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사랑...variety-1 (11/19)

11. 사랑...variety-1

익숙해지기 싫은 병원의 하얀 전등들을 누운 채 희미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지나가게 된다...

저번엔 기억이 없어 잘 몰랐지만... 이렇게 침대에 누워 병원 복도를 지나가려니 생각보다 훨씬 무섭고 겁이 난다... 내가 이렇게 나약한 인간 이었나... 아니다...

난 방금 전 혜주의 목소리가 더 듣고 싶을 뿐이다. 더 이상 듣지 못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겨우 듣게 된 혜주의 목소리인데... 자꾸 의식이 멀어져 간다... 혜주를 찾아 겨우 뜬 눈동자를 돌려본다.

옆에서 같이 뛰고 있는... 혜주의 이마엔 땀이 흐르고 있다...

'바보처럼 뭐가 저렇게 급하다고...'

나는 움직이지도 않는 손을 올리려 애를 쓰며 혜주의 이마의 땀을 닦아 주려고 한다.

이동메트리스에서 겨우 10cm정도나 손이 올라갔으려나... 힘을 줘 보지만 올라가지 않는 내 손이 원망스럽다... 눈물까지 흘리고 있는 혜주의 눈물과 땀을 닦아줘야 하는데 말이다. 혜주가 내 손을 봤나 보다. 꼭 잡아주는... 혜주의 손은 너무 따뜻하다...

다시 기억이 멀어지기 시작한다...

혜주가 뭐라고 말을 하는데... 내 입을 막고 있는 산소호흡기의 마스크로 인해 내 숨소리만 귀에 울려 멍하게 들렸기에 난 혜주의 목소리를 들으려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아저씨..."

울면서 아저씨를 외치는...무슨 문이 열린 건지 보지도 못한 채 나는 침대에 누운 채 그렇게 문으로 들어가 혜주와 떨어지게 되었다...

겨우 잡고 있던 정신의 끈이 끊어지듯 기억을 잃게 되었다...

내 목숨은 질긴가 보다...

정말로 죽는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죽는 게 무섭진 않았다...

앞서 말했듯 혜주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이제서야 겨우 듣게 되었는데... 이렇게 제대로 얘기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약간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눈을 떴을 때... 의사와 그리고 마주보고 뭐라고 얘길 하고 있는 삼구가 보였다...

혜주는??

혜주가 없다... 어렵게 고개를 들어 혜주를 찾아보려하는데 내 손을 누군가가 꼭 잡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혜주가 지쳤는지 내 손을 잡고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다. 자면서도 손을 놓지 않으려는 듯 작은 내 움직임에도 혜주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간다.

따뜻하면서도 강한 힘이 느껴지는 혜주의 손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이제 스물 둘인데 나보다도 더 많은 일들을 겪은 혜주의 손은... 날 작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혜주를 바라보고 있는데 삼구와 의사의 말이 들려온다.

"다행히 아이도 무사합니다..."

"일산화탄소 중독인가요?"

"예...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아마 두 명의 생명은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언제쯤 퇴원할 수 있는 거죠?"

"여자분은 그나마 괜찮지만 민호씨가 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아무리 경미한 일산화중독이라고 해도 최소 삼사일은 두고 본 후에 퇴원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예..."

의사가 자리를 뜨자 삼구는 잠시 팔짱을 끼고는 생각에 잠겨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멍하니 삼구를 바라보는데 몸을 내 쪽으로 향하던 삼구가 내 뜬 눈을 보게 되었다.

"참나... 이 미친놈..."

"..."

"니 얘냐?"

"..."

말하기가 거북하다... 목이 따갑고 연신 나오려는 기침을 자고 있는 혜주가 깰까봐 겨우 참고 있었기에 삼구의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사고를 제대로 치는구나... 아니! 니네가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이냐? 아니지. 다 큰 성인들이 누가 반대한다고 죽을라고 지랄인데?"

더 이상 듣고 있을 순 없었다.

어렵게 입을 열어 말을 해본다...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도 목에 힘을 준다.

"혜주 깬다..."

"미친놈... 지금 혜주가 문제야? 까딱 잘못했으면 너 살인자 될 뻔했어 이 새끼야!..."

"..."

"말도 못하겠지? 어떻게 그렇게 생각이 짧냐? 돈도 잘 벌면서 왜 죽을려고 한 건데?!"

"내가 아니야..."

"뭐? 뭐가 네가 아닌데?"

"애 아빠도.,, 자살하려고 했던 것도 내가 아니라고...단지 기억이 없다..."

"그럼? 저 아가씨가 니 옷까지 다 벗겨놓고 모텔방안에다가 번개탄에 불 붙였단 말이냐?!! 그게 말이 돼?"

"..."

"하옇튼 나 없었으면 너 죽었어 새끼야..."

"어떻게 찾은 거야?"

삼구가 혜주의 핸드폰을 꺼내 내게 보여준다... 내 번호로 온 문자 한통...

[미안해요. 이제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고 싶어요.]

눈을 깜빡이며 다시 한 번 확인해 봤지만 분명히 내 핸드폰 번호였다... 이런 걸 보낸 기억도 생각도 나질 않는데... 혜주의 핸드폰에 찍혀있는 내 번호로 온 문자가 확실했다...

오히려 내가 당황하게 된다... 이게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삼구를 바라보게 된다.

"뭐야? 네가 보낸 거 아니야?"

"이거 뭐야?"

"..."

"..."

삼구와 난 서로 멍하니 쳐다보게 된다.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이거 보고 나 찾은 거야?"

"말도 마라... 놀래켜주려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갔다가 불이 꺼져 있어서 혹시나 해서 매장으로 갔더니 혜주 혼자 앉아 있더라... 그때가 아마 새벽 1시였을걸... 근데 갑자기 핸드폰 울리고 나서 문자 보는데... 혜주가 미친년처럼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나한테 어버버하는거야..."

"..."

"내가 수화라도 할 줄 알아야지... 뭐라고 하는지 도통 몰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핸드폰을 보여주면서 막 우는데..."

"울었어?"

"그래 미친놈아... 막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진짜 애절하더라..."

"..."

"그러다가 목을 부여잡고 한참을 켁켁 되더니 갑자기 말을 하는데... 진짜 깜짝 놀랐다... 저번에 통화할 때 혜주 이 아이 사고인지 뭔지로 벙어리 된 거 아니야?"

"실어증이었어...그것보다 그래서 혜주가 뭐라고 그랬어..."

"그거 말하면... 남사스러워서 말도 못하겠다..."

"뭐라고 했는데?"

"..."

"야!..."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정작 큰소리가 아닌 쉰 소리로 삼구에게 고함이 아닌 굉음을 내게 되었다...

이런 고통을 혜주는 몇 개월 동안이나 아무렇지 않게 지냈다는 것이 안쓰럽게 느껴졌지만, 그것보다 지금 삼구의 뒷얘기가 너무 궁금했기에 난 삼구만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게 혜주가 나 붙잡고 막...윽~~"

혜주가 일어났다...

갑자기 삼구에게 달려들어선 두 손으로 삼구의 입을 틀어막는다.

빨개진 눈두덩이로 삼구를 노려보며 고개를 젓는... 삼구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손을 놓는 혜주였다...

