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화
공동 집필 “촌스럽긴.”
“촌스러운 게 아니라 당연한 거라 니까요. 그러니까 둘 중 하나죠. 연 인이 되거나 남남으로 남거나.”
“그래서 남남으로 남겠다?”
“대표님,아까 제가 다른 가능성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다른 가능성이라면 연인이 되는
것?”
“네.”
“그건 너무 희박한 가능성이지 않 을까?”
“왜 그렇게 인생을 부정적으로 바 라보시는 겁니까? 인생 모르는 겁니 다. 첫눈에 반하는 영화들이 괜히 나오는 것이……
김단비를 곁눈질로 힐끔거리며 열 변을 토해내고 있는 안유천의 말을 이규한이 도중에 잘랐다.
“유천아,너무 들이댄다.”
“네?”
“만난 지 아직 오 분도 안 됐다.” “제가 좀 서둘렀나요?”
“좀이 아니라 많이.”
“자중하겠습니다.”
안유천이 재빨리 사과한 순간,이 규한이 김단비의 반응을 살폈다.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네!’
여전히 웃음을 짓고 있는 김단비를 발견한 이규한도 웃었다.
‘정말 잘될 수도 있겠네!’
안유천과 김단비.
어쩌면 두 사람이 진짜 연인으로 발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이규한이 이내 고개를 혼들었다.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하는가 여 부가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 다.
“김 작가,아까 내가 말했던 ‘수상 한 여자’의 시나리오 초고. 이 녀석 이 썼습니다.”
“작품 제목이 ‘수상한 여자’인가 요?”
“네. 간략한 내용도 알려드리겠습 니다.”
이규한이 판타지 설정이 가미된 ‘수상한 여자’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정리해서 김단비 작가에게 알려 주 었다.
두 눈을 빛내며 이규한의 설명을 듣던 김단비가 박수를 쳤다.
“어머,재밌어요.”
“그래요?”
“어떻게 이런 기막힌 소재를 떠올 릴 수가 있어요?”
김단비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쓰게 웃었다.
지금 눈앞에서 감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단비가 이런 기막힌 소재를 떠올릴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읽어 볼래요?”
이규한이 김단비에게 제안했다.
“지금 여기에서요?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괜찮습니다.”
“그럼 읽어 보겠습니다.”
김단비가 읽어 보겠다고 대답한 순 간, 안유천이 물었다.
“전 커피만 마시고 일어나면 되나 요?”
“안 되지.”
“왜요?”
“평가는 들어봐야지.”
“그건 나중에 천천히 들어봐도 되 지 않나요?”
“안 돼. 지금 들어야 해.”
“왜 꼭 지금 들어야 하는데요?”
안유천이 불만을 토로한 순간,이 규한이 제안했다.
“저녁 사 줄게.”
“저녁이요?”
“갈비 먹을래?”
“갈비요?”
이규한이 저녁 메뉴로 갈비를 입에 올린 순간,안유천의 표정이 돌변했 다.
‘갈비는 언제나 진리죠.:
“기다릴 거지?”
“설마 또 돼지갈비 사 주실 건 아 니죠?”
“나도 양심은 있는 사람이다.”
“그럼… 소갈비?”
“그래. 소갈비 사 줄게.”
안유천은 표정 관리에 능한 편이 아니었다.
횡재했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김단비에게 말했다.
“천천히,아주 천천히 읽으셔도 됩 니다. 소화시킬 시간이 필요하거든
점심에 이어서 저녁까지.
두 끼 연속으로 갈비를 뜯게 된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육류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두 끼 연속으로 갈비를 뜯는 것은 확실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 다.
그렇지만 점심 식사로 함께 돼지갈 비를 뜯었던 안유천은 달랐다.
마치 갈비를 무척 오래간만에 뜯는 사람처럼 열심히 뜯고 있었다.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그런 안유천 을 바라보던 이규한이 물었다.
“넌 질리지도 않냐?”
“안 질리는데요. 낮엔 돼지였고,저 녁에는 소잖아요. 고기의 종류가 다 튼데 어떻게 질릴 수가 있습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하면서도 소 갈비를 입속으로 밀어 넣기 바쁜 안 유천을 보던 이규한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그래. 아주 실컷 먹어라.”
“네,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후로도 약 삼십 분 동안 열심 히 소갈비를 먹은 안유천이 배를 쓰 다듬으며 만족스런 기색을 드러냈 “역시 갈비는 진리네요.”
“다 먹었어?”
“네. 이제 더 들어갈 데가 없습니 다.”
“그럼 이제 대화를 좀 해 볼까?”
진즉에 식사를 마친 김단비가 기다 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글을 잘 쓰시네요.”
소갈비에 이어 칭찬까지 먹은 안유 천의 양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괜히 대한민국 최고의 제작자이자 프로듀서이신 이규한 대표님과 계약 한 게 아니네요. 글을 볼 줄 아세
요.”
“네? 아,네.”
“제가 좀 씁니다.”
안유천이 잘난 척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규한이 끼어들었다.
“자,칭찬은 그쯤 하고 이제 아쉬 운 점을 말해 봐요.”
이규한이 제안한 순간,안유천이 볼을 부풀렸다.
“칭찬 타임이 너무 짧은 것 아닙니 까?”
툴툴거리는 안유천에게 시선도 던 지지 않고 이규한이 재촉했다.
“김 작가,어서 말해 봐요.”
그 재촉을 받은 김단비가 조심스럽 게 입을 뗐다.
“제가 글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 은 우선 캐릭터의 감정이었어요. 기 적이 벌어지면서 다시 젊어진 여주 인공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대체 뭘까? 이런 생각을 잠시 해 봤거든 요. 만약 제가 극중 주인공의 입장 이라면,사랑을 해 보고 싶을 것 같 았어요.”
