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배신... 또 한번의 이별... (7/19)

7. 배신... 또 한번의 이별...

보미에게... 또 욕을 먹었으면서도 서둘러 혜주를 쫓아 달려 오긴 했는데... 막상 집 앞에 당도한 나는 번호키를 누르기를 망설이며 문앞에서 가만히 서 있게 되었다.

들어가서... 혜주에게 뭐라고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변명이 없었다... 의자에 앉아 있었고 내 위에 앉아서 엉덩이를 흔들며 가슴을 훤히 꺼내놓고 있었던... 아마도 혜주에겐 테이블과 의자의 등받이로 가려진 시선으로 내가 보미와 관계하고 있는걸로 보였을게 분명했다.

한손에는 가방을 한손에는 혜주가 들고온 비닐봉지를 들고 문앞에서 서 있다가 다시 물러나 벽에 기대어 생각만 하게 된다. 결국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게 가장 좋을거라는 생각으로 결론 짓고 번호키를 눌러 문을 연다. 잠시 안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들어가며 혜주의 위치를 찾게 된다.

거실중앙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혜주가 문이 열리고 내가 들어오는 소리에도 고개도 돌리지도 않은 채 여전히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곤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나 왔어..."

"..."

"밥 먹었니?? 배 안고파?"

"..."

"우리 맛있는거 시켜 먹을까? 아니... 우리 외식하자. 우리 같이 살고나서 한번도 외식 한적 없었잖아. 뭐 먹고 싶어? 일식?,중식?,... 아니면 한식?."

내 계속된 질문에도 혜주는 계속해서 텔레비젼만 보고 있는다. 이제는 귀머거리까지 된 듯... 내 말이 들리지 않는것처럼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이 없었다. 계속된 내 말에도 말이다...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를 지를 순 없었기에... 다시 한번 혜주의 어깨에 손가락을 세워 두드리듯 가볍게 치며 불러본다.

"혜주야..."

그러나. 혜주는 대답대신 어깨를 빼며 날 한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손가락을 허공에 세운 채 나는 멍하니 닫힌 문으로 들어간 혜주의 뒷모습에 시선을 뺏기게 되었다. 결국 나는 한숨을 길게 쉬곤 옷을 대충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거실에 앉아 혜주가 보던 드라마를 보다가...

정말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왜 내가 잘못한것처럼 느껴지는거냐고...어차피 나랑 뭐 해줄것도 아니면서... 솔직히...내가 지랑 연예를 했어... 아니면 관계를 했어... 물론 즉흥적인 기분에 결혼이라는 말을 꺼냈고,,,좀... 신혼기분에 들떠있었던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신혼도 아니잖아...괜히 오랜만에 똘똘이 즐겁게 해줄라는 시간이나 망치고...'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었지만...괜한 내 자기합리화였고, 그런 합리화는 날 혜주가 생각하는 변태에서 정당한 남자로 세뇌시키듯 바꾸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의 응급실에서의 내 행동은 단지 이성을 잠시 잃은 내 어릴적 봉인했던 정의감에 불탔을 뿐... 다시 하라고 해도 절대 하지 못할 어처구니 없는 캐릭터였다고 취부하며 생각하기 시작한다. 20년이 넘는 생활동안 혼자 자유를 만끽하던 나였는데 아무리 혜주라는 여자가 가슴안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해도 그것의 결론이 좋게 끝날지도 모르는 판국에 내가 왜 죄 지은 사람처럼 행동해야 하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문득 바닥에 놓여있는 검은 봉지가 보였고, 아까운 샌드위치만 버릴거 같다는 생각에 도시락 통을 열고 하나 집어 먹기 시작했다. 맛은 끝내줬지만...애써 우걱거리며 씹기 시작한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혜주가 씻으려는지 수건을 들고 나오다가 날 쳐다본다... 그리곤 샌드위치가 들어있는 도시락 통을 냅다 훔쳐들고는 부엌으로 향한다. 보온병의 뚜껑을 열고 싱크대에 커피를 부어 버리곤... 이번엔 샌드위치를 들고 선 쓰레기통의 발판을 밟아 쓰레기통 뚜껑을 연다.

"야!!"

"..."

내 고함소리에 혜주가 놀랐는지 멈쳐 서서는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본다.

금욕이라는 것에 가뜩이나 짜증이 난 상태였고... 거기다가 왜 아무 죄 없는 먹을걸...혜주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는 충분히 소중한 먹는걸 버릴려는 행동으로 알 순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애매한 우리 사이에 더군다나 내 집에서 내 돈으로 산 재료를 가지고 만든 음식을 함부로 대하는 혜주는 혜주로 보이질 않았다.

"다시 가져다 놔!"

"..."

"내가 뭘 잘못했냐... 개도 먹을 땐 안건드리는데..."

"..."

이제는 날 흘겨보는 혜주의 눈빛이 조금씩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이것도 거처야할 우리 생활의 일부라는 생각에 계속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처음처럼 고함은 지르지 못하고, 그냥 평소처럼 얘기 하게 된다...

"얼른 줘..."

"..."(수그러든 내 말투에 혜주가 못마땅한 듯 골맨 표정으로 도시락통을 마지못해 내려놓는다.)

"혜주야..."

"..."

"우리가 진짜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넌 아직 어리지만... 난 벌써 나이가 꽉찬,, 그리고 결혼할 시기도 지났어. 그런데 내가 왜 네 눈치를 보면서 내 생활까지 깨트려야 하는거니? 남자란 동물이 원래 가끔 발정이 나기도 하는거야... 니가 내 마누라냐?? 아니잖아!..."

