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의무
잠이 언제 들었는지... 나는 조용한 어둠과 함께 손에 느껴지는 따뜻함에 눈을 겨우 떠서 손의 정체를 확인하게 되었다. 거칠지만... 어느 누구의 손보다 따스하고 가냘픈 혜주의 손이 내 손에 잡혀 있었다.
고개를 들어 혜주를 보는데... 환자용 침대보다 반칸이나 낮을 법한 간의침대에 혜주가 누워 손을 침대로 올려놓고는... 내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새근대며 잠을 자고 있는 혜주의 얼굴을 한참동안 쳐다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려놓고 팔을 머리에 괴는 혜주의 평온한 모습을 감상하기 시작했고, 약간씩 움직이는 혜주의 모든 움직임이 내 눈에는 귀엽게 보여지고 있었다.
내가 사준 추리닝 한 세트를 깨끗이 빨아서 얼마나 입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혜주의 옆 라인을 감상한다.
여전히 풍만한 가슴에... 거기에 많은 고생이 있었는지 더 가늘어진 허리가 가슴을 조금 애리게 했지만... 내 시선은 팔목에 머리를 대고 누워있는 혜주의 가슴에 고정한 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게 된다. 지퍼가 반쯤 내려간 분홍색 추리닝의 내 시야에 잡히는 단 두개의 글자 'VE' 사이로 보이는 혜주의 나시와... 그리고 그사이로 무덤을 이루듯 겹쳐진 가슴의 모양이 그대로 보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환자라고는 해도... 이런 혜주의 몸에 반응 안할 남자가 있을까?...
천천히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리게 되었다... 더 보고 있다가는 내 상태를 망각하고 그냥...
떨리는 손으로 지퍼를 올려 주려고 하는 내 이성과는 달리... 천천히 손이 내려가 혜주의 벌려진 추리닝을 더 벌리는 행동을 하게 된다. 내 손길은 숨을 고르게 쉬던 혜주의 숨소리에 맞춰 천천히 벌려진 틈새를 잡고 열기 시작했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혜주의 끈나시가 아닌 아마도 수이의 것인지... 약간은 큰 크기로 인해 쉽게 가슴의 겹침과 보이는 스물둘의 탄력 있는 살결은 내 침을 삼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손을 놔야 하는데.
천천히 더 벌리게 된다...
브래지어도... 내가 사다준 순수한 빛깔의... 약간은 작은지 가슴의 모임이 더 크게 보이며
그리고...
혜주의 약간은 선 붉은빛이 도는 작은 유두...
의 시작되는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숨을 죽이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아무리 여동생으로 생각하기로 했지만... 혜주의 모습은 내 여동생으로 여기기엔 너무 내 가슴속에 들어와 있나보다...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느껴지는 시선에 혜주의 가슴에서 얼굴로 내 시선을 옮겼을 때... 어둠 속에서 날 의아한 듯 쳐다보고 있는 혜주의 눈빛에... 그만 몸이 굳어졌고... 그제야 내가 침대에서 얼굴을 많이 빼내어 혜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혜주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다... 그리곤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고,, 눈을 흘기며 날 귀엽게 노려본다...
"아...아니 난 잘 자나 해서..."
"풋~~"
웃음을 지으며 혜주가... 손을 올려선 침대를 짚어 갑자기 침대위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난 반대방향으로 몸을 옮겼고, 침대 위에 올라온 혜주가 내 허리를 잡고는 천천히 내 위에 올라탄다...
이...이런 일은 생각은 해봤지만... 순수한 혜주가 이럴 리가 없었는데... 50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갑자기 걱정이 됐지만... 지금 그런 잡생각보단 몸이 먼저 반응을 하고 있었다. 혜주가 올라타 탄력 있는 허벅지와 엉덩이를 느끼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는 자지로 인해 나도 모르게 혜주의 얼굴과 사타구니를 번갈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고 있는데... 내 위에 있던 혜주가 상체를 세워선 추리닝의 지퍼를 끝까지 내렸고, 벌려진 추리닝사이로 헐렁한 끈나시윗단 위에 보이는 동그랗고 모아진 혜주의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바지는 벗지 않은 채... 누워 있는 내 자지에 연신 엉덩이를 흔들며 자극을 하기 시작한다...
"으~~~~윽...윽..."
장장 50일 이상이라는 시간동안 금욕생활을 했기에... 금세 사정할 기운이 맴돌았다. 혜주가 내 위에서 몸만 흔들고 있는데...
유과장과 질퍽한 정사와 함께 두 번의 연속적인 삽입에도 끝내 끝까지 가지 못했던 나였는데... 혜주가 단지 중심을 비벼주는 행동만으로 금방이라도 사정할 기세였다.
"응!!으으응~~!!"
혜주가 내 가슴을 누르곤 날 부른다...
당장 넣어달라는...게 아닌... 걱정스러운...
눈을 뜨게 되었다...
바로 옆에서 날 내려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깨우는... 그와 동시에...
팬티가 축축해지는 걸 느끼게 되었다...
"으응!!"
신음소리도 뱉어내지 못하고... 나는 입을 꽉 깨물고는... 아랫도리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다행히... 내 물건의 형태로 인해 유심히 보지 않는다면 그렇게...티는 안 나는...하지만 내 이마의 식은땀과 벌게진 얼굴은 충분히 혜주를 걱정시킬 만 했나보다...
"꿈이었구나...휴..."
"응??" (날 내려다보는 혜주가 노트를 들어 글을 적는다.)
- 아저씨도 악몽 꿔요?
"아...아니... 아니야... 그냥..."
-깨워도 잘 일어나지도 못하던데.
"그랬구나... 혜주야...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혜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날 부축하려는 듯 내 팔뚝의 아래로 손을 넣으려고 했고, 난 혜주의 손길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야... 나 혼자 다녀올게..."
"괜찮다니까..."
"네가 엄마냐!... 가만히 앉자 있어!..."
괜히 혜주에게 화를 내곤...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병실 안에 있는 화장실로 향하게 되었다...
행여나 환자복은 다행히 젖지도 않았는데도 혜주에게 들킬까봐 침대를 빙 돌아서 화장실로 가게 되었다...
33살의 나이에 몽정이라니...서둘러 하의를 벗고 찐득거리는... 팬티를 빨아선... 마땅히 숨길 장소가 없었기에 그냥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곤 몸에서 냄새라도 날까봐선 몇 번이고 씻고 환자복을 입게 되었다...
괜한 의식으로 헛기침을 하며 침대에 눕는데... 혜주의 웃음을 보게 되었다...
저 웃음의 의미가...
