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제비꽃
아침 일찍부터 혜주가 밥을 차려주고는 한참을 옷을 고르고 있다.
오늘은 혜주가 처음 복학하는 날이다. 어차피 난 병가로 한동안 출근을 하지 않기에 굳이 아침을 챙겨 먹을 이유가 없었는데도 혜주는 요지부동 아침 6시만 되면 일어나 밥을 차려준다. 날 깨우지 않기 위해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히 손을 움직이며 거실에 누워있는 날 최대한 아껴주고 있었다.
밥을 먹고 있는데 혜주가 흰색 가디건에 속에는 검은색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는 티와 바지는 청바지를 입고 내게 보여주려는 듯 방에서 나온다. 밥숟가락을 들고 그대로 혜주의 옷을 보는데... 예쁜 옷도 많이 사줬는데 왜 저렇게 입은 건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내 멍한 시선에 혜주가 골을 낸다.
"으으응!"
"응?... 아!... 그것도 예쁜데... 왜 그렇게 입고 학교를 갈려고 그래? 2년만인데,,, 이쁜거 많잖아..."
노트를 들고는 적는다... 핸드폰의 문자를 쓰는 건 아직 버겁나보다.
-이게 편해요... 무슨 패션쇼하는것도 아닌데.
"그래도...이왕이면 화사한 치마 입어..."
-무릎위로 올라가는 치마... 안 입은 지 오래돼서...
"잠깐만... 내가 골라줄게!"
밥숟가락을 그대로 내려놓고는 방으로 들어가 이제는 혜주의 옷장이 되어버린 예전의 내 이불장을 열어본다. 참... 사람의 성격이라는 건 옷정리 상태에서도 알 수 있다더니...
원피스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키 재기 하듯 옷장에 걸려 있는 옷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군대도 안다녀왔으면서 무슨 티들을 각을 잡아 놓은 건지... 색깔별로 딱딱 각이 맞춰 놓여 있는 티를 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아래 서랍장도 열려고 허리를 숙이게 되었다. 분명히 짧은 치마도 샀는데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허리를 숙이는데... 갑자기 놀란 혜주가 내게 달려와 내 손을 잡으려고 했다... 이미 반쯤 열린 서랍장에는 두개의 무덤들로 이루어진 브래지어가 병정들처럼 잘 정리되어 줄을 서고 있었다... 브래지어와... 작고 작은 팬티마저 네모났게 접어서 포개놓은... 그리고 오른편에 팬티와 마찬가지로 각잡아 잘 접은 짧은 치마들을 발견하게 되었지만,, 이내 혜주의 손에 의해 서랍장의 문이 닫히게 되었다...
"놀래라... 어차피 내가 다 보고 사준 건데... 뭐가 창피하다고..."
"..."(또 흘겨본다...근데 얼굴이 조금씩 빨개진다...)
"큭... 알았어... 이제 봄도 다 지나갔으니까 짧은 치마 좀 골라 줄려고 했지..."
"으응!..."(고개를 젓는다.)
"음~~ 그럼"
나는 몸을 일으켜 다시 옷이 즐비해 있는 옷걸이를 하나씩 밀치며 옷을 고르게 되었다. 점원들의 안목이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모든 옷들이 전부 혜주한테 어울릴 거 같아는 생각을 하며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혜주가 예쁘니까 이런 결과가 생겼겠지만... 결국 나는 눈을 감고는 다시 처음부터 왼쪽에서 손을 넣어 옷을 넘기기 시작한다.
7번째 옷에서 손을 멈춘다... 행운의 세븐이니...
눈을 떴을 때 꺼내 든 옷은 아이보리색 화사한 원피스였다. 허리 위로는 약간 타이트한 경향이 없진 않았지만 아주 약간의 볼륨감 있는 치마부분이 나름 괜찮다는 생각을 하며 혜주에게 건네준다. 혜주의 표정이 당황스럽게 변해갔다... 하긴 근 1년 반 동안 치마하고는 담 쌓고 산거 같은데... 더군다나 이런 약간의 섹시함과 귀여움이 공존하는 옷을 선뜻 입을 리 없었지만... 나는 한 번 더 옷을 들고 있는 손을 내밀며 혜주에게 강제로 품에 안겨준다.
그리고 다시 문을 닫고 밥상 앞에 앉아서 혜주를 기다리며 하던 식사를 계속 이어갔다.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얼굴만 빼꼼 내민 혜주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화사한 봄 꽃...연한 아이보리 장미꽃을 본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귀엽고 아름다운 혜주를 볼 수 있었다...
볼륨감이 아이보리색으로 인해 더 볼륨 있게 나타나 숨길 수 없는 가슴과 잘록한 허리...치마의 무릎 바로 위에서 끝나는 시점에서 곧게 뻗은 잘 빠진 다리까지... 당장이라도 텔레비젼안으로 들어가 다른 배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정작 본인은 정말 어색한지 자꾸 치마를 끌어내리며 다리를 꼬은다... 하긴 치마라도 혜주가 치마 입는 건 발목까지 내려온 월남치마를 본게 다였으니...
멍하니 숟가락을 든 채 혜주의 자태에 입도 다물지 못하고 앉아 있는 내게 쑥스러운지 손을 앞으로 모아 엄지손가락을 팅켜 다른 엄지손가락을 때리기 시작했다...
내게 점점 다가오고 있는 혜주의 세 번째 버릇이다...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을라면 노트에 글을 쓰던 볼펜을 깨무는 버릇과 함께 요즘 자주 내게 보여주는 나만이 알고 있는 혜주의 버릇 중 하나다...
내 반응을 약간 숙인 고개에 눈을 크게 떠선 조심스럽게 훔쳐보듯 쳐다보는 혜주의 시선에 그제야 밥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어색한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뭐... 나름대로 어울리네..."
"흥!"(혜주가 내 반응에 기분이 상했는지 다시 옷을 갈아입으려는 듯 몸을 돌린다.)
"아니야!... 딱이다!!! 진짜 네가 입어주니까, 옷들이 고마워할 정도로 예뻐!!...그거 입고 등교해라!!"
내 극찬에 혜주가 고개를 돌렸고, 다시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하며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화사하게 웃어준다.
"예전에는 그런 거 많이 입었을 거 아니야. 한동안 안 입어서 그렇지 훨씬 잘 어울려... 그러니까 그거 입..."
"..."(예전이라는 내 말에 혜주가 말을 잇지 않고 잠시 날 바라본다.)
"하옇튼 그거 입고 늦었으니까 빨리 학교 가!"
"..."
"얼른..."
혜주도 시계를 본다... 벌써 8시가 넘었다는 걸 알고는 서둘러 가방을 든다... 하나밖에 없는 운동부나 어울릴법한 검은색 커다란 가방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에 메고는...현관으로 향한다...
"자...잠깐!!"
"..." (서둘러 단 한 족밖에 없는 운동화를 신으려던 혜주가 날 쳐다본다.)
"그,그거 뭐냐... 운동화... 가방... 옷에 안 어울리게 그게 뭐야."
"피~...으응!!"
상관없다는 듯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나는 밥상을 무르곤 그대로 혜주를 따라간다.
"응?"
"나가자. 신발하고 구두 사러..."
"엉응!!"(벽시계를 보며 혜주가 너무 이르다는 듯 얘기를 한다.)