자기합리화에 말도안되는 설득을 가만히 듣고 있던 혜주가 옆에 놓여 있는 비닐봉지에서 노트를 꺼내 글을 적기 시작한다.

-알았어요. 이제 상관안할께요.

이게 아닌데... 다른 반응을 꼭 원한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쉽게 혜주가 이해(?)해 줄 줄은 몰랐고, 수긍(?)할지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프로포즈까지 했던 나였는데...화를 내면서도 알았다니... 혜주는 글을 적고는 그대로 욕실이 아닌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멍하니 방문을 쳐다보다가...갑자기 다 귀찮아 진다... 이런 연예감정을 느끼는것도 그리고 저렇게 투정을 부리는걸 풀어줄 기운도,, 갑자기 예전의 내 생활이 그리워지기 시작햇다. 결혼한 사람들이 하던... 해도 후회 않해도 후회라는 말이 이런 의미일 줄은 몰랐다. 물론 혜주가 날 좋아해준다면... 전혀 상황은 변하겠지만...

계속 샌드위치를 우겨 넣으며 텔레비전을 보고만 있는다...

그 이후 잠이 들기전까지 한번도 방에서 나오지 않는 혜주였기에 나는 거실에서 이불을 펴고 텔레비전을 켜둔 채...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를 잠을 자게 되었다.

단단이 삐졌나보다... 요즘 아침은 항상 즐거운 밥내음과 국냄새에 잠을 깼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땐 아무것도 없었다...

안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을 보게되자 어제 밀려오던 귀차니즘과 짜증이 또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도 화났다는걸 보여줄 필요가 있다. 어린것에 휘둘릴만큼 내 나이가 적은것도 아니고 거기에 정말로 친 동생처럼 지 마음대로 내 생활을 휘졌는 혜주였기에 나름 내 패턴을 마추도록 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혜주에게 인사도 없이 은행으로 출근을 한다.

회사에서도 하루 종일 인상을 구기고 있었는지... 항상 커피를 타주던 심대리가 오늘은 내 옆에도 오지 않는다. 감정을 표출하는데 익숙치 않은 나였기에 내 작은 얼굴표정의 변화에도 은행직원들은 조금 놀란 듯 보였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됐고 유과장이 나에게 점심을 같이 하자고 권한다.

굳이 피할 이유가 없었기에 난 유과장을 따라 나서게 되었다.

유과장이 선택한 점심메뉴는 스파게티였다... 무슨 점심을 라면과도 같은 면을 먹자는 건지... 하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고 따라갔다. 어차피 배에 들어가면 다 똑같을테니까... 음식을 시키고 가만히 주방을 바라보고 있는데 유과장이 말을 시작했다.

"진짜 무슨 일 있어요?"

"예??"

"요즘 사람이 변한거 같다는 말 못들었어요?"

"..."

"웃기도 하고... 오늘처럼 화난 표정으로 하루종이 뚱해있기도 하고..."

"제가요?"

"예."

"그랬군요..."

"혹시 여자친구 생겼어요?"

"아...아니요..."

"그럼? 인터넷쇼핑몰이 잘 안되요?"

"아닙니다. 그냥 요즘 사건이 많아서 그랬습니다."

"음~... 사건이 많아 보이긴 해요..."

"... 근데 잡담이나 하려고 부르신거 아니실테고... 심대리 건 때문에 부르셨나요?"

"... 그럼 달리 부를 이유가 있겠나요.그래도 눈치는 빠르신 편인가 봐요."

"은행에서 눈치밥만 먹고 살아서요. 상처가 거의 아물때가 됐으니 말씀하실 줄 예상도 했고요."

"생각해 보셨어요?"

"예."

"그럼 결정하셨군요."

"죄송합니다. 역시 저한테는 그런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도 없고요..."

"정말 못나셨내요..."

"예?"

"못났다고요. 무슨 남자가 그렇게 자신감이 없으시나요?"

"..."

무슨 말을 들어도 지금만 참으면 그냥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것이다. 항상 내 삶은 그랬다. 혜주를 만나고 며칠동안 나 같지 않게 행동했기에 지금 심신이 너무 지쳐있었다. 그동안은 혜주의 미소를 볼 수 있었기에 그 피곤함이 어느정도 수그러들었지만... 어제 이후 혜주는 날 짐승보다도 못한 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고, 피곤했지만... 급기야 차라리 그런 시선이 날 편하게 해 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건 내 나쁜 버릇인... 선을 긋는것이다... 혜주를 사랑하면 내걸로 만들면 된다...라는 생각은 그 날 하루였다. 그 응급실에서 부어있는 혜주의 얼굴을 봤고,, 죄책감으로 아마도 미쳤던게 분명했다...

사랑해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연인은 수두룩했고, 거기다가 혜주에겐 단지 난 아빠의 존재와도 같을 뿐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아빠로서의 역활을 해주는게 좋을 것이다.

"그렇게 살면 다른 사람들한테 욕 먹지 않나요?"

"글쎄요... 심대리한테도 욕먹긴 싫어서요..."

"예?? 지금 심대리 옹호하시는 거에요?"

"그런건 아닌데요..."

"모든 사람들한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건가요?"

"아니요... 모든 사람들한테 미움받기 싫을 뿐입니다..."

"예??? 지금 저랑 말 장난하자는 건가요!?"

"..."

