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화
억대 부자 “루틴… 이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 는 차수련에게 이규한이 덧붙였다.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알고 계셨단 거죠?”
“차수련 씨가 설렁탕을 드시지 못 한다는 사실요.”
“그걸 어떻게 아셨죠?”
“민석이에게 들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차수련이 두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 말씀은 제가 설렁탕을 못 먹는 다는 사실을 알면서 일부러 설렁탕 집에 데려갔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왜죠? 절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신 건가요?”
“차수련 씨. 제가 그 정도로 치사 하거나 나쁜 놈은 아닙니다.”
“그럼 왜죠?”
“설렁탕을 못 먹는 게 아니라,안 먹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이번 기회 를 통해서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 다.”
이규한이 대답한 순간 차수련이 표 정을 굳혔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 요?”
“연기에 대한 열정이 없다.”
" ……?"
“지난번에 민석이에게 차수련 씨에 대해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 습니다. 차수련 씨가 새로운 배역에 도전하지 않는 것이 연기에 대한 열 정이 없다고 판단한 이유였습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죠?”
“연기에 대한 열정이 없는 것이 아 니라,새로운 배역에 도전할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규한이 말을 마친 순간,차수련 이 흠칫했다.
‘제대로 짚었어!’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확신하 며 다시 입을 뗐다.
“아까 설렁탕 맛이 괜찮았다고 하 셨죠?”
“네,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다음에 다시 설렁탕을 드실 의향 이 있으신가요?” “아마 다시 먹을 것 같습니다.”
“연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런 배역을 절대 못 해. 이 배역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 이렇 게 미리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새로 운 배역들에 도전해 볼 엄두조차 내 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도전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게 어렵지, 막상 도전을 해 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아까 설렁탕처럼요.”
이규한이 긴 이야기를 마친 후,아 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어 올렸다.
차수련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 해서였다.
약 십 분의 시간이 흐른 후,차수
“제게 제안하시려는 배역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물론 알려 드려야죠.”
이규한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방 에서 ‘그때,우리’의 시나리오를 꺼 냈다.
“직접 보시죠.”
“어떤 배역인지는 알아야……
“천천히 읽어보세요. 다 읽고 나시 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차수련이 짤막한 한숨을 내쉰 후 시나리오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 차수련은 책을 빨리 읽는
편이었다.
약 반 시간 후,시나리오를 다 읽 고 덮은 차수련이 물었다.
“혹시 제게 맡기시려는 배역이 세 영인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저와 가장 잘 어울리는 배역 같아 서요.”
“맞습니다.”
‘그때,우리’에 등장하는 세영 배역 은 대학교의 뀐카였다.
미모와 지성,그리고 재력까지 겸 비한 덕분에 남자라면 사랑에 빠지 지 않을 수 없는 배역이 세영이었
그런 세영과 지금 마주앉아 있는 차수련의 이미지.
‘그때,우리’의 시나리오를 직접 썼 던 이규한의 입장에서 싱크로율이 100퍼센트에 가까웠다.
이것이 이규한이 차수련을 캐스팅 하기 위해서 공을 들이는 이유였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이규한이 긴장하고 있을 때,차수 련이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란 겁니까?”
“혹시 제게 맡기시려는 배역이 미
라가 아닐까 하고 걱정했거든요.”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환하게 웃었다.
‘스몰,스물 하나’에 등장하는 미라 배역은 어장 관리의 달인이었다.
미모는 뛰어난 편이 아니었지만, 타고난 끼로 남자들을 유혹하는 스 타일의 여성.
차수련의 이미지와는 무척 어울리 지 않는 배역이었다.
“출연을 결심하셨습니까?”
이규한이 물었다.
그렇지만 차수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고민에 잠긴 차수련을 확인한 이규한은 재촉하지 않았다.
‘결정하기 힘들 거야!’
연극 무대에서 영화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무척 큰 변화였다.
차수련처럼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 하는 성격이라면,엄청난 용기가 필 요할 터였다.
