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9화 (9/272)

이게 안유천의 현재 포지션이었다.

그리고 이규한이 공모전 당선 경험 조차 없는 무명작가 안유천을 알고 있는 이유는 그가 램프 엔터테인먼 트에 시나리오를 투고한 까닭이었 다.

‘그날 밤 벌어진 아주 사소한 이야 기’.

안유천이 무작정 사무실로 들고 온 시나리오 책의 제목이었다.

원래라면 그 시나리오를 읽어 보지 도 않고 캐비닛 깊숙한 곳에 던져 버렸으리라.

그렇지만 이규한이 그 시나리오를 읽은 이유는 안유천이 그날 당당하 게 소리친 말 때문이었다.

“천만 관객이 들 시나리오를 먼저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 다.” 이규한은 안유천이 보여 준 패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직접 읽고 난 후 이규한이 한 생각은 ‘제대로 속았다’였다.

천만 관객은커녕,1만 관객도 불러 모으기 힘들 정도로 시나리오는 허 접했다.

일단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추지 못 했고,소재도 너무 진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한은 안유 천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안유천의 형편이 딱해서가 아니었 다.

안유천이 쓴 시나리오에서 가능성 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1억 관객 제작자

윤색 계약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을 지경입니 다.”

안유천이 엄살을 부렸다.

“뭐 먹고 싶은데?”

“당연히 갈비죠.”

“갈비? 대낮부터?”

“원래 갈비는 낮에 뜯어야 제맛입 니다.” “갈비탕으로 합의 보자.”

“갈비탕이요?”

“내가 어제 과음해서 국물 있는 걸 먹고 싶어서 그래.”

안유천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싫어? 싫으면 말든가.”

“제가 언제 싫다고 했습니까? 대 신……

“대신 뭐야?”

“두 그릇 먹어도 됩니까?”

“그래,두 그릇 먹어라.”

‘삼대 가족사’,아니 ‘과속 삼대 스 캔들’이 투자를 받는 데 있어서 안

유천은 결정적인 역할을 해 줘야 하 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갈비탕 두 그릇이 대수일 까.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데 성공한 안유천이 슬그머니 가방을 열었다.

잠시 후 그가 시나리오를 꺼냈다.

“이 피디님,이거 이번에 쓴 시나 리 오인데

“넣어 둬라.”

“왜요? 일단 한번 보시고 난 다음 에

“안 봐도 비디오다.”

이규한이 잘라 말하자 안유천이 볼 을 부풀렸다.

“요새 비디오 보는 사람이 어디 있 다고. 다 DVD 보는 세상인데.”

툴툴거리는 그에게 이규한이 물었 다.

“빨리 입봉하고 싶지?”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죠.”

작가들이 빨리 입봉,즉 자신의 작 품을 개봉하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싶어서 였다.

신인 작가와 경력 작가의 대우는 천차만별 이 었으니 까.

안유천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입봉에 성공해서 아르바이트 를 관두고 전업 작가로 살고 싶으리 라.

“내가 입봉시켜 줄게.”

이규한이 호언장담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안유천은 작가로 서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

그 장점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시 나리오를 쓰도록 지시해 머잖은 시 간에 입봉을 시켜 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안유천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역시 이 피디님은 대한민국 최고 의 영화 프로듀서입니다.”

“왜 내가 최고의 프로듀서인데?” “제 잠재력을 알아보셨잖아요.”

“그게 아니라 네가 연락처를 아는 프로듀서가 나밖에 없는 것 아냐? 그래서 날 최고의 프로듀서라고 말 하는 거지?”

“역시 예리하시네요.”

픽 웃은 이규한이 가방에서 계약서 를 꺼냈다.

“속 쓰리고,배도 고프니까 빨리 계약하자.”

“각본 계약이요? 계약금은 얼마나 주실 건데요? 500? 천? 이 피디님 은 제 능력을 아시니까,2천?”

“유천아, 김칫국 마시지 마라. 각본 계약이 아니라 윤색 계약이다.”

“윤색이요?”

기존의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작업 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각색과 윤색.

각색은 시나리오 내의 주요 설정을 바꾸거나 캐릭터를 교체하는 작업을 하는 경우를 말했다.