나는 창피함에 돌아눕고는 벌써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
병원에서의 퇴원은 생각보다 이틀이나 지나서 할 수 있었다.
혜주가 없는 동안 내 건강은 내가 느꼈던 것 보다 훨씬 나빠졌었고, 한동안 집에서 휴식을 취해야만 한다는 의사선생과의 조건에 약속을 하고나서야 퇴원을 할 수 있었다. 그 조건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물론 혜주였다. 날 정말로 극진히 모시듯 간호하는 모습에 의사도 혜주에게 간호사 시험을 보라는 권유까지 했을 정도니 말이다.
나는 혜주에게 했던 협박성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혜주와 집이 아닌 쇼핑센터로 향한다.
혜주는 강한 거부감을 표력하면서도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알았는지 애써 날 부축하며 같이 걸어줬다. 맨 처음 나는 혜주의 옷을 사기 위해 캐주얼복 전문 층인 3층으로 향한다.
"혜주야 옷 좀 골라봐..."
혜주가 내 말에 마지못해 잠시 두리번거린다... 이 많은 매장 중에 선뜻 어디로 발걸음을 옮기지도 못한 채 서서 먼 산 바라보듯 구경하고 있는 혜주의 모습에 기가 찼지만 한번의 기회를 준다. 역시... 기껏 고른 게 폭탄세일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는 가판대에서 고른 3000원짜리 티 한 장이다...
"풋...크크크... 참 너답다고 해야 하나..."
내 웃음소리에 혜주가 얼굴이 조금씩 귀엽게 일그러진다...
천상 스물두 살의 처녀인데... 나는 혜주의 손을 잡아채선 걸어가기 시작했다... 티를 끝내 손에 놓지 않고 내게 이끌려 오는 혜주는 내가 어느 매장에라도 들어가려는 시늉을 하면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걸음을 멈추기 일쑤였다. 이번엔 내가 혜주를 인상을 쓰며 흘겨본다... 내 표정에 고개를 숙이는 혜주의 빈틈을 노려 그대로 바로 옆 매장으로 끌고 들어간다.
혜주가 발걸음을 멈추려 했지만 이미 혜주의 몸은 매장 안에 들어와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예...여기 제 동생 옷 좀 사주려고 왔는데요."
"예?? 아~~ 어떤 걸로 원하시나요? 정장도 있고, 바로 옆에 캐주얼도 있는데요."
"다요..."
"예??"
점원이 내 말뜻을 이해 못하고 다시 되묻는다.
"다요. 지금 제 동생이 이민 온지 얼마 안대서 옷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평상복부터 외출복까지 다요."
"예?? 어머!! 알겠습니다."
점원의 입이 볼에 걸칠 정도로 미소를 지으며 혜주가 도망이라도 갈까봐 걱정되는지 더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연신 뒤를 돌아 날 바라보는 혜주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지어준다. 점원과... 옆 매장의 점원들까지 총 세 명의 여직원들이 혜주에게 달라붙었다. 연신 옷들을 가져와 보기를 반복한다. 웃긴 건 혜주는 가져오는 각종메이커들의 예쁜 옷들을 전부 거부하며 고개를 가로 젓기 일쑤였고, 곤란해 하는 점원이 날 바라볼 때마다 나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오케이 사인을 남발한다.
쌓여가는 옷들이 층을 이루며 높아지자 겁이 나는지 혜주가 울먹이려고 한다.
항상 당당한 혜주였지만... 고생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고나서 처음으로 해볼 쇼핑에서 이런 어거지성 선물공세에 당황한 듯 보였고, 겁이 난 듯 보였다.
그리고... 한 가지 관가했던...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혜주가 가슴속에 항상 묻어뒀던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혜주에게 다가간다. 점원들에게 포장을 해달라는 말을 하며 혜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건넨다.
"걱정 마... 네가 생각하는 거보다 나 돈 많아..."
"..."
"앞으로 넌 내 여동생이라니까... 오빠가 이 정도는 할 수 있게 허락하는 게 그렇게 힘드니..."
혜주는 천천히 노트를 꺼내 글을 적는다...
노트에 눈물이 떨어져 방울을 그리며 적혀가는 글을 번지게 한다.
-저... 행복지면 안 돼요...제 동생들은 그 인간 집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저만 행복해지면 정말 하늘이 불공평한 거잖아요...
"..."
-그래서... 저 이렇게 좋은 거 입고 살면 안돼요...
혜주가... 왜 허름한 옷을 고집하는 건지...자기 돈으로 옷 한 벌 사입을법한데도... 전혀 돈을 안 쓰는지... 그제야 그 속 깊은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혜주는 두 동생들의 누나가 아니었다...엄마였다... 자식을 버리고 온 엄마의 마음으로 항상 죄스러워 했고, 죄책감에 고통스러움을 거부하지 않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내가 너무 섣부른 행동을 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이렇게까지 학대하며 살고 있는 혜주가... 또 미련해 보인다.
날 버리고 도망간 내 어머니라는 사람도 혹시 이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난 사람을 돈이라는 물건을 매개로 직접 겪고 상대하는 은행원이라는 직업으로 인해 혜주의 이런 순수함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경험해 본 적도 없었다. 혜주가 별종임은 확실했다...
"혜주야. 니가 고생하고 일부러 험한 옷만 골라 입는다는 걸 동생들이 알면 고마워할까?"
"..."
"만약에... 내게 누나가 있다면 말이야...그리고 그 누나가 어쩔 수 없이 나와 떨어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서 떨어져 살고 있다면 말이야...
난 누나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비록 내가 고생하고 힘이 들어도... 누나마저 힘들게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내가 감히 누나한테 기댈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어..."
"..."
"내가 없었던 시간동안 혜주가 혼자 벌면서 모은 돈으로 사치품을 쓰는 게 아까워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걸 잘못했다고 하는 게 아니야... 네가 얼마나 착하고 올바른지 충분히 느끼고 그 삶은 존경까지 하는 내가 널 어떻게 비판할 수 있겠니... 하지만 이제 내가 있잖아... 오빠가 생겼는데... 동생일도 법적인 게 걸려 있는 거 알고 있으니까... 차차 해결방안을 찾아보면 답이 안 나오겠니? 이 오빠를 믿어봐라..."
조심스럽게 오빠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혜주가 날 의아한...듯 쳐다본다... 아니, 그냥 쳐다보는 게 맞겠지만... 내 의도된 오빠라는 단어의 사용에 혜주의 표정이 껄끄러워 보이는 듯 했다.
"아씨... 알았어!! 아빠!! 아빠라고 하면 됐냐!!? 됐지!!"
"풋...큭큭큭"
"허... 울다가 웃으면... 엉..."