그래서 이규한이 묵묵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한번 해 볼게요.”
마침내 차수련이 승낙한 순간,이 규한이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그러나 애써 내색하지 않은 채 이 규한이 펜을 꺼냈다.
〈세영 배역 - 차수련〉
‘스물. 스물 하나’의 시나리오 표지 에 이규한이 캐스팅 결과를 적어 넣 었다.
후우.
크게 한숨을 내쉰 이규한이 시나리 오를 집어 들었다. 그런 그의 눈앞 에 어김없이 숫자가 떠올랐다.
- 1,229,876.
983,569에서 1,229,876으로.
차수련의 캐스팅을 마친 순간,숫 자가 늘어났다.
즉,최종 관객수가 늘어난 것이었 다.
“이십만이 넘게 늘었어!”
바뀐 숫자를 확인한 이규한이 환하 게 웃었다.
이십만.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라고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실상은 무척 큰 숫자였 다.
‘그때,우리’는 천만 관객을 노리고 제작하는 대작 영화가 아니었다.
제작비가 적은 만큼,손익분기점도 낮았다.
차수련의 캐스팅으로 이십만 명의 관객수가 늘어나면서,‘그때, 우리’ 는 손익분기점에 거의 다다라 있었 다.
그리고 아직 끝이 아니었다.
시나리오 수정과 감독 선정,배우 캐스팅,개봉 시기 조율 등을 통해 서 최종 관객수가 더 늘어날 여지가 충분히 존재했다.
“감독 선임이 우선인가?”
이규한이 사무실에 혼자 앉아서 고 민하고 있을 때였다.
딩 동.
벨 소리가 들려왔다.
사무실 문을 연 이규한이 놀란 기 색을 드러냈다.
“미주 씨가… 여긴 어떻게 왔어?”
“배신자가 잘 지내나 확인하러 왔 어요.” “배신자?”
“램프 엔터테인먼트에 날 남겨 두 고 혼자 도망쳤으니 배신자죠.”
“그건 미안하게 됐어.”
이규한이 사과했을 때 김미주가 말 했다.
“통장 확인해 봐요.”
“통장은 왜?”
“정산금 들어왔을 거예요.”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를 개업하고, 첫 작품인 ‘그때,우리’의 제작 준비 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정산을 까닿게 잊고 있었 다.
‘얼마나 들어왔을까?’
이규한이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박 대표가 삥땅 치려는 걸 제가 막았어요.”
“그런 일이 있었어?”
“고맙죠?”
“고맙네.”
‘치사하고 쪼잔한 박태혁이라면 장 부를 조작해서 약속했던 정산금보다 더 적게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의심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 실제로 이런 케이스는 영화계에서 종종 발생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한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램프 엔터테인먼트에 김 미주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리고 김미주는 이규한의 기대에 부 응했다.
박태혁의 장부 조작 시도를 막아 냈으니까.
‘일단 얼마나 들어왔는지 확인부터 해 보자!’
막연히 꽤 들어올 거란 생각은 가 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정확한 금액 까지는 계산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인터텟 뱅킹을 한 이규한이
잠시 뒤,두 눈을 치켜떴다.
‘이게 대체 얼마야?’
- 351,260,220.
이렇게 큰 금액의 돈이 통장에 들 어온 것.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무척 낯설었다.
‘삼억 오천?’
한참 만에 통장에 찍혀 있는 금액 의 액수를 확인하는 데 성공한 이규 한이 부지불식간에 혼잣말을 꺼냈 다.
‘대충 2억 정도 들어오지 않을까?’
이규한이 막연하게 예상했던 정산 금의 액수였다. 그런데 실제 통장에 입금된 정산 금액은 예상했던 것보 다 훨씬 많았다.
그래서 이규한이 놀란 표정을 지으 며 생각했다.
‘태혁이 형,부자 됐네!’