반면 윤색은 주요 설정을 건드리지 않고,대사와 지문만 바꾸어서 캐릭 터를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그리고 이규한이 안유천에게 윤색 계약을 제안한 이유는 그가 가진 작 가로서의 장점 때문이었다.

안유천이 가진 장점.

바로 캐릭터의 매력을 극대화시키 는 것이었다.

적재적소에 허를 찌르는 대사를 던 질 줄 알기에,안유천은 코미디 영 화에 특히 강점을 갖고 있었다.

휴먼 코미디 장르인 ‘과속 삼대 스 캔들’의 윤색을 맡기에 적임자였다.

더구나 아직 무명작가이기에 윤색 의 대가로 지불해야 할 돈도 비싸지 어쨌든 각본이나 각색 계약이 아니 라 윤색 계약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안유천이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않 고 드러냈다.

“왜,싫어?”

“꼭 싫은 건 아니지만……

“500 줄게.”

“500이요?”

예상보다 윤색료가 많다는 것을 알 아챈 안유천의 표정이 금세 바뀌었 다.

“어려운 작업인가 보죠?”

“쉬워. 네 실력이면 며칠이면 될

“역시 제 능력을 인정하시는군요.” “할 거야,말 거야?”

“합니다,해요.”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고 판단한 걸까.

안유천이 승낙한 순간,이규한이 물었다.

“차태훈 알지?”

“당연히 알죠.”

“박보연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입니 다.” “잘됐네.”

“뭐가요?”

“이번 영화의 주연을 맡을 배우들 이거든.”

이규한이 설명을 더하자 안유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망하겠네요.”

“뭐?”

“로맨스하기에는 너무 나이 차가 많잖아요.”

“부녀야.”

“네?”

“아빠와 딸로 출연할 거라고.”

“잉,아빠와 딸이요?”

“책 보면 알게 될 거야.”

이규한은 더 설명하는 대신 ‘과속 삼대 스캔들’의 시나리오를 안유천 에게 건넸다.

“일주일이면 되겠지?”

“일주일은 너무 짧은 것 아닙니까? 그래도 보름은 주셔야……

“힘 빼고 막 써.”

의아한 시선을 던지는 안유천에게 이규한이 덧붙였다.

“넌 힘 빼고 써야 글이 잘 나오더 라고.”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다.

-영화는 디테일의 예술이다. -영화는 철저하게 규칙을 따르는 예술이다.

영화에 대한 정의들이었다.

이규한도 이 정의들에 공감했다. 그렇지만 그가 가장 공감하는 영화 의 정의는 이것이었다.

-영화는 기다림의 예술이다.

빨리 영화를 제작해서 개봉하고 싶 다. 그래서 관객들에게 선보여 좋은 평가를 받고 싶다.

모든 영화 제작자들은 비슷한 마음 이었다.

그렇지만 영화는 혼자 서두른다고 해서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지 않았 다.

좋은 영화를 만들려면 기다리는 법 을 배워야 했다.

“일주일은 기다려야지.”

당장 안유천이 윤색을 마칠 때까지 이규한이 ‘과속 삼대 스캔들’을 위 그렇지만 마냥 윤색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초보들이나 하는 짓 이다.

제작자와 피디들이 바쁜 이유는 한 작품만 진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전에도 말했듯이,영화 한 편을 기획해서 시나리오를 개발하고,투 자를 받고,촬영을 무사히 마쳐 개 봉까지 할 확률.

채 1%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확률이 무척 낮았다.

영화가 개봉하지 못하고 엎어질 경 우를 대비해 제작사에서는 다른 작 품들도 동시에 준비를 해야 했다.

“쓸 만한 작품이 하나도 없네.”

이규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램프 엔터테인먼트로 투고가 들어 온 무명작가들의 작품을 찬찬히 살 펴보았지만 수준이 형편없었다.

시나리오를 읽는 시간이 아까울 정 도의 수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이규한이 다음으로 시나리오 장터로 들어갔 다.

시나리오 장터는 영화진흥위원회에 서 운영하는 사이트였다.

영화 제작자와 시나리오 창작자를 이어 주기 위해 설립한 사이트.

시나리오 작가들이 자신의 창작물 을 올리면,제작자 혹은 프로듀서가 읽어 본 후 좋은 작품을 구매하는 방식이었다.

실제로 시나리오 장터를 통해 제작 사에 팔리는 작품들은 꽤 있었다.

