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뻔한데 재밌다.
- ‘과속 삼대 스캔들’ VIP 시사회.
언론 시사를 겸한 VIP 시사회가 로터스 시네마 강남점에서 열렸다.
“오랜만이네!”
시사회에 참석한 것도 무척 오랜만 이었다.
비록 직접 제작한 영화는 아니었지
만,이규한은 프로듀서로 ‘과속 삼 대 스캔들’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 다.
긴장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마치 당연하다는 둣이 영화 ‘만월’ 의 시사회장에서 경험했던 악몽이 떠올랐다.
“이번엔 다를 거야.”
나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준비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만월’의 악몽이 재현될 확률은 낮다고 판단하면서 이규한이 스스로를 다독이며 영화를 보았다.
약 1시간 40분의 러닝타임이 끝났 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한 순 간,이규한의 귓가를 때린 것은 요 란한 박수 소리였다.
“재밌는데?”
“가족영화로 볼 만해.”
“저 아역 배우,너무 귀엽지 않 아?”
“뻔한데 재밌다.”
그 박수 소리에 섞인 수군거리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라면 놓치고 지나갔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지금 이규한은 무척 긴장하고 집중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 목소리들을 놓치지 않았
다.
‘됐다!’
이규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객석에서 흘러나온 반응.
이규한이 내심 바라고 있었던 반응 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든 것은 마지막 반응이었다.
“뻔한데 재밌다!”
전형적인 익숙한 한국 영화의 기법 이지만,그곳에 코미디와 감동이 적 절하게 버무려져 있다.
이 평가에 담긴 속뜻이었다. 그리 고 영화의 흥행을 위해서 꼭 필요한 평가였다.
이규한이 고개를 돌렸다.
역시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 는 강형진 감독이 보였다.
시선을 느꼈을까?
강형진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 치며 물었다.
“이 피디님,어땠습니까?”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하는 강 형진에게 이규한은 입을 열어 대답 하지 않았다.
대신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그제야 강형진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을 때,박태혁이 물었다.
“영화,어떤 것 같아?”
“직접 보셨잖아요.”
“난 솔직히 별론데. 시사회 반응은 괜찮은 것 같네.”
박태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런 그를 이규한이 한심하게 바라 보았다.
영화 제작자로 성공할 수 있는 방 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트랜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흥 행작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거 나,그런 안목을 갖춘 피디를 데리
고 있거나.
그렇지만 박태혁은 두 가지를 모두 갖지 못했다.
‘과속 삼대 스캔들’을 시사회에서 직접 보고 나서도 별로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 흥행작을 알아보는 안목 이 없다는 증거였고,이번 영화를 끝으로 이규한이 램프 엔터테인먼트 를 떠나기로 이미 결심한 것이 그가 후자도 갖추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힘들겠군!’
‘과속 삼대 스캔들’로 흥행에 성공 할 테지만,향후 박태혁의 영화 제 작자로서의 인생은 험난할 것이란 예상이 들었다.
“입소문만 타면 흥행이 될 겁니 다.”
이규한이 힘주어 말한 순간이었다. “규한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기현?’
김기현의 목소리임을 알아챈 이규 한이 고개를 돌렸다.
“영화 재밌는데?”
“고맙다.”
“아버지가 서운해하시겠어. 씨제스 가 아니라 로터스 엔터테인먼트랑 같이했으니까. 다음에는 꼭 아버지 랑 같이해야 한다.” 김기현이 엄포를 늘어놓았다.
‘나쁘지 않지!’
이규한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내 메이저 투자 배급사 가운데서 도 가장 우위에 서 있는 씨제스 엔 터테인먼트와 함께 일하는 것.
절대 이규한에게 손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규한 오빠!”
그때 였다.
또 다른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이규한이 두 눈을 치켜떴다.
“지연이… 구나.” “네,오랜만이에요.”
“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
“기현 오빠 졸라서 찾아왔죠. 오빠 가 프로듀서를 맡은 영화가 얼마나 재밌을지 궁금했거든요.”
2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서 지연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보조개라 쏙 들어가는 웃음은 여전 히 매력적이었고,나이를 먹으면서 더 성숙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어땠어?”
“음,규한 오빠 스타일의 영화는 아닌 것 같네요.” “오빠 스타일과는 많이 다른 것 같 다고요.”
서지연의 예상치 못했던 평가는 정 확히 이규한의 정곡을 찔렀다.
오락성보다는 작품성.
이규한이 평소 중시하고 추구했던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과속 삼대 스캔들’은 작 품성보다는 오락성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서지연은 그 부분을 조심스럽게 지적한 것이었다.
‘여전하네!’
보조개가 파인 서지연을 바라보던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서지연의 전공은 영화 평론.
그녀와 함께 영화를 보고, 영화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마다 무척 즐거 웠다.
또,이규한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관점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드러낸 탓에 놀란 적도 많았다
미모와 지성을 겸비했달까.
“좀 더 자세히 말해 줄래?”