"김대리님 진짜 어리석고 무능하내요... 적을 만들줄 알아야 출세하시는 겁니다..."

"출세 안하려고요..."

"참나..."

유과장이 날 어이없다는 듯 쳐다본다...

이러면 된거다... 저런 표정을 수도 없이 봤고, 결국 그냥 잊혀지면 된다. 혜주 앞이라면 모를까...다른 사람한테까지 의지될 남자로 보일 필요는 없었다...그냥 천천히 원래로 돌아가면 되는것이다...

오늘은 내가 일어나기 전에 유과장이 먼저 일어나 식당을 나가버렸다... 아직 밥도 안나왔는데... 남아서 혼자 다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다.

오후의 일과도 끔찍했다... 뒤에서 앉아 날 계속 노려보고 있는 유과장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일을 하기란... 오히려 직원들에게 유과장과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였다.

내 일을 다 마췄을 때... 서둘러 매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혹시라도 유과장이 날 또 불러세울까하는 걱정때문이었다. 매장에 도착한 난 집에 들어가봐야 삐져있는 혜주를 어떻게 해 줄지 곤란하다는 생각으로 컴퓨터를 켠다. 어제 찍은 사진들을 업뎃하며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일을 느릿하게 하는데도 다 끝내니 아직도 9시다... 가만히 앉아 있기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집인데라는 생각에 나는 매장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한다.

발걸음에 힘을 주며 일부러 도착한 집의 번호키를 평소와 다르게 소리나게 눌러 문을 열었다.

컴컴하게 꺼져있는 거실이 날 반긴다... 너무도 익숙한 어둠이 내 몸을 휘감았다...

"혜...혜주야???"

불러봐도 대답이 없었다...

'호...혹시...' 나는 서둘러 구두를 벗고는 혜주가 자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안방문을 열었다... 역시 불이 꺼져 있다. 그리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로 가봤지만 거기에도 없다...불이 꺼저 있다는건... 나간지 한참 지났다는걸 의미했다. 매장에 포장된 물건이 없는걸로 봐서는 낮에는 매장에서 일한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나는 서둘러 수이한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응 나 민호 인데."

[예??]

"혜.,혜주 아저씨... 혹시 혜주 만나고 있니?"

[예?? 아뇨...]

"그래 알았어..."

[왜요?? 지금 혜주 없어요?]

"응. 퇴근하고 오니까... 없내..."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선 다시 매장 좀 가보고 나중에 전화할께.]

전화를 끊고 서둘러 구두를 다시 신었다. 서둘러 매장으로 가보지만... 역시 잠겨있는 문이다... 도대체... 어디 갔는지...

나는 우선 집으로 향하게 된다. 혹시나 돌아왔을지 몰랐기에 서두르게 되었다... 매장에서 집까지 가는 시간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 숨을 헐떡이며 문을 열어보지만... 역시 인기척이라곤 찾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짜증이 밀려온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구두를 던져버리듯 벗어버리곤 거실에 앉아 담배를 하나 꺼냈다. 입에 물고 괜히 혼자 씩씩대기 시작한다... 찾으러 나가야 하는데... 들어오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 작은아빠가 내 집을 알리 없으니 분명히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거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하며 혜주가 들어온 후로 집에서 처음 펴보는 담배였다...

그러나... 연신 담배를 빨아드리는 입술이 담배불의 열기와는 상관없이 바짝 마르기 시작한다는 걸 느끼며 애써 태연한 척 앉아 있었지만... 생전 떨지 않던 다리를 요란하게 떨며 흔들고 있었다는 것도 모른 채 연신 시계만 바라보게 된다...

결국 담배 한개피를 다 피기도 전에 서둘러 끄고는 다시 신발을 신고 나갔다. 동민장...혜주가 갈 곳이라곤 매장. 수이의 집. 그리고 동민장이 내가 알고 있는 전부였기에 아직 확인되지 않은 동민장으로 서둘러 택시를 잡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다...

단숨에 큰 도로가에 도착한 나는 택시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짧으면서도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보내고 겨우 빈 택시를 세치기해서 탈 수 있었다...

"아저씨. 산동으로 가주세요..."

그리고 초조함에 등받이에 기대지도 못하고 출발하는 차의 창문을 바라보게 되었다.

동민장의 할머리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걱정스러운 생각을 할때 택시가 출발을 한다...

그리고 출발하자마자... 난 창문 너머의 혜주를 볼 수 있었다...

잘못본건 아닌지 눈을 껌뻑이며 자세히 다시 한 번 봐도 내가 사준 분홍색 추리닝 복장으로 이제야 집 방향으로 걸어가는... 혜주는 가슴에 무슨 보자기 같은걸 감싸안고 걸어가고 있었다... 젊은 남자와 함께... 혜주의 또래로 보이는 남자의 손에도 혜주가 들고 있는 보자기보다도 훨씬 큰 보자기를 들려 있었다. 그 남자는 키도 켰고. 짧은 머리도 어색해보이지 않는 훈남이었다.

몸도 다부지게 생겼고, 옷만 좀 후질구래한 밀리터리룩처럼 보이는 바지와 티를 입고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리고 남자는 뭐라고 연신 혜주를 웃겨주는지... 혜주의 얼굴에 미소가 보였고, 크게 웃는 시늉까지 한다...

택시를 멈춰야 하는데... 혜주의 그런 모습에 난 허무함을 느끼며 몸에 힘이 빠졌고,,,그대로 달리고 있는 택시의 등받이에 눈을 감으며 몸을 기댄다...

