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30화 (30/272)

30 화

함량 미달 ‘역시 몰랐네!’

이규한이 쓴웃음을 머금었을 때였 다.

“정말 형님이 ‘과속 삼대 스캔들’ 의 프로듀서였습니까?”

최호인도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그렇다니까. 왜 못 믿겠어?”

“그게 아니라……

“정 못 믿겠으면 검색해서 영화 정 보 확인해 봐.”

“아닙니다. 믿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뭐?”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 니다.”

이규한을 바라보는 최호인의 눈빛. 그새 바뀌어 있었다.

좀 전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던 존 경과 동경이란 감정이 깃들어 있었 다.

“규리야.”

“응,오빠.” “아까 내가 했던 말,전달했어?”

“시나리오 말이지?”

이규리에게 남자 친구인 최호인을 여기로 부르라고 지시하면서,그가 쓴 시나리오를 갖고 오라고 말했었 다.

“가져왔지?”

“당연히 가져왔지.”

이규리가 눈짓하자,최호인이 재빨 리 가방에서 두 권의 시나리오 책을 꺼냈다.

“형님께서 직접 제가 쓴 시나리오 를 읽어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최호인이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말 한 순간,이규한이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형님?’

방금 최호인이 자신을 부른 호칭이 신경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잔뜩 기대하는 눈빛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각하고 있네.”

해서 이규한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 했다.

“제가 무슨 착각을 했습니까?”

“안 읽을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직접 썼던 시나리오를 갖고 오라고 지시했던 것.

당연히 시나리오를 직접 읽어보기 위함이 아니었느냐?

최호인은 이런 의미가 담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규한이 대답했다.

“제목이 궁금했을 뿐이야.”

“......?"

“제목만 봐도 대충의 내용과 흥행 여부를 알 수 있거든.”

‘지구 너머의 낙원’,그리고 ‘우리 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

최호인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두 권의 시나리오 책에 적혀 있는 제목 이었다.

그리고 아까 이규한은 거짓말을 했 다.

단지 제목만으로 시나리오의 내용 과 흥행 여부를 아는 것.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목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극의 장르 정도가 전부였다.

어쨌든.

이규한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두 권의 시나리오 책으로 손을 뻗는 대신 최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 장편 시나리오는 몇 작

품이나 썼어?”

“총 다섯 편 썼습니다.”

“시나리오 공모전에 제출해 본 적 있어?”

“네,있습니다.”

“그럼 시나리오 공모전 수상 경력 은 있어?”

“아직 없습니다.”

“본심에는 올라갔었어?”

“예심에서 탈락했습니다.”

최호인이 멋쩍은 둣 머리를 긁적이 며 대답한 순간,이규한이 물었다.

“네가 시나리오 공모전에 냈던 작 품이 본심에도 오르지 못하고 예심

에서 탈락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 해?”

“함량 미달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낸 작품이 함량 미달이라고 판단했단 뜻이야?”

“그게 아니라,시나리오 공모전의 심사위원들이 함량 미달이란 뜻입니 다.”

“왜 그렇게 생각해?”

“제 작품을 본심에도 올리지 않고 예심에서 떨어뜨렸으니까요. 작품을 보는 눈이 형편없는 함량 미달의 심 사위원들이 틀림없습니다.” 분하고 억울한 표정으로 힘주어 말 하는 최호인을 바라보고 있던 이규 한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좋게 말하면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것이었지만,나쁘게 말하면 주제 파 악이 전혀 안 되어 있었다.

아까 최호인이 함량 미달이란 대답 을 꺼냈을 때,이규한은 내심 반가 웠다.

적어도 자신의 작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주제 파악 은 냉정하게 하고 있다는 뜻이었으 니까.

그렇지만 착각에 불과했다.

최호인이 함량 미달이라고 지적했 던 것은 본인의 작품이 아니라,본 인의 작품을 심사했던 공모전 심사 위원들이 었다.

이 차이는 무척 컸다.

최호인이 주제 파악이 된 상황이라 면,본인의 부족함을 깨닫고 시나리 오 공모전에서 수상할 수 있도록 더 욱 노력할 터였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라면,본인의 부족함을 채울 생각은 않고 계속 공 모전 심사위원들의 안목만 탓할 터 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의 생각을 갖고 있으면 죽 을 때까지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뽑

힐 수 없어!’

이렇게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것 을 이규한이 꾹 참고 다시 물었다.

“제작사 대표나 피디에게 작품을 보여 준 적은?”

“지인에게 부탁해서 믿을 만한 제 작사 대표님에게 제가 썼던 작품을 보여 줬던 적이 있습니다.”

“그 믿을 만한 제작사 대표가 누구 지?”

“큐비스 엔터테인먼트의 김갑성 대 표님입니다.”

큐비스 엔터테인먼트의 김갑성 대 표.

이규한도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믿을 만한 제작자는 아닌데!’

상업 영화 두 편을 제작했고,그 두 편의 작품이 모두 손익분기점을 넘긴 김갑성 대표는 영화 제작에 대 한 실력과 감각이 있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인성은 별로였다.

충무로에서 그에 대한 평이 좋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김갑성 대표에게서 어떤 평이 돌아왔어?”

“그게……

“왜? 돌아온 평가가 별로 안 좋았 어?”

“그건 아닙니다.”

“그럼?”

“실은 아직 평가를 못 들었습니 다.”

최호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 다.

“언제 보여 줬는데?”

“대략 반년쯤 전입니다.”

“그래서 아직 김갑성 대표에게서 평가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그렇습니다.”

“기다리지 마. 평가가 돌아오지 않 을 테니까.”

그리고 김갑성 대표에게서 시나리 오에 대한 평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 고 확신하는 이유는 이규한 역시 제 작자였기 때문이었다.