해서 이규한이 부탁했지만,서지연 은 대답하는 대신 혀를 날름 내밀었 다.
“공짜로요? 저도 이제 원고료 받고 평론 쓰는 프로인데요.”
‘장난끼도 여전하네!’
이규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혼들며 대답했다.
“뭘 원하는 거야?”
“술 한잔 사 주세요.”
“술을 사 달라고?”
서지연의 부탁을 들은 이규한이 대 답을 미루고 망설였다.
술값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과연 서지연과 계속 얽히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서 였다.
“한잔 사. 일전에 말했던 지연이 귀국 환영회를 오늘 하면 되겠네.”
김기현이 다시 끼어들며 부추겼다.
그런 김기현은 어서 제안을 수락하 라며 강렬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그 강렬한 시선에 담긴 의미를 몰랐으리라.
그렇지만 지금은 달랐다.
김기현이 이렇게 강렬한 시선을 던 지는 이유는 서지연을 좋아하기 때 문이었다.
그녀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기회 를 만들고 싶어서 술자리가 만들어 지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이규한이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대 답했다.
“알았다. 내가 한잔 살게.” “야,파전에 동동주가 뭐냐? 명색 이 지연이 귀국 환영회인데.”
전통 주점에 도착한 김기현이 불평 을 터뜨렸다.
“우아하게 와인 정도는 마셔 줘야 지.”
“가난한 영화 피디와 와인이 어울 린다고 생각해?”
“자식,엄살은 여전하네.”
이규한이 김기현과 주종을 두고 가 벼운 설전을 벌일 때,맞은편에 앉 아 있던 서지연이 웃으며 말했다.
“전 와인보다 동동주가 더 좋은데 요. 옛날 생각도 나고요.”
“옛날 생각?”
“예전에 이렇게 셋이서 자주 뭉쳤 잖아요.”
“하긴 그랬지. 그때는 진짜 자주 어울렸었지.”
김기현이 고개를 끄덕일 때,이규
한이 술잔을 들었다.
“귀국 축하해.”
“네,오빠. 고마워요.”
“나도 다시 한 번 축하한다.”
챙.
건배를 하고 잔을 비운 후,이규한 이 서진연에게 물었다.
“술 샀으니까 약속대로 얘기해 봐. 아까 ‘과속 삼대 스캔들’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평을 해 주기로 했 잖아.”
“아,그거요.”
“설마 술만 얻어먹고 입 싹 닦으려 는 건 아니지?” “에이,설마요.”
서지연이 웃으며 부인할 때, 김기 현이 끼어들었다.
“야,숨 좀 돌리고 물어라. 지연이 체하겠다.”
“궁금해서 그래.”
“너무 기대하시면 제가 부담스러운 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번 영화는 규한 오빠 스타일과는 많이 달랐어 요. 소재는 센 편인데,익숙한 방식 으로 풀어 갔거든요. 그렇지만 나쁜 것 같지는 않아요. 익숙한 방식으로 풀어 가는 이야기 구조가 관객들 입 장에서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는 강 한 소재를 희석시킨 느낌이거든요.”
‘과속 삼대 스캔들’의 핵심을 정확 히 찌르는 평가였기 때문이었다.
‘성공하겠네!’
서지연이 앞으로 영화 평론가로 크 게 성공할 거란 생각을 막 했을 때, 그녀가 다시 입을 뗐다.
“가장 좋았던 것은 음악이었어요.”
“음악이 제일 좋았다고?”
“하마터면 처질 수 있는 극의 분위 기와 긴장감을 음악이 유지시켜 주 더라고요.”
‘과속 삼대 스캔들’에는 여자 주인 공인 박보연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
이 몇 차례 등장했다.
방금 서지연의 지적대로 음악이 등 장한 것은 극의 분위기와 긴장감을 유지시켜 준 도구 역할을 했다.
‘음악이 제일 좋았다?’
이규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왜 그러세요? 제가 무슨 말실수라 도 했나요?”
이규한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 아챈 서지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이규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서지연이 말실수를 한 것은 없었 다.
오히려 그녀는 좋은 지적을 한 셈
덕분에 이규한이 하마터면 놓치고 지나갈 수도 있었던 부분을 새삼 깨 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원 수익료도 고민해 볼 때가 됐 어!’
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다.
“앞으로도 박태혁 대표와 손잡고 일할 거야?”
김기현이 던진 질문을 듣고서 이규 한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방금 뭐라고 했어?”
“계속 박태혁 대표와 일할 거냐
“아니,그만둘 거야.”
이규한이 램프 엔터테인먼트를 관 둘 거라는 결심을 밝히자, 김기현이 두 눈을 빛냈다.
“그럼 이제 누구하고 일할 건데?”
“그게……
“그러지 말고 나랑 일하자.”
이규한이 깜짝 놀라며 김기현을 바 라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제안이었기 때 문이었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지. 우리 회사로 스카웃 하고 싶다고.”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