그렇지만 좋은 작품은 가뭄에 콩 나듯 올라오는 편이었고, 대부분의 작품은 맞춤법과 시나리오 형식도 갖추지 못하는 졸작이었다.

‘시간이 아깝다. 시간이 아까워!’

이규한이 재차 한숨을 푹 내쉴 때, 박태혁이 물었다.

“왜 자꾸 한숨을 내쉬어?”

“잘 찾아봐. 원래 보석은 숨어 있 는 거야.”

이규한이 코웃음을 치면서 불평을 터뜨렸다.

“이러지 말고,우리도 비싼 작가 좀 씁시다.”

입봉작을 갖고 있는 경력 작가.

그중에서도 홍행에 성공한 작품을 쓴 작가의 경우는 자연히 몸값이 올 라간다. 그리고 싼 게 비지떡이란 말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몸값이 비싼 작가는 비싼 값을 한 다.

매번 흥행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춘 완벽한 작품을 써 내지는 못하더라 도 다른 작가들이 갖지 못한 장점은 하나씩 갖고 있다.

“비싼 작가 쓸 돈이 어디 있어?”

“투자를 해야 수익을 거두죠.”

“그러다 투자금 회수 못 하면? 그 래서 망하면?”

당당하게 대꾸하는 박태혁을 보며 이규한이 속으로 혀를 찼다.

박태혁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마인드가 비슷했다.

‘로우 리스크,하이 리턴 (Low risk, High return).'

투자는 하지 않으려 하면서 큰 대 가를 바란다.

속된 말로 도둑놈 심보.

‘양아치가 따로 없네!’

이규한이 경멸 어린 시선을 던졌 다.

나름대로 영화계에서 오래 버틴 이 규한이 경험한 영화계 인사들은 크 게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었다.

양아치,그리고 양아치가 아닌 척 하는 양아치.

즉 노골적으로 양아치 짓을 하거나 점잖은 척,신사인 척하면서 양아치 짓을 하는 부류뿐이었다.

‘글러 먹었어!’

이규한이 속으로 욕할 때,박태혁 이 다가왔다.

“왜 그렇게 봐?”

“제가 뭘요?”

“기분 나쁘게 쳐다봤잖아.”

“찔리는 게 있나 보죠?”

“야,신소리하지 말고,보석 좀 찾 아봐.”

박태혁이 다가와 이규혁이 보고 있 던 모니터를 살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뗐다.

“우리도 좀비 영화 하나 할까?”

“좀비 영화요?”

“그래,레지던트 에이블 같은 거 좋잖아? 여기 좀비 영화 하나 올라 와 있네.”

이규한이 모니터를 살폈다.

잠시 후 이규한은 박태혁이 말한 좀비 영화를 찾았다.

‘좀비의 나라!’

시나리오 장터에 올라온 시나리오 의 제목이었다.

“미국이 아니잖아요. 대한민국에서 좀비 영화가 될 것 같아……

박태혁에게 핀잔을 주던 이규한이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된다!’

대한민국에서는 좀비 영화가 먹히 지 않는다.

이런 선입견을 갖고 있던 이규한의 생각이 바뀐 것은 좀비 영화가 성공 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산행 열차!’

연상우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 고 연출했던 ‘부산행 열차’는 좀비 영화였다. 그리고 ‘부산행 열차’는 한국에서는 좀비 소재의 영화가 먹 히지 않는다는 영화 관계자들의 예 상을 뒤엎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영화가 재미있 다,영화가 잘 빠졌다는 입소문이 퍼지며 흥행에 성공했다.

‘관객수가 천만이 넘었지!’

새롭고 과감한 시도가 통했던 케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규한이 벌 떡 일어났다.

“갑자기 왜 일어나?”

“집에 갈게요.”

“벌써 집에 간다고?”

“좀비 영화 좀 봐야겠어요.”

“여기서 보면 되잖아?”

“좀비 영화는 집에서 이불 뒤집어 쓰고,과자 먹으면서 봐야 제맛이거

이규한이 서둘러 퇴근 준비를 하자 박태혁이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뭐 볼 건데?”

“당신이 잠든 사이에.”

이규한이 대답한 순간,박태혁이 소리쳤다.

“야,그거 좀비 영화 아니잖아.”

1억 관객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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