제작자들은 항상 좋은 작품에 목이 마르다.

그래서 좋은 작품을 발견하면 무조 건 선점하려 드는 편이다.

그런데 작품을 건넨 후 반년 가까 이 연락이 없었다는 사실이 의미하 는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최호인이 보냈던 시나리오 책을 보 고 전혀 흥미나 관심이 생기기 않았

거나,아예 읽어 보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쪽이든 큐비스 엔터테인먼트의 김갑 성 대표에게서 작품에 대한 평가가 돌아올 확률은 없었다.

‘어느 쪽이려나?’

이규한이 두 권의 시나리오 책을 내려다보았다.

최호인은 지금까지 본인이 썼던 다 섯 작품의 시나리오 가운데 가장 자 신이 있는 두 작품의 시나리오를 갖 고 왔을 것이었다.

‘어디 한번 볼까?’

이규한이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손 을 뻗었다.

그런 그가 우선 집어든 것은 ‘우리 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였다.

‘얼마냐?’

이규한이 확인하려는 것은 눈앞에 떠오르는 숫자였다.

- 10,203.

잠시 후,이규한의 눈앞에 숫자가 떠올랐다.

그 숫자를 확인한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망작 중의 망작인 ‘만월’보다도 못 하네!’

굳이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 다’라는 제목이 적혀 있는 시나리오 책의 내용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10,203이란 숫자. 즉,예상 관객수 를 확인한 순간,충분히 시나리오의 수준이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큐비스 엔터테인먼트의 김갑성 대 표에게서 시나리오에 대한 평가가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있었군!’

갈증이 치밀었다.

손에 들고 있던 ‘우리의 복수는 범 죄가 아니다’ 시나리오 책을 내려놓

“갑자기 왜 혼자 술을 드십니까?”

“몰라도 돼.”

퉁명스레 대꾸한 이규한이 크게 숨 을 내쉰 후,남아 있던 ‘지구 너머 의 낙원’이란 시나리오 책을 바라보 았다.

‘그래도 이건 좀 낫겠지?’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이규한이 시나리오 책을 들어 올렸 다.

‘이번엔 얼마냐?’

잠시 후, 이규한의 눈앞에 숫자가

떠올랐다.

- 4,569.

그 숫자를 확인한 이규한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4569명이라고?’

이규한의 한숨이 깊어졌다.

설마했는데.

아까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 다’ 책을 들어 올려서 감정했을 때 보다,오히려 숫자가 더 줄어들어 있었다.

조르륵.

긴장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 던 최호인이 물었다.

“아까부터 왜 자꾸 혼자 술을 드십 니까?”

“가슴이 답답해서.”

한 잔의 술로는 부족했다.

연거푸 세 잔의 술을 마신 후,이 규한이 최호인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기 때 문일까.

마른침을 꿀끽 삼킨 최호인이 물었 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이규한이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되레 질문을 던졌다.

“계속 영화할 거야?”

“물론입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대답 을 들은 이규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대답해.”

“네?”

“마지막으로 묻는다. 죽어도 영화 계속할 거야?”

이규한의 일변한 분위기에 당황해 서일까?

아까와 달리 잠시 머뭇거리던 최호 인이 힘주어 답했다.

“네. 죽어도 영화할 겁니다.”

그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다시 술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며 생각했 다.

‘이거 문제가 심각하네!’

“왜 술을 그렇게 급하게 마셔?”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

이규리가 핀잔을 건넸다.

그렇지만 잔소리를 하는 이규리의 목소리는 아까 회사 앞에서 만났을 때보다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이규한이 마음을 바꿔서 남자 친구 인 최호인을 직접 만났던 것 때문이 리라.

그렇지만 이규한의 표정은 밝아지 지 않았다.

최호인을 만나고 난 후 더 심란해 졌기 때문이었다.

‘재능이나 감각이 부족해!’

영화감독은 예술가였다.

그리고 예술이란 영역은 특이한 분 야였다.

노력보다 타고난 재능이 훨씬 더 중요한 분야.

그저 영화를 좋아하고,좋아하는 것을 더 잘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 녀석이 그렇게 좋아?”

“응.”

“왜 그렇게 좋아?”

“사람 좋아하는 데 무슨 이유가 있 겠어?”

단호한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란 생각이 들 었기 때문이었다.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이규리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의 고민이 깊어 졌다.

가장 쉬운 방법은 억지로 두 사람 을 떼어놓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방법을 사용했던 결과 가 좋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한 번 경험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 녀석과 결혼하고 싶어?”

“응. 결혼하고 싶어.”

“신중히 생각해. 연애와 결혼은 다 르니까.”

연애와 결혼은 확연히 달랐다.

연애가 이상이라면,결혼은 현실이 었으니까.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알아?”

“응?”

“결혼도 안 해 봤으면서 어떻게 아 냐고?”

“내가 왜……

이규한은 이미 결혼 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결혼 생활을 했던 경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행한 결혼 생활 끝에 아내가 내 밀었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 끔 찍한 경험까지 해 봤던 마당이었다. 그래서 반박하려고 했던 이규한이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이규리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규한이 화제를 돌렸다.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 은 수입이 불안정해. 그동안 날 곁 에서 지켜봐서 그건 너도 알고 있잖 아?”

“물론 알아.”

“걱정 안 돼?”

“나도 걱정돼. 그렇지만 호인 씨가 잘해 낼 거라고 믿어.”

후우.

이규한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이 헤어지게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규리가 걱정이 됐다.

실패한 영화감독들은 이규한의 주 변에 많았다.

그래서 실패한 영화감독들과 그들 의 가족들이 살아가는 비참한 삶을 이규한은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 었다.

‘내가 도울 수밖에.’

1억 관객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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