택시가 산동에 도착했지만... 나는 멍하니 등을 돌려 나에게 요금을 요구하고있는 기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손님!... 계산이요!!"

"예??,,아!... 죄송합니다..."

택시비를 지불하고는...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담배를 하나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지만...급하게 나오느라 집에 놔두고 왔다는걸 알게 된다...

두리번 거리던 내 시야에 편의점이 보였고 힘없이 걸어가 담배를 사선... 편의점 야외 의자에 앉은 채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방금전 혜주의 웃는 얼굴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둘의 모습은... 너무 잘 어울려 보였다. 나같은,, 아저씨와 같이 있는 혜주의 모습을 떠올려보지만... 아무리 비교를 해봐도...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그림으로 혜주에겐 그런 또래의 친구가 훨씬 잘 어울렸다...

얼마나 있었는지... 방금 산것처럼 느꼈던 담배가 반이나 줄어 들어 있었다...

갑자기 조금씩 마음속에서 배신감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혜주를 생각할수록 그 단어는 커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기도 했다가... 이내 냉정해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던 나는 미친놈처럼 실실 웃기 시작했다...

혜주가 남자친구가 없다고 본인의 입으로 단 한번도 말한적 없었고,,,수이도 혜주의 사정을 자세히는 잘 모른다는걸 감안한다면... 아름다운 혜주에게 남자친구가 없는게 더 이상했다. 다만... 병원에서의 의사 말대로 육체관계는 아직일것이고... 그렇다면 이건 혹시 복수일지 모른다. 어제 나와 보미의 섹스신을 목격한데 대한...하지만 이 생각은 곧 접게 되었다.

순진한 혜주가 이런 짓까지 해서 내게 질투심을 유발할 여자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아니면 정말로 혜주가 삶이 피곤해 잠시 친하게 지낸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애써... 배신이라는 단어를 없애려고... 이런 생각들 밖에 할 수 없는 나였다...

이런 생각을 한 나는 서둘러 다시 택시를 잡아타곤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아까 탔던 곳에서 내린 나는 뛰기 시작했다. 왜 뛰는지도 모른채 내리자 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그 때... 이제야 돌아오는지... 아까 봤던 그 밀리터리룩풍의 옷을 입고 있던 남자아이가 연신 미소를 지으며 내가 걸어가는 반대방향인 버스정류장으로 걸어오는걸 보게 되었다... 몸이 굳어져 그대로 멈추게 되었다...

내게 다가오듯 걸어오는 남자아이는 아이가 아니었다. 이십대 중반의 너무도 잘생긴 총각이었다. 비싸보이지 않는 밀리터리 바지와 사파리는 내가 입었다면 꼭 예비군아저씨처럼 보였겠지만... 훤칠한 키와 또렷한 이모구비로 옷을 소화하고 있는 이 남자가 나보다 훨씬 미남형임을 내게 말해주고 있는 듯 보여진다.

휘파람까지 불며 날 스쳐지나가는 남자의 몸에서 혜주의 향기가 나는 듯 느껴졌다...그 남자를 나도 모르게 잡을 뻔 했다... 걸어가는 그 남자의 등을 보며... 나는 애써 생각을 지우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며 집에 도착했고... 나올때 불을 끄고 나온 내 방...아니 이제는 혜주가 자는 방의 불이 켜져 있었다...

숨을 고르며 천천히 올라갔고, 평소처럼 번호키의 무음상태로 문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보이기 위해 숨을 참으며 구두를 벗고 거실로 들어왔다. 혜주가 방문을 열고는...

침대보를 들고 나온다...

나와 눈이 마주친 혜주가 침대보를 조심스럽게 여미며 날 무시하 듯 욕실로 스쳐 걸어간다... 그러나... 난 분명히 혜주가 숨기듯 들고 들어간 침대보에 묻어있는 소량의 선혈을 볼 수 있었다...

선혈... 빨갛고... 선명한 저 핏자국이... 내 눈에 각인되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고보니... 욕실로 향하는 혜주는 날 무시한게 아니었다... 단지 창피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빨개진 얼굴로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날 스쳐지나간게 분명했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나는 현기증이 일어날거 같다는 생각을 꾹 참으며 조심스럽게 혜주의 방문을 열었고.,, 침대위의 구겨지듯 놓여 있는 아직도 온기가 남은 이불을 조심스럽게 들쳐봤다.

침대보에 묻은 핏자국은 매트리스까지도 약간 적셨는지... 검붉은 얼룩이 희미하게 보였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황급히 이불을 원상태 시켜놓고... 나는 열려있는 방문으로 나왔다.

혜주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듯 흔들리는 혜주의 눈동자가 방금 이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확신을 준다. 다시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혜주는 애써... 날 무시하듯 천천히 걸어 방으로 들어가선 문을 닫았다... 작은 문닫는 소리가 내겐 꼭 천둥소리처럼 들려졌고, 나는 갑자기 술이 절실이 필요하다는걸 알게 되었다...

내가...정말로 혜주를 사랑했나보다...

지금 난 한 집안에 같이 있었지만 혜주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 내 욕심이 너무 컸었다는걸 깨닫게 되었다... 혜주와 도저히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집앞의 슈퍼로 나갔다...