"괜찮아. 역에 가다보면 거기 옷 매장 아침 일찍 열더라. 여학생들도 많이 다니는 거 보니까 전부 있을 거야."
내가 서둘러 나가자 혜주도 어쩔 수 없이 날 따라오게 되었다.
역시 내가 본게 정확했다. 이미 문을 열어놓고 청소를 방금 시작한 듯 보이는 주인에게 혜주에게 어울릴법한 구두와 가방을 골라 구두의 낯설음에 잠시 발을 튕기듯 움직이는 학교에 늦은 혜주부터 보낸 후 나는 각각 스타일이 다른 가방 두개와 구두를 골라 집으로 향했다.
요즘 행복이라는 단어를 나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거의 하루 종일을 혜주와 같이 생활하는 나였기에... 물론 혜주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월급이라는 나와의 관계가 있었기에 오후에 혜주가 매장으로 향한 건 당연했고, 쫓아가려던 날 급구 말리는 혜주였기에 혼자서 혜주가 돌아오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게 되었다. 집에서 홀로 쓸쓸히 주인만을 기다리는 애완동물들은 아마 이런 마음일거다...
혜주의 시간관념은 너무도 철저했다. 점심을 내게 차려주고는 정확히 1시 40분이 되면 옷을 챙겨 입고 매장으로 나간다.
그리고 보미의 전화통화로 혜주가 일하나는 정말 똑 부러진다는 걸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보미와 처음엔 신경전이 있었던 듯 했지만 혜주가 누군가!... 어느새 보미는 혜주의 가장 친한 언니처럼 혜주를 칭찬하고 위하는 모습을 내게 보여줬다. 총 세 명의 인원이 매장을 지켰기에 매상에는 전혀 손실이 없었고, 오히려 날로 번창해 가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매주 수요일마다 업뎃을 하던 홈쇼핑의 사진을 내 몸 상태로 인해 중단한지 이주가까이 되자 게시판에 뜻밖의 쇄도하는 사진 요청을 보게 되었다. 내 쇼핑몰이 여자 누드모델들 사진 전시장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기엔 매장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를 가리는 성격이 아닌 줄 알았던 보미였지만...
새로 들어온 남직원은 뭐가 그리 탐탁지 않은지 절대로 사진을 찍으려 들지 않는 보미였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동안은 혜주와의 신혼(?)을 즐기기 위해 시간을 뺄 수가 없었는데...
거기에 혜주가 있는데 다른 여자의 나신을 찍는 것도 좀 걸리긴 했다...
혜주가 처음 등교하는 오늘이 기회였다. 서둘러 보미에게 전화를 건다.
"나다."
[응...왜?]
"어디야?"
[모텔.]
"뭐? 웬 모텔?"
[왜긴... 어제 오랜만에 나이트 갔다가 한명 물었지...]
"참나... 너 남자친구는 뭐하고?"
[헤어졌어... 근데 왜?]
"어휴...그냥 사진 업뎃 좀 하려고..."
[이제 몸 괜찮은 거야?]
"응..."
[그래? 그럼 3시까지 가게로 갈께... 나 졸려...어제 넘 무리했나봐...]
"참나... 알았어..."
보미의 성격은 잘 알고 있지만... 가끔가다 날 당황하게 만드는 것까진 어쩔 수가 없었다... 싱겁게 전화를 끊고는 지금쯤 강의를 듣고 있을 혜주를 생각하며 미소 짓게 된다.
혜주가 학교를 오랜만에 등교하는데...내가 가슴이 떨려서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그 때문에 혜주가 항상 맞춰놓는 알람을 듣기도 전에 일어나서는 조용히 욕실로 수건을 들고 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역시 혜주도 많이 흥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근 1년 반 만에 복학을 하는 것인데 말이다... 아니 수이한테 전해 듣기로는 2년만의 복학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졌고, 거기에 본격적인 일을 하기 시작한 시간 외에도 반년이라는 시간을 그 작은아빠라는 사람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생들을 돌봤다고 했으니...
이런 행복한 시간이 어디 있겠느냔 말이다... 한참을 혜주가 강의 듣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누워 있었다.
'나라라~~' 핸드폰 알람음에 누운 채 전화기를 눌러 확인한다.
-큰일이에요...개강 시작인데 하나도 모르겠어요.
"하하하하하하하...그렇겠지... 2년 만에 공부하는 건데 아무리 혼자 독학을 한다고 해도... 알바 하느라 시간도 없었으면서..."
혼자 웃고 잠시 동안 혜주의 문자를 바라보고 있는데 또 알림음이...
-아는 사람도 하나도 없고,, 슬퍼요...
"에휴...친구들은 전부 졸업반이니...넌 금세 친구 사귈 수 있을 텐데 뭐..."
꼭 혜주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혼자서 중얼거리던 나는 중얼거리던 말을 그대로 문자로 적어 보냈다.
잠시 후 혜주에게서 답장이 온다.
-당근!!
"크크"
점심은 황제처럼 먹으라는 말이 있다.
역시 혜주도 점심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1시가 조금 넘었고, 이른 아침식사로 요즘 1시만 되면 배가 고파온다...물론 혜주의 음식솜씨가 너무 뛰어나다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긴 하지만,, 혜주가 없는 지금 밥을 차려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귀찮음이 밀려와 몸이 일어나기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빈둥거리며 누워있는데 세번째 문자음이 울렸다.
서둘러 문자를 받아본다.
-냉장고에 반찬 꺼내고, 국은 전자레인지에 넣어 놓은 거 3분만 돌리세요. 설거지하지 마세요! 식사 하셨나 확인할거예요!.
무서운 혜주... 이건 또 언제 다 준비해 놓은건지...
그리고 강의 들으면서 이미 내 행적을 족집게처럼 다 예측하고 있었다니... 실소를 하며 나는 귀차니즘을 떨쳐냈다.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갔고, 냉장고에 순서대로 넣어놓은 반찬을 꺼내 밥상위에 올려놓고는 전자레인지의 시작버튼을 누른다. 밥을 퍼선 가만히 상 앞에 앉아 전자렌지가 다 돌아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전화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혜주가 전화를 할리가 없었기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일어나 거실 바닥에 내려 놨던 전화기를 들어 확인한다.
역시... 오랜만에 삼구가 전화를 걸었나보다.
"왜?"
[참나... 넌 가장 친한 친구가 전화했는데,,첫마디가 '왜'냐?]
"그럼? 밥 먹으려고 준비 다 해놨어 빨리 말이나 해라."
[왜 사진 업로드 안하는 건데?. 야! 너 이렇게 애독자의 맘 몰라주고 자꾸 약속 어길래?!!]
"미친놈... 무슨 애독자냐. 독자는..."
[오매불망 사진만 올라오길 기다리니까 애독자지!]
"그럼 주문이나 하셔... 꼭 주문도 안하는 것 들이 난리야..."
[야! 내가 물건 대주는데... 뭘 주문하냐!]
"크크크...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냐?"
[아! 내일 한국 들어간다. 이번에는 너희 집에서 신세 좀 지자.]
"무.뭐??! 갑자기 한국은 왜?"
[뭘 그리 놀라냐. 처음도 아니면서... 거기 있는 내 세컨이 이번에 결혼한다고 나보고 다시는 보지 말라잖냐...참나...더러워서...]
"..."
[왜? 무슨 일 있어?]
"그.그게... 그냥 모텔에서 지내지?"