다시 내 옆에 앉아선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날 애절하게 바라본 혜주가 천천히 말을 꺼낸다... 여전히 쉰 목소리로...말을 하면서도 힘이 드는지 목을 손으로 부여잡고 어렵게 입을 연다.

"아...저. 씨... 바보예요?"

"아니야... 정말 내가 그런 문자 보낸 거 아니야."

"알아요..."

"알아?"

"예... 아저씨가 무슨짓을 하든 저 다 믿어요. 근데 깨웠는데 왜 한 번에 안 일어난 거예요.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미안..."

내가 왜 사과를 하는지도 모르고...아니 혜주를 울린 것만으로도 난 죽을 죄인이 되어 버린 듯 느꼈기에 곧바로 사과부터 한다...혜주는 내 사과를 듣더니 다시 한줄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혜주의 목소리는 아직도 쉰 채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는지 쇳소리도 섞여 나오고 있었다...하지만 난 지금 순간 혜주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는 것에 신께 감사하고 있다.

아무리 혜주가 내 옆에 울고 있어도 말이다...

머쓱한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삼구가 자리를 피해준다...

삼구가 나가자 혜주가... 내 손을 잡아 준다... 손을 잡고는 연신 쓰다듬으며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그만 울어... 나 자꾸 얘기하는데 목이 너무 아프다..."

"...알았어요... 절대 안정이라고 했으니까...주무세요."

"응...근데 어디 가지마..."

"저 잠깐 심대리한테 다녀올게요... 심대리는 아직 어머니가 안 오셨데요."

"응?...응..."

지금 이 와중에 심대리를 걱정하는 혜주가 놀라웠다... 심대리에 대해선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혜주는 일어나기 전에 잠시 날 가만히 쳐다본다. 많은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애써 눈물을 참으며 날 바라보던 혜주가 정말로 심대리가 걱정이 되는지 마지못해 일어나 응급실에서 나간다... 아마도 심대리는 같은 응급실에 있지 않나보다...

혜주가 응급실에서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삼구가 들어온다.

"정리 좀 하자... 그럼 그 여자가 네 애를 임신한 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관계냐?"

"말...하자면 길어...같은 직장에 다녔지만 확실한건 내 애가 아니야."

"그럼... 널 왜 물귀신처럼 끌고 죽으려고 했던 건데?"

"아마... 내가 너무 행복해져서 그런가봐... 자신은 불행해졌는데..."

"..."

"나 때문에 불륜인 남자친구와 헤어졌거든...거기에 회사도 그만두고..."

"불륜?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그나저나 네 애가 아니란 말이지?"

"응..."

"휴~~ 귀국해서 놀래주려다가...이게 뭐냐 오히려 십년감수했다... 그런데 혜주랑은 어디까지 갔냐? 이 엉큼한 새끼야! 크크크"

"..."

"벌써 따 먹었어?"

"울 혜주 그런 애 아니야..."

"울 혜주? 하하하하 너 진짜 빠졌구나... 야! 란제리 모델 한다고 찾아온 애가 그런 애가 아니면?!... 이 세상 모든 여대생들은 전부 그런 애가 아니냐?!!"

"야!!"

"크크... 너 진심이구나?"

내 쉰 목소리의 어렵게 나온 고함소리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삼구가 웃다가 갑자기 진지하게 정색을 하며 묻기 시작한다.

"..."

"정신 차려 이 새끼야... 혜주 이제 스물둘이야!... 너 같은 노땅하고 어울릴 거 같아?! 거의 띠동갑이잖아, 그냥 즐기려면 진하게 놀고 돈 좀 쥐어주면 다 떠나더라! 솔직히 여자란 동물이 말이다 말로는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지껄이지만 다 필요 없어! 지가 좋아하는 젊고 멋진 놈 나타나면 뒤도 안돌아보고 떠나는 게 여자란 동물이야!"

"우리 혜주 그런 애 아니라니까..."

"미친놈... 니가 된통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그런데 혜주 얘는 어디간거야?"

"미오씨한테 가본다고... 혼자 있다고 걱정되나봐..."

"미오?? 그 심대리인가 하는 여자?"

내 말에 삼구의 얼굴이 굳어진다...

가만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삼구가 벌떡 일어났다.

"왜. 왜??"

"야!... 너 죽이려던 여자랑 단 둘이 놔두면 혜주가 가만히 있겠어?"

".응??"

"너 문자 받고 울면서 어버버하다가 뱉어낸 첫말이 뭔 줄 아냐? 자기가 알고 있는 울 아저씨가 이럴 리가 없다고, 나쁜 여자가 울 아저씨 어떻게 하려고하는 거 같다더라...섬뜩했어 새꺄...나 같았으면 이 새끼 바람났구나! 라고 화 냈을 텐데...혜주는 계속 울 아저씨~ 울 아저씨~~...안나오는 목소리로 아주 통곡더라...정말 사랑하는 사람 부르는 것처럼 애절하게 말까지 트여서는...아! 참... 너 자고 있는 동안 여기 선생님한테 혜주 목 상태 확인했는데... 아직 말 많이 하면 안 된다고, 사고의 충격을 무슨 원인으로 극복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무리하게 목 사용하면 평생 목소리 쇠 끓는 소리처럼 변한채로 살아야 될지 모른다고 하더라..."

"...그랬구나..."

"그래 새끼야... 나도 솔직히 지금 긴가민가해서 너한테 질투 섞인 투정으로 경고는 하지만... 저런 여자 내 옆에 있었으면 벌써 내 여자로 만들어 버렸어..."

"..."

"그게 문제가 아니고... 지금 한방에 단 둘이 있단 말이야?"

"한방?,,일인실이야?"

"어휴. 그 여자는 의식이 있어서 본능적으로 코를 가린 듯하다하더라... 사람목숨이 그렇게 쉽게 끊는걸 몸이 허락하겠냐...너보다 훨씬 경상이래...하옇튼 나 가보고 올께..."

"같이...같이 가자...나 좀 부축 해죠..."

"쉬어..."

"아니야... 나도 같이 갈래... 혜주 말릴 수 있는 사람 나 밖에 없을 거야..."

"..."

마지못해 삼구가 날 부축한 채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5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역시 삼구의 부축을 받으며 복도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걸어가기 시작한다... 복도를 걷고 있는데...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혜주의 쉬고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의 절규를 들을 수 있었다... 들려오는 병실 쪽에는 이미 간호사가 한차례 사고를 수습하고 나오는지... 팔과 소매, 그리고 배에까지 피를 묻힌 채 땀을 닦으며 병실에서 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분명 무슨 사고가 있었다...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착한 혜주가 내 복수를 대신해서 심대리에게 악행을 저질렀을 리가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애써 접고는 잘 옮겨지지도 않는 발걸음에 속도를 내어 간호사가 나온 병실로 걸어간다...

병실에 도착해서 병실 안을 보게 되었다.

혜주의 뒷모습과...그리고 침대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혜주를 노려보고 있는 심대리가 내 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혜주가 손을 올리더니 심대리에게 따귀를 날린다... 그 순한 혜주가... 정말로 나 때문에 화가 많이 난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혜주의 이런 모습에 쉽게 병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나와 삼구는 잠시 문지방에 서 있게 되었다.

따귀를 맞고도... 여전히 심대리는 고개를 치켜세워 혜주를 노려본다. 그리곤 냉랭하고 쏘듯 혜주를 노려보며 말을 하는 심대리였다.