“사랑… 이요?”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기 때문일까.
안유천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을 때였다.
“음,물론 성공도 하고 싶을 것이 고,이전에 해 본 적 없는 여러 가 지 일들을 해 보고 싶은 것도 당연 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자로서 는 역시 멋진 남자와 사랑을 해 보 고 싶을 것 같았거든요.”
“왜죠?”
“여주인공이 젊은 시절에는 연애라 는 게 거의 없었어요. 집안 어르신 들 소개로 몇 번 만난 후에 연애라 는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결혼에 골 인했죠. 모르긴 몰라도 극중 여주인 공은 그게 못내 아쉽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요즘 젊은 여자들처럼 멋진 남자와 연애와 사랑을 해 보고 싶다 는 욕심을 가졌을 거라고 판단했어 요.”
김단비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 다.
그렇지만 안유천은 전혀 수긍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안유 천을 바라보던 이규한이 픽 웃었다.
안유천이 수긍하거나 이해하지 못 하는 이유.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능력이 모자 라서가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남자와 여자 의 차이였다.
안유천의 성별은 남자.
그래서 여자들의 심리를 제대로 이 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끝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아쉬웠던 점은 여주인공 의 마지막 선택이었어요.”
“마지막 선택이요?”
“안 작가님이 쓰신 초고에서 여주 인공은 사고를 당해서 다시 노화된 거잖아요. 제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극적인 일로 인해 다시 노화되는 모 습이 보여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
“초고를 읽고 나서 퍼뜩 든 생각은 사고 때문에 노화가 된 것이 아니라 여주인공의 선택이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예를 들면 희생을 하는 거죠. 자식을 위해서 다시 찾은 젊 음을 희생하는 것. 저는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극중 주인공은 한 명의 여자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어머 니이기도 하니까요.”
안유천이 반박하는 대신 후식으로 나온 매실차를 마셨다.
그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해는 간다.
그러나 수긍하기는 어렵다.
대충 이런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안유천을 탓할 생각이 없었다.
이것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
작가 안유천의 문제가 아니라 성별 의 문제였다.
그래서 이규한은 탓하는 대신 안유 천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며 기다렸 다.
작가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동물이 었다.
특히 자신이 쓴 작품에 대해서 이 러쿵저러쿵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 대 부분이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타인이 자식 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욕할 때 부 모가 보이는 반응과 엇비슷했다.
작가에게 있어 작품은 자식 같은 존재.
그런 작품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판 혹은 비난을 받는 상황인데,기분 좋을 작가는 없기 때문이다.
해서 이규한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 자주 만날래요?”
안유천이 불쑥 물었다.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
그래서 이규한이 깜짝 놀랐다.
놀란 것은 김단비 역시 마찬가지였 다.
“너,설마 작업 거는 거냐?”
이규한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은 순 간, 안유천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절 너무 띄엄띄엄 보시는 것 아닙니까? 작업을 거는 게 아니 라 같이 자주 만나서 작품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왜?”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요. 아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공
안유천이 더욱 적극적으로 구애 공 세를 펼쳤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안도했 다.
“진짜 한번 해 보는 게 어때?” “네?”
“공동 집필 말이야. 계약은 내가 해 줄게.”
이규한이 말하자,안유천이 두 눈 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이세요?”
“당연히 진심이지.”
“진짜 계약해 주실 건가요?”
“그럼. ‘수상한 여자’의 공동 작가 로 여기 김단비 작가를 올리는 것에 네가 수긍하면,바로 계약을 진행할 생각이야.”
안유천과 김단비가 ‘수상한 여자’ 의 시나리오를 공동 집필하는 것.
이규한이 내심 바라던 큰 그림이었 다.
그런 상황에서 안유천이 먼저 김단 비에게 공동 집필 제안을 했다.
비록 겉으로 기쁜 기색을 드러내지 는 않았지만,이규한의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땡큐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규한이 재빨리 덧붙였지
만,안유천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 았다.
‘내키지 않는 건가?’
이규한이 재차 안유천의 반응을 살 피고 있을 때였다.
“정확하게 하시죠.”
“말해 봐.”
“김 작가님과 따로 계약을 해 주시 는 거죠?”
안유천의 질문을 받고서야,이규한 은 그의 표정이 밝지 않았던 이유는 알아냈다.
김단비와 따로 작가 계약을 하지 않고,원래 안유천과 했던 계약에 무임 승차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원래 받은 각본료를 반으로 쪼개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안유천이 우려하는 부분이었다. 말도 안 되는 걱정.
그렇지만 영화계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종종 현실이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아까 안유천이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었다.
“당연히 따로 해야지.”
“확실하죠?”
“속고만 살았냐?”
“아쉽게도 속을 기회조차 없었습니 다.” 안유천은 무명작가.
첫 계약이 바로 ‘과속 삼대 스캔 들’의 윤색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는 ‘수상한 그녀’,세 번째는 ‘써니 걸스’였다.
이규한과 강형진.
모두 무명 시나리오 작가의 등을 칠 정도로 양심이 없는 양아치는 아 니었다. 그러니 안유천은 속을 기회 조차 없었던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유천이 우려 하는 이유.
영화계의 나쁜 관행에 대해서 워낙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약속한 겁니다.”
이규한이 재차 고개를 끄덕인 순 간,안유천의 표정에 깃들어 있던 우려가 사라졌다.
그런 그가 김단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잘해 보죠.”
김단비가 그 손을 맞잡았다.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마주 웃으며 악수를 나누고 있는 안유천과 김단비를 바라보던 이규한 이 매실차를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 갔다.
‘시너지!,
이규한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단 어 였다.
‘이 조합,나쁘지 않은데?’
매실차를 마시던 이규한의 두 눈이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