[미쳤냐? 친구 집이 떡하니 있는데... 무슨 모텔은...저번이야 그 세컨 때문에 모텔에서 자기도 했지만... 혼자 궁상맞게 모텔이 뭐냐 모텔이!]
"너 여자 잘 꼬시잖아...한 명 꼬셔서 여자랑 같이 모텔에서 자라..."
[평일에 그것도 삼일만 있다 다시 들어올 건데... 너 혹시 누구랑 같이 사냐?]
"..."
[오오!~~ 누구? 보미?? 아니면 새로운 여자??]
"됐고,, 알았어... 들어오면 전화해."
[오!! 진짠가 보네...오케이~~ 내일 저녁에 보자!]
갑자기 식욕이 뚝 떨어진다...종남이가 내 집에서 자고 간게 한두 번도 아니었고, 그게 별로 불편하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는데...
혜주와의 유일한 공간에 갑자기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게 되자 왠지 모르게 친구가 싫어진다...그것도 가장 친하고 유일한 친구인데...
'나라라라라~~'
-아저씨! 아직도 안 먹었죠!! 진짜 혼나요.
혜주의 문자가 다시 왔고, 결국 삐삐 거리는 전자레인지에서 잘 데워진 미역국을 꺼내 밥을 말아 먹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맛이 아마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의 맛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금세 그릇을 비우게 된다.
요즘 나는 혜주인간이 되어간다. 혜주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려면 괜히 귀차니즘이 몰려오고... 그 귀차니즘은 혜주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두 날아가 버리는... 혜주와 같이 있는 공간에서만 힘을 쓸 수 있는 혜주인간이 되어 버렸다... 밥을 먹자마자 상도 무르지 않고 그대로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역시... 내 집이지만 어느새 혜주를 위한 공간이 되어버린,,주인의 부재가 이렇게 쓸쓸해질 수 있다는 걸 느끼며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있다가는 출근을 해도 도저히 적응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충 옷을 챙겨 입고 핸드폰을 챙겨 현관문을 열고 나온다...
'나라라라~~'
-반찬은 냉장고에...안 그러면 상해서 못 먹어요.
뭐.뭐냐... 이건...
등이 오싹해짐을 느끼며 혜주에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혹시 몰카 설치했냐?
-큭큭
-부처님 손바닥안!.
수업을 받고 있는지 짧은 단문의 문장들이 내 핸드폰을 통해 전해졌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 상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놔둔 반찬들을 냉장고에 집어넣고는 그릇들에 물만 담가뒀다. 설거지를 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혜주가 확인한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 매장으로 향한다. 버스를 타고 가는게 보통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걷고 싶어졌다. 이른 오후의 한산한 길거리는 모든 사람들이 이 시간엔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내게 말을 해주듯 혼자 걷기가 어색해진다.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매장으로 향하게 되는 나였다.
거의 도착했을 무렵 매장 앞에서 남자 알바 생이 청소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군~"
"엇! 안녕하세요 사장님. 이제 몸은 괜찮으신 거예요?"
"응! 덕분에. 부지런하네 청소도 다하고."
"예? 하하하...혜주씨가 오고 나서는 가만히 앉아 있질 않아서요...청소라도 해 놔야지 안 그러면 눈치 보여요..."
"...그래?"
"예. 사장님 동생분이라서 그런지... 요즘 좀 힘들어요...하하하하하하"
"..."
아마도 혜주가 내 동생으로 알려졌나 보다...
당연히 보미와의 얘기 중에 내 말이 나왔을 것이고, 아마도 딱 보기에도 나이차가 많아 보인 우리 사이였기에 보미가 분명히 설명하기 귀찮아서 시골에서 올라온 벙어리 동생정도로 둘러 됐을 게 분명했다.
"근데 사장님."
"응?"
"혜주씨... 남친 있다고 하던데, 혹시 보셨어요?"
"...남친?"
"예... 매일 핸드폰으로 문자하는거 보면... 있는 거 같긴 한데... 한 번도 제대로 말을 안 해줘서...아니 글을 안 적어줘서..."
"모. 몰라... 아무리 동생이라도 그걸 어떻게 아냐."
"음~... 진짜 궁금하네요..."
"왜?"
"비록 벙어리긴 하지만 여동생분이 진짜 예쁘잖아요... 그 정도면 말을 못해도 보고만 있어도 말을 걸고 싶어질 텐데...어느 놈이 그런 행운의 주인공인지 궁금해서요..."
"...지금 오군이 나이가 몇이지?"
"저요? 25이요."
"젊구나..."
"젊긴요. 보미 누나가 만날 노계라고 구박만 하는데... 하긴 그래도 힘 하나는 좋다고 하던데."
"힘? 너 벌써 보미랑??"
"예? 뭘요?"
"아. 아니다..."
보미가 알바 생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 냈고, 힘이라는 말에 괜한 오버를 하게 된 나였지만 금세 그럴 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말을 흐리게 된다.
이 오군이라는 남자는 요즘 같은 불경기에 군대를 다녀와 전문대를 졸업하고 마땅히 취직자리가 정해지지 않자 호기심 반으로 내 매장에 취직을 하게 된 사람이다.
당연히 첫 출근을 하곤 보미를 본 후 한눈에 우리 매장이 마음에 들어 지금까지 열심히 일을 해주고 있다. 정확히 말해서는 보미가 마음에 들었을 테고,, 거기에 혜주까지 매장에 나오니 나 같아도 쉽게 그만두지 못할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매장안의 테이블에 앉아 있다.
장부를 보고 있다. 매출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증가해 있었다...그리고 잠시 후 보미가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매장 안에 들어왔다.
어제 광란의 밤을 보냈다는 걸 여지없이 보여주는 듯 짧은 치마에 구겨진 검은색 블라우스와 거기에 구겨진 짧은 재킷까지... 스타킹은 없어진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신지 않은 건지 짧은 치마 아래로 허벅지의 흰 살결이 그대로 보여지고 있었다.
"어!... 자기 벌서 왔네..."
"근데 뭐가 이리 많이 팔렸냐?"
"뭐긴... 나하고 오군 때문이지... 아니다! 혜주가 결정적이네..."
"혜주?"
"전표 봐바... 근 일주일 매출이 거의 이주 매출보다 많을걸..."
"어!... 진짜네..."
"혜주가 일일이 편지까지 써서 물건 발송한다... 그 많은걸..."
"편지?"
"응...거기에 문의 오는 편지들에 전부 자신감정을 솔직히 담아서 다 보내주고...티팬티를 주문하는 손님한테 '여친을 위한 선물이라면 보류하세요. 입던 사람이 아니라면 엉덩이에 너무 껴서 어색해요.'
라고 보내더라...이게 웬 장사 망치는 소리냐 했는데...한 세트 주문하던데. 크크크... 답글로 입던 사람입니다. 라고 적어놓고는... 내가 감상평으로 손님 끌면,, 혜주는 조금은 순진한 편지로 쐐기를 박더라... 처음에는 혜주 편지가
너무 깨끗해서 걱정했었는데... 오히려 그게 대박일 줄은 나도 놀랐지..."
"허~... 그랬구나...그래서 요즘 좀 늦었구나..."
"큭...난?? 걱정 안 해주냐?!"
"너야 뭐... 그나저나 너랑 오군 얼마씩 받지?"
"뭐가?"
"월급..."
