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어떤 문제인지 모르지?”
“문제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방향이 틀렸어.”
“무슨 방향이 어떻게 틀렸다는 겁 니까?”
“네가 잘하는 이야기가 아냐.”
“제가 잘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이규한이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아까 작가가 가진 장점에 대해 이 야기했었지? 시나리오 작가 안유천 이 가진 장점이 뭐라고 했어?”
“캐릭터 살리기, 그리고 코미디라 고 하셨습니다.”
“용케 기억하고 있네. 그런데 네가 쓴 ‘그날 밤에 벌어진 아주 사소한 이야기’는 장르가 뭐야?”
“스릴러입니다.”
“웃겨?”
“계속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당연
히 웃기지 않죠.”
‘그날 밤에 벌어진 아주 사소한 이 야기’는 스릴러다.
더구나 주요 소재는 연쇄살인이다.
계속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어떻게 웃길 수가 있느냐?
안유천이 정색한 채 꺼낸 이야기의 요지였다.
그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다시 물 었다.
“반전은? 관객들의 뒤통수를 치는 반전은 있어?”
“반전은… 없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날 밤 에 벌어진 아주 사소한 이야기’의 장르는 심리 스릴러였다.
따라서 사건의 해결이나 범인 찾기 가 극의 메인이 아니었다.
연쇄살인을 저지른 범인을 미리 알 려 주고,그 범인이 대체 왜 연쇄살 인까지 저질렀는가를 추적하는 심리 스릴러.
당연히 ‘유주얼 서스펙트’급의 기 막힌 반전이 등장하기 힘들었다.
“이제 내가 왜 방향을 잘못 잡았다 고 말했는지 알겠어? 넌 스릴러가 아니라 캐릭터 중심의 코미디에 특 화된 작가야. 그런데 스릴러 장르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네 장점을 스스
로 포기한 거지.”
“앞으로 코미디 장르의 글을 쓰라 는 겁니까?”
“휴먼 코미디가 시나리오 작가 안 유천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 르지.”
안유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이규한의 말뜻을 제대로 이 해한 둣 보였다.
그렇지만 안유천의 표정은 밝아지 지 않았다.
“자신이 없는데요. 캐릭터 중심의 코미디 장르의 글은 한 번도 써 본 적 없어서요.” 안유천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 했다.
“걱정할 것 없어. 내가 있으니까.”
“이 피디님만 믿으라고요?”
“그래,이미 소재도 갖고 있고,어 떤 식으로 극을 풀어 가야 하는지도 알고 있어. 네가 할 일은 스토리와 캐릭터,그리고 코미디 요소를 보강 하는 것뿐이야.”
물론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규한은 안유천의 능력을 믿었다.
‘안유천이라면?’
충분히 재밌는 시나리오를 써 낼 수 있을 거란 신뢰가 있었다. 그리 고 신뢰가 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꺼낸 것이었고.
“장르가 뭔데요?”
안유천이 흥미를 드러낸 순간,이 규한이 대답했다.
“판타지야.”
“판타지요?”
그 대답을 들은 안유천이 깜짝 놀 랐다.
“왜 그렇게 놀라?”
“당연히 놀랄 수밖에요. 지난번에 저한테 하신 말씀 기억 안 나세요?” 끼떤 이야기?”
“영화는 현실성이 담보돼야 한다. 그러니 판타지의 판 자도 입에 올리 지 마라. 저한테 이렇게 강조하셨잖 아요.”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진짜 기억 안 나세요?”
“사람은 변하는 법이야.”
“네?”
“생각이 바뀌었단 뜻이야.”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뀌셨는데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판타지 같 은 일도 가끔씩 벌어지더라고.”
이규한의 생각이 바뀐 이유.
판타지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 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유천 을 힐끗 살핀 이규한이 소주병을 들 었다.
쪼르륵.
안유천이 들어 올린 빈 잔을 채워 주며 이규한이 물었다.
“할 거야,말 거야?”
“그게……
“나,못 믿어?”
“당연히 믿죠.”
“그런데 뭘 망설여? 딱히 할 일도 없잖아?” “이 피디님 믿고 한번 해 보겠습니 다.”
“잘 생각했다. 기념으로 건배 한번 하자.”
이규한이 술잔을 들어 올렸을 때, 안유천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제목이 뭔데요?”
이규한이 대답했다.
“수상한 여자!”
탁!
안유천이 윤색한 시나리오의 마지 막 장을 읽고 난 후,박태혁이 탁자 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긴 박태 혁이 한참 후에 질문했다.