"네가 뭔데!...네가 뭔데 내 목숨을 살리는 건데?!"

심대리의 이 말은...

나는 심대리의 고함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핏자국과...그리고 뽑혀있는 링거 줄을 보게 된다. 아마도 심대리가 또 다시 선택한 방법은 예전에 나와 같은...

"넌 행복하잖아!. 그래! 네 거 내가 뺏으려고 했어! 그건 미안한데, 왜 내 목숨까지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거냐고!"

"..."

"민호씨 가졌다고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냐?!!! 왜?! 너도 내가 불쌍하게 보여? 그래 지금은 행복하겠지!!... 남자가 너한테 목매니까 행복하게 느껴지겠지...넌 그게 평생 갈 줄 알아!!"

"..."

내 예상대로... 심대리는 그동안 너무도 불행하게 살고 있었나보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거기에 이제는 증오까지 느껴질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뱃속에 담고 있으니 말이다.

삶이 얼마나 망막했으면 내게 도움을 청하기보단 같이 죽음을 택하려고 했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심대리는 이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자신의 한풀이를 하듯 혜주에게 쏘아붙이기를 계속 한다.

"네년도 나랑 다를 거 같아?!! 너도 똑같아! 남자한테 버림받고 모든 걸 잃어봐야 내 심정과 똑같이 느낄 거야., 그러니까 상관하지 말고 지금 너 좋다고 달라붙은 그 놈한테 가라고!! 여기서 나가라고! 내가 죽던 말든 상관하지 말고!!"

"엄. 엄마잖아요..."

혜주의 목소리가 들렸다...뒷모습만...혜주의 가녀린 등만 내게 보여 확실하진 않았지만, 울고 있는지 울먹이는 쉰 소리로 심대리를 보며 나지막하게 얘기를 시작했다. 그 나즈막한 혜주의 목소리에도... 혜주를 부르려던 나와 그리고 심대리는 말을 잇지 못한다...

혜주의 입에서 나온 엄마라는 단어에 심대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걸 볼 수 있었지만,, 다시 심대리는 혜주를 노려보려 했다.

"언.니... 엄...마 아니에요? 엄.마 잖아요..."

"..."

"언.니 뱃속에 아이가 살고 있잖아요...그 아기도...숨을 쉬고 잠도 자요...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아직 태어나지도 못해서...한 번도 아름다운걸 보지도 못했는데... 엄마가 힘들다고 아기까지 죽이려고 해요? 언닌 엄마 아니에요?"

"...그...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넌 내려가서 김대리 하..."

"언니 엄마 살아계시죠? 지금 병원으로 오고 계신대요. 언니를 걱정하는 사람이 온다고요...언니는 세상엔 정말로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사람도 있다는 걸 왜 모르세요... 그리고 안 느껴지세요? 언니 뱃속에서 아가가 얼마나 떨고 있었는지? 지금도 떨고 있다는 걸요...엄마라면 아가를 사랑해주고 지켜줘야죠..."

"..."

독하게 노려보던 심대리의 눈에선 혜주의 말에 한줄기의 눈물이 다시 흘러내린다... 방금 전에 흘렸던 눈물과는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아마도 자신의 아기와 엄마를 생각하나보다.

시선을 혜주에게서 거두진 않았지만 심대리의 손은 어느새 자신의 배를 감싸듯 만지고 있었다...

"그 아기가 뭘 알아요...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단지 엄마 몸속에 있다는 것이 유일한 죄로 소중한 아기가 죽어야만 한다면...그러면 언니는 사람도 아니에요..."

"...내...내 애야!...내가 죽이던 살리던 내 맘이라고..."

혜주의 손이 다시 공중으로 올라갔다... 다시 심대리의 따귀를 때리려던 혜주는 든 손을 떨며 배를 만지고 있는 심대리를 차마 때리진 못했지만... 정말로 아무렇게나 말을 뱉어내는 심대리를 원망을 하는 듯 들어 올린 손을 주먹을 쥐며 천천히 내린다...

"사람이 죽으면요... 아무것도 못 봐요...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 줬던 사람도 못보고...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도 못보고, 자신의 딸이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보지도 못하고, 딸은 아무한테도 못 보여줘요...정말로 소중한 사람인데도...사랑하는 사람인데도 죽으면 대화도 못하고 같이 웃을 수도, 울지도 못한단 말이에요..."

"네...네가 뭘 알아!...당장 여기서 나가! 사람 그만 괴롭히고 나가라고..."

"몰라요!...

저도 언니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하지만... 남겨진 사람이 얼마나 힘든 진 조금 알아요...언니도 그 괴로움 아니까 죽으려고 한 거 아니에요!,.,."

",,,,"

"전... 울지도 못해요...웃...지도 못하고요...

엄마랑 아빠가 보고 싶어도...보지도 못하지만... 하늘에서 저 내려다보고 있을 거라고 믿어서...그래서 울지도 못하고,, 남겨진 내 불쌍한 동생들 생각하면 아무리 기쁜 일이 생겨도 웃지도 못해요... 언니가 얼마나 힘든데요?!! 저보다 힘들어요?!! 저라고 죽고 싶다는 생각 안 해본 줄 아세요...그럴 때마다 동생들 얼굴이 생각나서 죽지도 못했어요...언니는 엄마도 같이 살아 있고,, 뱃속에서 누구보다 언니를 사랑하고 있는 아기도 함께 있잖아요...왜 그걸 모르세요...왜 그걸 모르시냐고요...흑...콜록.,.콜록..."

말을 하던 혜주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곤 더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쓰러지듯 손을 땅에 짚고 주저앉는 혜주였기에 난 링거가 팔에 꽂혀 있는 줄도 잊은 채 혜주에게 달려가게 되었다...

"혜, 혜주야..."

"콜록...흑...아. 아저씨...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언니가 자꾸 제 마음을 몰라줘요...흑...흑..."

괴로움에 의한 투정인지...자신에 대한 설움인지...내게 심대리를 고자질 하듯 눈물을 흘리며 내 팔을 잡고는 내게 안긴다...

고통스럽게 기침을 계속하며 서럽게 울기 시작한 혜주였기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냥 혜주의 머리를 잡고 내 품에 더 꽉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울던 혜주가 훌쩍이며 날 민다...심대리 앞에선 이런 행동자체가 심대리를 자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눈물을 손으로 훔치곤 심대리를 향해 다시 일어난 혜주는 괴로운 듯 목을 잡고는 아까보다도 더 쉰 쇳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언닌 살아야 되요... 아기한테 미안해서라도 살아서 이번 잘못 갚으세요...아니면 제가 언니 용서 못해요..."

"네...네가 뭐...뭔데..."

심대리도 이미 눈물을 쏟고 있었다...내가 알고 있는 예전의 심대리는 그렇게 모진 여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자살시도를 하면서 내 도움을 받으려고 날 끌어들였을 것이다. 겁이 많아 혼자 가기는 무서웠을 테니까 말이다...

"너..."

말을 하던 심대리가 갑자기 놀란 듯 손을 올려 혜주의 얼굴을 가리킨다.