"어우~"
혜주가 내 민망한 농담에 학을 띤다...
나름 내 어릴 적에는 잘 통했는데...어찌됐든 혜주가 웃었다... 혜주는 자주 울었지만... 웃는 모습이 훨~~씬 잘 어울린다. 나는 포장을 하고 있는 점원들에게 다가가 품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고, 점원 중 한명이 두 손으로 정중하게 받고는 계산을 시작했다.
"전부 122만 2천300원인데요. 2천300원은 디씨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헉!"
갑자기 옆에서 가격을 들은 혜주가 얼굴이 사색이 되선. 점원의 명세서를 낚아챈다... 그리곤 믿기 힘든지 몇 번을 확인 하 듯 멍한 시선으로 반복해서 보고는... 입을 벌린 채 내 카드를 훔칠 기회를 엿보는 게 분명했다. 나는 얼른 카드를 건네주려고 했고, 역시 내 팔을 끌어당기는 혜주였다.
"왜 그러세요 손님?"
"으으으응응!!"
"예???"
"아닙니다 계산해주세요."
"응응!!!" (필사적이라는 단어가 어울릴법한 혜주의 표정과 행동은 더 이어졌다.)
"빨리! 계산해주세요."
급기야 난 혜주의 머리를 잡고 미는 형태의 상황까지 벌어졌고, 점원도 잘못하면 대목을 잃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빠르게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지지지~~지잉'
프린터가 된 영수증을 내게 볼펜과 함께 넘기는 점원의 손에서 잽싸게 낚아 채 사인을 한다.
"휴... 혜주야 너 카드 없지?! 여기에 사인하면 이제 무르지도 못해..."
"으..."
"왜? 여기다 다 버리고 갈까? 그래...네가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 이걸 내가 입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요... 죄송한데 그냥 불우이웃한테 나눠..."
내 말을 듣던 혜주가 놀라선 포장을 하고 있는 옷들을 막 주워 담기 시작한다.
자존심 하나로 먹고사는 혜주였지만... 이 금액은 생각지도 못해봤는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에 놀라면서도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절대 불쌍해서가 아니다. 그냥 이런 모습도 귀여웠기에 그랬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호호호...엇..."
"..."
점원도 따라 웃었지만 내가 노려봤다. 혜주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건 나여야만 하니까... 혜주의 속사정도 모르면서 웃기 시작한 점원을 보게 되자... 애꿎은 점원에게 눈을 흘기기 시작했고, 점원도 자신의 실수라고 생각했는지 웃음을 참는다.
"크크...혜주야... 그렇게 좋으면서..."
"으응!!"(날 째리면서 이건 좋은 게 아니고, 아까워서예요!.라는 말을 하는 듯 보인다.)
"어차피 이거 다 못가지고가. 배달되니까. 일어나."
"..."
기가 차다는 듯 날 바라보는 혜주의 팔뚝에 손을 둘러 일으켜 세운 나는 정말로 저 옷들을 배달해 주는 거냐는 듯 점원을 노려보기 시작한 혜주를 끌고 옷 매장에서 나왔다.
혜주는 연신 포장을 하고 있는 점원들을 바라보며 쉽게 발걸음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혜주를 데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속옷 매장으로 향한다.
아마도... 아니 분명히 혜주는 내가 사준 속옷과 있던 속옷이 전부였을 것이기에 안면몰수하고 곧바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번엔 점원이 쉽게 말을 걸지 못한다.
누가 봐도 원조교제 같은 모습의 우리일 테니... 점원의 의심 가득한 눈빛을 이해할 수 있는 나다.
"여기 제 와이프한테 사이즈 좀 재어주세요. 시골에서 올라와서 아마 사이즈도 모르고 대충 입고 다니는 거 같아요."
"예?? 아!~~~"
"혜주야 따라가 봐."
그제야 점원은 발걸음을 옮겨 혜주에게 다가갔지만, 여전히 날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아무리 속옷장사를 하는 나라도 이런 여성 속옷매장에 들어오기란 영 적응이 되질 않나보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보이는 간이 의자에 앉게 되었고, 잠시 후 얼굴이 새빨개진 혜주가 점원을 따라 커튼으로 이뤄진 드레스 룸에서 나온다.
"완전히 잘못입고 계셨네요. 그것보다 너무 몸이 예쁘신데 왜 그런 속옷을..."
나오며 말을 하던 점원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말꼬리를 흐린다.
"속옷 사이즈 안 맞죠?"
"예?...예..."
"차이 많이 나요?"
"예???"
어차피 버린 몸... 대담해지기로 결심한 나였기에 서슴없이 점원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스타일별로 좀 사려고 하는데. 괜히 사이즈 잘못 쟀으면 다 못 입잖아요..."
"..."
"됐고요. 그럼 우리 혜주한테 어울릴 만한 걸로 골라주세요... 아니... 그냥 포장해주세요."
속옷매장이라서 그런가?... 혜주가 아까 옷매장과는 달리 고개를 숙인 채 나에게 덤벼들지 않는다... 조금의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의외의 행동에 김이 좀 샌다...
그래도 편하게 결제를 할 수 있으니...나야 상관없었다... 점원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건지... 아니면 단단히 오해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스타일의 브래지어와 팬티 세트를 혜주가 아닌 내게 보여주며 계속 가져오기를 반복했다... 야한 속옷만 만지는 나로서는... 좀 많이 민밋한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런 게 혜주한테는 정말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혜주가 먼 산을 바라보며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내 스타일의 검은색과 회색의 투톤이 V자로 위에는 검은색 쉐폰 원단과 부드러운 실크의 검정이 경계가 이뤄진 조금은 야한 속옷을 얼른 챙겨달라고 점원에게 부탁했다...
속옷매장에서 대량 20여종의 세트를 산 나는 배달을 요청하며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혜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혜주가 날 바라봤을 때...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걸 볼 수 있었다... 아직도 생각에 잠겨 있나 보다... 아무 말 없이 혜주의 손을 잡고 나는 화장품 매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혜주는 이제는 체념한 듯 내 손에 이끌려 힘없이 쫓아오기 시작한다...
마음이... 씁쓸하다... 보미와 비교하면 안 되는데... 아마 이런 선물을 보미에게 안겨준다면 날 자기가 아닌 서방으로 불러주며 하루 종일 매달리다시피 팔짱을 끼며 안겨 연신 입가에 미소를 버리지 못하고 재잘될텐데.
"손에 바르는 걸로 많이 좀 챙겨주세요..."
"예?? 이십대라서 특별히 바를 건 없을텐데... 원래 젊음이 가장 강력한 무기거든요. 아가씨도 보면...어머!!..."