"뜬금없이 월급은 왜?,,나야... 200이고... 오군아 너 얼마지?"
"110만원이요."
"음... 월급 올리자... 괜찮지 보미야?"
"뭐?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사장 마음이지..."
"사장은... 이정도로 대박치는데 월급이 너무 적다..."
"진짜?? 나야 좋지만... 얼마줄건데?"
보미의 얼굴에 화색이 돈데... 역시 돈 싫어하는 여자 없다고 하더니...
사실 선물이야 모르겠지만 현금으로는 절대 받지 않을 혜주의 월급을 올려주기 위한 형평성을 바닥에 깔아놓기 위한 내 의도였지만... 이정도의 대박이라면 충분히 월급을 올려준다고 해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다 기분이다!! 50% 씩 인상이다..."
"진짜!~~~ 와 울 자기 통 크다!!!! 호호호호"
"통은 지들이 다 일하면서..."
"그런게 어딨냐. 호호... 근데 우리 사진찍자... 빨리 찍고 나 집에 갈 거야... 피곤...해..."
"하하하... 하옇튼... 알았어 잠깐 기다려..."
보미가 준비를 하려는 듯 재킷을 벗고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다말고 오군을 바라본다.
나는 저번에 쓰러졌을 때 떨어트린 카메라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을 하다말고 보미의 시선을 쫓아 오군을 바라보게 되었다.
"아... 오군아 너 1시간만 나갔다 와라... 아무래도 보미가 좀 그런가봐..."
"예..."
예상을 하고 있었는데... 나가기가 아쉬웠던 오군이 분명했다.
그렇게 자리를 비켜주고 유독 상자에 쌓여있는 재고들을 확인 한 후 차례로 늘어놓기 시작한 나다. 이것저것 고르는데... 역시 내가 봐도 그렇게 끌리는 제품이 아니었기에 재고가 많이 남아 있을 수밖엔 없는 상품들이었다...
"흠... 이전에는 마네킹에 입혀놓고 누가 찍은 거야?"
"오군이. 그나마 인지도 때문에 혜주 오기 전까진 매상 변동이 없었는데... 사진이 별로긴 하더라..."
"응... 우선 이거 입어봐."
이미 알몸이 된 상태로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서 있던 보미에게 완전히 검은색의 불투명 전신스타킹을 들어 건넸다.
익숙한 듯 의자에 앉아 한쪽씩 다리에 넣고는 잡아 당겨 입기 시작하는 보미의 모습은 역시 섹시하고 매력적이다. 출렁이는 인공가슴만 아니라면 진짜 내 스타일이긴 한데...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 보미가 갑자기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자기 욕구불만이냐?"
"응?? 무,,뭐가?"
"하긴... 그렇게 사랑스러운 혜주랑 같이 살면서도 혜주 얘기하는 거 보니까 완전 소중히 대해주던데..."
"참나... 날 뭐로 보고...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자기 아랫도리나 관리하시죠!... 그거 뭐냐?!"
보미의 말에 시선을 내 하반신으로 옮긴다... 이 주책없는 놈은 왜 갑자기 성을 내고 있는 건지... 그제야 여자의 나체로 인해 발기한 내 자신의 물건을 알게 되었다.
"큭큭... 하고싶을 땐 언제든 말하셔~ 내가 있잖아."
"어휴... 됐네요..."
"크크... 이제는 혜주가 있다 이거지?!!...그런데 자기야..."
"응?"
애써 시선을 카메라에 고정하고 있는 날 계속해서 부르는 보미였다.
"자기는 어떻게 참아?"
"뭐가?"
"남자는 더 하잖아... 막 하고 싶을 때... 혜주 말하는거 보니까 아직 이던데...혼자 해결해?"
"..."
"난 하고 싶을 때 참으면 진짜 병 날거 같던데..."
"내가 넌 줄 아냐..."
"내가 어때서? 솔직한 거지 자기야 말로 병나는 거 아니야?"
'병은 무슨... 그냥..."
"그냥?"
"..."
말을 하다 말고 한참을 생각하고 있는 나였고, 무슨 말을 이렇게 뜸을 들이나 하는 표정으로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보미였다.
"됐다...그냥 그래."
"뭔데? 그냥 뭐? 진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더라...뭔데?"
"그냥... 혜주 보고 있으면 내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세요."
대화를 하던 나와 보미는 입구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보미는 불투명이긴 했지만... 검정 전신 스타킹만 입고 있었기에 나는 서둘러 의자에 걸쳐놨던 재킷을 보미에게 던져줬지만,, 정작 본인은 천천히...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당당하게 주워 입기 시작한다.
문 앞에 서있던 남자의 시선이 보미에게 꽂혀서는 미동도 없이 몸이 굳어진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기에 내가 먼저 그 남자에게 용건을 묻게 되었다.
"무슨 일이세요?"
"...예?...아!... 김민호씨 되시죠?"
"예."
"일본에서 물건이 한차 왔는데요. 매일 계단에 내려놓다가 오늘은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왔습니다."
"물건이요?"
"예..."
보미가 재킷의 지퍼를 여미고 나서야 나는 보미의 몸을 가리던 몸을 움직여 남자에게 걸어갔다.
반 정도 내려놓은 상자들이 벌써 산을 이루고 있는 걸 보고나서야... 갑자기 삼구가 생각나게 되었다... 어쩐지 갑자기 전화를 걸더니...
짐을 옮기기 시작한 나와 택배기사는 아직 날씨가 그리 덥지도 않았지만 온 몸을 땀으로 적시게 되었다...
물건을 옮기는 와중에도 기사는 계속해서 옆에 앉아 전표를 정리하고 있던 보미의 노출된 스타킹으로 다리를 훔쳐보기 바빴기에 일부러 헛기침과 노려봄으로 눈치를 줬지만 그 기사는 이와 같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에 감사만 하는지 계속해서 훔쳐보기를 한다.
오히려 보미는 그 아저씨의 시선이 즐겁다는 듯 앉은 자세에서 불편하다는 듯 재킷을 조금 올려 접힌 사타구니에 끼고 앉았기에 기사는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물건을 옮겨줬고, 물건이 다 옮겨지자 내게 사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보미의 앉아 있는 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아쉬워하며 매장을 떠나게 되었다...
"휴...넌 뭐가 좋다고 그렇게 대놓고 보여 주냐?"
"닳는 것도 아닌데... 열심히 일하시는데 이런 거라도 해드려야지..."
"참나..."
"큭큭큭...근데 진짜 몇 번을 넘어질 뻔 한지 알아?"
"그래?."
"응...크크크... 아마 다음부터는 이 시간에 꼭 올걸..."
"뭐야... 벌써 6시가 다 되잖아... 빨리 시작하자..."
잡담하고... 물건을 옮기고 나서 정리를 하고 나니...벌써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기야. 이거 말고 새로 온거 찍어야 되는 거 아니야?"
"아!...그게 좋겠다. 그럼 이것들은... 인기 없는 게 생각보다 많은데..."
"그거야 1 1으로 껴 팔면 되지..."
"응?"
"대형마트에서 잘 하는 거 있잖아... 덤팔이... 우리도 그거 하면 되지..."
"와!~ 자기 진짜 천재다... 그럼 이번에 온것들 중에 껴 파는 거야?"
"응! 우선 정리해보고 조금 인기 없는 제품에 덤으로 껴주면 될 거야... 그것보다 A-2부터 4까지가 메인 상품이었지?"
