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화
갈 길이 구만리 만약 생판 남이었다면?
더 열심히 뜯어말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뒀을 터였다.
백문이 불여일견.
백번 말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 고,직접 경험을 해 봐야 깨닫는다 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기 때문이었 다.
그렇지만 이규리는 남이 아니었다.
하나뿐인 여동생이었다.
그런 그녀가 비참한 삶을 사는 것 을 그냥 손 놓고 지켜볼 수는 없었 다.
“이렇게 하자.”
“호인 씨와 헤어지라는 건 아니 지?”
“아냐.”
무조건 최호인과 헤어지라고 종용 하는 것.
끝이 안 좋았다는 사실을 이미 알 고 있는 이규한이기에 다른 방법을 택했다.
“시간을 좀 갖고 지켜보자.”
“언제까지?”
“그 녀석이 밥벌이는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하지만……
“만약 그때까지 못 기다린다면 나 도 절대 허락 못 해.”
이규한이 엄포를 늘어놓았다.
다행이 이규리도 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알았어.”
그 대답을 듣고서야 안도한 이규한 이 말했다.
“힘들 거야.”
“각오하고 있어.”
“그렇게 쉽게 대답하지 마.”
" ……?"
“네가 지금 각오하고 있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 거야.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혼 생활 은 지옥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절대로 지금 다니는 회 사는 그만두지 마.”
아까도 말했듯이 영화와 관련된 일 을 하는 사람들의 수입은 규칙적이 지 않았다.
능력이 없다고 낙인이 찍힌 피디들 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것은 불 규칙한 수입으로 인해 생활고를 겪 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부부 중 한 명이라도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는 것이 필요 했다.
“명심할게.”
이규리가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하 는 것을 들은 이규한이 안주머니에 서 통장을 꺼내서 건넸다.
“받아.”
“이게 뭐야?”
“보면 몰라? 통장이지.”
“그러니까 통장을 왜 나한테 주는
거야?”
“일단 확인부터 해.”
이규한이 재촉하자,이규리가 통장 을 펼쳤다.
잠시 뒤,이규리가 두 눈을 부릅떴 다.
“이게… 대체 얼마야?”
“이억 오천만 원.”
“이렇게 많은 돈이 어디서 났어?”
“도둑질한 건 아니니까 걱정 마. 내가 번 거야.”
“무슨 수로 이렇게 큰돈을 벌었는 데?”
“아까 너도 들었잖아. 이번에 프로
듀서로 참여했던 ‘과속 삼대 스캔 들’이 흥행에 성공한 덕분에 번 돈 중 일부야.”
“이렇게 많은데 일부… 라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이규리 에게 이규한이 말했다.
“그중 오천만 원은 네 돈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명색이 오빠인데 여동생 시집갈 때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잖아.”
“오빠!”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일까.
이규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수익 높은 곳으로 골라서 적금을
넣어 둬. 아니면,펀드 같은 데 넣 어서 재테크를 해 보던가. 아까도 말했듯이 아직 그 녀석과 결혼하려 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때까지 최대한 돈을 모아.”
“알았어. 그리고 고마워.”
통장을 양손으로 꼭 움켜쥐고 있는 이규리에게 이규한이 덧붙였다.
“나머지 이억은 네가 은행에 넣어 둬.”
“왜 오빠가 갖고 있지 않고?”
“내가 영화하는 사람이란 것,잊었 어?”
“내 수중에 돈이 있으면 또 영화를 제작한다고 어딘가에 쓸 거야. 그러 니까 네가 갖고 있어. 나중에 따로 쓸데가 있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일단 급한 불은 꼈네!’
어느 정도 시간은 번 셈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최호인이 밥벌이를 할 정도로 능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이규리와 헤어진 후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서 걸음을 옮기던 이 규한의 고민이 깊어졌다.
다음 날 아침.
이규한이 통장을 펼쳤다.
삼억 오천만 원에서 일억으로.
통장의 잔고는 확 줄어들어 있었 다.
그렇지만 기분은 좋았다.