소주를 샀고... 슈퍼앞에서 안주 없이 마시게 되었다. 술을 잘 마시지도 않는 나였지만... 사람들이 왜 괴로울때 술을 찾는지 알것같다는 생각을 하며 마시기 시작한 소주는 어느새... 두병의 빈병이 내 발 아래에 뒹굴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한참동안 술을 마시고 있는데... 혜주가 두리번 거리며 오피스텔의 건물 문을 열고 나온다... 팔짱을 끼고 풍만한 가슴을 더 돗보이며 두리번 거리던 혜주는 날 발견하곤 다가오다가 그제야 술병을 발견했는지... 잠시 멈칫거리며 서 있는다...

나는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며 3병째인 소주병에 입을 대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서서 혜주가 날 쳐다본다...

내가 계속 술을 연거푸 마시자... 혜주가 도저히 안되겠는지 내게 다가와 내 팔짱을 끌어당기며 일으켜 세우려 한다...

"놔...!!"

"응응~어!!"

말도 안되는 어버버소리를 하며 날 일으켜 세울 수 없자 혜주는 내 손에 들려 있던 소주병을 낚아채곤... 그대로 병에 남아 있는 술을 쏟아 버렸다.

한줄의 물줄기를 형성하며 내 눈앞에서 소주가 흘러 내렸고, 난 참질 못했다.

"이...이게!!!"

지금 난 혜주에게 손지검을 하려는 듯 손을 크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들어올린 손으로 차마 혜주의 얼굴을 때리진 못했다...

그러나 혜주가... 내 행동에 잔뜩 어깨를 움추리곤... 질끈 눈을 감는다... 그런 혜주였기에 난 손을 든 채... 차마 내려치진 못했다... 그냥 손을 내리고... 나는 다시 슈퍼로 들어가 소주병을 두병 사와 나와선 그대로 앉아 다시 한병을 따 마시기 시작했다...

"흑..."

혜주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눈물을 참는지... 훌쩍거리기를 몇번 하더니... 날 다시 바라본다... 하지만... 난 그냥 술을 마시며 혜주의 시선을 피하게 되었다... 저 눈물의 이유를 몰랐기에 난 상관하지 않았다...결국 혜주는 그대로 집으로 들어갔다...

남은 한병을 다 마시고... 나는 비틀거리며 매장으로 향했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왠지 매장으로 가야 할거 같았다... 지금 집으로 들어간다면... 내가 혜주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취중에도 매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술이 심하게 취했는데도 잠이 잘 오질 않았다... 깨어있으면서도 췻기가 점점 사라져가는 고통은 정말로 복부가 쓰라릴 만큼... 날 힘들게 했다... 몇번의 오바이트를 한 후... 시계를 보니 벌써 7시다... 출근 준비를 해야 했기에... 나는 무거운 몸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콩나물국의 냄새가 내 코를 간지른다... 혜주가 문소리에 잠시 움직여 날 확인하곤... 그대로 하던 요리를 계속한다... 혜주도 한숨도 안 잔듯... 부운 눈으로 콩나물해장국을 끓이고 있었다...

잠시 혜주의 등을 보게 된다... 순간 저 등을 안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만...어제 남자와 내 방에서 뒹구렀을 혜주의 모습이 떠오른다...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나는 그대로 옷방으로 걸어가 양복으로 갈아 입고는 가방을 들고 나와버렸다... 혜주의 탁한 신음소리가 들려 왔지만 내가 더 괴롭다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세수도 하지 않고... 무작정 나온 나는 회사로 향했다. 회사에서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망상들과 상상들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듯 느꼈기에... 나는 버스 대신에 택시를 타고 서둘러 출근을 하게 되었다... 키당번인 김대리가 올때까지... 담배를 피며 은행앞에서 기다리게 되었고, 문을 열자마자... 세수부터 하곤 내 자리로 들어가 앉는다...

정리를 하고 오늘 하루 할일을 계획세워보지만... 혜주의 나신을 자꾸 상상하게 된다... 보미와 겹치며... 아니... 보미와는 다르게 남자의 아래에서 고통스러워하며 첫경험을 했을... 혜주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어느새 직원들이 들어왔고... 내 수척한 모습에 심대리가 평소처럼 나만을 위한 커피를 들고 다가왔다.

"김대리님... 커피 괜찮으세요?"

"예?? 예..."

"무슨 일 있으세요?"

"아...아뇨... 어제 좀 과음을 해서..."

"수염이라도 좀 깍고 오세요... 부장님한테 한소리 듣겠어요..."

"그래요?"

"예... 처음봐요... 김대리님 수염난거..."

"..."

은색이 은은하게 발하는 우리 은행여직원들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심대리를 가만히 쳐다보게 된다...

창구담당에 펀드 보조라는 직책이 어울릴만큼 날씬한 몸매에 단정하게 뒤로 묶은 큰웨이브진 아주 약간의 갈색빛이 도는 심대리의 얼굴은 눈이 한번더 갈 만큼 미인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얼굴이 어디가서 빠질 만큼은 아니었다...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심대리가 자신의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 알고 잠시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는다...

"심대리는 남자친구 있죠?"

"예???"

"아뇨... 궁금해서요."

"헤어졌어요... 2년전에..."

"왜요?"

"남친이 너무 술하고 친구를 좋아했었어요... 아주 질렸죠 뭐..."

"원래 남자들 다 그러지 않아요?"

"다 그렇긴요... 김대리님은 안그러시잖아요."

"저요?"

"예... 제가 입사하고 나서 한번도 그런 모습 본적 없던걸요..."

"..."

"항상... 집에 일찍가시고..."

"..."

"여자친구도 없으시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윤대리님이 그러던데요... 김대리님 여자친구도 없고, 맨날 집에만 가서 방콕한다고."