" 아마 그럴걸."
"가만 보자... 상자가..."
쌓아놓은 상자를 둘러보며 적혀 있는 전표들을 찾아본다. 이리저리 뒤지고 있는데 갑자기 놀란 보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 혜주야?"
"..."
"왜 그래?"
허리를 들어 벽을 이룬 상자너머의 혜주를 볼 수 있었는데 혜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창백해진 채 가슴을 손을 얹고 숨을 헐떡이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상자를 넘어트리며 혜주에게 달려갔고, 혜주의 어깨를 부여잡고 잠시 혜주의 표정을 살피게 된다. 정말로 창백해진 얼굴에... 얼마나 달려 왔는지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는 혜주였다.
"혜주야 . 왜 그래?"
"헉.헉.헉..."
"무슨 일인데?? 왜? 이상한 놈이 쫓아왔어?"
"..."
혜주가 가슴에 얹고 있던 떨리는 손을 들어 밖을 가리킨다. 난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혜주의 악마...그러니까 경찰 소에서 혜주를 나쁜 아이로 내몰며 혜주에게 눈물을 흘리게 했던 작은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고, 곧바로 계단을 뛰어 올라가 양쪽의 골목길을 번갈아 쳐다보며 사람의 인기척을 찾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우선 큰길로 이어진 골목길로 향했다.
잠시 후에 오군을 볼 수 있었다.
"엇!. 끝나셨어요?"
"응.응?? 뭘?"
"촬영이요?"
"아니...그것보다. 혹시 여기로 싸가지 없어 보이는 오~육십 대 아저씨 못 봤어?"
"아니요. 아무도 안지나갔는데요."
"그래..."
"왜 그러세요?"
"아니다... 넌 빨리 매장에 가봐. 혜주랑 보미만 있다."
"예..."
오군을 보내고 나서 난 한참을 더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그 원수 같은 놈을 찾아 헤맸지만... 끝내 비슷한 사람도 찾지 못하고 발걸음을 매장으로 향한다.
막상 만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각오되어 있진 않았지만, 혜주를 괴롭히는 장본인인 그 놈만큼은 혜주가 당한 고통에 비해 작지만 내 손으로 직접 복수라도 해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달려 나왔었는데...
허무하게 매장으로 걸어가게 되자 발걸음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매장 안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옷을 갈아입은 보미가 앉아 커피로 보이는 듯 한 따뜻한 김이 흘러나오기 있는 컵을 양손으로 잡고 있는 혜주의 앞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오군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오군은?"
"보냈어... 혜주가 오군 왔는데 너무 놀라서... 그냥 내가 보냈어."
"그래? 잘했다...근데 문이라도 잠그고 있지..."
"왜? 여기까지 들어올까 봐? 들어오기만 해봐...아주!"
"아주?... 겁이 너무 없어도 문제야... 남자 무서운 줄 모르고 그렇게 나서다가 너 진짜 큰일 난다..."
"큰일은...그것보다 그 변태새끼 못 찾았어?"
"변태?? 혜주가 그냥 변태래?"
"아니야? 그럼 혜주가 왜 이렇게 놀란 건데?"
"...있어...혜주야 그 놈 맞지?"
"..."(고개를 흔든다...)
"아니야? 그럼 취한이야?"
"..."(역시 고개를 흔든다...혜주의 이런 반응은 아마 낯선 위협에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쳐온게 분명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한편으로는 안심이 된다...)
"뭐야? 둘이만 알고 있는 비밀이라도 되는 거야?"
"...혜주야...잘 못 봤을 거야..."
혜주는 온기가 사라지기 시작한 잔을 여전히 부여잡고는 조금 진정이 됐는지 내 얼굴을 바라본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혜주의 모습에서 아직도 떨림이 내게 전해지고 있는 듯 보였다. 내 걱정스러운 눈빛에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은 괜찮다고 말을 하는 혜주가 보였기에 보미만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게 되었다.
가만히 혜주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손을 옮겨 혜주의 커피 잔을 잡고 있는 손 중 하나를 빼내어 잡았다.
역시 떨림이 느껴졌다...
그동안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아직도 손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상처를 손으로 느끼며 떨림마저도 상처가 되어 내게 전해진다. 울컥하는 가슴을 겨우 진정하며 나도 모르게 애처롭게 혜주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보미가 말을 잇지 못하고 가방을 챙겨 든다...
"에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자기가 혜주 좀 달래줘... 내가 있어도 도움이 별로 안 되던데 자기 오니까 그래도 진정이 되나 보네... 그럼 난 퇴근하우~~"
자리를 피해준 보미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잡고 있는 혜주의 손에 힘을 준다...
떨림을 내 손으로 덮어버리려는 듯 무의식중에 힘을 줬기에 혜주가 아픔을 느끼는지 어색한 미소 속에 찡그림이 내 눈에 들어온다.
"미. 미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게 여전히 미소를 지어주는...
내 표정에서 너무도 큰 걱정을 읽었는지 혜주는 애써 밝은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눈에 보이는 그런 어색함이 날 더 씁쓸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떨리는 손을 하면서...
"혜주야... 이럴 때는 강한 척 할 필요 없는 거야... 네가 아무리 누구한테 의지하는 게 어색하다고 해도... 내가 왜 여기에 있는데..."
"..."
"내가 죽으려고 했을 때... 죽지 못하게 막은 건 아마 널 지켜주라고 하늘에서 기회를 준거라는 생각이 들어...그러니까... 혜주가 겁을 먹었는데 그걸 숨긴다면 그건 나한테는 더 큰 죄를 짓게 만드는 거라는 거 몰라?...내가 힘도 없고, 그렇다고 널 정말로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노력하잖아... 그거 모르니? 정말 오빠처럼... 아빠처럼 널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렇게 나한테마저 감정을 숨기면... 나 힘이 빠진다... 정말로 네가 2년이라는 시간동안 얼마나 혼자 힘들게 살았는지 알면서도 조금은 섭섭하고 나도 힘들어져..."
혜주의 손을 잡고 차분한 목소리로 평소처럼 말을 이어간다.
흥분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목소리를 깔지도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속마음을 혜주에게 전해 아직도 감정 표현에 서툰 혜주를... 그냥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말을 이어나간다. 내가 처음 혜주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약간은 경계를 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는 진실함을 들려줬기에 이번에는 내 차례라는 생각을 하며 혜주의 잠긴 마음을 풀기 위해 노력중이다.
그런 내 진심이 전해졌는지...
혜주가 자신도 모르게 껌뻑이는 눈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내 말을 들으며 점점 굳어진 표정으로 변한 혜주의 얼굴은 내 고백과도 같은 말과 함께 무의식적인 내면의 공포와 숨어있던 외로움을 분출하는 듯 흐른 눈물은 볼을 타고 턱을 지나 옷에 떨어지기 시작한다.
작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처럼 혜주의 옷을 적신 눈물방울의 부딪침에 그제야 자신이 눈물을 흘린다는 걸 알았는지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연신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난 혜주의 잡은 한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혜주는 한손을 번갈아 양쪽 볼을 닦으며 부끄러운 듯 천천히 어색한 미소를 띠려 노력하기 시작했지만...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눈물을 멈추려는 듯 혜주는 시선을 천장으로 향하며 애써 고개를 젖혀보지만... 멈출 리 없는 눈물처럼 계속해서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게 눈물을 보이는걸 아직도 어색해 하면서도... 한번 분출된 감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듯 혜주는 손으로 계속 눈물을 닦았고, 끝내 얼굴에선 어색한 미소가 사라진다.
