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화
제가 여행 보내드리겠습니다 “됐다!”
이규한이 만류했지만,안유천은 순 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별로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으니 까 다시 한 번 써 볼게요.”
“됐다니까. 이제 ‘써니 걸즈’ 각색 작업에 집중해.”
“아니요. 제가 마음이 안 좋아서
그럽니다. 저한테 한 번만 더 기회 르 "
“유천아.”
“말씀하시죠.”
“시나리오를 못 쓴 게 아냐. 내가 판단하기에는 지금 네가 쓸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 왔어.”
“그렇지만……
“형 말대로 해.”
“…알겠습니다.”
안유천이 수긍했다.
그렇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 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 작가로서 가진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못내 아쉬음이 남기 때문이 리라.
“냉면 먹을래?”
“아니요. 진짜 입맛이 없습니다.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안유천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일어 섰다.
그런 그를 향해 이규한이 말했다.
“냉면 먹을 자격 있어.”
" ?”
“그 정도는 썼단 뜻이야.”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는 안유천의 표정이 그
제야 조금 밝아졌다.
안유천이 먼저 떠나고 혼자 남겨진 이규한이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수 상한 여자’의 시나리오 책을 꺼냈 다.
아까 안유천에게 건넸던 말.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꺼냈던 말이 아니었다.
안유천은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좋은 시나리오를 써 왔다.
적어도 골격은 갖추었으니까. 그렇지만 너무 급히 써서일까. 디테일이 약했다.
또,이규한이 기억하고 있는 ‘수상 한 여자’라는 작품 특유의 신파적인 부분이 한참 부족했다
“남자 작가니까 어쩔 수 없지!”
안유천은 남자 작가이다 보니 신파 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부분은 각색 작가를 붙여서 해결해야 했다.
‘누가 좋을까?’
이규한이 고민에 잠겼다.
신파와 코미디.
두 가지에 모두 능한 작가를 찾으 려고 하다 보니,마땅한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다.
그로 인해 이규한이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지이잉.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 내일 약속 시간과 장소 좀 알려 주세요.
아까 통화를 하면서 내일 만나기로 약속했던 김단비가 보낸 문자의 내 용이었다.
그녀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확인하 고 무심코 답장을 보내려고 했던 이 규한이 무릎을 탁 쳤다.
굳이 다른 각색 작가를 찾기 위해 서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김단비 작가가 최적임자야!”
비록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진 못했 지만,‘수상한 여자’의 시나리오 초 고를 썼던 게 바로 김단비 작가였 다.
그런 그녀만큼 ‘수상한 여자’의 각 본 작업에 최적임자가 또 어디 있을 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규한이 서 둘러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에요? 혹시 지금 시간이 괜찮으면 내일까지 기다리지 말고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그때,우리’의 각본 계약을 한 후, 김단비 작가는 작품 활동에 전념하 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관뒀다.
통화를 해 보니 마침 근처 커피숍 에서 글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후,이규한이 김단비 작가가 알려 주었던 커피숍으로 찾아갔다.
노트북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 고 있는 김단비 작가를 발견한 이규 한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렇지만 김단비 작가는 워낙 집중 한 탓에 이규한이 앞에 도착해 있다 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요?” 이규한이 노트북 모니터를 힐끗 살 피며 물었다.
모니터 위에 떠올라 있는 것. 익숙한 한글 파일이 아니었다.
낯선 풍광 사진들이 떠올라 있었 다.
그제야 이규한이 도착했다는 사실 을 뒤늦게 알아챈 김단비 작가가 황 급히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
“오셨어요?”
“여행 가려고요?”
이규한이 넌지시 묻자 김단비 작가 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어요.” “거기가 어딘데요?”
“광이요.”
“괌에 가 보고 싶은가 보네요. 한 번 다녀오지 그래요?”
“저도 가고 싶지만 너무 비싸요.”
“각색료 받았잖아요?”
이규한이 의아한 시선을 던지며 묻 자,김단비 작가가 대답했다.
“그건 생활비로 써야죠. 또 언제 작품을 계약할지 알지 못하는 게 작 가의 삶이잖아요. 그러니까 가능한 아껴 써야죠.”
김단비 작가가 당연하다는 듯이 덧 붙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쓴웃
음을 머금었다.
작가는 비정규직이다.
한번 일을 맡으면 목돈을 손에 쥘 수 있지만,일반 직장인들과 달리 월급이 따박따박 들어오지 않는다.
언제 또 새로운 일을 맡아서 들어 갈지 알 수가 없으니, 목돈을 손에 쥐어도 함부로 쓸 수가 없다.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지금 마주 앉아 있는 김단비 작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외 여행에는 꽤 큰돈이 들었다. 그래서 김단비 작가는 비행기 티켓 을 구매하고 직접 괌으로 찾아가는 대신,다른 사람이 인터넷에 올린 괌 여행 후기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내 정신 좀 봐. 일단 작품 부터 드려야 하는데.”
김단비 작가가 가방에서 출력한 ‘그때,우리’ 시나리오 책을 꺼내려 고 할 때, 이규한이 만류했다.
“그 전에 아까 하던 얘기부터 마저 할까요?”
“하던 이야기요?”
“해외 여행 말이에요.”
이규한이 덧붙이자,김단비 작가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그냥 남이 올린 후기와 사 진을 보는 걸로 만족해요. 지금 해 외 여행을 가는 건 너무 사치라는 것,저도 잘 알아요.”
“만약 상황이 달라지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각본 계약을 하나 더 하고 나면 해외여행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 가능하겠지만… 각본 계약이 갑자기 들어올 리가 없으니까요.”
김단비 작가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 을 마친 순간,이규한이 재빨리 입 을 뗐다.