그제야 혜주의 손을 잡은 점원이 깜짝 놀란다... 그리곤 다시 혜주의 얼굴을 쳐다보는 점원이었기에... 혜주가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려는 듯 조금 고개를 숙인다...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느끼는지... 들려 있는 손을 급하게 빼내곤 앉아 있는 원형 의자위에 예쁘게 모인 허벅지 위에 손을 누르듯 포겠다...
"제가 죽일 놈이죠... 오빠 공부한다는 핑계로 하나밖에 없는 동생한테 있는 고생 다 시키고... 이제 해결 됐으니까 울 혜주 공주 만들어 주려고요. 좋은 거 다 주세요..."
"아~~~ 공부면? 사시?? 혹시 검사님 되시는 거예요?"
"..."
가벼운 미소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나는 점원의 말을 넘겨버렸다. 그제야 혜주를 바라보는 점원의 시선에 안타까움이 배어나기 시작했고, 정말로 정성스럽게 혜주의 손을 잡고는 보듬어보기도, 쓰다듬기도 한다. 그리곤 얼굴에 손을 대본다.
"에고.,. 이렇게 예쁜데...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여기 있는 거 다 사달라고 하세요 오빠한테... 이 정도는 껌도 아니겠네..."
"..."
"하하... 그렇죠... 혜주한테 맞는 거 다 싸주세요..."
"예??"
"전문가시니까 필요한 거 아시잖아요. 혜주가 저 때문에 그 흔한 로션도 없어요..."
"... 그건 너무했다..."
"그렇죠... 괜히 아가씨한테도 미안해지네... 얼른 싸주세요..."
"미안해야죠!. 이렇게 곱고 예쁜데... 다는 필요 없고요, 제가 알아서 챙겨볼게요..."
여자는 무슨 스포일러 같은 것에 화장품을 담아 혜주의 손등에 묻혀 문질러보더니 다시 그 행동을 몇 번 반복한다. 기름종이 같은 파란색의 종이에 연신 닦아내며 이번엔 샘플 화장품을 발라보기도 하고... 하옇튼 이상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선 혜주에게 한보따리의 화장품을 안겨줬다...
정말로... 마지못해 받는 듯 혜주는 날 연신 바라보며 이걸 받아도 되는 것인지 망설이기를 했기에 내가 점원의 손에서 낚아채 혜주에게 건네줬다.
혜주는... 화장품을 받아 들고는 날 안타깝게 바라본다... 저 눈빛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그래도 내 기분은 좋을 뿐이다...
혜주와 가볍게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번엔 강하게 혜주가 내 팔을 잡았다.
"왜?"
"..."(혜주는 집으로 가자는지 손을 지붕을 만들어 내게 보여준다.)
"집에?"
"응~..."
"집에 먹을 거 하나도 없는데..."
끝내 나는 혜주의 팔에 이끌려 지하 매장으로 향했고, 식품 층인 지하1층에서 내린 나와 혜주다. 혜주가 어디선가 바구니를 들고 오더니 앞장을 서기 시작한다.
여긴 내 담당이 아니었기에... 그저 혜주의 뒷모습을 쫓아 걸어가게 되었고, 혜주의 등가 방에서 수첩을 꺼내는 걸 볼 수 있었다. 한참을 노트를 바라보는 혜주였기에 가까이 다가가 노트 안을 훔쳐보게 된다... 뚫어져라 쳐다보던 노트에서 내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급하게 닫고는 날 또 귀엽게 째려본다.
혜주의 노트 안에 적혀 있는 예쁜 글씨를 볼 수 있었다.
'스테미너 영양죽'
저건 언제 또 적어놓은건지... 분명히 병원에서 식차를 몰고 오는 아줌마와 한참을 얘기하더니... 금세 친해져선 웃기까지 하더니...저런 것까지 적어 놓은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날 의식하며 노트를 조금씩 열어보며 재료를 고르기 시작하는 혜주다... 한 가지 재료를 고르더라도 연신 들어다 놨다를 반복하는 혜주의 모습이...
결국 사지도 않고는 다시 노트에 뭔가를 적고 그대로 지나친다... 이런 행동을 반복하는 혜주였기에 나는 영문도 모르고 빈 바구니만 바라보게 되었다. 거의 30분 동안을 돌아다닌 우리였지만... 바구니엔 달랑 우유하나가 다였다...
"왜 안사는 거야? 뭐 만들려고 하는 건데?"
"응응!!"
귀찮다는 듯 나보고 기다리라는 손의 모양을 하곤 다시 처음으로 갔던 양파가 있는 코너로 돌아가는 혜주다... 그리곤 양파에 코를 바짝 대곤 냄새까지 맡더니 결국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 바구니에 담는다. 그 다음은 아마도 밤이 있는 코너였을 것이다. 역시 혜주가 그쪽으로 걸어간다. 그런데 그대로 밤이 진열된 진열장을 지나 두 불럭이나 떨어진 냉장상품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냉동 밤...을 꺼내 담는다... 나는 서둘러 아까 지나쳤던 밤 코너의 진열된 상품과 냉동 밤을 비교해보니...
160원차이로 냉동 밤이 더 싸다... 그런데 양이 1/3이나 냉동 밤이 더 많다...
그런 일의 반복이었다... 혜주는 장을 하나 보는데도 이렇게 공을 들여 양과 가격을 비교하며 꼼꼼하게 체크까지 해서 고르고 골라 가장 좋고 싼 것들을 찾아 바구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판대에 놓여있는 시식코너는 모조리 선렵하듯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하나씩 맛보며... 꼭 미소까지 지어주는... 그러나 정작 시식코너에서 맛본 것들은 하나도 사질 않았다...
한가득 채워 계산을 하는데... 3만2천원이 나왔다... 아마도 내가 저 정도 양의 장을 봤다면... 4만원이 훌쩍 넘었을 게 분명했다...
혜주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예쁜 옷이나...화장품을 사줬을 때도... 이런 미소를 보인 적 없던 혜주였는데... 사실 위층에서 쓴 돈이 아마 300은 넘을 거다... 그런데 3만 2천원에 이렇게 음식을 만들 생각에 기대에 부풀어 미소를 지을 수 있다니...
내 자신이 창피하고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끝내...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집 문을 열고... 혜주가 들어가다 그대로 현관 앞에 서서 움직이질 않는다... 무슨 일인가?라는 생각에 나는 혜주의 어깨 너머로 집안을 둘러보는데... 집안 꼴이... 그러고 보니... 폐인처럼 생활하며 모든 살림과는 담을 싸고 지낸 시간이 한달이다 보니... 집안은 엉망이라는 단어도 아까울정도로 개판이었다...