포기한 듯... 고개를 내려 날 쳐다보는... 혜주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려왔지만... 내 앞에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처음인 혜주였기에... 아린 가슴을 참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색함과 창피함을 느끼는지 혜주가 고개를 숙이며 잡힌 손을 풀려고 한다...
"바보야... 네가 왜 바본지 알아? 그렇게 참기만 하면... 정말로 속병 들어서 몸도 망가진다는 걸 왜 몰라...속병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흑...흑..."
"무서운걸 인정할 줄 알아야 사람이지... 무조건 참기만 하면... 지금 네 나이가 몇인데 아무리 속 깊은 아이라도... 내 앞에선 언제나 어린아이야 넌..."
이제는 혜주가 울먹이기 시작한다...
강한 척... 자존심 센척... 그리고 삶의 무게를 혼자서 다 짊어진 척을 하던 혜주는 더 이상 내 앞에 없었다...
스물두 살이라는 나이에 너무도 많은걸 감당할 수밖에 없었고, 강요당했고,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한 채 살아왔던 혜주였기에... 한번 깨진 가면은 쉽게 돌아오질 않았다...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러내리며... 울먹이던 혜주가 잡힌 손을 뿌리치려 반항을 한다...
이런 혜주의 행동은... 예상 못했지만 곧 그 의미를 혼자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도... 예전 내 매장에서 사라지듯 나갔을 때처럼...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들켜버렸다는 창피함이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거기에... 사라진 그 후에 작은아빠에게 당한 수모와 공포를 얼마나 참았는지 그전보다 더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내게 들켜버린 듯 빠져나가기 위해 애를 쓴다...
이런 혜주의 행동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느꼈기에 난 잡은 손에 더 힘을 준다...
내게 잡힌 손을 빼내지 못하자... 남은 손으로 내 손을 잡고 풀려 애를 쓴다... 이제는 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손에 힘을 줘 내 손을 풀려는 혜주의 얼굴에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듯 보였다. 눈물은 계속 뺨을 타고 예쁜 옷을 적시고 있었고,, 이제는 울먹임에서 통곡으로 변하기 시작한 혜주의 쉰 목소리에 가슴이 베이는 듯 한 고통이 내게도 전해졌다...
고개를 흔들며 내 팔을 손으로 때리는 혜주는... 내 눈에 너무 애처롭게 보였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혜주의 팔을 당겨 품에 안고는 혜주에게 받은 것에 비해 너무도 작은 행동인... 등을 토닥이며 끌어안는다...
내 품에 안겨 얼굴을 내 옷에 묻고는 한참을 혜주는 울었다...
소리를 참으려는 듯 입으로 내 옷을 물고는 절규 같은 혜주의 침묵속의 눈물이 옷을 뚫고 내 가슴을 적시며 날 더 아프게 했다...
한참동안 내 심장소리를 들으며 울던 혜주가...흐느낌을 멈추기 시작한다.
천천히... 이제는 다 쏟아 냈는지 눈물이 마르기 시작한걸 알았기에... 잡고 있는 손에 힘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혜주는 내 품에 안겨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이처럼 내 품에 안겨 잠이 든 혜주의 머리맡에 코를 대어 향기를 맡듯 기댄다... 향긋한 제비꽃과 같은 내음이 내 코를 머리카락으로 간지르며 겨우 진정된 듯 고르게 숨을 내쉬는 혜주의 숨결을 느낀 채 나는 그대로 혜주를 안고 있다... 이제야 난 눈물을 지을 수 있었다...혜주 앞에선 난 버팀목이여야 했기에 눈물을 흘려선 안 된다...
행여나 혜주의 머리에 눈물이 흐를까봐 손으로 연신 닦아내며 혜주로 인해 참았던 감정의 복받침을 애써 짓누르려 애를 쓴다...
이제는 완전한 어둠이 매장을 덮어 오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있는 형광등만 켜놓은 상태였기에 을씨년스러울 정도의 적막함이 덮어오기 시작했지만, 혜주의 새근거림이 모든 것을 물리치듯 전혀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은 매장 안이었다. 두시간여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잠에서 깨어 깜짝 놀란 혜주가 서둘러 내 품에서 떨어졌다...
침까지 흘렸는지...
손으로 입을 닦으며... 부운 눈으로 날 바라본다... 겨우 평점심을 찾은 혜주는 내게 자신의 감정을 들켰다는 것이 이내 부끄러워졌는지 앙탈을 부린다...
"너무 곤히 자서..."
"..."
"괜찮아졌어? 이제 그만 갈까?"
",,,,,"
혜주의 볼이 빨갛다...그러나 날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 혜주였다.
천천히 메고 있던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필기를 시작했다...
-아저씨... 나빠요...
"응? 내가 왜?"
-왜 사람을 울려요...
"미안..."
-창피하잖아요.
"그래도...이제는 안 떨잖아... 아까 너 떠는 모습 보기가 너무 힘들었어..."
그제야... 자신의 볼펜을 들고 있는 손을 내려다본다...
신기한 듯... 떨림이 멈춘 손을 보던 혜주가 고개를 들어 날 빤히 쳐다봤다...
"..."
-변태...
"벼...변태??"
-왕변태!!!!!!!
느낌표 까지...
갑작스런 혜주의 앙탈에 당황하며 혜주를 바라본다...기껏 속에 담아뒀던 아픔을 울음으로나마 풀어주려고 노력했던 날... 갑자기 무슨 변태라는 단어로 몰아 붙이냔 말이다...
"내가 왜 변태야..."
-저 껴안았잖아요!
"그...그거야..."
-책임져요!
"채...책임??"
-당연하죠... 처녀 몸을 껴안았으면...
"책임이야... 오히려 나야 고맙지만..."
"풋...큭큭큭..."
정말로 날 변태라고 놀리며 재밌어하는 혜주였기에 나는 기꺼이 변태가 될 용의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혜주의 글은 그럴 분위기를 말하고 있지 않았다. 한참을 날 바라본다... 고마움을 담은 눈빛으로 말이다... 그 시간은 길어졌기에 방금 전 엉뚱한 생각을 했던 내가 먼저 시선을 피하게 되었다.
혜주가 다시 글을 적어 내게 보여준다.
-아저씨... 저랑 내일 여행 갈래요?
"여행?"
-예...갑자기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겼어요...
"그래... 어차피 정식으로 출근하면 이제 놀러 다니지도 못할 텐데... 까짓것 내일 하루 더 보미한테 가게 맡기지...근데 너 학교는? 오늘 처음 등교했으면서 벌써 땡땡이 칠 생각이냐?
-아니거든요!. 내일은 한 과목 있는데 다음 주부터 강의 시작한다고 했어요.
-그리고...정말 고마워요...
혜주에게 고맙다는 말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혜주를 안았을 때보다... 더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한바탕 눈물을 쏟아 부은 혜주는 먹었던 겁도 다 사라졌는지 가방을 챙겨선 나보다 앞서 매장을 나선다...
아니... 겁이 사라진 게 아닌... 내가 옆에 있다는 믿음으로 인해 과감하게 행동하는 듯 보였다.
