이 말한 순간,김기현 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 다.
“제작비 아낄 필요 없다니까.”
“아냐,B.P를 낮춰야 해.”
“손익분기점? 굳이 그걸 낮출 필요 가 있어? 제작비를 많이 쓰는 한이 있더라도 더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 면 이득이 더 클 것 아냐?”
김기현이 주장했다.
나름 일리가 있는 이야기.
그렇지만 이규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영화를 몰라!’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인 아버지 김대환의 후광 덕분에 김기 현은 쉽게 영화를 제작했다.
해서 이 바닥이 온통 장밋빛으로 보일 터였다.
그렇지만 이미 쓰디쓴 실패를 여러 차례 경험했던 이규한은 달랐다.
자신이 제작한 영화의 홍행 여부에 따라서 인생의 성패가 갈리는 것이 영화제작자의 숙명.
그래서 이규한은 ‘그때,우리’를 제 작하기에 앞서서 다각도로 분석을 하고 또 분석했다.
그 분석 결과,‘그때,우리’의 흥행 에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 렸다.
‘최대 300만!’
청춘물의 특징 중 하나가 관객층이 명확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규 한은 ‘그때,우리’가 아무리 잘 만들 어진다고 해도 300만 관객을 불러 모으는 것이 한계라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익을 최대한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제작비를 줄여서 손 익분기점을 낮추는 것이었다.
칠 대 삼.
‘그때,우리’의 공동제작을 맡은 블 루문 엔터테인먼트와 스카이 엔터테 인먼트의 수익 분배 비율이었다.
수익 분배 비율이 좋은 만큼,이규 한은 ‘그때, 우리’를 제작해서 가능 한 많은 수익을 거두고 싶었다.
“이렇게 하자. 감독을 신인으로 가 는 대신,배우를 톱스타급으로 붙이 자.”
“그렇게 하려는 이유는?”
“이유는 아까와 같아. 제작비를 줄 이려는 거지.”
이규한이 대답한 순간, 김기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반대 아냐? 톱스타를 캐스팅하면
제작비가 상승할 텐데?”
“얼핏 보기엔 그렇지만 반대야. 톱 스타를 캐스팅하면 순제작비는 늘지 몰라도 총제작비는 오히려 줄어들 어.”
“이유가 뭔데?”
“홍보비가 덜 들거든.”
" 홈……?"
“톱스타가 우리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영화 흥보가 될 거야. 그럼 흥보비를 줄일 수 있으니 자연 스레 총제작비도 줄 거 아냐.”
그제야 이규한의 말뜻을 파악한 김 기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자꾸 제작비 때문에 쩔쩔 매는 지 이해가 안 가네.”
“김기현. 전에 했던 말 기억하지?”
“무슨 말?”
“공동 제작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러니 기획 개발은 전적으로 네게 일 임한다. 이렇게 말했었잖아.”
“그냥 믿고 맡겨 달라?”
“그래.”
“오케이. 한 입으로 두말하면 사내 자식이 아니지.”
김기현이 오케이 사인을 냈다.
“내가 도와 줄 일은 없고?” “하나 있어. 톱스타를 캐스팅해 줘.”
“누굴 캐스팅하길 원하는데?”
“이도빈을 생각하고 있어.”
이규한이 ‘그때,우리’의 남자 주인 공을 맡아 줬으면 하고 욕심을 내는 배우는 이도빈이었다.
드라마를 통해서 대중들에게 얼굴 을 알린 후,스크린으로 진출한 이 도빈은 팬층이 무척 두터웠다.
또,20대 중반 배우들 가운데서는 손에 꼽히는 티켓 파워를 갖추고 있 었다.
“이도빈을 캐스팅하는 게 쉬울까?”
김기현 역시 영화제작사인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당연히 이도빈에 대해 알고 있었 다.
그래서 난색을 드러낸 순간,이규 한이 대답했다.
“당연히 어렵겠지. 그래서 너한테 부탁한 거야.”
‘......?"
“아버지 찬스 좀 활용하란 뜻이 야.”
일전에 ‘과속 삼대 스캔들’을 제작 할 때와는 달랐다.
당시 이규한이 씨제스 엔터테인먼
트 대표를 아버지로 두고 있는 김기 현에게 일절 도움을 청하지 않았던 것은 빚을 지는 게 싫어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김기현은 엄연히 공동제작자.
빚을 지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이용할 수 있는 부분은 최 대한 이용하는 편이 맞았다.
“아버지 찬스를 활용하라?”
그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김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맡겨 둬.”
“믿는다.”
“동업자끼리 당연히 믿어야지.”
‘동업자라.’
그 표현이 무척 거슬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참,부모님은 잘 계시지?”
김기현이 불쑥 질문했다.
“언제 네 부모님께 인사 한번 드리 러 가야 하는데. 예전에 네 어머니 가 끓여 주신 김치콩나물국이 진짜 맛있었는데.”
그 질문을 들은 순간,이규한이 표 정을 굳혔다.
그 표정 변화를 확인한 김기현이 다시 물었다.
“왜? 어디 편찮으셔?”
“아니.”
“그런데 왜……?”
이규한이 대답했다.
“곧 아프실 거야.”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김기현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상황.
그렇지만 이규한은 거짓말을 한 것 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어 머니는 아프기 시작했다.
그런 어머니의 병명은 췌장암이었
침묵의 장기라 불리는 췌장.
특별한 자각 증상이 없기에 조기 발견이 어려웠고,그래서 더욱 무서 운 것이 췌장암이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