오랜만에 오빠 노릇을 했다는 생각 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통장에 남아 있는 잔고는 일억. 그렇지만 이 돈은 이미 쓸 용처가 있었다.
그러니 통장 잔고가 바닥이 난 것 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시 빈 털터리가 됐다고 생각하자,오히려 새로운 의욕이 샘솟았다.
그때 였다.
지이잉. 지이잉.
이규한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발신자는 안유천.
“무슨 일로 전화했어?”
“시나리오 다 썼습니다.”
“벌써?”
“저는 힘 빼고 써야 좋은 글이 나 온다면서요.”
“그렇긴 하지. 일단 고생했다.”
안유천과의 통화를 마치자마자 이 규한이 바로 외출 준비를 시작했을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다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안녕하세요,대표님. 저 김단비입 니다.”
“아,김 작가. 무슨 일로 전화했어 요?”
“시나리오 각색 작업이 마무리가 돼서요.”
“벌써요?”
“너무 빨리 끝냈나요? 좀 더 시간
“그럼 지금보다 더 잘 쓸 수 있어 요?”
“그건 확신할 수 없지만……
김단비와 통화를 하던 이규한이 희 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신인 작가들의 특징.
본인이 쓴 글에 대한 확신이 없다 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자꾸 주변의 말에 휘둘리기 마련이 었다.
“이 부분만 고치면 훨씬 더 시나리
오가 좋아질 것 같은데?”
“에이,벌써 끝났어? 조금만 더 설 정과 캐릭터에 대해서 고민해 봐.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글이 나올 거야.”
“잘 썼네. 그런데 아쉬워. 콕 껍어 서 말하긴 어려운데 2% 부족한 느 낌이랄까. 부족한 2%를 채워 와.”
신인 작가들이 프로듀서나 제작자 에게서 흔히 듣는 말들이었다.
문제는 이런 이야기들이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대부분 주관적인 의견이었기 때문
또,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그러다 보니 신인 작가들은 수정 과정에서 방향을 잃어버리기 십상이 었고,심지어 잘 쓴 글을 새로 써서 더 나빠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장고 끝의 악수랄까.
‘신인 작가들의 문제가 아냐!’
이규한이 판단하기에 이건 신인 작 가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대안 제시도 없이,주 관적인 의견을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무능한 피디 및 제작자들에게 있었 “일단 시나리오를 보고 얘기하죠.”
“네,알겠습니다.”
“오늘은 선약이 있으니까 내일쯤 연락할게요.”
김단비와의 통화를 마친 이규한이 일단 안유천을 만나기 위해서 집을 빠져나왔다.
강남역 인근에 위치한 커피 전문점 인 빈상트에서 안유천을 만났다.
“요즘 어때?”
이규한이 묻자,안유천이 한숨을 푹 내쉬며 답했다.
“죽을 것 같아요.”
“왜?”
“두 작품을 동시에 작업하는 것, 막연히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 렵 네요.”
‘수상한 여자’, 그리고 ‘써니 걸즈’. 안유천은 두 작품의 각본과 각색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기에 힘들어하 는 것이리라.
“좋게 생각해.”
“좋게 생각하라고요?” “그래. 일이 없어서 노는 것보단 낫잖아?”
“그건 그렇죠.”
“그리고 잊지 마.”
“뭘 잊지 말라는 겁니까?”
“너한테 일을 맡기는 사람이 없어 서 과연 누가 읽어 줄지도 확신할 수 없던 글을 혼자 방에 틀어박혀서 쓰고 있었던 때를 말이야.”
이규한이 충고하자,안유천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씀이시죠?” “바로 그거야.”
“그래서 아침부터 계속 굶고 왔습 콧바람을 일으키면서 당당하게 대 꾸하는 안유천을 확인한 이규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주 장하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됐고. 시나리오나 꺼내 봐.”
“여기 있습니다.”
안유천이 기다렸다는 듯이 시나리 오 책을 꺼냈다.
‘수상한 여자’라는 제목을 물끄러 미 내려다보던 이규한이 바로 손을 뻗지 못하고 숨을 골랐다.