날 향해 고개를 돌린 혜주가... 진짜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한다... 혜주의 눈빛이 무섭다...
갑자기 짐을 현관 옆에 내려놓더니... 날 끌고 오피스텔에서 나온 혜주는 그대로 앞 슈퍼의 의자에 날 앉히고는 손을 내 앞에 내민다...
"으.응?? 뭐?"
"으응응!"(혜주가 돈을 세는 시늉을 한다...)
"아! 돈?"
나는 지갑을 꺼내 돈을 꺼내려하는데... 말도 없이 지갑채로 낚아채 간 혜주는 그대로 슈퍼로 들어가 정작 지갑은 자신의 추리닝 상의 주머니에 넣고는 바지에서 동전들을 소리 내며 꺼내선 내가 즐겨 먹는 이온음료를 하나 사왔다. 테이블에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손을 올려 담배를 펴는 시늉을 한다...그리곤... 크게 양손을 교차하며 X자를 만든다...
아마... 담배는 절대 안 된다는 말인 듯 보였고, 분명히 내가 슈퍼에서 담배를 살거라고 예상을 했는지... 지갑채 압수당하게 된 나는 멍하니 오피스텔로 사라지는 혜주의 뒷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10분이 지나가...20분이 지나도... 혜주가 나오질 않는다... 조용히 일어나... 잠시 오피스텔의 현관문의 동태를 살핀 난 몰래 슈퍼로 들어갔다.
"아줌마. 돈 조금 있다 드릴게요. 담배하고 라이터 좀 주세요."
"응?? 김 군한테는 안 팔아..."
"예??"
"돈 주고 산다고 해도 안 팔아..."
"그...그게 무슨 말이에요?"
"김 군한테... 저번 저녁에 술 팔고 나서... 내가 혜주한테 얼마나 원망을 들었는데...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내 딸년 생각나서 나도 같이 울었다니까... 그래서 혜주하고 약속했어. 다시는 담배하고 술 안판다고..."
"그...그런 게 어디 있어요..."
"어딨긴 여기 있지... 억울하면 저기 100m 떨어진 편의점 가서 사오던가..."
"와... 이...이 지지배가..."
"누구보고 지지배래!!"
"깜짝이야... 왜 아줌마가 화내요?..."
"다시 그런 욕해봐...아주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릴 테니까..."
"에휴..."
"거기... 오징어 다리 하나 들고 가서 씹든가...그건 공짜로 줄께."
"예~~~~! 감사합니다~~..."
500원짜리 다리 하나가 들어있는 봉지를 하나 들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허탈하고...한편으로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역시 혜주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어 내가 살고 있는 창문을 올려다보는데... 혜주가 예상이라도 했는지... 창문을 열고 걸레를 든 손으로 턱을 괴고는 킥킥대며 웃고 있다... 도대체... 내 얼굴이 왜 빨개지는지도 모른 채... 혜주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웃으며 날 바라보던 혜주가... 고개를 들어 따스한 햇볕을 얼굴로 받아내려는지 눈을 감고는 잠시 창문에 턱을 괸 채로 그대로 있는다... 꼭 외화의 한 장면처럼... 붉은 빛의 때가 묻어 있는 벽과 창문이 혜주로 인해 밝아지는 듯 한 기분까지 전해지며... 나도 모르게 혜주와 같이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햇볕을 받아본다...
감은 눈에도 검붉은 햇볕의 따뜻함이 보여진다. 얼굴에 따스함이 느껴졌고, 정신이 아련해진다... 꼭 구름위에 있는 듯 몸이 가벼워진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나는 그대로 한참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지 하늘을 이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적이 없었다...햇볕을 이렇게 따스하게 느껴본적도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바쁜 삶에 하루하루가 귀찮기만 했는데... 단 5분의 햇볕을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 줄은 모르고 지냈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 혜주가 턱을 괴던 팔 아래로 고개를 내려 창문 밑틀에 대고 있던 팔에 얼굴을 내려놓고 기대어 날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눈이 마주쳤고,,잠시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는... 혜주가 웃으며 올라오라는 손동작을 하고 나서야 들어가 사라져 버린 혜주의 잔상에 이상한 아쉬움이 남았다...
집으로 들어갔을 때... 약30분 전의 집안과는 완전히 다른... 꼭 새집처럼 느껴지는 내 집을 보게 되었다... 쌀을 들어오자마자 이미 불려놨는지 그릇에 덮어놨던 자신의 노트를 치우곤 불린 쌀을 냄비에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간간히 저으면서 다른 반찬들을 만드는 혜주의 모습을 보게 되자... 이게 삶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멍하니 혜주가 내가 들어왔을 때 틀어놓은 텔레비전에 시선도 주지 않고 혜주의 뒷모습만 바라보는데...그동안의 내 행동이 너무 후회스럽게 느껴졌다.
그때... 내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기에 괜한 죄를 지은 듯 느낀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받았다...
"여.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퇴원하셨죠?]
"아... 수이니?"
[예.]
"응... 지금 집이야."
[혜주는요? ]
"같이 왔지..."
[그럼 지금 가도 되요?]
"그래...빨리 와 밥 먹을 거니까."
[예~~]
혜주는 잠시 날 쳐다보더니 서둘러 밥을 밥통에 안친다... 그러고 보니 죽만 같이 먹을 생각이었나 보다...
서둘러 요리를 준비하는 혜주의 허둥대면서도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에 다시 한 번 감탄을 받으며 계속해서 혜주를 쳐다보고만 있던 나는 문을 두드리는 수이의 소리에 일어나
문을 열어줬다... 이미 밥과 반찬은 다 준비되어 있었기에 내 작은 상에 상을 차리고 있던 혜주가 수이를 보며 너무도 반갑게 반긴다...
여자들은 참... 본지 삼일도 안 지났는데... 저렇게 반가울까?...
소소한 얘기를 나누던 우리는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했고, 역시 혜주의 음식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처음 끓여보는 영양죽일텐데... 내 입맛의 간을 벌써 파악하고 있는 혜주였는지 딱 적당하게 싱거운 정도로 금세 한 그릇을 다 비우게 됐다...
웃으며 한 그릇을 더 퍼오는 혜주였고,, 뭐가 그리 좋냐는 듯 날 쳐다보는 수이 때문에 나이에 맞지 않게 쑥스러워하는 나다...
꼭 신혼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두그릇을 비우고...또 달라고 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올 사람이 없는데... 라는 생각으로 혜주와 수이를 번갈아 바라보곤 나는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간다.
"누구세요?"
"김민호씨 댁이죠?"
"예? 예... 누구세요?"
"OO마트요... 배달 왔는데요."