그리고... 난 그제서야 내 환자복에 묻어 있는 피를 발견하게 되었다...정말로 놀란 나는 옷 속으로 손을 넣어 확인해보지만 이건 내 피가 아니었다... 서둘러 일어나 혜주의 몸을 돌려 얼굴을 보는데... 입에서 피를 토해 흘러내리고 있는 혜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새하얀 얼굴에 묻어 있는 붉은 핏자국은 섬뜩하리만큼 빨간색을 띠고 있었다...

"가...간호사!! 간호사!"

난 목이 아픈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간호사를 연발하며 혜주의 입에 묻어 있는 피를 닦아준다.

혜주도 내 손에 묻어나는 피를 보곤 당황하며 놀란 눈치였지만 자신의 흘리던 눈물을 멈추지 않고는 다시 몸을 돌려 심대리의 손을 잡는다.

피를 토하면서도... 자신의 안위는 뒷전이라는 듯 심대리의 손을 잡고는 역시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언니... 저랑 약속해요... 다시는 이런 몹쓸 생각 안한다고 말이에요."

"네...네가...알...알았으니까... 빨리 선생님한테 가봐... 알았다고..."

그제야... 옆에서 혜주의 상태를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 간호사에게 향하는 혜주였다... 약간은 비틀거렸지만... 우리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듯 다시 정신을 차려선 간호사가 이끄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삼구에게 심대리를 맡기고 나는 서둘러 혜주를 따라가게 되었다.

로비의 간호사실로 간 우리는 간단한 처치와 함께 의사선생님을 기다리며 앉아 있다.

눈물을 여전히 닦으며 심대리가 불쌍하고 원망스러운지 날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미안..."

괜히 사과를 하는 나다...

내가 혜주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하면 할수록 혜주의 눈물이 더 많아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말로 목이 아픈지... 목을 잡고는 이제야 얼굴을 들어 날 바라보며 고개를 젓는다... 부은 눈으로...내가 전혀 미안할 게 없다는 듯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심각해진 내 얼굴을 바라보던 혜주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는다.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때는데 그때 마침 의사선생님이 다가와 혜주를 살피기 시작했다.

입을 벌리게 해서 안을 라이트로 비추며 쳐다보는 의사선생은 잠시 입가에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선 붉은 핏자국을 보고는 한숨을 쉰다...

"정밀 검사를 한번 받아보시는게 좋을 거 같네요. 보기에는 갑자기 목에 심한 무리를 줘서 각혈이 일어난 거 같긴 한데..."

혜주가 고개를 저으며 의사의 말을 자른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역시 쉰 목소리로...어렵게 말을 해 거부를 한다...그리곤 또 심대리 걱정을 한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수가 있는건지...겨우 스물둘 인데...

"선. 생님 512호 심.미오.환...자 언제 퇴원해요?"

"예? 일산화탄소중독환자라면 내일이라도 퇴원가능하시긴 한데요..."

"예..."

혜주가 의사와 대화를 하는 도중 간간히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이미 예상이 된다...

혜주라면...내가 알고 있는 혜주라면 다음 행동이 무엇이 될지 충분히 감을 잡고도 남았으니 말이다...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혜주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푸념하듯 한숨을 쉬게 되었다.

의사의 권유로 그 후 나는 응급실로 돌아가게 된다.

혜주가 심대리와 같이 있고 싶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 고집으로 인해 심대리 곁에는 삼구가 남아있게 되었고, 그나마 내 몸 상태도 더 이상의 후유증이 없을 거 같다는 의사의 진단에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혜주를 옆에 두고 심대리와 삼구, 이 넷이서 휴게실에 있다. 심대리의 속죄(?)를 듣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대리의 상태는 불안하고 심각했다는 걸 심대리의 차분한 목소리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는 심대리의 모습으로 그 분위기는 오히려 더 착잡하게 내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밝힌 그 남자의 본성을 알게 된 심대리는 아이를 지울 생각으로 병원으로 향했었고, 도저히 푹신하다고 느낄 수 없는 침대에 누워 다리를 벌리고 의사를 기다리는 동안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의사가 들어와 마지막으로 아이의 심장소리를 들려주며 결정하기를 요구했고, 심대리의 뱃속에서 앞으로 다가올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듯 힘차게 들려오는 심장소리를 듣게 된 심대리는 끝내 낙태를 하지 못하고 병원을 나오게 되었단다...

며칠을 울면서 힘들게 밥도 먹지 못하고 지내던 심대리는 마지막이라는 미련한 미련으로 그 남자에게 연락을 했고, 연신 전화를 끊어버리는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억울함과 배신감에 결국 그 남자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경솔한 짓을 저질렀다는 심대리의 말에 그게 왜 경솔한 짓인지 생각을 하는 나였지만, 쉽게 입을 때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더 충격적이었다. 그 여자는... 담담하게 다 알고 있다는 듯 심대리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권유까지 했다는 것이다.

꼭 복수를 하려는 전화통화는 아니었지만... 그 여자의 냉랭한 목소리는 복수심은커녕 심대리 자신이 얼마나 허무한 존재가 되어버린것에 대한 자각을 시키기기에 충분한 듯 보였다.

그래서 죽음을 택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내게 고마움을 전하려고 내 퇴원날짜에 맞춰 인사하러 오던 길에... 나와 혜주를 보게 되었고, 쫓아와서 우리를 모습을 지켜보며 행복해 하다는 걸 알게 된 후...내가 느꼈던 고마움은 또 하나의 배신감을 느끼게 만들었다고...

나와 혜주가 웃으며 장을 보는 것까지 고스란히 다 지켜본 심대리는... 자신의 불행에 대한 원인을 내게서 찾으려고 했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 그 남자와의 사이를 갈라놓은 중요한 요인으로서 심대리에게 각인 되어갔고, 결국 어제 술에 약을 타는 결과까지 이어졌단다.

자신을 책망하려면 지금 하라는 듯 얘기를 하는 심대리였지만...

나를 포함해 병실한의 세 명은 그저 심대리가 측은하고 불쌍하게 보일 뿐...아무도 얘기를 선뜻 꺼내지 못하고 있다.

심대리의 자살 소동으로 인한 감시가 있었기에 삼구도 더 이상 심대리에게 갈 필요는 없었고, 내 집으로...아니 혜주와 내가 살고 있는 우리 집으로 가서 쉰다며 나가버린다...

내가 안방은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를 몇 번이고 했지만... 애써 분위기를 바꾸려는지 음흉한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는 삼구의 표정에 혜주가 약간은 골을 내는 듯 보였다.

병실 안에 다른 환자도 있었지만 이제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혜주만 남게 되었다.

혜주는 누워있는 날 보면서 한숨을 쉰다... 맨날 병원이냐는 듯... 날 불쌍하다는 눈빛까지 보내며... 한숨을 쉰다...

나도 한숨이 나왔다... 쓰나미가 몰려간 후의 허탈함 같은 허무함을 느끼게 만든 심대리였기에.,,나온 한숨이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는데 혜주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픈 목인줄 뻔히 알면서 혜주에게 말을 건넨다...

"목 많이 아파?..."

",,,,,,,,,,,아뇨..."

