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8화 (8/272)

8 화

무명작가 안유천 “저 왔습니다.”

이규한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 자마자 고성이 터져 나왔다.

“너,미쳤어?”

“또 왜 그러세요?”

“왜냐고? 진짜 몰라서 물어?”

“모르니까 묻는 것 아닙니까?”

“야! 무슨 계약을 이따위로 한 거

“아,계약 때문에 그러시는구나.”

“이 자식, 다 알면서 계속 시치미 델 거야?”

박태혁이 두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 다.

그렇지만 이미 각오를 단단히 하고 출근한 이규한은 주눅 들지 않고 당 당하게 대꾸했다.

“제가 혼자 계약했습니까? 형이랑 합의한 대로 계약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일시불로 돈 주라고 그랬 어?”

“사정이 딱해서 그랬습니다…… “뭐,사정이 딱해?”

“빚 때문에 당장 길바닥에 나앉을 판이라고 그러면서 사정하는데 모른 체할 수가 없더라고요.”

이규한이 사우나를 하면서 미리 준 비해 온 대답들을 차례로 꺼냈다.

“아,진짜 돌겠네. 만약 투자 못 받으면? 그럼 어쩔 거야?”

“1억 날리는 거죠.”

“뭐? 네 돈 아니라고 그렇게 쉽계 말할 거야?”

“그러니까 투자 받아야죠.”

“뭐?”

“제가 책임지고 투자 받고,영화

이규한이 큰소리를 빵빵 쳤다.

그렇지만 박태혁의 표정은 여전히 밝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제목은 왜 또 바꿨어? ‘과 속 삼대 스캔들’보다는 ‘삼대 가족 사’가 더 나은 것 같은데.”

“기왕 믿기로 했으니 끝까지 믿어 주세요.”

“내가 널 어떻게 믿겠냐? 니 돈 아니라고 법인 카드 들고 나가서는 물 쓰듯이 돈을 팍팍 쓰는데.”

“물 쓰듯이 쓰지는 않았는데.”

이규한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강형진과의 술자리가 길어지 긴 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대부분 의 술값을 법인 카드가 아니라 자신 의 카드로 계산했다.

박태혁이 이렇게 화를 낼 것을 어 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에 일부러 1 차만 법인 카드로 계산했던 것이다.

“5만 원 넘게 썼잖아.”

“요새 물가가 얼마나 비싼데요. 밥 먹고 술까지 마시는 데 5만 8,000 원이면 오히려 적게 쓴 거죠.”

“야,니 입으로 기획 개발비 적게 쓰겠다고 약속했잖아!”

박태혁이 콧김을 씩씩 내뿜으면서 이규한이 더 반박하는 대신,속으 로 생각했다.

‘여기까지!

방금 박태혁과의 대화를 통해 이규 한은 마음을 확실히 정했다.

이규한이 ‘과속 삼대 스캔들’을 끝 으로 박태혁과 인연을 끊기로 결정 한 이유는 두 가지.

법인 카드로 5만 8,000원을 결제 했다는 것 때문에 방방 뛰는 쪼잔함 이 싫었고,‘과속 삼대 스캔들’보다 ‘삼대 가족사’라는 제목이 더 좋다 고 하는 게 그가 감각이 없다는 증 거였기 때문이다.

그런 속마음을 감춘 채 이규한이 말했다.

“일단 강형진 감독 통장에 입금해 주시죠. 상황이 무척 급한 것 같은 데.”

“벌써 했어.”

“벌써요?”

“어차피 줘야 할 돈이라서 빨리 보 내 버렸어.”

‘그건 잘했네!’

속으로 생각한 이규한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어 봐야 좋은 소리 못 듣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출근하자마자 또 어디 가?”

“약속 있어요.”

“무슨 약속?”

“빨리 투자 받으려면 부지런히 일 해야죠.”

지이잉,지이잉.

마침 그때 이규한의 휴대전화가 진 동했다.

“빨리 안 온다고 전화 온 것 보이 죠? 얼른 가야겠어요.”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는 휴대전화 를 들어 올리며 이규한이 서둘러 사 무실을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규한아!”

박태혁이 불렀다.

“또 왜요?”

“이번 영화,꼭 성공해야 한다.”

“진짜 열심히 할 거라니까요.”

이규한이 바로 대답했다.

이 자리를 피하기 위해 임시방편으 로 꺼낸 대답이 아니었다.

이규한은 이번 영화의 투자를 받 고,대박을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박태혁을 위해서는 아니 었다.

이규한에게 전화를 건 이는 강형진 감독이었다. 그리고 이규한은 그가 전화를 건 이유를 능히 짐작하고 있 었다.

‘입금된 걸 확인했구나!’