막상 집에 들어갔을 땐... 밀려오는 쑥스러움에 혜주가 도망가듯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고 거실에 이불을 폈다... 그리고 대충 세수만 한 나는 깔아놓은 이불위에 눕는다. 뭐가 그리 창피한지 혜주는 방안에 들어가서 전혀 나올 생각도 없나보다...
누워서 멍하니 틀어놓은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핸드폰을 집어 들고 확인을 하는데...
혜주다...
바로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화를 건 혜주였다.
조용히 혜주의 숨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온다...
"안자?"
"..."
"에고 우리 울보혜주 얼른 자야지..."
"..."
"..."
"..."
"..."
방해되는 텔레비전을 꺼버린 나였고, 그저 서로의 고른 숨소리만이 핸드폰을 통해 대화하듯 주고받기 시작했다.
어떤 말보다... 혜주의 편안한 숨소리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더 많은 감정과 얘기를 내게 전해주는 듯 느껴졌기에 나도 조용히 혜주의 숨소리에 맞춰 숨을 쉬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이 감겨왔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혜주의 숨소리는 잠을 자고 있는 듯 들려왔다... 혜주의 숨소리를 듣고 있자... 나도 잠이 밀려왔다...
조심스러운 소리에 눈을 뜨게 된다...
항상 맡던 국냄새 아닌 소리에 눈을 뜨게 된 나다... 하품을 하며 고개만 들어 주방을 보는데... 짧은 면반바지 아래로 늘씬하고 잘 뻗은 혜주의 곧은 다리가 내 시선에 잡혔다. 볼록한 엉덩이와... 저 반바지를 정말로 입을 줄 몰랐다...꼭 사각 티처럼 작은 사이즈로 자신의 몸에 대보더니 고개를 흔들던 혜주였는데... 흰색 반팔에 짧은 반바지차림의 혜주는 이제야 이 집안에 완전히 적응해 보이는 모습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다.
저 곧게 뻗은 허벅지를 한번만이라도 만져 봤으면...
몸을 세워 다시 하품을 하며 혜주에게 다가간다.
김밥...
여행을 가자고 하더니... 몇 시부터 일어나 준비를 했는지 벌써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는 김밥 산을 보게 되었다.
재료는... 김치에 계란에 시금치... 거기에 소시지가 다 였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김밥은... 정말로 처음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한 줄을 통째로 들어선 입에 물었다.
"헉!...으응~!"
손으로 내 손등을 때리는...날 눈을 흘겨 째려보며 혜주는 먹던 김밥을 달라는 듯 손을 내민다...
한입이 베어진 김밥을 어쩔 수 없이 혜주에게 건네자 칼로 한 줄을 더 토막을 내어 접시에 같이 담아 내놓는다...
그리곤 다시 김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저걸 누가 다 먹는다고...
입에 넣고 먹는데... 진짜 맛있다... 이런 허접한 재료도... 혜주의 손을 거치면 정말로 맛있는 김치김밥이 되나보다... 어느새 다 비워버린 접시에 아쉬움을 느끼며 난 다시 김밥 한 줄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칼을 들고 있는 혜주의 눈빛에서...날 애완동물처럼 사료 앞에서 '안 돼'라는 말을 읽을 수 있었기에 꼬리를 내리고 세수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던 나는 어제 목욕도 하지 않았다는 걸 몸으로 느끼며 아예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샤워를 다 마치고... 수건을 찾는데... 항상 혜주가 걸어놓던 수건걸이에 수건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수건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그냥 티에 얼굴을 닦으려고 티를 집어 들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콩콩콩...'
"나.나 샤워 했는데..."
"어엉!"
"수.수건 없어..."
'콩콩...'
잠긴 문을 열자... 좁은 틈사이로 혜주의 손이 보였고 수건이 들려 있었다. 새 수건을 꺼내 내게 건네주는 혜주였다.
저 문을 확 열면... 혜주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지만... 즐거운 여행 전에 못 볼걸 보여 줄 자신이 없었기에 나는 다 닦고는 다시 옷을 입고 나왔다...
================
응봉산...
기껏 혜주가 날 이끌고 간다는 여행의 목적지가 응봉산이었다... 평소에도 운동하기 싫어하는 나였는데 갑자기 무슨 산이란 말이냐... 씩씩하게 걷는 혜주의 발걸음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보이지 않는 목줄에 매달려 나는 혜주의 뒤를 쫓아가게 되었다. 정말 10분이 1시간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여럿 보내곤 혜주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뭔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나도 고개를 들어 혜주의 시선을 쫓는데...
샛노란 개나리가 만발한 돌담 위를 볼 수 있었다...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은 혜주의 시선은 개나리의 화사한 노란빛보다도 더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길을 따라 산행과도 같은 걸음을 옮기던 혜주가... 자신도 많이 힘든지 숨을 헐떡이며 갑자기 주의를 두리번거린다...
그리곤 길을 찾았는지 서슴없이 다시 걸어가기 시작한다.
영문도 모른 채 혜주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혜주가 길을 벗어나 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왕래가 뜸해 사라진 길인 듯 주위와는 층이 져서 조금은 풀이 자라 그냥 모르고 지나칠 길을 따라 혜주를 쫓아가기를 근 10여분이 지났을 쯤... 혜주가 가만히 서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내게 미소를 짓는다...
화사한 미소를 쫓아 혜주에게 다가가던 나는 그제야 혜주의 주위에 여기저기에 혜주가 좋아한다는 제비꽃들이 즐비하게 많이 피어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분홍색의 여러 제비꽃들에 둘러싸이듯 서 있던 혜주가 꽃을 피해 가져온 돗자리를 펼쳐선 가방에서 반합 통을 꺼내 앉는다...그리곤 나보고 빨리 와서 앉으라는 듯 돗자리를 손으로 귀엽게 두드린다...
음식을 풀어 놓으며 삼단 반합통 중 한통의 김밥을 내 앞에 꺼내 놓았다.
이런 외진곳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나는 궁금증을 뒤로하고 우선 혜주 앞에 앉았다. 내게 젓가락을 건네곤 서둘러 자신도 젓가락을 꺼내선 내게 먼저 김밥을 하나 들어 입에 가져다 댄다... 내가 받아먹은 후에서야 혜주 자신도 먹기 시작한다...
김밥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어딘지 모를 숙연함에 쉽게 말을 걸지 못하게 된 나다...
연신 제비꽃들을 바라보며 이유모를 미소도 짓고는...김밥 하나를 먹고는 잠시 또 숙연한 표정으로 변하기도 하는 혜주의 변화무쌍한 표정에 압도당했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아침겸 점심식사는 혜주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김밥을 다 먹고 나서도 혜주는 제비꽃에서 시선을 때지 못한 채... 그렇게 한동안 말도 없이 감성에 취해 있었다...
그리곤 엉덩이를 가볍게 털고 일어나서 제비꽃들이 유독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쪼그리고 앉아 찬찬히 그리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은은한 표정을 하곤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는 혜주였다.
제비꽃을 정말로 좋아하는지... 삶에 치여 살면서도 이런 비밀 장소까지 만들어서 올 정도로 좋아하는 꽃이라니...이런 혜주의 의외의 모습에 신기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였다.
내가 알고 있는 아름다운 혜주는 이상하게 꽃과는 매치가 잘 되질 않았다. 신선한 반찬 재료를 보며 웃음 짓는다면 모를까...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있던 혜주가 눈을 비빈다...
