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시나리오 감정 이규한이 일찍 퇴근한 이유.
좀비 영화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 다.
시나리오 장터에 올라와 있는 허접 한 작품들을 보며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 았기 때문이다.
“나는… 흥행작을 이미 알고 있 다!” ‘과속 삼대 스캔들’만이 아니었다.
이규한은 과거로 돌아온 만큼,향 후 10년간 어떤 작품들이 흥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었다.
이것은 제작자 이규한에게 있어서 엄청난 무기가 될 터였다.
“최대한 기억을 잘 더듬어 보자!” 이규한이 펜을 들었다.
-추적자.
-내가 진짜 왕이로소이다.
-수상한 여자.
-부산행 열차.
이규한이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 으면서 노트에 흥행할 작품들의 제 목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 다.
일주일.
이규한이 안유천에게 주었던 시간 이었다.
안유천은 시간을 지켰다. 아니,정 확히 6일 만에 윤색을 마쳤다.
“왜 이렇게 빨리했어?” “이 피디님이 힘 빼고 쓰라고 하셨 잖습니까?”
당당하게 되묻는 안유천의 표정에 서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래서 그가 갖고 온 시나리오 윤색고를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이규한이 물었 다.
“시나리오는 어땠어?”
“재밌던데요.”
“확실히 재밌었어?”
“코미디가 얼마나 통할지가 흥행의 관건이 될 것 같던데요.”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유천이 정확히 맥을 짚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보세요?”
“볼 거야. 그 전에 할 일이 있어.”
“뭔데요?”
“시나리오 감정!”
“시나리오 감정이요? 책을 안 보고 감정부터 해요?”
“그런 게 있어.”
더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 봐야 미친놈 취급만 받을 테 니까.
“일단 조용히 해 봐.”
이규한이 경건한 마음으로 시나리
오 윤색고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리고 시나리오를 들어 올린 순간, 이규한의 눈앞에 새로운 숫자가 떠 올랐다.
-6,212,349.
‘늘어났다!’
이규한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늘어난 것이 다가 아니었다. 5,221,004?flAi 6,212,349^.
바뀌어 있었다.
‘약 백만 정도 차이야!’
안유천은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고
윤색을 마쳤다. 그리고 윤색을 거친 시나리오의 예상 관객수는 윤색 전 에 비해 백만 가까이 늘어 있었다.
“설마… 이게 감정하는 건가요?”
안유천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 며 물었다.
“그래,감정이 끝났어.”
“감정 결과는 어떤데요?”
“좋아,잘 썼네.”
이규한이 칭찬을 건넸다.
짧은 시간의 윤색을 통해 100만 가까이 관객수를 늘렸으니 안유천의 수정은 아주 훌륭했다.
그래서 이규한이 아낌없이 칭찬했 지만,안유천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 았다.
“지금 놀리시는 겁니까?”
“아닌데.”
“적어도 바뀐 시나리오를 보시고 나서 평가해 주셔야 할 것 아닙니 까?”
살짝 언성을 높이는 안유천의 반응 을 확인한 이규한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규한이 가진 비밀(?)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안유천이다.
그러니 충분히 기분이 나쁠 수 있 는 상황이었다.
“알았어. 지금부터 제대로 볼게.”
이규한이 시나리오 윤색고를 펼치 고 정독을 시작했다.
약 한 시간에 걸쳐 정독을 마친 이규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고쳤네!’
괜히 예상 관객수가 백만이나 늘어 난 것이 아니었다.
안유천이 윤색한 시나리오는 감독 의 시나리오에 비해 훨씬 좋게 바뀌 었다.
특히 대사가 좋아졌다.
차태훈과 박보연 맞춤으로 쓴 듯한 대사는 생동감이 묻어났다.
그리고 하나 더.
안유천 특유의 생뚱맞은 코미디 감 각이 제대로 녹아들었다.
탁.
이규한이,안유천이 윤색해 온 시 나리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고개 를 들었다.
평가가 궁금해서 일까.
잔뜩 긴장하고 있던 안유천이 조심 스럽게 물었다.
“다시 써 올까요?”
“다시 쓰면 더 잘 쓸 자신 있어?”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면…… 이규한이 도중에 말을 자르자 안유 천의 표정이 굳었다.
“진짜 더 잘 쓸 수 있는데.”
“완벽해.”
“네?”
“더 좋아질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 다고. 그리고 내가 충고 하나 할 까?”
“말씀하십시오.”
안유천이 자세를 바꾸는 것을 확인 한 이규한이 입을 뗐다.
“넌 힘을 빼고 글을 써야 돼. 바꿔 말하면,장점을 극대화시켜야 한다
는 뜻이야.”
“제 장점이 무엇일까요?”
안유천의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쓰 게 웃었다.