“그러니까 각본 계약을 하나 더 하 고 나면 진짜 해외 여행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는 뜻이죠?”
“네? 네. 그런데 왜 아까부터 자꾸 이런 걸 물으시는 건가요?”
김단비 작가의 질문을 받은 이규한 이 대답했다.
“제가 해외 여행 보내드리겠습니 다.”
“그러니까… 각본 계약을 하나 더 하자는 말씀이시죠?”
한참 만에 말뜻을 이해한 김단비 작가가 물었다.
“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 동 각본이 되는 겁니다.”
“네. 시나리오 초고는 나온 상황이 거든요.”
‘수상한 여자’의 시나리오 초고.
이미 안유천이 집필을 마친 상황이 었다. 그리고 이규한은 초고 작업을 마친 시나리오 작업을 김단비에게 맡겨 볼 생각이었다.
한 작품에 두 명의 작가를 쓰는 경우.
당연히 돈이 두 배로 들었다.
그래서 일반적인 경우에는 제작사 측에서 두 명의 작가에게 모두 돈과 크레딧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했다.
“글이 아주 쓰레기다. 쓰레기. 이런 글을 싸질러 놓고 내 돈을 받고 크 레덧에 이름까지 올리겠다고? 네가 양심이란 게 과연 있긴 있는 놈이 야?”
이런 경우 가장 흔히 쓰이는 방법.
시나리오 초고를 쓴 작가인 안유천 을 밀어내는 것이었다.
인간적인 모욕감을 주면서 안유천 을 가지치기 하듯 쳐 내고,대신 다 른 작가인 김단비 작가에게 헐값에 각본과 각색 작업을 시키는 것.
영화 제작자들이 흔히 하는 양아치 짓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안유천이 ‘수상 한 여자’의 시나리오 집필에 들였던 공을 당연히 대우해 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공동작가로 크레딧에 이름 을 올리게 하려는 것이었고.
물론 여기에도 선제 조건이 필요했 다.
바로 미리 각본 계약을 맺고 시나 리오 초고를 썼던 안유천 작가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럼 기존에 각본 계약을 맺은 작 가가 있다는 뜻인가요?”
“맞습니다.”
“누구인가요?”
이규한이 막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 물었다.
딸랑.
마침 문을 열고 커피전문점 안으로 들어오는 안유천을 발견했기 때문이 었다.
‘타이밍 참 잘 맞춘단 말이야!’
이규한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눈짓으로 안유천을 가리켰다.
“저 녀석입니다.”
안유천이 이규한을 발견하고 다가 왔다.
“커피 사 주려고.”
이규한이 대답하자,안유천의 콧김 이 거칠어졌다.
“역시 작가는 글을 잘 쓰고 봐야겠 네요.”
“무슨 뜻이야?”
“예전에는 자판기 커피 빼 마시라 고 하셨잖아요.”
안유천이 대답한 후,김단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누구예요?”
“인사해. 김단비 작가야.”
이규한이 말하자,안유천이 특유의 너스레를 떨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제작자,그리고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과 함께 작업 하고 있는 시나리오 작가 안유천이 라고 합니다.”
“김단비라고 합니다.”
“제가 이름을 못 들어본 걸 보니, 아직 크레딧이 없는 신인 작가시죠?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제 게……
안유천이 허세를 부릴 때,이규한 이 끼어들었다.
“너도 아직 크레딧 없는 건 마찬가
지잖아.”
이규한이 지적하자,안유천이 당황 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직은 없지만,곧 생길 것 아닙 니까?”
“팩트는 아직은 크레덧이 없다는 거지.”
“뭐,그게 팩트이긴 하지만……
“그리고 여기 있는 김단비 작가도 대한민국 최고의 제작자와 함께 일 하고 있다.”
“네? 누구요? 설마 양동현 대표와 일하는 겁니까?”
안유천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 이규한이 대답하지 않고 안유천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안유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네 본심을 들은 것 같아서.”
“제 본심이요?”
“불과 얼마 전에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 제작자가 나라고 말했던 것 같 은데. 그새 마음이 바뀌었나 보지?”
그제야 본인의 실수를 깨달은 안유 천이 머리를 긁적였다.
“마음이 바뀐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진짜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영화 제작자 가운데서는 이규한 대표님이 여전히 대한민국 최고거든요.”
“네가 친분이 있는 제작자는 나밖 에 없잖아?”
“현재로서는 그렇죠.”
“아주 고맙다.”
이규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 다.
전혀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 문이었다.
그때,안유천이 재빨리 화제를 전 환했다.
“김단비 작가도 대표님과 계약한 겁니까?”
“맞아.”
“그럼 저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최고의 제작자인 이규한 대표님이 인정한 실력 있는 작가셨군요.”
안유천의 허세가 싫지 않은 걸까.
김단비가 실소를 터뜨린 순간,이 규한이 입을 뗐다.
“재밌는 녀석이니까 친하게 지내 요.”
“네,알겠습니다.”
“내가 알기론 동갑인데 친구가 되 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뚜렷한 정답이 없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언제 탄탄대로가 열릴지 모르는 먼 길을 혼자서 외롭게 걸어갈 때,외 로움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
분명히 큰 도움과 의지가 될 터였 다.
그래서 이규한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이었다.
“친구가 있으면 좋죠.”
김단비는 그 제안에 긍정적인 대답 을 꺼냈다.
반면 안유천은 부정적인 답변을 꺼 냈다.
“우린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거야?” 이규한이 의아한 시선을 던지며 이 유를 묻자,안유천이 당연하다는 듯 이 대답했다.
“남녀 사이는 친구가 될 수 없다. 이게 제 신조거든요.”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