마트라는 소리에 문을 열어준 나는...적자니 당황하게 되었다... 방금 방을 치웠고... 주문한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두 명의 남자들이 두어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옮긴 상자와 쇼핑백이 거실의 한편을 전부 차지해 버렸다...
"저...저게 뭐에요?"
"혜주...옷일 거야..."
"예??!!!"
누구보다 놀란 건 수이였다... 하긴 놀라지 않는다면 이상한 그림이지... 나도 포장을 하니 저렇게 많아 보일지는 생각도 못했는데...
"저...저게 다요?"
"응..."
"와!! 혜주야 너 로또 맞았다..."
"..."(혜주가 얼굴을 붉히며 수이의 허벅지를 꼬집는다.)
"윽!! 계집애는 꼭 좋은 말하는데도 때려...근데 아저씨가 저거 다 사준거에요? 그걸 혜주가 받았고요??"
"받기는... 거의 협박하고 강제로 결제해서 산거지..."
"아!~~ 그럼 그렇지... 나 같으면... 아후~~"
"크크크"
"아저씨!"
"응?"
"전 뭐 없어요??"
"응응응!!"
혜주가 무섭게 노려보며 수이에게 밥이나 마저 먹으라는 시늉을 한다.
"쳇... 이거 애인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응!!"
"애...애인은... 오빠...아니...아...아빠라니까..."
"아빠는... 무슨 아빠가 저렇게 지극정성이에요?... 그런 아빠 있으면 저 좀 소개시켜줘요!... 이 한 몸 불살라서 평생 아빠로 모실 테니..."
"무,,뭐??"
"아니다... 아저씨!! 저 어때요... 비록 혜주보다 좀 떨어지긴 하지만... 뭐 나이는 같고... 같은 여대에..."
"으응응!!!!"
혜주가 아까보다도 더 세게 수이의 허벅지를 꼬집기 시작했다.
"아~얏!! 아파!! 참나... 누가 진짜 뺐는데!! 농담도 못하냐!"
"응!!"
"아!! 아저씨..."
수이의 부름에 혜주가 다시 경계를 하며 손을 움직일 준비를 한다... 수이는 잠깐 혜주의 표정을 살피곤 그대로 말을 이어나간다.
"혜주 학교요... 이번 주까지 재 등록안하면 위험하다던데요..."
"그래?? 그럼 하자."
"진짜요?"
"응..."
"으으으응응!!"
혜주가 이번에는 우리말을 가로막으며 서둘러 노트를 찾아 일어났다...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놓고는 엎드려 글을 쓰기 시작했다.
- 저 학교 안가요!!!!
"왜? 아저씨가 도와준다고 하는데,..."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참나. 복에 겨운 소리 하네. 혜주야 너 성공해서 동생들 데려온다며. 그럼 학교 다녀야 성공할 거 아니야!!"
-지금도 아저씨한테 도움 많이 받았어. 그러니까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수이야. 혜주 말은 무시하고 여기 카드 줄 테니까, 이걸로 계산 좀 대신해줘."
"카드 안 돼요. "
"응? 카드가 안 돼?"
"예. 입금하거나..."
"그래?, 그럼 계좌번호 좀 줘. 내가 하지 뭐..."
"예..."
수이가 가방에서 메모를 찾아 꺼내 내게 건네주는데. 역시 혜주가 냅다 달려들었다. 내 손에 들려 있는 메모지를 뺏으려는 듯 달려든 혜주가 날 밀치게 되었고, 내 위에 혜주가 몸을 비스듬히 포개며 내 위에 반쯤 눕게 되었다.
"어! 얘가 왜이래..."
"응응응!,!"
"글쎄!! 나중에 갚으라니까..."
"응!"(혜주가 고개를 흔든다.)
"몰라 난 무조건 입금할거니까... 다니든 안다니던 네 맘대로 해."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혜주를 번쩍 들어 옮기지 못한 채... 잠시 동안의 뒤엉킴이 발생했다.
그때 의미 모를 미소를 짓기 시작한 수이가 한마디를 무심하게 뱉어냈다. 그 말에 나는 미소를 짓게 되었고, 혜주는... 가뜩이나 힘을 주고 있어 빨개진 얼굴이 한 층 더 빨개져 홍당무가 된 체하던 행동을 멈추게 되었다...
"참나. 밤일은 밤에나 하시지!!~"
정말로 무섭게 수이를 노려보는 혜주였기에 수이가 급하게 화재를 바꾼다.
"근데... 이 많은 옷들을 어디다가 다 둘 거예요?"
"응?? 그거야 혜주바...?..."
"혜주 방이 어디에요? 거실 이예요, 안방이요? 아... 안방이라고 했지...그런데 안방 보니까 옷 넣을 곳 하나도 없을 거 같던데..."
"아~ 옷장..."
"으응..."(급하게 글을 적는다.)
-동미에 옷장 있는데.
동미장의 옷장이라... 그 90년대까지 나왔다던 종이도 아니고 면도 아닌 비닐과도 같은 이상한 재질의 휘청 이는 분홍빛의 바랜 옷장이 생각이 났다.
그래도... 새로 산 옷이 좋긴 한가보다... 벌써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있는 걸 보니...
아니... 난 혜주가 아까부터 저기 놓여있는 옷들을 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걸 진작 눈치 챘지만, 혜주의 성격을 알기에 모른 채 하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나만이 받은 것이 아니었나보다... 내가 수이를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보는... 정말로 친구의 행복에 자신도 행복해지는 듯... 얼굴에 번져가는 미소를 볼 수 있었다.
"크크... 지지배... 좋긴 하나보지?!!"
"으응!" (수이의 짓궂은 말에 당황하듯 고개를 절래 흔들며 혜주가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근데... 이거 다 입어보고 산거야? 아저씨 센스로 보면... 전부 야시시 한 거 아니야?"
"내, 내가 뭘..."
"아저씨 직업이 다 말해주는데요, 뭐!..."
"..."
혜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옷이 쌓여있는 구석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기에 수이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게 된다. 문득 혜주의 표정이 약간 어둡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아마도 또 동생들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고, 이건 착한 혜주의 마음속 한구석은 아직도 자신이 죄인인 듯 착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 수이야 그럼 지금 갈까?"
"예?"
"잠깐만..."
나는 혜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조그마한 행복을 찾아줘야 했다.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선 옷장 안에 넣어둔 이불들을 다 꺼내 들고 깨끗이 치워진 작은방에 또 구박을 듣기 싫었기에 잘 포개어 내려놓고는 이불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빼두었던 옷장의 칸막이들과 봉을 작은방에서 찾아와 다시 설치를 하기 시작했다. 귀차니즘에 걸려 있던 받침대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이것들만 던져놨었기에 설치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휴~~ 이것도 힘드네... 자... 혜주야 너 옷 여기다 다 정리하고 있어... 그리고 화장품은...우선 저기 다이위에 올려놓고."