쉰 목소리에 날카롭게까지 들리는 음성이지만... 바로 내 옆에 혜주가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사슴처럼 큰 눈망울에 작고 오뚝한 콧방울에 어울리는 작은 입술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이 날 위해 그렇게 서럽게 울어줬다는게 믿기지가 않았는데... 자신의 트라우마 마저 깨고 말을 하게 된 원인이 나라니... 미안하면서도 정말로... 정말로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심대리의 일은 안타까웠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혜주가 가장 소중했기에 혜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날 죽음으로 잡아당기려던 심대리마저도 용서가 되는 듯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 죽을뻔한 나인데...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온다...

이런 삭막함만 느껴지는 병원 안에서...그리고 방금 전 심대리의 심각한 얘기를 들은 직후인데도 혜주를 바라보고 있으니 미소를 짓게 된다. 어이없다는 듯 날 바라보는 혜주의 시선을 느꼈지만. 연신 미소를 짓고 있자 혜주도 피식 웃으며 예전에 누웠던 간이침대에 자리를 펴기 시작한다...

"거...거기 불편하잖아..."

"...괜.찮.아요."(목이 많이 아픈가 보다... 여전히 목을 잡고 얘기를 한다.)

"내가 내려갈까?"

"..."

정말로 기가 차다는 듯 날 바라보며 귀엽게 인상을 쓴다...

"내가 내려갈게... 혜주야 위에서 자."

"...참.나..."

내 말을 무시하고 다시 이불로 배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달랑 하나 있는 이불로 배계를 만들면... 뭘 덮고 자려는 건지...어제 아침에 학교에 입고 간 원피스 그대로였고, 거기에 여기저기 피도 묻어있는데다가 더렵혀졌는데도... 앉아서 이제야 묻어 있는 피를 보며 속상해 하는 혜주는 괜히 날 노려본다... 이런걸 입게 만든 내가 잘못이라는 듯 말이다...

푸념하듯 한숨을 쉬며 내게서 시선을 거둔 혜주는 옆에 있던 비닐봉지에서 내 재킷을 꺼낸다.

그리곤 누워서 이불을 덮듯 재킷을 덮는데... 짧은 재킷으로 상체만 덮어 혜주의 곧게 뻗은 다리가 그대로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조금씩 손을 내려 재킷을 내리는 혜주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계속해서 다리와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자...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혜주가 벌떡 일어난다.

"저...집.에 다.녀.올래요..."

"으.응?? 그래?..."

"꼼.짝.하지 말.고 누.워 있어요...금.방 다.녀.올테니까요..."

"근데 지금 시간에?"

"집.이.랑 가.깝.잖아요. 뛰.어.갔다 오면 1시.간 안.걸.릴거에요."

어렵게 한 글자씩 뛰어 말한 혜주는 벌떡 일어났다...

"혜주야. 택시 타고 갔다 와."

"..."(역시 고개를 젓는...)

"지금 몇 신데 여자 혼자서 뛰어갔다 온다는 거야. 그렇게 예쁘게 입고... 그냥 택시 타고 집으로 가서 잠을 자던가..."

"..."

"같이 갈까? 나 불안해서 도저히 못 있겠다... 너 데려다 주고 올께...아... 삼구...아니다... 그냥 여기로 다시 와..."

갈팡질팡... 집에서 편하게 재우고 싶긴 한데... 지금 우리의 집에는 삼구가 떡하니 혼자 누워 있을 것이 뻔했고...그 난봉꾼이 있는 집안에 혜주를 같이 두기엔...아무리 친구를 믿는다고 해도... 남녀 관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혜주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자 혜주가 '피식' 웃고는 내 지갑을 꺼내 건넨다.

"그.럼 택.시.비 좀 빌려주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빌려주긴... 빨리 다녀와?"

웃음이...

얼른 2만원을 꺼내 주자... 혜주가 다시 만원을 돌려주며 다녀오겠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병실을 나간다.

10분이... 정말로 이렇게 긴 시간인 줄은...20분이 이렇게 지루한 기다림인 줄을 처음 알게 되었다... 40분이 지났을 때... 초조해지기까지 한다...

당연히 삼구를 믿는데...

친구의 의리로 그냥 믿어버리기엔 너무도 아름다운 혜주였다...

사랑을 하면 질투를 하게 되고. 투기를 한다더니...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행동인지... 결국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복도로 힘겹게 걸어가선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혜주의 핸드폰에 전화를 건다...

한참을 울린 후에 혜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 보세요?]

"왜 안와?!"

나도 모르게... 아픈 목에도 신경질적인 화가 섞인걸 느끼게 되는...

[예?]

"왜 이렇게 안 오냐고..."

[그.그게...]

"..."

[야! 이 나쁜 새끼야!!]

갑자기 전화기 너머에서 혜주대신에 삼구 목소리가...

[내가 혜주씨한테 뭔 짓 할까봐 걱정돼서 전화했냐! 이런 친구도 아닌 새끼야!...]

"아...아니... 온다고 했는데 걱정돼서 그런 거지..."

[큭큭큭... 미친놈,,, 지금 눈에 다 보이거든! 옷 갈이입고 후다닥 나가려던 혜주씨가 내 뱃속에서 고함지르는 소리 듣고 밥 챙겨준다고 늦는 거다! 이 행복한 놈아!!!]

"..."

혜주의 성격상 배 곯는걸 가장 불쌍하게 여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딴 놈한테 무슨 밥씩이나...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내 애타는 마음도 모르고... 이 와중에 밥상을 차려서 삼구한테 받치는 혜주의 귀여운... 혹시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삼구가 눈독을 들이면 골치 아파진다는 생각도 하면서... 한숨을 쉰 나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끊은 지 1분도 안돼서 전화기가 둘린다... 당연히 혜주 번호다.

"여보세요...'

[다 드.셨.어요. 금.방 갈게요...]

[야!! 이 써글놈아!! 너만 행복하...]

전화가 급히 끊어진다... 발악하듯 소리치는 삼구의 목소리에 혜주가 급하게 전화를 끊은 게 분명했다... 씁쓸하면서도... 역시 혜주의 아름다움과 고운 마음은 누구 나한테 통한다는 걸 느끼면서 잠시 벤치에 계속해서 앉아 있다.

멍하니...

한참을 생각에 잠기게 된다. 혜주와 만나고 나서 이렇게 많은 변화와 사건이 내 삶에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주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도 그냥저냥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예전의 내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혜주라는 여성은 내 옆에 없었을... 편안한 생활을 계속해서 영위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의... 혜주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만 생각했는데도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어느새... 혜주는 내 가슴속의 한 부분이 아닌 전부가 되어 버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렇게 한동안 벤치에 앉아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피해라도 줄까봐 종종걸음보다 조금 빠르게 허겁지겁 달려오는 혜주를 보게 된다.

내가 처음 사준 분홍색 추리닝...이제는 버릴때도 된 LOVE라는 글씨가 가슴팍에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 추리닝을 입고는 달려오던 혜주가 날 발견한 듯 숨을 고르며 걸어오기 시작했다.

내 앞에 당도한 혜주는 잠시 날 노려본다...

"누.워... 있으라니까..."

"큭... 그냥... 전화하려고 나왔어."

"피~... 얼른... 누워요."

"응..."

혜주의 손에 이끌려 침대로 향한 나는 혜주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 눕게 된다.

날 부축하는 혜주의 손은...

가늘고 약해보였지만 힘하나는...

내가 바로 눕자 혜주는 준비해온 얇은 이불을 꺼내선 간의 침대에 펴기 시작한다...