울었나보다...내 시선을 느꼈는지 혜주가 다시 내게 미소를 지어준다...그리곤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글을 적기 시작했다.
-여기 데려온 사람은 아저씨가 처음이에요. 수이한테도 안가르켜 줬는데...
"그래? 영광이네..."
-당연하죠... 제비꽃 예쁘죠?
"응... 정말로 제비꽃 좋아하는구나..."
-여기 제 아빠하고 엄마가 있는 곳이거든요...
"..."
갑작스런 혜주의 말에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에 무슨 엄마와 아빠가 있다는 말인지... 선뜻 이해를 못한 난 혜주를 빤히 쳐다보게 되었다.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던 혜주는 모든 것을 말하려는 듯 멈춘 손을 움직여 필기를 이어나갔다.
-울 엄마, 아빠가 서로를 너무 사랑했나봐요. 아빠 돌아가셨을 때... 화장한 엄마의 재가 들어있는 목걸이를 찾을 수 있었거든요...참... 죽은 사람 뼛가루는 무서웠을 수도 있는데...
"..."
-그래서 아빠도 화장시키면서 작은아빠 몰래 가루를 조금 훔쳤어요... 작은 아빠가 엄마랑 같은 곳에 뿌려야 된다고 강에 뿌리려고 했거든요...우리한테는 상의도 없이 흔적도 찾지 못하게 말이에요...
"..."
-여기에 같이 묻어 드렸어요...비록 한줌도 안 되는 재지만... 유일하게 이것만 무작정 들고 작은아빠 집에서 나오긴 했는데요...
일하면서 매일 쫓기듯 도망 다니는 게 아빠하고 엄마한테 걱정시켜 드리는 거 같아서...이 년 전에 뿌려드릴 만한 마땅한 곳을 못 찾아서 막 헤매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제비꽃이 너무 예쁜거에요. 그래서 더 생각도 안하고 여기다 묻어 드렸죠...
제비꽃 정말로 예쁘죠? 아빠 엄마 같이 묻어드리고 나니까... 신기하게 여기 제비꽃들이 더 많아졌어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혜주의 표정은... 내 어휘력으로는 도저히 뭐라고 표현을 할 수 없다... 다만 그 표정에는 이 장소엔 분명히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제의 내 진심을 받아들인 혜주였기에... 이 소중한 장소마저 내게 보여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니... 혜주가 내게 주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물질적인 어떠한 것도 해줄 수 없는 혜주였을지 모르지만...그 어떤 억만금의 선물보다도 내겐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선물이었다.
혜주의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이 순간만큼 소중한 시간은 없을 듯 느껴졌다...
더 이상의 대화는 우리에게 필요 없었다... 혜주가 어색하게 손을 내밀며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손을 잡고 숲속 한가운데일지도 모르는 곳에서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비꽃만을 바라보게 되었다... 혜주는 어제와는 달리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꼭 제비꽃들과 대화를...아니 엄마, 아빠와 즐거운 얘기를 나누는 듯 간간히 얼굴에 미소를 띠며 제비꽃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산을 내려오던 혜주가 정자를 향해 달려간다...
몇 분의 어르신들이 정자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혜주가 웃으며 남은 반합 통을 꺼내 놓는다... 여길 올 때마다 혜주는 이런 일을 반복했나보다...
왜 저렇게 많은 김밥을 쌌는지...그리고 왜 곧바로 산을 내려가지 않고 이렇게 돌아서 내려오는지...
이 산을 주로 애용하시는 분들처럼 보인 어르신들도 비록 몇 가지 재료가 들어가지 않은 김밥이었지만 정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재료가 들어가 있는걸 알고 있는지 너무도 맛있게 전부를 비우셨다.
아마도 이 산에 허락 없이 엄마와 아빠의 거처를 마련한 속죄를 하려는 듯 혜주는 연신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터줏대감처럼 보이는 이분들에게 보리차까지 컵에 따라 드린다...
지친 몸을 이끌고 당장이라도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혜주는 굳이 매장으로 날 끌고 간다...
피곤함이 머리꼭대기까지 차 있었지만... 오늘 내게 자신을 보여준 혜주였기에 복종하듯 혜주의 손에 이끌려 매장으로 향하게 된 나다...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는데... 매장 앞에 낯익은 여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혜주가 내 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혜주도 알고 있는 심대리였다...정작 이 오해를 풀지 않은 나였다는 생각이 들었고 후회가 된다... 아마 혜주는 이 여자와 내 사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혜주를 점원처럼 불렀고, 거기에 퇴근하라는 강요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손을 놓는 혜주를 바라보던 나는 심대리에게 우선 인사를 건넸다.
"아.안녕하세요."
"어디 다녀오시나봐요..."
"예?...예...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김대리님 좀 만나려고요. 저번에도 그렇고...오늘도 저 한참 기다렸어요..."
"저요?"
"예...그런데... 이분이 혜주신가 봐요..."
"예?? 혜주를 어떻게..."
"저번에 병원에서... 애타게 찾으셨잖아요...이 직원분이 혜주씬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네요..."
"아!...인사드려 혜주야... 여긴 나랑 같이 일했던 심대리님...여긴 혜주가 맞고요."
서로를 인사를 시키는데... 여자의 감인지... 혜주가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며 어색한 인사를 한다. 심대리는 간단히 목인 사를 하고는 다시 시선을 내게 향했다.
"바쁘세요?"
"예? 아니요. 이제 매장에 가보려고 하는데 잠깐은 괜찮습니다."
"그럼 저 술 한잔만 사주 세요..."
"예?? 술이요?"
나도 모르게 혜주를 쳐다보게 되었다. 심대리가 많이 힘들다는 건 수척해진 얼굴로 알 수 있었고, 간단한 술 한 잔 정도는 위로차원에서도 괜찮을 거 같았지만,, 지금 내 옆에는 혜주가 있었다...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는 나였고, 혜주가 날 심대리에게 밀듯 손을 젓고는 가볍게 미소를 띄워준다... 그리곤 그대로 매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분명히 기분이 안 좋을 텐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매장 입구를 바라보는데 심대리가 내 표정이 거슬리는지 약간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예쁘네요..."
"예?"
"혜주씨 예쁘다고요..."
"..."
"행복하세요?"
"..."
이런 어색한 분위기는 정말 싫다... 비록 내가 내면적인 큰 변화를 겪었지만... 그건 혜주와 혜주에 의해 연관된 사람들에 대한 국한되어진 변화였지... 이런 분위기까지 자발적으로 끼어들긴 아직도 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쉽게 내 사생활을 말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기에 대답을 하지 않게 되었다.
"김대리님은 행복해 지셨군요..."
"..."
"부럽네요... 정말 술이나 한잔 사주 세요..."
"다음에 하면 안 될까요?"
"다음이요? 다음이라..."
말끝을 흐리는 심대리의 표정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 여자가 큰일을 저지른다고해도...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혜주가 본 후가 아닌가...
이 여자에게 괜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혜주에게 미움이라도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마지못해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확인해야 했다...아까 오늘도 한참 기다렸다는 말은 이전에도 날 기다렸다는 것인데... 혜주가 미처 보지 못한 괴한이 혹시 심대리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가볍게 한잔만 하시죠... 지금 시간도 이른데..."
"그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