"..."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혜주였기에 약간의 쑥스러움을 느끼며 나는 수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수이가 좀 도와주고, 난 돈 좀 붙이고 올께."
"지금요?"
"응. 혜주가 도망가기 전에 얼른 돈부터 붙여야지..."
"하긴... 저 지지배가 하도...아얏! 아파 이것아..."
"..."
어느 정도 혜주가 만들어준 죽을 비운 뒤라 난 그대로 재킷을 걸치고 둘만 내 집에 남겨두고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은행으로 걸어간다.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혜주가 다시 대학을 다닐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준비해줘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나였기에 첫 번째인 등록금만이 내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메모지를 꺼내 본다. 약 270만 원 정도의 등록금과 함께 지정된 은행에서만 납부가 가능하다는 메모가 있었다.
지정된 은행은 조금 걸어가야 했기에 다시 주머니 속에 메모지를 소중히 넣고 천천히 걸어간다. 혜주에게 이제는 정말로 자신의 공간을 꾸밀 시간을 더 오래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내 눈에 핸드폰 가게가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혜주는 핸드폰이 없었다...,...
"저기... 여대생인데요. 선물할건데 제가 사줄 수 있죠?"
"예! 당연하죠."
"그럼 가장 인기 있는 걸로 하나만 골라주세요..."
"알겠습니다... 혹시 주민등록증 가져오셨나요? 명의는 선생님 것으로 하실 거죠?"
"예... 여기 있습니다."
점원의 익숙한 필기와 내민 서류에 사인을 하곤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 받은 폴더식 핑크빛이 감도는 내가 보기에도 여자들한테 인기 있어 보이는 핸드폰을 케이스채로 들고 난 가게를 나와 다시 은행으로 향한다. 어느새 은행에 도착했고,, 손님으로 막상 은행에 들어오게 되니 좀 어리버리해진 난 창고 직원에게 다가가 어색하게 등록금 납부 건으로 왔다는 말을 건넸고, 역시 익숙한 듯 혜주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물어본다.
주민등록번호...
서둘러 수이한테 전화를 걸어 혜주의 주민등록번호를 물어보는데... 역시 혜주가 말을 해줄리 만무했다... 난 그때 본 혜주의 주민등록번호를 기억해 내려 애를 쓴다.
몇 번이고 확인하듯 되내였던 숫자였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을 해 냈고, 우선 검색을 요청했다. 다행히 내 기억력이 녹슬진 않았나보다... 납부를 하고 달랑 한 장의 절치선이 두 군데 나있는 영수증을 소중히 챙겨 주머니에 넣고는 1시간 지나서야 은행에서 나와 다시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한손에 핸드폰이 들어있는 상자를 들고 천천히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수이였다.
"여보세요?"
[저요. 납부하셨어요?]
"응. 왜 시끄러워?"
[나왔어요. 지지배가 옷 정리하다가 꼴사납게 울기 시작하잖아요...]
"너도 알잖아... 동생들 때문에 그런다는 거..."
[알죠... 그런데 당장 지가 할 수 있는 건 없잖아요. 그럼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노트에다가 이거 환불하면 더 일찍 동생들 데려올 수 있을 거 같다고... 진짜로 진지하게 저 쳐다봐서
짜증나서 한바탕 하고 나왔어요...]
"..."
매번 느끼지만...역시 혜주답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옷을 사줬는데도 혜주는 역시 자신의 꾸밈에는 관심이 없나보다. 아니 관심이 없을 리가 없다. 22살 나이의 여자아이가 자신이 예뻐지는 것에 어떻게 관심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그래... 그래도 이해해줘...혜주가 얼마나 힘들겠니..."
[...아저씨보다 제가 더 혜주 잘 알거든요!!]
"알지...나도 알아... 그러니까 이해해 달라는 거지."
[어휴... 하옇튼 우는 거 보고 나왔으니까... 죄송해요, 괜히 아저씨한테 부담만 드리는거같아서... 그래도요 솔직히 전 아저씨를 혜주가 만나서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다행?"
[예... 처음에는 다른 남자처럼 혜주한테 빠져서 이상한 짓 하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아저씨라면 어떻게 해도 될 거 같아요...호호호.]
"큭... 너 혜주 친구 맞냐?"
[친구니까... 이런 말 하는 거예요. 솔직히 혜주 알잖아요. 악착같이 살면서도 정작 자기 속은 못 채우는 거... 혜주한테 말하지 마세요...제가 생각했을 땐 혜주 저렇게 돈 모아봐야 평생 동생들 못 데려와요...]
"왜? 일 년이면 1000만원 넘게 벌 텐데..."
[세 명이 살 집이 얼만데요? 5000은 넘게 있어야 될걸요...제가 이기적인진 모르지만... 혜주 얼마나 예쁜데요... 저렇게 살면 안 돼요...]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도 같은 생각이라서... 혜주 행복하게 해주려고..."
[예!! 믿어요. 저 진짜로 아저씨 다시 봤어요... 혜주 죽었다고 따라 죽으려는 거 보고...]
"또!... 그 얘기는 그만해라... 창피하게..."
[전 아저씨 편이라는 거죠!...그래서 한 가지 알려드리면요... 혜주가 귀에 무지 예민해요.]
"무...무슨..."
[그냥 알아두시라고요... 호호호호호호... 그럼 전 이만 집에 갈게요~~]
전화의 종결 음을 들으며 괜히 얼굴이 붉어진다...
머릿속에는 '귀'라는 단어가 난무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상상할수록...
길을 가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더 창피해진 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문득 새로 연 꽃가게가 눈에 들어왔고,, 난 홀린 듯 향기에 취해 매장 안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의외로 남자 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남자가 다가와 내게 무슨 꽃을 포장해 줄지 물어본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작은 5개의 분홍색 꽃잎이 어우러져 앙증맞게 피어있는 종이 눈에 들어왔다.
수줍게 웃는 혜주의 이미지와 금세 겹쳐졌기에 처음 생각했던 장미를 뒤로하고 그 꽃을 손으로 가리키게 되었다.
너무 티가 날거라는 생각에 주인에게 가볍게 줄기만 가릴 정도로 포장해 달라고 하곤 주인의 큰 손에 흔들리며 모아지는 한 움큼의 꽃을 보고 서 있었고, 그 꽃을 들고 꽃가게를 나오게 되었다...