"같이 잘까?"

혜주를 빤히 쳐다보던 나는...

스스로도 생각지도 못한 말을 입으로 뱉어냈다...

숨어 있던 욕망인지... 아니다 그냥 몸이 아파서 투정 부리듯 뱉어낸 말이다...

아니면 정말로 무의식중에 뱉어낸 말 인진 모르겠지만... 혜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혜주가... 이불을 펴다 말고 놀라 날 빤히 쳐다본다...

'아차!' 싶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 있는 병실 안에서 무슨 짓을 한다는 건 아니었지만... 같이 자자고 한 것 자체가 지금 상황에서는 너무도 어색한 말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날 바라보는 혜주의 시선에 내 얼굴이 점점 빨개지기 시작한다...

"미,,미안... 아래가... 좁잖아...간이침대가 딱딱하기도..., 거기에 약간 추울 거 같기도 하고,., 모기도 있을 거 같은데. 그...그리고 아래는 공기도 안 좋을거 같...아..."

"풋~..."

당황해 횡설수설하기 시작한 내 모습을 귀엽다는 듯 '피식'웃음지은 혜주는 잠시 자신이 깔아놓은 이불을 보더니 천천히 손을 침대에 짚는다...

혜주가... 내가 말 한대로 내 옆에서 누워서 자려는 듯 천천히 올라온다...

갑자기 심장이 멈출 거 같다는 생각까지 하며 심하게 고동치고 있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침대의 조금 사이드로 몸을 움직인다.

어느 때보다도 긴장을 하며... 입속이 바짝 마를 정도로 침을 삼키는... 여지없이 변태중년아저씨의 포스를 풍기는 내 모습에 올라오려던 혜주가 멈칫한다...

내 상태를 바로 앞에서 본다면... 아마 어느 여자라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을 정도로 뻣뻣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혜주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본다...맑은 눈동자에... 작은 입술을 꼭 다문 채...

잠시 망설이던 혜주가 내가 비켜 만들어준 내 옆에 조심스럽게 바로 눕는다... 이불을 덮은 건 아니지만... 작은 병실침대였기에 어깨가 맞다으며 분명히 같이 누워있게 되었다...

내 심장은 이미 유체이탈을 한 듯... 고동소리마져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울 만큼 심하게 뛰고 있었다.

'쿵쿵쿵쿵쿵쿵~~'

'콩콩콩콩콩...'

그런데... 내 심장소리와 다른... 나와 마찬가지로 역시 심하게 고동치고 있는... 나보다는 작지만 분명히 혜주 몸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귀가 아닌 맞다은 어깨로 느낄 수 있었고,, 혜주도... 지금 상황에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는지...거기에 겁을 먹고 있는지도 알게 된다... 괜히 미안해지는...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려 혜주의 손을 잡았다.

부드럽게...그리고 힘을 줘서 잡았다.

"고마워..."

",,,,,,,"

내말에 바짝 긴장한 혜주의 숨소리가... 내 귀를 간지른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혜주의 숨소리를 듣게 되니... 오히려 혜주와 달리 난 마음이 편안해진다... 혜주의 순수함에 심하게 고동치던 심장도 안정을 찾는 것일까?

어느새 평온해져 긴장했던 근육들이 풀어지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혜주는 달랐다... 여전히 심하게 고동치는 심장소리를 억누르듯 한 손을 올려 자신의 가슴에 얹고는 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히 보인 채 내 옆에 누워 있었기에 나는 아쉬웠지만 입을 때 말을 한다.

"혜주야... 내가 내려가서 잘게..."

"..."

내가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혜주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준다...그리곤 고개를 천천히 가로로 젓는다...

어색하면서도... 작은 입술 끝을 올려 귀엽게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는... 좁은 침대라서 고개를 돌리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이제는 얼굴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마주하고 있었다.

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혜주의 얼굴에서 시선을 도저히 땔 수 없었다...

혜주도... 그런 시선을 보며 미소 짓던 입술을 다시 긴장이 되는지 다시 원래대로 다물고는 떨리는 입술을 애써 숨기며 날 바라봐준다...

창피하지만... 날 위해 참아주고 있는 표정이 뻔히 눈에 보였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풋큭큭"

"..."(내 웃음에 혜주가 당황하듯 눈이 더 커진다.)

"미. 미안...참~~ 너무 순진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그런데 무슨 용기로 침대에 올라왔냐?"

"핏!..."

혜주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내 손은 이미 자물쇠가 잠겨 있듯 혜주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는 혜주... 혜주의 검은 윤기 나는 머리카락마저도 예뻐 보이는데... 그런데 가마가 보이질 않는다...

"어... 너 가마는 어디로 사라졌냐?"

"헛..."

급하게 머리를 돌리는...

날 쳐다보며 미간을 찡그리며 아랫입술을 약간 치켜 올려 윗입술을 약간 덮듯 더 굳게 다물고는 인상을 쓰며 날 노려본다. 가슴에 얹고 있던 손을 올려서는 자신의 뒤통수를 가리듯 감싸고는 더 험하게 인상을 쓰지만... 내겐 귀엽게만 보였기에 병실안인것도 잊은 채 소리내어 웃게 되었고, 그에 당황한 혜주가 머리에 얹고 있던 손을 내어 내 입을 막게 된다...

"조. 조용히 해요... 다른 분들 깨요..."

"큭큭..."

"몰라요... 친, 구들이 전 시집도 못갈 거라고...놀린단 말이에요."

"누가? 네가? 참나... 이렇게 예쁜 혜주가 시집을 못가면..."

"예쁘긴..."

"참나... 고생만 하더니... 자기가 얼마나 예쁜지도 잊었구나..."

"...피~..."

입술을 삐쭉 내밀면서도 기분은 좋은지 얼굴에 약간의 눈웃음이 보인다.

내게 들키기 싫은지 얼굴을 약간 돌려 '피~'라는 소리를 내면서... 가느다란 목선과 더불어 얇게 이어진 턱선의 아름다움이란... 스물두 살만 아니었다면... 백번이고 이미 저 턱선을 이어 입술에 내 입을 포갰으리라...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바로 옆에 혜주가 누워있다는 이유로 내 몸이 내 말을 듣질 않는다...

이미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

그러고 보니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혜주를 만나고 나서 가장 긴 금욕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걸 되새기게 된다... 참... 대견한 놈이지 않은가...

이정도면 혜주도 날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내 얼굴이 아랫도리의 변화에 굳어지기 시작하자 혜주의 시선이 걱정스러운 듯 변해갔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되는데...

"목 많이 아파요?"

"으.응?? 아니야..."

"왜 인상 써요?"

"그냥..."

"..."

말로는 그냥이라고 했지만 혜주의 여러 가지가 날 미치게 만들기 시작했다... 보통 여자의 땀 냄새에는 암내가 나기 마련인데... 집에서 나올 때 삼구 때문에 씻지도 못했을 텐데 혜주에게서 은은한 아카시아 향이 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향긋한 향이 내 코를 간질였고, 날 빤히 바라보는 눈물을 많이 흘려 맑아진 커다란 눈망울의 밝음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또렷하게 보였고, 가느다란 목선과 몸이 만나는 쇄골의 도드라짐이 추리닝의 벌려진 틈사이로 보여지며 옷으로 가려졌지만 누워있어 적당히 퍼져 풍만하게 무덤을 이루고 있는 혜주의 가슴...