“더 안 고쳐도 되겠어?”
“직접 보셨잖아요?”
“봤지. 그런데 조금 부족하다는 느 낌이 들어서.”
박태혁이 대답을 꺼내자마자 이규 한이 바로 입을 뗐다.
“부족한 부분을 말씀해 보세요.”
“그게……
“막상 얘기하려니까 없죠?”
박태혁의 말문이 막힌 것을 확인한 이규한이 실소를 머금었다.
이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입소문만으로 800만이 넘는 관객 을 동원한 ‘과속 삼대 스캔들’의 시 나리오 완성고에서 무슨 흠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한 번만 더 부탁하는 게 어때?”
“윤색을 한 번 더요? 왜요?”
“일주일 만에 이 정도 고쳐 왔잖 아. 시간과 공을 조금만 더 들이면 더 나은 수정고가 나오지 않을까?”
박태혁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이규한이 정색했다.
“더 건드리면 오히려 이상해집니 다.” “그렇지만……
“제 말 들으세요.”
“…알았다.”
고심 끝에 고개를 끄덕인 박태혁이 다시 물었다.
“이제 어쩔 거야?”
박태혁이 물은 것.
시나리오가 완성됐으니 다음 스렙 을 어떻게 밟아 나갈 것이냐고 물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경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 번째 방법은,바로 투자사에 시 나리오를 넣는 것이었고,두 번째 방법은 캐스팅까지 완성하고 난 후 투자사에 시나리오를 넣는 것이었 다.
‘어느 쪽이 더 유리할까?’
이규한이 잠시 고민한 후 대답했 다.
“배우부터 캐스팅 하죠.”
“왜? 시나리오는 자신 있다면서?”
“시나리오는 자신 있어요. 그런데 감독이 너무 약해서요.”
투자사가 투자를 결정하는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그 요인들을 우선순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았다.
1순위. 감독 2순위. 배우 3순위. 시나리오 4순위. 제작사 및 프로듀서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란 정설답게 투자사에서도 투자 여부를 판단할 때,어떤 감독이 연출하는가를 최우 선으로 두는 편이었다.
다음이 배우였다.
티켓 파워를 갖춘 배우가 출연하는 가는 투자에 있어 무척 중요한 요인 이었다.
세 번째가 바로 시나리오.
‘웃기는 일이지!’
이규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 다.
결국 영화는 스토리를 영상으로 만 들어서 전달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 나리 오였다.
‘얼마나 시나리오가 탄탄한가?’
여기에 따라 영화의 짜임새와 작품 성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시나리오 완성도의 여 부는 투자사에서 투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규한은 이게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당장 이규한이 바꿀 수 없는 구조 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문제를 바꿀 힘이 없다면 다른 답을 찾아야 했 다.
“감독이 약하긴 하지.”
박태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과속 삼대 스캔들’의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강형진은 입봉작의 흥행에 실패한 감독이었다.
투자사에서 가장 꺼리는 감독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시나리오의 완성도 측면에서 이규한은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아까도 말했듯 시나리오의 완성도는 투자를 결정하는 요인 가운데 3순위 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대로 투자사에 ‘과속 삼 대 스캔들’을 밀어 넣는다면 투자 유치에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이규한이 선택한 방법은 캐 스팅까지 마무리해서 감독이 약하다 는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나도 캐스팅부터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박태혁이 동의하며 이규한에게 물 었다.
“주연은 누굴 생각하고 있어?” “시나리오 보셨을 때,떠오르는 배 우 없었어요?”
“있었어.”
“누구요?”
“차태훈. 맞아?”
“맞습니다.”
이규한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 다.
박태혁은 캐스팅에 대한 정보를 일 절 알지 못한 채 안유천이 윤색을 거친 시나리오를 읽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로 주연배우로 차 태훈을 떠올렸다는 것.
안유천이 윤색을 잘했다는 증거였 “여주인공은?”
“박보연이요.”
“박보연이 할까?”
박태혁이 걱정하는 이유는 박보연 이 최근 작품 활동이 뜸했기 때문이 다. 그리고 박보연이 작품 활동이 뜸한 것은 그녀가 작품은 고르는 안 목이 워낙 까다로워서였다.
“부딪쳐 봐야죠.”
“대책이 없다는 소리네.”
박태혁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박보연을 캐스 팅할 자신이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고 보세요. 꼭 박보연을 캐스팅 해 올 테니까요.”
이규한이 자신 있게 포부를 밝힌 후,사무실을 빠져나갔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