"방콕 않해요."

"예??"

"비밀 하나 알려드릴까요?"

"..."

"그럼 퇴근 후에 같이 가실래요?"

"예???"

"시간 되시죠?"

"..."

"퇴근 후에 뵈요."

내가 왜 이러는지... 그냥 자포자기 한것인지... 아니면 회사를 위해서 이 한몸 희생하려는 생각이 갑지기 든건지... 나도 잘 알지 못했다... 그냥... 커피를 타다 준 심대리를 보게 되었고, 나오는대로 말을 했다. 흘러가는대로 말을 하다보니...퇴근후에 약속을 잡게 된다. 심대리가 일과시간이 시작되자 자리로 돌아갔고, 잠시 후 유과장이 날 지나치며 쳐다본다...

많은 의미의 내용이 담긴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달리 할 말이 없었기에 난 유과장의 시선을 피하며 계속 일을 했다. 앞으로 어떻게 일이 벌어질지 계획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유과장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회의도 없었고, 정산도 빨리 끝나 일찍 퇴근을 준비하고 있는데... 심대리가 신이 났는지...

나보다 먼저 챙겨서 나간다... 나와의 약속을 잊을리가 없는데...나도 곧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곤 밖으로 향한다. 역시... 심대리가 문에서 약 30m는 떨어져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날 기다렸다는 듯 손으로 오라는 행동을 했고, 나는 심대리가 있는곳으로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나는 생각대로 심대리를 이끌고 버스가 아닌 매장으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나였기에... 심대리는 긴장반 흥분반으로 날 쳐다보다가 내 시선에 다시 고개를 돌리도 한다.

택시에서 내려 난 심대리보다 한걸음 앞서 매장으로 향했고. 심대리가 쫓아온다...

불이 켜져 있다... 시계를 보니... 아직 7시도 안된 시간에... 잠시 머뭇거린 나는... 왜 내가 혜주의 눈치를 살펴야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후... 그냥 심대리를 이끌고 들어가게 되었다.

내 모습이 매장에 들어섰을때... 아직도 약간 눈이 부운 채 혜주가 날 반기며 미소를 짓다가... 뒤따라 들어온 심대리를 보곤 띄우던 미소가 사라지게 되었다.

"미스장 이제 퇴근해..."

"..."

미스장...이라는 내 말에 날 쳐다보는 눈빛을 통해 혜주가 놀라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나는 무시한채 심대리를 모시듯 테이블의 의자를 빼줬다.

심대리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어리둥절하다가 내 행동에 천천히 걸어서 의자에 앉았다...

혜주는 그대로 서서 나와 심대리를 번갈아 쳐다본다. 별 상관없었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배신감과 좌절감은 혜주에 비할바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발걸음을 옮겨 커피를 타기 시작했고, 혜주의 시선을 외면한 채 그대로 커피잔을 심대리에게 내놓았다. 그리고 앉으며 혜주에게 다시 말을 했다.

"뭐해?,. 내가 정리하고 들어갈테니까. 들어가..."

"응응..."(혜주는 아직 보내지 않은 수북히 쌓인 상자를 가리키며 택배기사를 기다려야 한다는 뜻을 내게 전하는 듯 보였다.)

"내가 보낼께. 송장 책상에 올려놓고 들어가."

내 말에 혜주가 잠시 심대리를 쳐다보더니... 항상 끼고 다니는 노트와 볼펜을 들고 천천히 걸어나간다...

문에서 사라졌을 때... 심대리가 뜻밖의 질문을 내게 했다.

"어머... 어린데 말을 못하나봐요?"

"예??...예... 벙어리에요."

"아!~~... 아깝다... 예쁘게 생겼는데..."

"뭐... 그렇죠..."

'탁탁탁탁...'

그제야... 계단을 올라가는 혜주의 빠른 발소리를 듣게 되었다... 아마도... 곧바로 집에 가지 않고 문앞에서 잠시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나보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기엔 너무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주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당장이라도 쫓아가고 싶었지만 또 똑같은 이전의 반복이라는걸 알고 있었기에 애써 참으며 그대로 앉아 심대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는다.,.

"에고... 안갔나보내...벙어리라고 해서 기분 상했나봐요..."

"..."

"근데 여긴 어디에요?"

"... 제 일터요."

"예??"

"저 팬티하고 브라자 팔아요."

"예??!!"

"여기가 김대리님 가게에요?"

"뭐...그렇다고도 할 수 있죠... 매출은 전부 제꺼니까요..."

"그럼 부업하시는거에요?"

"어쩌다보니까요..."

"근데... 왜 이런..."

"안녕하세요~~"

심대리의 말을 끊고 택배기사가 문을 두르리며 익숙한듯 들어온다. 미소를 짓고 들어오던 기사가 날 발견하고는 순간 당황한 듯보인다... 아마도 혜주를 보고 싶었나 보다... 금새 사무적인 말투로 변한 기사는 송장을 확인하고 갯수를 마춰본 뒤 밖으로 상자를 들고 나가기 시작했다... 오늘도 주문량이 상당한듯 보였다...

그러고보니... 요즘은 매장일에 거의 신경을 안쓰고 있었다... 그만큼 혜주가 일을 잘하는지... 클레임 전화도 단 한번도 걸려온적이 없었다...

택배기사가 마지막 상자를 들고 나갔을 때 나는 지갑에서 택배에 대한 요금을 지불하려고 했고, 의아한 듯 날 쳐다보던 택배기사가 내게 말을 했다.