신중한 기색으로 이규한이 막 시나
리오 책으로 손을 가져가려 했을 때 였다.
이규한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안유 천이 물었다.
“혹시 또 그걸 하시려는 겁니까?”
“그거라니?”
“시나리오 감정이요.”
안유천의 말이 끝난 순간,이규한 이 픽 하고 실소를 홀렸다.
그가 작업한 시나리오를 확인하는 것.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두 번째였 다.
‘과속 삼대 스캔들’의 윤색을 안유
천이 마쳤을 때도,이규한은 시나리 오 책을 바로 펼쳐서 확인하지 않았 다.
대신 신중한 표정으로 시나리오를 집어 들었었다.
“시나리오 감정이요? 책을 안 보고 감정부터 해요?” 당시 안유천이 황당하단 표정을 지 은 채 던졌던 질문이었다.
그 기억이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일 까.
안유천은 오늘도 흥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맞아. 곧 감정에 들어갈 거야.”
이규한이 솔직하게 대답하자,안유 천이 더욱 흥미를 드러냈다.
“그 감정이라는 것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요? 시나리오를 집어 들면 글자들이 막 눈앞에 보이나요? 그래 서 거 뭐냐? 빨간펜 선생님처럼 고 쳐야 될 부분들이 빨간색으로 딱 떠 오르나요?”
“유천아.”
“네!”
“영업 비밀이다.”
“역시 다르네요.” “무슨 소리야?”
“이런 신기한 능력을 또 누가 갖고 있겠습니까? 대표님이 괜히 대한민 국 최고의 프로듀서가 되신 것이 아 니라는 뜻입니다.”
“지금 비꼬는 거냐?”
“아닌데요.”
“진짜 아냐?”
“진짜 아닙니다.”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말씀하십시오.”
“입 좀 다물고 있어.”
“왜요?”
안유천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데 성공한 이규한이 탁자 위에 놓여 있 는 ‘수상한 여자’ 시나리오를 들어 올렸다.
- 2,235,897.
잠시 후,이규한의 눈앞에 떠오른 숫자였다.
‘고작 이백만?’
뒷자리 숫자는 제대로 눈에 들어오 지도 않았다.
가장 앞자리 숫자가 2라는 것을
확인한 이규한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규한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수 상한 여자’의 최종 관객수.
800만 관객을 훌쩍 넘겼었다.
그런데 방금 이규한이 집어든 ‘수 상한 여자’의 예상 관객수는 200만 명을 간신히 넘긴 수준이었다.
‘책이 엉망인 거야? 아니면,다른 변수들 때문인 거야?’
이규한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수 상한 여자’의 최종 관객수와 시나리 오 책을 들어 확인한 예상 관객수의 격차가 너무 컸다.
그로 인해 이규한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을 때,안유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요? 감정 결과가 별로인가요?”
“그래. 별로야.”
“얼마나 안 좋은데요?”
이규한이 대답했다.
“갈 길이 구만리다.” 지글지글.
불판 위에 놓여 있던 돼지갈비가 타기 시작했다.
안유천이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속도가 현저히 느 려졌다는 사실을 간파한 이규한이 물었다.
“더 먹을래?”
“아니요.”
“왜? 아직 7인분밖에 안 먹었어.”
“오늘은 입맛이 별로 없네요.”
탁.
안유천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대 답했다.
푸흡.
이규한과 안유천의 대화를 엿들었 을까.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옆 테이블에서 고기를 먹고 있던 젊은 여성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둘이서 7인분씩이나 먹고서 입맛이 없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
이렇게 생각했기에 실소를 터트린 것이리라.
그렇지만 정작 이규한은 웃지 않았 다.
안유천의 말이 사실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에 몇 인분을 먹었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던 이규한이 그날 둘이서 돼지갈비 12인분을 해치웠
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날에 비하면 겨우 절반 정도밖에 먹지 않은 셈이었다.
그때 였다.
“다시 한 번 쓸까요?”
안유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