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2화 (2/272)

2 화

이미 아내가 내민 이혼 서류에 도 장을 찍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집기들에 압류 딱지들이 덕 지덕지 붙어 있는 집으로 들어가기 싫었다.

인근 찜질방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비틀거리며 걷던 이규한이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문득 고개를 든 이규한의 눈에 덩

그러니 떠올라 있는 달이 보였다. 보름달,그것도 피처럼 붉은 보름 달이었다.

레드문!

붉은 보름달을 확인한 이규한이 쓴 웃음을 머금었다.

“회사 이름부터 망조가 깃들었어!”

레드문이 뜨면 대재앙이 벌어진다 는 속설이 있었다.

물론 이규한은 그깟 속설 따위를 믿는 성격이 아니었다.

레드문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규한.

오히려 속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 하기 위해 일부러 레드문 엔터테인 먼트라는 이름을 사용했었는데.

“충고대로 회사명을 바꿔야 했어.”

이규한이 뒤늦게 후회하며 도로를 건너던 중 행인과 어깨를 부딪쳤다.

툭!

그 충격으로 어깨에 메고 있던 가 방이 도로에 떨어지면서,가방에 들 어 있던 내용물들이 쏟아졌다.

손때가 묻어 있는 책들을 가방에 도로 넣고,마지막 책으로 손을 뻗 던 이규한이 멈칫했다.

‘만월,붉은 달이 뜨는 불길한 밤 에 벌어진 이야기!’

두툼한 제본책에 적혀 있는 제목이

영화 ‘만월’의 시나리오 최종 수정 고.

이규한을 재기 불능의 나락으로 빠 뜨린 바로 그 작품이었다.

“제목 따라간다더니!”

영화 만월의 원제를 확인한 이규한 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최종 수 정고를 막 집어 든 순간이었다.

-25,511.

이규한의 눈앞에 숫자 다섯 자리가 떠올랐다.

“이건… 뭐지?”

시나리오를 집어 든 순간,눈앞에 숫자가 떠오르다니.

이건 머리털 나고 처음 겪는 경험 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떠올라 있는 숫자가 무척 낯익었다.

‘이건… 만월의 최종 관객수야!’ 대체 왜 이런 신기한 일이 자신에 게 벌어진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때였다.

빠앙! 빠아앙!

요란한 경적이 이규한의 고막을 때 렸다.

그 경적을 듣고 퍼뜩 고개를 든 이규한의 눈앞에서 빠른 속도로 다 가오는 승용차의 하이빔이 번쩍거리 고 있었다.

‘죽기 싫어! 아직 죽을 수 없다고!’

무능하고 실패한 영화 제작자!

이런 낙인이 찍힌 채 삶을 마감하 고 싶지 않았다.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줘!’

두 눈을 잠시 멀게 할 정도로 강 렬한 하이빔을 바라보며 몸이 얼어 붙은 이규한은 간절히 바랐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휴대전화의 알람이 울렸다.

귓가를 자극하는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를 듣고 이규한이 감고 있던 눈 을 천천히 떴다.

은하철도 999.

고전 만화영화에 등장한 주제가였 다.

가장 좋아했던 만화영화이자 영화 제작자라는 꿈을 갖게 해 준 작품이 기도 한 ‘은하철도 999’의 주제가를 들은 이규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 다.

‘언제 들어도 좋네!’

그렇지만 이규한의 입가에 슬며시 번지던 미소는 이내 흔적도 없이 사 라졌다.

‘근데 왜 ‘은하철도 999’의 주제가 가 나오는 거지?’

이규한은 알람을 꽤 오래전에 바꾸 었다.

‘은하철도 999’의 주제가 대신 기 계음으로.

‘언제였더라?’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바꾼 계기는 기억이 났 다.

영화판이,막연하게 예상했던 것만 큼 낭만적인 곳이 아니란 사실을 깨 달은 게 알람을 바꾸게 된 계기였 다.

‘환상에서 깨어나자!’

이런 각오를 하며 알람을 바꾸었는 데.

‘그게 언제였더라?’

이규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9년 전? 10년 전?’

정확하진 않았지만,대략 그 무렵 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이규한은 기억을 더듬었다.

‘술을 마시고 찜질방을 찾아가려고 했지!’