"여기 사장님 아니세요?"

"맞는데요."

"월말에 전부 몰아서 계산한다는거 모르세요?"

"예??"

"여기 벙어리 아가씨가 그렇게 하는게 훨씬 수월할거 같다고 직접 저희 지점 사장님한테 편지를 써서 부탁했어요. 사장님도 글씨가 너무 예쁘다고 마음에 들어하시면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고요. 그 아가씨가 한술 더 떠서 다른데는 2500원인데 왜 여기는 3000원이냐고 대량거래하는데 깍아달라고 해서 일주일전부터 2500원에 쇼부 봤고요..."

"..."

"근데... 오늘 그 아가씨는 어디 갔나요?"

"퇴근했습니다."

"아!~~ 그만 둔거 아니죠?"

"예..."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다시 밝아진 얼굴로 기사는 마지막 상자를 들고 나간다...

혜주의 생활력에 감탄을 하며...잠시 혜주의 생각에 멍한 표정으로 심대리 앞 의자에 다시 앉는다.

"아까 그 아가씨가 일 잘하나봐요... 벙어리면 일하기 힘들텐데..."

"예..."

"근데 저 여기 왜 데려오셨어요? 이 비밀 털어놓으려고 데려 오신거에요?"

"..."

"근데 물건 장난아니게 많이 파시나봐요..."

심대리의 얼굴엔 기대라는 글자로 가득차 날 바라보며 말을 한다. 아마도 나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어했고. 그 듣고 싶은 말이 유과장이 심대리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말을 떠올리게 되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심대리의 눈빛에 담긴 기대감은 내겐 부담감으로 변해 전해진다...

결국 지금이 말할 때라는걸 알 수 있었고... 속에서 나오는데로 말을 여과없이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저 그래요... 다름이 아니고...제가... 심대리님 여기 모시고 온건... 털어서 먼지 하나 안나는 사람 없다는거 보여드리려고 모셔왔어요."

"예??"

"심대리님 지금 잘못하면 회사 짤릴지도 모른다는거 말씀드리려고요..."

"무...무슨..."

심대리가 잡고 있는 커피잔이 약간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왜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잘못 없으세요?"

"...예!"

"그럼 됐어요... 저도 이상한 일에 엮이는건 귀찮으니까요..."

"기...기가 막혀서... 귀찮다고 하셨어요?"

"..."

"지금 저 가지고 장난치시는거에요?"

"아니요... 저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하.한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그러게요..."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는 날 심대리는 붉어진 얼굴로 노려보다가 그대로 일어났다...

"지...지금 김대리님 실수 하는거예요!"

"제가요?"

"예! 사람가지고 장난치는것도 아니고... 이 수모는 꼭 갚을거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마세요..."

"후회... 정말 이상한 일 없다면... 계속 은행에서 볼텐데... 너무 맘 상해 하지 마시고요..."

"..."

심대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씩씩대다가 구두의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빠른 걸음으로 매장에서 나갔고... 계단을 거칠게 올라갔다.

심대리가 내 말을 들으며 입도 대지 않은 커피였기에 나는 잔의 손잡이를 돌려 잡고 천천히 향을 음미하며 마신다. 심대리의 복수를 생각하면 이렇게 느긋할 입장도 아니었지만... 어차피.일이 터지든 안터치든 짤리면 그만이니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다시 계단에서 또각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곤 심대리가 아까와는 사뭇 다른 조금은 겁먹은 표정으로 다시 의자에 앉는다...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고,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따가운지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많은 생각을 한 듯 보였다.

"왜요?"

"김대리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예?"

"제가 뭘 잘못하고 있다는 거냐고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무슨 명단하고 관계가 있다고 하던데요..."

"..."

"맞나요?"

"그건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심대리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다는걸로 봐서는 아마도 잘못된 정보는 아닌 듯 보였다.

"왜요? 사실이에요?"

"... 부장님이 그러셨나요? 아님... 새로운 그 계집애가 그러던가요?"

"계집애요?"

"유과장이요. 그년이 저보고 회사 고객정보 빼돌렸다고 그래요?"

"고객 정보였어요?

"아...아니...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은 설명하듯 길게 얘길 늘어놓다가 실수를 한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었다... 심대리도 예외는 아닌가보다... 자신의 말 실수를 깨달으며 '아니요'라는 말의 말끝이 흐려진다.

"전 별 상관 없지만... 위에서는 아닌거 같던데요..."

"뭐라고 하던가요?"

"전 잘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은행에 별 관심이 없어서요."

"..."

"다만... 준비를 한다고 하더군요. 이 건에 대한 처리에 대해서요."

"준비요?"

"예... 혹시 그 고객정보를 다른 곳으로 유출했나요?"

"아뇨... 기흥씨가 가져오라고 했는데. 저도 겁나서 아직 가지고 있어요."

"기흥씨요?"

"헛!..."

"기흥이라는 사람이 누구죠?"

"...제이은행...펀드매니저요..."

"그사람하고 무슨 사이세요? 애인사이에요?"

"그...그건..."

"지금 저보고 도와달라고 다시 돌아오신거 아니에요?"

"..."

"뭐라도 알아야 도와주던가 말던가 하죠."

"다 귀찮다면서요?... 절 도와주시긴 할거에요?"

"일 터져서 더 귀찮아지긴 싫거든요."

"...불륜이에요... 기흥씨랑은..."

"불륜?,, 결혼한 사람이에요?"

"예..."