한 움큼의 꽃송이를 들고 남자 혼자 걸어가는 것이 이렇게 창피한 일인 줄은 태어나서 처음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 꽃 선물은 난생 처음이었고, 그것도 상대가 혜주이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조금 더 빠르게 걷던 나는 겨우 집에 도착했고, 역시 무의식적으로 무음으로 번호키를 누르고 혹시나 내 선물을 단번에 눈치 챌 혜주를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방문이 열려 있었고, 거의 다 정리하긴 했지만 아직도 옷들이 침대위에 올려져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중 옷한벌을 양손으로 잡고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는 혜주의 쓸쓸하고 멍한 모습을 보게 된 나는 어쩔 수 없이 인기척을 낸다...
"으음!!"
"..."
혜주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는데... 수이 말대로 울었는지 약간은 볼이 상기가 되어 있는 혜주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난 이유를 모른 채 선물을 서둘러 등 뒤로 숨기게 되었다.
잠시 날 바라보던 혜주는 옷을 내려놓고는... 갑자기 내게 와 안긴다...
혜주의...
가슴이 내 가슴 아래에 닿았다... 팔을 뒤로하고 있었기에... 혜주의 포옹을 제대로 받아주지도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은 채 서 있게 되었다.
가만히 내 품을 안고는 얼굴을 내 가슴에 묻고 있는 혜주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다...
"혜주야..."
"훌쩍..."
내 가슴에 눈물을 닦고는 내게서 떨어진다... 아쉬움이라는 단어가...잠시 눈을 비비고는 자신의 뺨을 양손으로 소리나게 모아 때렸다...
큰소리에...깜짝 놀란 나를 뒤로하고 혜주는 보란 듯 내게 미소를 지어준다... 힘들어도 힘든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 조금은 기대도 될 텐데 말이다... 혜주는 아마 자신이 울고 있던 모습을 내게 보여주기 싫었나보다. 잠시 내 혼을 빼놓은 혜주는 내 품을 손을 둘러 안았기에 뒤에 내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됐는지
내 등 뒤에 숨겨진 물건을 훔쳐보려는 듯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기울인다...
"왜?! 이거 니꺼 아니야!!"
"으응!"
"누가 뭐래요? 라고 한거지?!!"
"하하!!"
웃음만은... 혜주의 웃음만은 변하지 않았는데... 예전의 고운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혜주가 내게 등을 돌리곤 방으로 들어간다. 정리하던 옷을 대충 넣으려는지 개기 시작했다.
천천히 따라 들어간 나는 혜주의 얼굴에 꽃을 내밀었다. 생각지도 못한 꽃 선물에 혜주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지만,,, 이내 꽃 내음를 맡아보려는지 코를 가져다 댄다.
꽃을 내밀고 있는 내손이 무안한 것도 모른 채 침대에 개던 옷을 들고 앉아서는 한참을 꽃향기에 취해 눈을 감고 있었다.
"바. 받아... 무안하게..."
"...^^..."
"그. 그냥 지나가다가 예뻐 보여서 사 온 거야..."
혜주가 서둘러 노트를 가져온다.
그리곤 익숙한 볼펜 볼의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저씨 이 꽃,., 분홍색 제비꽃의 꽃말이 뭔지 아세요?
"제비꽃... 몰...몰라..."
-순진한 사랑. 그중에서 분홍색은 진실한 사랑이레요.
"..."
-제가 제비꽃 좋아하는 거 수이가 말해줬어요?
"아니..."
-와! 아저씨 의외로 센스 있다... 전... 제비꽃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다른 꽃은 향이 금세 익숙해지는데, 제비꽃은 계속 가거든요...거기다가 진실한 사랑이라는 꽃말도 좋고, 그리고 바이올렛이 분홍색 색명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이게 제비꽃이란 영어라는 거 알고 나서 더 좋아하게 됐고요. 꽃 이름보다 색깔로 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멋져요... 저도 죽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장혜주라는 이름보다 열심히 살았던 아이라고 막연하게 기억 속에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고 있거든요. 이름보다는 그 이름 속에 있는 색깔로...
혜주의 장문의 글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난 살면서 남의 시선에 별 상관하지 않고 살아왔었는데... 그리고 내가 죽은 후에 남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지는 전혀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나보다도 어린것이 꽃 하나에도 이런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멍하니 혜주의 글씨만 바라보며 감동을 받게 되었다.
글을 쓰던 혜주는 내게 너무 많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볼펜을 굴리지 않고 있는다...
"그렇구나... 이게 제비꽃이구나... 난 제비꽃은 전부 노란색인 줄 알았는데..."
-색깔이 얼마나 많은데요. 작고 예쁘고...색도 많고.
"응...아고 난 씻어야겠다... 오랜만에 좀 걸었더니 피곤하네..."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건네준 꽃에 다시 눈을 감고 코를 묻는 혜주를 보며 슬그머니 핸드폰케이스를 침대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그리곤 샤워기의 물을 틀어 놓았다. 역시... 반응이 즉각적으로 온다.
'쿵!쿵!쿵'
"야야! 문 부서져! 그리고 그것도 이미 개통도 다 해놓은거라서... 환불 안 된다... 위약금이 30만원이라고 듣고 왔으니까!! 마음대로 해..."
"응응으응!!"
"몰라!! 네가 버리든 말든 맘대로 하라고! 어차피 요금은 계속 나올 테니까... 그리고 문자 위주로 하는 무슨 팅인가 하옇튼 그거 등록해놨으니까!"
"..."
조용해 졌고, 샤워기의 물을 잠그지도 않고 조금 더 화장실에 있던 나는 소리죽여 문을 연 후 혜주가 있는 방안을 몰래 훔쳐본다... 신기한 듯 침대에 엎드려 누워선 종아리를 들어 교차하듯 움직이며 핸드폰을 이것저것 눌러보고 있는 혜주의 모습이... 천상 여대생이다...
한참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제야 혜주가 날 발견하고는 서둘러 바로 앉고는 얼굴이 빨개진다...
"크크크크크크크..."
혜주가 날 또 귀엽게 노려본다... 저런 눈 흘김이라면 평생 받으면서 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혜주는 노려보던 시선을 걷고는 다시 내 앞에서 서툰 손놀림으로 핸드폰을 만진다...
'나라라라~~'
내 주머니 속에 있는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들려왔다. 핸드폰을 꺼내보자 문자1건이 왔다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아저씨.자꾸 그러면 혼나욧!]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비록 문자를 통했지만 혜주의 귀여운 앙탈에 나도 모르게 크게 웃게 되었다.
이렇게 귀여운 혜주라면...
잠시 후에 혜주가 나로 인해 고통 받게 된다는 것도 모른 채 이성과는 달리 혜주의 모습에 점점 더 사랑에 빠져들게 된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