포장마차에서 안주도 없이 소주 세 병을 마신 후,찜질방을 찾아 헤떴 다.

그 와중에 도로를 건너다 행인과 부딪쳐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이 떨 어지면서 가방 안의 내용물들이 도 로에 쏟아졌었다.

그 내용물들을 가방에 주워 담던 도중 하이빔을 쏘아 대며 빠르게 달 려오던 승용차를 마주했었다.

이것이 이규한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이었다.

‘병원이… 아니다!’

만약 차에 치였다면 병원이어야 했 다.

그렇지만 병원 특유의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여긴… 예전 내 집이야!”

주변을 살피던 그는 이내 깨달았 다.

지금 자신이 눈을 뜬 곳이 결혼 전에 혼자 살던 원룸이란 사실을.

‘그럼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고?’ 현실에서 절대 벌어질 수 없는 일

이었다.

판타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

이규한은 영화 제작자로 일하며 주 인공이 어떤 사건에 휘말리거나 어 떤 매개체로 인해 과거로 돌아가는 설정의 시나리오들을 많이 접했었 다.

“현실성이 없잖아,현실성이!”

그 시나리오들을 접할 때마다 그가 한 말이었다.

그런데 현실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 했던,영화에서나 가능하던 일이 지

금 자신에게 닥친 셈이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이규한이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프다!”

허벅지에서 짜릿한 통증이 밀려드 는 게 꿈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규한은 회귀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시나리오 를 완성해 가져왔던 작가들에게 현 실성이 없다고 면전에서 맹비난을 퍼부었던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 뒤 이규한이 혼잣말을 꺼냈 다.

‘내가… 잘못했네!” 이규한이 레드문 엔터테인먼트를 세운 것은 약 10년 전.

그사이 그는 ‘만월’을 포함해 총 여섯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물론 여섯 편의 영화를 모두 단독 으로 제작한 것은 아니었다.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도 있었으니 까.

어쨌든 10년간 여섯 편의 영화를 제작한 것은 꽤 대단한 일이었다.

영화판에 호기롭게 뛰어들었다가 단 한 작품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쓸쓸히 뒤안길로 사라져 간 영화 제 작자들이 부지기수임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이규한이 이 렇게 많은 작품을 제작해 세상에 내 놓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타고난 추 진력 때문이었다.

“죽어도 이 영화를 제작해야겠다.”

그는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면 도 중에 절대 뒤를 돌아보는 성격이 아 니었다.

오직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일념 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

그리고 이규한의 평소 성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졌지?’

이런 의문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날따라 더욱 붉었던 레드문의 영향인가,아니면 다시 한 번 기회 를 달라던 내 간절한 바람이 전해진 건가?’

이규한이 고심 끝에 찾아낸 의심이 가는 이유들이었다.

그렇지만 말 그대로 추측일 뿐이었 다.

이런 일이 벌어진 정확한 이유까지 는 알 수 없었다.

애초 현실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 는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졌으니까.

그래서 이규한은 이유를 찾는 것을 빠르게 포기했다.

대신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 적응하 기 위해 애썼다.

“오늘이 며칠이지?”

이규한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2007년 7월 14일.

오늘 날짜를 확인한 그가 기억을 더듬었다.

“아직 회사를 차리기 전이구나!” 이규한이 레드문 엔터테인먼트를 세운 것은 2008년이었다.

2007년의 이규한은 램프 엔터테인 먼트 소속 피디로 일하고 있었다.

‘7월 14일이면,작품 결정하는 날 이네.’

이규한이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두 작품의 시나리오가 놓여 있었다.

왼쪽에 놓인 시나리오는 ‘나의 새 로운 파트너’.

오른쪽에 놓인 시나리오는 ‘삼대 가족사’.

“그때,‘나의 새로운 파트너’를 선 택했었지!”

후우.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내린 선택.

그게 램프 엔터테인먼트의 운명을 갈랐다.

‘그 선택을 하고 땅을 치고 후회했 었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던 이규한이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아직 기회가 있어!’

램프 엔터테인먼트의 운명을 바꿀 기회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또 현직 영화 프로듀서이자 장래의 영화 제작자 이규한의 운명을 바꿀 기회도 마찬가지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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