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우리 친구 아냐?
“그게 정말인가요? 정말 씨제스 엔 터테인먼트가 이 작품을 탐내고 있 나요?”
권지영이 재차 질문했다.
“그렇다니까. 시나리오가 새끈하게 잘빠졌잖아. 감독이 좀 약하긴 하지 만,워낙 시나리오가 좋아서 호평 일색이야. 주연 캐스팅만 완료되면 씨제스 엔터테인먼트가 바로 투자하
려고 준비하던데.”
김기현이 말을 마친 순간,권지영 이 두 눈을 빛냈다.
김기현의 아버지가 씨제스 엔터테 인먼트 대표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 져 있었다. 그리고 권지영도 그 사 실을 알고 있었다.
‘김기현의 입에서 홀러나온 고급 정보!’
아마 권지영은 이렇게 판단하고 있 으리라.
“규한아,권 팀장이랑 친한 건 알 지만 이러면 안 되지. 만약 로터스 에서 투자받으면 상도덕에 어긋나는 거야.” “에이,이 바닥에 상도덕이 어디 있어요?”
“이렇게 나오시겠다?”
“제가 뭘요?”
“권 팀장,아무리 시나리오가 탐이 나도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지.”
권지영은 김기현을 더 상대하는 대 신,앞에 놓여 있던 서류철을 서둘 러 정리했다.
“두 분 오랜만에 만나신 것 같은데 더 얘기 나누세요. 전 급한 일이 있 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권 팀장,어디 가? 같이 술 한잔 하지?” “다음에요. 그럼 저 먼저 갑니다.”
권지영이 미팅룸을 먼저 빠져나갔 다.
미팅룸 안에 김기현과 둘만 남게 되자,이규한이 거친 숨을 토해 냈 다.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야?”
“무슨 수작씩이나. 친구 좀 도와준 거지.”
“친구?”
“왜? 우리 친구 아냐?”
이규한이 마른침을 삼켰다.
‘친구라.’ 김기현과 이규한의 사이가 벌어진 것.
먼 홋날의 일이었다.
지금은 친구 사이가 맞았다.
“이규한,인상 쓰지 마. 지금은 인 상 구기고 있을 때가 아니라 고맙다 고 인사를 해야 할 때 아냐?”
“ 인사?”
“내 덕분에 투자가 성사될 확률이 높아졌잖아.”
이규한이 반박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김기현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 이었다.
50 대 50.
로터스 엔터테인먼트가 ‘과속 삼대 스캔들’에 투자할 가능성은 절반 정 도였다. 그렇지만 김기현의 등장으 로 투자 가능성은 훨씬 높아졌다.
“시나리오가 새끈하게 잘빠졌잖아. 감독이 좀 약하긴 하지만,워낙 시 나리오가 좋아서 호평 일색이야. 주 연 캐스팅만 완료되면 씨제스 엔터 테인먼트가 바로 투자하려고 준비하 던데.” 김기현의 이야기를 들은 권지영이
서둘러 미팅룸을 빠져나간 이유.
이 정보를 윗선에 보고하기 위해서 였다.
4대 투자 배급사 가운데 가장 앞 서 있는 곳은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당연히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 좋 은 시나리오들이 가장 많이 몰렸다.
오죽했으면 씨제스 엔터테인먼트가 투자하지 않고 버린 시나리오 중에 나머지 세 투자 배급사들이 옥석 찾 기를 한다는 이야기가 돌까.
그런 씨제스 엔터테인먼트가 ‘과속 삼대 스캔들’ 투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김기현에게서 들은 권지영은 윗선에 보고할 터였 이 정보를 들은 로터스 엔터테인먼 트의 투자 결정권을 가진 윗선들은 마음이 조급해질 터였다. 그리고 ‘과속 삼대 스캔들’을 씨제스 엔터 테인먼트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돌려서 투자를 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것은 분명했다.
“술 한잔 사.”
“술?”
“야,투자 받게 도움을 줬는데 술 한잔 정도는 사야지?”
‘날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김기현과 사이좋게 마주 앉아 술을 마신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이내 마음을 고 쳐먹었다.
‘지금은 2018년이 아니니까!’
2018년의 김기현은 이규한을 파멸 시키려 했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서로에게 호의를 갖고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눌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어쩌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제작한 영화의 홍행만 바꿀 수 있 는 게 아니었다.
인간관계도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술은… 네가 사라!”
“왜 내가 술을 사?”
“부잣집 아들이잖아.”
술은 함께 마셔 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앙금까지는 모두 사라지 지 않았다. 그래서 이규한은 김기현 에게 계산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그럼 파전에 동동주, 오케이?” 김기현의 말이 끝난 순간,이규한 이 인상을 구겼다.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네.”
“무슨 소리야?”