작가들을 만나다 보면 이런 질문을 받게 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그리고 작가가 자신의 장점을 모르 는 경우 발생하는 부작용은 방향을 자주 잃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목표했던 산이 아니라 다른 산을 자꾸 오르게 되는 것이었 다.
원래 목표했던 산이 아니라 다른 산에 올라 이 산이 아닌가,하고 을 랐다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른다.
그러다 보면 작가는 자괴감에 빠지 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장점을 잃어버리고 쓸쓸히 다른 길 을 찾아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프로듀서였다.
작가의 장점을 파악하고,그 장점 을 극대화시키는 것.
이게 프로듀서의 역할 가운데 하나 였다. 그리고 이규한은 안유천이란 작가의 장점을 극대화시킬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캐릭터를 잘 살려.”
“캐릭터요?”
“제가 코미디에 강하다고요?”
“아닌 것 같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요.”
안유천이 확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 했다.
그때,이규한이 다시 물었다.
“내가 왜 널 자꾸 만나는지 알아?” “제 잠재력을 알아보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너무 순순히 인정했기 때문일까.
안유천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낸 순 간,이규한이 제안했다.
“배고프다. 갈비 먹으러 갈까?”
“갈비요?”
“왜,싫어?”
“안 싫습니다. 아니,좋습니다.”
갈비를 먹으러 가자고 제안하자 안 유천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역시 단순해!’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피식 웃었다.
이것이 안유천이 가진 작가로서의 장점이었다.
“뭐 드실 건데요?”
그때,안유천이 두 눈을 빛내며 물 었다.
“못 들었어? 갈비 먹으러 가자고 말했잖아.”
“그건 당연히 들었죠.”
“그런데?”
“갈비에도 종류가 많잖습니까? 소 갈비,돼지갈비, 닭갈비,양갈비 등 등. 그중에서 어떤 것을 드시려는 건가 궁금해서요. 개인적으로는 소 갈…… “돼지갈비 먹자.”
“네? 네.”
“실망한 거 아니지?”
“아닙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돼지갈비입니다.”
‘거짓말!’
이규한이 다시 실소를 터뜨렸다.
안유천은 표정을 감추는 데 능숙하 지 않았다.
소갈비가 아니라 돼지갈비를 먹자 는 말을 듣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 다. 그리고 마음 같아서는 소갈비를 실컷 사 주고 싶었다.
안유천은 이번 윤색 작업에서 그만
한 값어치를 하고도 남았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주머니 사정이었다.
‘만약 소갈비를 실컷 먹고 법인 카 드로 결제한다면?’
박태혁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법인 카드를 빼앗아 가 버릴 수도 있었다.
‘얼른 독립해야지!’
더 빨리 제작사를 차려야겠다는 생 각을 하던 이규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시나리오 작업은 끝났다!’
‘과속 삼대 스캔들’의 시나리오 작 업은 이걸로 끝난 셈이었다.
영화 개봉까지, 수많은 난관 가운 데 하나를 넘은 상황.
그로 인해 기분이 좋아진 이규한이 소리쳤다.
“오늘 배 터질 때까지 실컷 먹어 라!”
지글지글.
불판에서 돼지갈비가 맛있게 익어 갔다.
분주하던 젓가락질의 속도가 늦춰 진 순간,이규한이 물었다.
실컷 먹었냐?”
“네,한 달 동안 돼지갈비 생각이 안 날 정도로 먹었습니다.”
“그럼 이제 이야기를 마저 해 볼 까?”
“어떤 이야기요?”
의아한 시선을 던지는 안유천을 확 인한 이규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 들었다.
안유천에게 맡긴 윤색.
이규한이 판단하기에 최상의 결과 가 나온 셈이었다.
이제 ‘과속 삼대 스캔들’의 시나리 오 수정은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한이 안유 천과 돼지갈비에 소주를 곁들이고 있는 이유는 다음 프로젝트 때문이 었다.
“나랑 작업 하나 같이하자.”
“무슨 작업이요?”
“빨리 입봉하고 싶다면서?”
“그럼 결정하신 겁니까?”
“무슨 결정?”
“제 시나리오를 제작하기로 결심하 신 것 아닙니까?”
안유천은 이규한을 만날 때마다 영 화 아이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 놓 았다. 그렇지만 현재까지는 말 그대 로 아이템일 뿐이었다.
언젠가 시나리오로 쓰겠다고 결심 한 아이템.
그런 이유로 이규한이 직접 본 안 유천이 쓴 시나리오는 딱 하나뿐이 었다.
‘그날 밤에 벌어진 아주 사소한 이 야기’.
물론 안유천은 착각하고 있었다.
이규한은 안유천이 쓴 ‘그날 밤에 벌어진 아주 사소한 이야기’라는 시 나리오를 영화로 제작할 생각이 눈 곱만큼도 없었다.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었으니까 .
“새거 하나 하자.”
“새거요? 왜요?”
“네가 썼던 시나리오에는 큰 문제 가 있어.”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