그리고 잘록한 허리가 날 미치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크게 삼키게 된다...

"꿀~~꺽~~~"

".,..."

혜주의 큰 눈이 내 침 삼킴에 더 켜져선 내 목을 쳐다본다...

내 목에서 난 소리와 혜주의 시선에... 당황한 나였지만...

나는 대담하게 혜주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올려 혜주의 턱을 내 쪽으로 올린다... 내 몸의 의도는 단순했다... 내 목을 지켜보고 있는 혜주의 시선이 혹시나 더 내려져 내 하반신을 보게 된다면... 이 와중에 얼마나 날 짐승에 변태로 보겠느냔 말이다...지금 내 상태가 말을 인해도 전부 알 수 있을 테니까...

"..."

침묵이...이어진다... 내 손에 의해 턱이 들려진 혜주의 얼굴에...

난 처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혜주의 입술만이 내 눈에 보이는 듯 꽂혀있는 내 시선을 바꿀 수가 없었다. 작지만... 도톰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저 입술에 내 입술을 닿을 수만 있다면...

내가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걸 스스로 자각했을 때... 나는 성급히 시선을 혜주의 눈과 마주치도록 올리게 된다...

혜주가...

눈을 감고 있다...

조금 떨리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눈을 감고 있는 혜주의 모습은 정말로 내가 꿈에 그리던 상상속의 첫 키스의 대상과 너무도 닮았다...

나는 혜주의 이런 행동이... 내게 입술을 허락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천천히 고개를 빼들어... 혜주에게 다가간다...

손으로 혜주의 고개를 천천히 바로 눕히고 난 얼굴만 혜주의 위로 옮긴다... 혜주의 손은 자신의 가슴에 그대로 위치해 주먹을 쥐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 주먹이 조금씩 계속해서 떨리는 것도 말이다...

천천히 고개를 내려 혜주의 입술에 내 입술을 살짝 닿았다. 머릿속에 하얘진다...달콤하게까지 느껴지는 정말로 세상 어느 무엇보다도 혜주의 입술은 부드럽고 달콤한 맛과 향기까지 나는 듯 느껴졌다...

잠시 혜주의 입술을 느끼는데...

"앗..."

"응?"

혜주가 얼굴을 약간 때고는 작고 귀여운 손으로 내 턱을 쓰다듬는다... 그러고보니 이틀동안 수염을 안깍았구나...

수염임을 확인했는지 혜주가 턱을 어루만디던 손을 내려 다시 가슴에 모은다.

"아. 아파?"

"..."

고개를 조용히 가로로 젓는... 잠시 떴던 눈을 감는다... 아까보다 더 천천히.,. 혜주가 또 따가워할까 봐 약간 입술을 내어 혜주의 입술을 덮는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혜주의 입술은 내가 느껴본 어느 여자보다도 부드럽고 따뜻했다... 입술만 닿고 있는데... 심상이 터질듯 고동치기 시작한다... 손이... 이럴땐 허리를 감싸거나 가슴을 만지는게 내 행동패턴이었는데... 공기의자처럼 혜주를 건너 몸을 어렵게 지탱하고 혹여라도 혜주의 몸에 닿을까봐 힘을 주고 있게 된다.

그런데 나의 이런 행동으로... 혜주의 심장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것처럼 느껴진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가보다.어색하게 혼자 가슴조리며 떨고 있는것이 아닌가보다... 혜주의 주먹이 더 꽉 자신의 옷을 움켜잡기 시작했다...

입술을 닿고만 있는다...

단지 입술만 포개고 있는데...

그 행동 자체가 혜주는 내게 모든 감정을 말해줬기에 그 이상의 무엇도... 나는 감히 실행할 수 없었다...

범하면 안 되는... 범해서도 안 되는 여신의 입술을 온몸에 전율을 느끼듯 입술을 통해 짜릿한 전기가 내 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키스라면 여자와 지겹도록 해봤는데... 지금은 숨을 어느 타임에 내 쉬어야 하는지도 잊은 채 한참을 혜주의 얼굴위에 내 얼굴을 대고 입술만 닿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먼저 혜주가 아까보다 더 힘을 줘서 날 밀어내 듯 자신의 가슴에 얹고 있던 손으로 내 젓는다...

나는 반동으로 침대위에서 혜주의 옆에 비스듬히 눕게 되었다.

"푸아~~..."

"..."

갑자기 숨을 몰아 내쉬는 혜주는...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귀까지 닳아 올라 있었다... 비상등의 분홍빛으로 내게 그렇게 보여지는지도 모르지만... 숨을 몰아쉬던 혜주는 잠시 후 감았던 눈을 뜨고는 귀엽게 내 시선을 피하며 내게 쑥스러운 듯 어렵게 얘기를 시작했다.

"...죄...죄송해요..."

"응?...내...내가 미안하지... 갑자기 너무 성급했어...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고... 혜주가 너무 예뻐보여...싫었지?? 미안..."

"아. 아니...요...그.,그게 아니라... 옛날에 드라마 볼 때에는 주인공들이 쉽게 하던데... 막상해보니까...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지 몰라서. 그리고 주먹쥐고 엄지 틈에 해보면 똑같다고 친구가 그랬는데... 너무 달라서..."

"드라마? 막상?? 달라?"

잠시 멍해진다... 혜주도... 나와 같은 떨림이었나 보다... 아니... 나와는 비교가 안될테지... 첫 키스인데...

"그럼... 너 이게 첫 키스야?"

"..."

수줍은 듯... 날 바라보며 고개만 약간 끄덕이는...

스물두 살인데...

이렇게 예쁜데... 나와의 키스가 첫 키스라니...

"저. 정말??"

"..."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날 쳐다본다...

그럼 자기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거냐는 듯 쳐다보던 눈을 귀엽게 흘기기 시작한다...

"제가 아저씬 줄 알아요?!!"

"그. 그게 아니고... 아니!! 내가 어때서?!"

"바람둥이..."

혜주가 부끄러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예전의 내 모습이 생각난 건지 하옇튼 여러 번 뒤척이며 돌아누워 내게 등을 보인다...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자나이 스물둘이면...그것보다 지금 혜주가 삐지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기에 나는 혜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바로 눕히려고 하는데... 손으로 내 손등을 때린다.

"놔요... 나만 손해본거 같아...바람둥이..."

"아...아니야... 나 바람둥이 아니야..."

"치~...나한테 걸린 것만 두 번이면서..."

"그. 그거야..."

"진짜... 괜히 가만히 있었어... 내 소중한 첫 키스를... 이런 바람둥이한테...물어내요..."

"크...미안해..."

내가 사과를 하자... 혜주가 고개를 돌린다. 역시 날 빤히 바라보며 얘기를 이어한다.

"왜 사과해요? 아저씨 진짜 바람둥이에요?"

"그건 아닌데... 네가 그렇게 느꼈고, 내가 생각해도 오해할만한 상황이...그래도 난 진짜로 사랑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거기에다가 지금처럼 진심으로 가슴 떨려본적도 없는걸..."

"그럼?...가슴도 안 떨리는 상대하고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고 그랬단 말이에요?"

"..."

너무도 진지한...