의아한 시선을 던지는 김기현을 보 며 이규한이 대답했다.
“부자가 더하단 소리야.” 로터스 엔터테인먼트 본사가 위치 한 서초동의 민속 주점.
아직 날이 저물기 전이라 손님은 이규한과 김기현,둘뿐이었다.
파전과 도토리묵을 안주로 살얼음 이 둥둥 떠 있는 동동주를 마시던 김기현이 먼저 입을 댔다.
“왜 로터스 엔터테인먼트부터 먼저
찾아왔어?”
“시나리오 장르가 휴먼 코미디라서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를 받 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고 판단했거
드 ”
이규한이 솔직하게 대답하자,김기 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영리하네. 그래도 씨제스 부터 찾아오지 그랬어?”
“네 아버지 백을 이용하라고?”
“백이 없는 것보단 낫잖아?”
“싫어.”
“왜?”
“부담 드리기도 싫고,실력으로 뚫
고 나가고 싶어.”
이규한이 대답하자, 김기현이 고개 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지식한 것도 여전하네.”
“고지식?”
“투자 배급사 대표 아버지 갖고 있 는 친구 뒀다 뭐 하게? 필요할 때 좀 갖다 써 먹어.”
“됐어. 결국 영화는 작품성으로 승 부하는 거니까. 백으로 투자를 받을 수는 있어도 절대 성공은 못 할 테 니까.”
“하여간 그놈의 고집은.”
김기현이 동동주가 가득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이규한이 망설이다가 잔을 들어 부 딪쳤을 때였다.
“유학 갔던 지연이 돌아왔다.”
“서 지연?”
“그래. 어제 연락 왔더라.”
이규한이 흠칫하며 입으로 가져가 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
서지연의 이름을 들은 이규한의 두 눈에 복잡 미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 갔다.
“너도 지연이 보고 싶지?”
“뭐,오래 못 봤으니까.” “내가 자리 한번 마련할까? 셋이서 한 번 뭉치자.”
“그러……
무심코 승낙하려 했던 이규한이 입 을 다물었다.
김기현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 했던 계기가 서지연이었기 때문이었 다.
“난 됐다. 둘이 만나. 이번 영화 때문에 바빠.”
이규한이 거짓 핑계를 꺼내 놓은 순간이었다.
딸랑.
민속주점 문이 열리고,권지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권지영을 확인한 이규한이 물었다.
“권 팀장이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 왔어?”
“여기가 이 피디님 단골집이잖아 요. 당연히 여기 계실 것 같아서 찾 아왔죠.”
“같이 술 한잔하고 싶어서?”
“빨리 알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요.”
“뭔데?”
“‘과속 삼대 스캔들’,저희 로터스 엔터테인먼트가 투자합니다. 그러니 까 씨제스랑 하시면 안 됩니다.” “왜 갑자기 결정이 바뀌었어?”
“제가 윗선을 설득했습니다. 이대 로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나리 오라서 요.”
권지영이 힘주어 말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속으로 코웃음 을 쳤다.
갑자기 ‘과속 삼대 스캔들’의 투자 결정이 난 이유가 김기현이 슬쩍 홀 렸던 거짓 정보 때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권 팀장,확실히 하자고.”
“뭘요?”
“시나리오 수정은 절대 없다.”
“네? 네.”
“감독 교체도 절대 안 돼.”
“그건……
권지영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곤 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다시 말했다.
“싫으면 말고.”
“아니요. 좋습니다.”
“분명히 감독 교체는 없다고 말했 다?”
“네. 그럼 내일 만나서 투자 계약 서 쓰고…… “그 전에 할 일이 있어.”
“뭔데요?”
“투자 계약서에 명시해.”
“네?”
“시나리오 수정과 감독 교체 요구 는 없다는 조항을 적으라고.”
말로 한 약속은 언제나 뒤집을 수 있다.
계약서에 문구로 조항을 삽입하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이규한 은 이런 요구를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잘 부탁해.”
“네?”
“지원 확실히 부탁한다고.”
이규한의 말귀를 알아들은 권지영 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희도 이번 프로젝 트에 사활을 걸었으니까요.”
권지영이 한 말은 빈말이 아닐 터 였다.
근래 투자한 영화마다 실패를 거듭 하고 있는 로터스 엔터테인먼트 입 장에서는 흥행작이 꼭 필요했다.
이미 투자 결정을 내린 만큼,‘과 속 삼대 스캔들’의 성공을 위해 최
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제… 진짜 다 왔다!’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한 이규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남은 것은 조연 캐스팅을 마 치고 촬영에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축하한다.”
김기현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 은 채 술잔을 들어올렸다.
챙!
이규한이 술잔을 부딪친 후,단숨 에 잔을 비웠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