강형진의 사정은 무척 급한 편이었 다.

모르긴 몰라도 아침에 눈을 뜨고 난 후부터 입금이 됐나 계속 확인하 고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약속했던 금액이 일시불로 입금됐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건 것일 테고.

“감독님,어제는 잘 들어가셨죠?”

“네,덕분에 오랜만에 아주 즐거웠 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즐거웠습니다.”

“이 피디님,통장에 입금된 거 확 인했습니다.”

“아,확인하셨군요.”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 다.”

강형진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 했다.

“제가 드린 돈이 아닙니다. 우리 대표님이 보낸 겁니다.”

“그렇지만 계약은 이 피디님이 해 주셨죠.”

“그건 그렇지만……

“저도 영화계에 오래 몸담았습니 다. 그래서 램프 엔터테인먼트 박태 혁 대표의 소문은 알고 있습니다. 그가 일시불로 각본료와 연출료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이 피디님이 많 이 노력하셨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제가 눈치가 없지는 않습니다.”

이규한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노력을 많이 했다기보다는 욕을 많 이 먹었을 뿐이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강형진이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었

기 때문이다.

“당연히 드려야 하는 건데요.”

생색을 팍팍 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이규한이 말했다.

“아니요. 당연한 일들이 당연히 지 켜지지 않는 것이 현재 영화계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서 이 피디님께 더욱 고마운 것이고 요.”

“그럼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시죠.”

“이번 영화 연출,진짜 잘해 주셔 야 합니다.”

“그거야 당연하죠.” “아까 말씀드렸듯이,당연한 일들 이 당연하지 않은 게 현재 영화계라 서요.”

이어진 이규한의 말을 들은 강형진 이 물었다.

“그럼 이제 전 뭘 하면 됩니까? 시나리오를 한 번 더 수정할까요?”

“무슨 수정이요?”

“투자를 받으려면 캐스팅 원고를 써 두는 게 유리하지 않을까요?”

방금 강형진이 말한 캐스팅 원고.

영화에 등장하는 배역을 맡을 배우 들을 캐스팅하기 위해 돌리는 시나 리오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캐 스팅 원고는 기존의 시나리오에서 캐릭터를 더 매력적으로 살리는 데 주력해서 수정하는 편이었다.

배우들이 꼭 맡고 싶은 매력적인 배역이어야만 캐스팅이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열정적이네!’

이규한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입금이 됐기 때문일까.

강형진은 쉬지도 않고 시나리오를 다시 수정하겠다는 의욕을 불태웠 다.

“아니요. 감독님은 다른 일을 하셔 야 합니다.” 그 열정이 무척 고무적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그를 뜯어말렸 다.

“어떤 일이요?”

“집안의 급한 일들부터 해결하세 요.”

“네? 하지만……

“가화만사성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 까? 우선 집안이 편안해져야 감독님 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실 테고,더 좋게 연출을 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 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심하게 신경 써 주셔서 감

사합니다.”

강형진과의 통화를 마친 이규한이 어제 강형진을 만났던 커피 전문점 으로 향했다.

또 다른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도 오래간만에 보는구나.”

약속 장소를 향해 걸어가던 이규한 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딸랑.

이규한이 문을 열고 커피 전문점으 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이규한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여

종업원이 인사를 건넸다.

그런 여종업원의 목소리는 무척 퉁 명스러웠다. 그리고 거의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커피 전문점을 찾는 단골 손님임에도 불구하고 여종업원이 반 갑게 맞이하지 않는 데는 나름 이유 가 있었다.

2,500원짜리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하루 종일 죽치며 탁자를 차지 하고 있으니 반가울 리 없었다.

“한국 영화계에서 최고로 능력 있 는 피디님을 만나서 영광입니다.”

그때,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 던 안유천이 이규한을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90도로 인사

했다.

“왜 이래?”

커피 전문점 안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이규한이 멋쩍은 표 정을 지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여종업원의 시선 도 어느새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깨 달은 이규한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 었다.

‘하여간 센스는 있는 녀석이란 말 이야.’

이규한이 다가가자 안유천이 다시 말했다.

“이 피디님,존경합니다.”

“뭐 잘못 먹었어?”

“굶었는데요.”

“왜 굶었어?”

“이 피디님이 사 주실 테니까요.”

당당하게 대꾸하는 안유천을 확인 한 이규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었다.

‘깜박 잊고 있었는데,원래 이렇게 뻔뻔하고 웃기는 녀석이었지.’

안유천은 시나리오 작가였다. 나이는 스물다섯.

지방의 전문대를 졸업하고 난 후, 작가가 되겠다는 꿈 하나만 갖고 무 작정 상경한 녀석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해결 하고,꾸준히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 만,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무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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