제작사 수익의 20%를 받겠다는 지분 계약을 했던 이규한의 정산 금 액이 삼억 오천만 원이었다. 그러니 램프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인 박태혁 이 거둬들인 수익은 10억을 훌쩍
넘어가는 셈이었다.
‘내 덕에 이렇게 돈을 많이 벌고도 장부를 조작해서 내 돈을 떼 먹으려 해?’
박태혁이 괘씹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김미주가 물었다.
“통장 확인하고 나니까 더 고맙
죠?”
이규한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김미주가 고마웠다.
그녀가 램프 엔터테인먼트에 버티 고 있었기 때문에 박태혁이 장부를 조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응. 더 고마워졌어.”
해서 이규한이 순순히 대답한 순 간,김미주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저한테 뭘 해 주실 거예요?” “특별히 원하는 게 있어?”
이규한이 김미주가 아까 소파 위에 내려 놓은 가방을 힐끗 살폈다. 곳곳에 흠집이 나 있는 오래된 낡 은 가방을 확인한 이규한이 다시 물 었다.
“가방 하나 사 줄까?”
“가방에 관심 없다는 거,아시잖아 요?”
“그럼 밥 살게.”
“겨우 밥이요?”
“비싼 밥 살게.”
이규한이 재빨리 덧붙였지만, 김미 주는 만족한 기색이 아니었다.
“밥은 됐어요.”
“그럼 따로 원하는 게 있어?”
“있어요.”
“뭔데?”
“탈출!”
김미주가 탈출하고 싶어 하는 곳. 굳이 부연 설명이 없더라도 어디인 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바로 램프 엔터테인먼트였다.
“당연히 받아 줘야지.”
“약속한 겁니다.”
이규한이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를 막 세웠을 때는 영화 제작에 본격적으로 돌입 한 상황이 아니었다.
앞으로 제작할 작품들을 준비하는 단계였기 때문에 직원이 따로 필요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때,우리’와 ‘수상한 여자’.
현재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진 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이었다. 그 리고 이 두 편의 작품이 끝이 아니
앞으로도 계속 프로젝트들이 차곡 차곡 추가될 터.
이규한이 혼자서 도맡아 처리하기 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머잖아 직원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직원 채용을 염두에 두었던 이규한의 마음속 1순위.
지금 앞에 앉아 있는 김미주였다.
일인 다역.
김미주가 갖추고 있는 가장 큰 장 점이었다.
경리부터 청소를 비롯한 잡무,그 리고 스케줄 관리까지.
똑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답게 김 미주는 일인 다역을 해 내면서도 어 지간해서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 더.
김미주는 시나리오를 보는 감각이 뛰어난 편이었다.
어지간한 기획 피디들보다도 더 시 나리오를 보는 눈이 있는 만큼,여 차하면 기획 피디 역할까지 도맡을 수 있었다.
그러니 김미주를 채용하지 않을 이 유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이규한이 먼저 김 미주를 찾아가서 블루문 엔터테인먼 트에서 일해 달라고 스카웃 제의를 하고 싶었던 상황이었다.
“그나저나 억대 부자가 된 기분이 어때요?”
그때,김미주가 물었다.
‘억대 부자라.’
이규한이 쓰게 웃었다.
통장에 이렇게 많은 돈이 들어와 있는 것.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아직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나쁘진 않네.”
잠시 후,이규한이 대답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나쁠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 많은 돈은 어디에 쓰실 건가 요?”
김미주가 던진 질문을 받은 이규한 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과속 삼대 스캔들’의 정산금이 들 어오면,이미 사용하기로 마음먹었 던 곳이 있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정산금이 훨씬 더 많이 통장에 들어와 있었 다.
‘이 여분의 돈을 어디에 쓰지?’
잠시 고민하던 이규한이 곧 결심을
굳혔다.
“미주 씨랑 밥 먹을 거야.”
“밥값이 얼마나 나온다고. 남는 돈 은요?”
이규한이 대답했다.
“감독 계약하는 데 쓸 거야.”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