혜주의 사고방식은 사랑하니까 키스를 한다인가보다...아니... 그게 원래 정석인데... 내 삶에선 하나가 빠져 있던 건 확실했다...

그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지...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혜주에게 도저히 말을 하질 못하고 있다...

나도 스물두살이 된 듯 느껴진다... 여자의 필요성도, 그리고 떨림도 포기한지 오래라고 생각했는데... 혜주는 날 혜주와 동급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같이 더러움에 몸을 몇번이고 담근 남자를 혜주는 사춘기 아이처럼 변하게 만든다... 떨리는 가슴으로 혜주에게 대답을 잇지 못하자 혜주가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한다.

"그럼... 지금 나하고 한 키스도...아무렇지 않은거에요?"

"아니야!... 진짜... 가슴이 떨려서 미치는 줄 알았어...지금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내 심장한테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막 떨려서 손까지 떨려..."

내말에... 혜주가 내 가슴을 바라보더니... 내 손을 자신의 손으로 쥔다... 정말이었다... 긴장이 약간 풀리긴 했지만 혜주와의 키스는 아직도 여운이 남아 있었고, 내 손이 약간씩 떨리고 있었다...

"정말이네..."

"정말이라니까... 이렇게 떨리는...그리고 이게 무슨 키스냐... 뽀뽀지..."

"..."

날 다시 흘겨본다...

"아니...그러니까 키스의 일종이긴 한데... 그래도 정말 키스라고 하면... 막..."

"..."

"아 몰라!! 내가 무슨 열여덜 사춘기도 아니고!..."

"아저씨...그럼... 전... 사...랑.해요?"

"으.응???!"

나도 모르게 혜주의 당돌하게까지 느낀 말과 당혹스럽고 부담스러운 시선에 목소리가 커졌다...

그때...

"아씨!! 잠 좀 잡시다!!...할려면 제대로 하던가... 어디 감질나서..."

갑자기 큰소리에 놀란 나와 혜주는 그대로 자는 척을 하듯 얼굴을 배계에 동시에 묻듯 눕고는 숨을 죽이게 되었다... 잠시 잊었었다... 이 병실이 다인실이고... 구석에 한명의 젊은 환자가 한명 더 나와 같이 쓰고 있다는 걸 말이다...

숨을 죽인 채... 눈까지 감고 있는 혜주의 모습을 실눈을 뜨고 보게 된다...질끈 눈을 감고는... 정말 창피한 듯... 다시 빨개지는 귀에... 나도 모르게 실소를 하게 된다...

"풋..."

"...큭..."

혜주가 내 웃음소리에... 눈을 감은 채... 자신도 미소를 짓고는 금세 급하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이 상황이... 혜주도 떨리면서도 웃음이 나나보다... 입을 틀어막고는 계속 큭큭 되는데... 나도 웃게 된다... 혜주가 손으로 내 가슴을 치며 웃지 말라는 듯 투정을 부린다.

잠시 동안 그렇게 킥킥 되던 우리는...

"진짜!!!! 서러워서 누군 애인 없나..."

라는 남자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아니... 여운을 계속 남기며 우리는 최대한 웃음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그리고... 조금 진정이 된 나는 손을 올려 혜주를 끌어안는다... 이미 가벼운 키스를 할 때부터 내 아랫도리는 오히려 생각과 달리 진정된 상태였기에 나는 혜주의 머리맡에 내 턱을 괴듯 대고는 힘껏 끌어

안았다...

아직... 혜주는 팔을 나와 자신의 사이에 두고 완전한 밀착을 거부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날 밀쳐내진 않는다...

따뜻한 혜주의 몸을 온몸으로 느끼며 삶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행복을 겹칠 수 있게 된 자신을 발견하며 천천히 눈을 감게 된다... 혜주도 내 품에 안긴 채 떨리는 가슴에 쉽게 진정을 하진 못했지만 내가 부드럽게 계속 안고 있자 곤히 잠이 들기 시작했나보다... 피곤했을 텐데... 정말로 피곤 할 텐데... 날 위해 이렇게 고생한 혜주의 작은 어깨를 느끼며 더 꼭 끌어안는다...

혜주의 심장소리가 팔을 통해 내 가슴에 전해지며 나도 잠이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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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보호자분!!"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일어나세요..."

낯선 여성의 목소리에 내 눈이 떠진다...

들려오는 음성의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 눈을 비비려 했을 때... 방해물로 인해 팔을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혜주가 아직도 내 품에 안겨... 어제 잠이든 그대로 곤히 자고 있었다.

고개만 빼 들어 침대 맡에 서 있는 간호사를 보게 된다... 약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는 혜주가 깰까봐 작은 목소리로 간호사에게 말을 건넨다...

"죄송합니다. 여...여친이 어제 저 때문에 너무 고생을 했거든요..."

"김민호씨... 그래도 안 돼요. 병원 원칙상 환자하고 보호자 분이 같은 침대에서 함..."

"알았으니까... 딱 10분만 더 자게 해주세요."

간호사의 큰 목소리로 혜주가 깰까봐 귀를 막으며 말을 끊어버린다... 병원 사정을 누가 모르냔 말이다... 혜주가 깨게 생겼는데...그게 대수라고...

하지만 간호사는 심기가 불편한지... 계속해서 혜주를 노려보고 서 있다...

"정말 죄송해요... 저 죽는 줄 알고 하루 종일 저만 찾아다녀서 그래요..."

"...10분후에 주사 놓으러 올 거니까... 그때까지 깨우세요..."

"예... 감사합니다..."

겨우 간호사가 병실을 나갔다...

얼굴을 침대에 다시 기대며 눕고는 조심스럽게 혜주의 귀를 막고 있던 손을 치웠다. 약간 찡그린... 입구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니 8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 시간에 벌써 일어나 밥을 먹고 치우고도 남을 시간이었는데... 정말로 어제 고생이 심했나보다...

곤히 자고 있는 혜주의 코를 간지른다...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귀엽게 들썩이는... 재밌다...

이번에는 혜주의 유난히 긴 속눈썹을 손가락을 세워 살살 눈썹만 간지르듯 만지기 시작하자... 눈을 찡그리면 고개를 약간씩 흔든다...

계속 만지며 장난을 치자... 혜주의 얼굴이 점점 크게 흔들기 시작한다...

'짝!~~'

"윽..."

눈을 깜빡이며... 손을 뻗어 내 손을 때린 것이다...

손으로 눈을 비빈 후 날 귀엽게 노려본다...

"일어났거든요!..."

"...언제?"

"간호사 왔을 때부터요... 창피해서 눈을 못 떴는데...장난을..."

"큭큭..."

"놔줘요... 일어나게..."

"싫어..."

"왜 이래요... "

나는 더 꼭 끌어안으며 혜주를 놓기를 거부한다.

"도망갈 거 같아서 싫어..."

"안 도망가요... 놔요... 진짜 창피해 질려고 한단 말예요..."

"큭큭큭..."

그제야 손을 놓아주자 날 경계하듯 벌떡 몸을 세워 앉고는 그대로 침대에서 내려간다... 왠지 모를 아쉬움에 그런 혜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게 된다... 그리곤... 내 뒤쪽을 바라보던 혜주가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숙인다... 혜주의 시선이 머물었던 곳을 향해 내가 얼굴을 돌렸을 때... 밥을 먹고 있던 남자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짜증을 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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