"심대리가 뭐가 아쉽다고 유부남을 만나요?"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요... 근데 곧 이혼할거에요... 저 사랑한다고 했어요. 이번일만 잘 되면 이혼해서 우리 가정 꾸미자고 저랑 약속했어요."

"일이라면... 고객정보 받아서 빼돌리고 나서요?"

"그,그건..."

"그걸 믿어요?"

"예!. 이것보세요... 저 사랑한다고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금가락지까지 줬어요. 이런 소중한 반지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저한테 줬겠어요?"

심대리는 목걸이른 옷에서 빼내어 거기에 걸려있는 금반지를 내게 보여준다. 내 눈에는... 그냥 흔히 보이는 가락지처럼 보였지만... 심대리는 정말로 소중한 물건인양 내게 보여주고는 얼른 품속으로 다시 숨긴다.

"참나... 그게 할머니한테 물려받은건지... 산건지 어떻게 알아요?"

"사진 보여줬어요. 기흥씨가 소중하게 지갑에 넣고 다니는 어머니 사진에 이 금반지를 끼고 계시는 사진이요.

"..."

"그러니까... 김대리님만 눈감아주세요... 저 이것만 주고... 퇴사할거에요. 그리고 결혼하고나서 우리 다시는 안보면 되잖아요."

"퇴사... 사람이 순진한건지... 바보에요?"

"...됐어요...역시 김대리님 하고 싶은대로 하새요... 내일 당장 사표 낼테니까요."

"저 좋아한거 아니에요?"

"..."

"저한테 호감 있으셔서 여기까지 따라온거 아니냐고요."

"예전에는요... 기흥씨 만나기전에 호감가졌었고...오늘은 김대리님 마음 확인해보고 싶어서 안되는거 알면서도 따라왔어요."

"그러다가 제가 좋아한다고 했으면요? 그 기흥이라는 사람하고 헤어질거에요?"

"아니요...병원에서 2개월이래요..."

"예?"

"저... 이제 돌아갈 수 없어요... 이미 기흥씨 아이까지 가진 마당에... 제가 못할게 뭐가 있겠어요?!"

"..."

"그럼 김대리님 하시고 싶은대로 하세요. 전 이만 돌아가 볼께요..."

"자...잠깐만요..."

"예?"

"당장 사표 내지 마세요...우선 그 정보도 넘기지 마시고요. 제가 그 기흥이라는 사람 만나보고... 정말로 심대리님을 사랑하는거라면 그냥 묻어둘게요. 그때 퇴사를 하든 계속 다니든 결정하셔도 안 늦잖아요."

"..."

"데려다 드릴께요. 가요..."

씁쓸했다...이건 혹을 때려다가 하나더 얻은 꼴이 되버렸고, 더 귀찮은 일까지 스스로 떠맡은 꼴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혜주가 매장을 나갈때의 표정이 떠올랐다. 날 원망하는 듯 보였던 혜주의 눈빛에 지금도 가슴이 애렸지만... 혜주의 남자친구의 얼굴을 다시 생각해보면... 차라리 이런 거리감이 적당할 듯 느껴졌다. 매장에서는 사장으로서

집에서는 아빠로서 혜주의 앞날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에 들었던 배신감을 우선 접고 이렇게 생활하는것이 나와 혜주에겐 어울릴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나는 집이 아닌 매장으로 다시 향하게 되었고, 대충 싱크대에서 씻고는 소파에 누워버렸다.

아무리 생각을 정리했다고는 해도... 방금 전 혜주의 표정과 막상 집에 들어가서 뭐라고 설명할 말도, 그리고 설명하기도 싫다는 생각에 편하게 익숙한 소파에서 눈을 감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심대리로부터 내일, 그러니까 금요일 저녁에 그 기흥씨의 연락처를 받으며 만나라는 얘길 들을 수 잇었다. 아마도 나에 대해서 얘길 한 듯. 심대리의 표정은 어제보다도 더 단호해 보였다. 가슴이 답답하다... 내 주위에 있는 여자들은 왜 하나같이 이렇게 답답한 여자밖에 없는지...

한숨이 나온다...

퇴근을 하고 나는... 또 매장에 잠을 청했다. 청소가 말끔히 되어 있는걸로 보아... 아마도 낮에 혜주가 대청소를 한 듯 보였다. 그리고 소파에는 내가 어제 덮고 잔 이불까지 잘 개어져 원래 있던 구석에 놓아뒀다... 혜주를 보고 싶었지만...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리된 생각을 쉽게 몸이 받아들이지 않는 듯 느껴진다... 역시 고민이 많으면 잠이 오질 않는다는게 맞는지... 쉽게 잠을 청하지 못했기에 일어나 매장에서 좀 떨어진 편의점에 가서 소주와 맥반석오징어를 사온다. 그리곤 금새 사온 3병의 소주를 다 비우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나는 지금 약속장소인 종로의 커피숍에 나와 있었고, 그 기흥이라는 남자 앞에 앉아 있다.

펀드매니저라는 직업에 자부심이 강한 듯 양복을 잘 차려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젤로 고정한듯 보이는 30대 중후반의 인상좋아 보이는 기흥이라는 사람은 나와 첫 대면에 넉살좋게 악수부터 청했다.

나온 커피의 은은한 원두 향이 연신 웃는 기흥으로부터 방해받지만 않는다면 정말 좋은 향기라고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김대리님이 눈감아 주신다면... 저 미오씨하고 열심히 살아보겠습니다.

"..."

"저 말만 앞서는 남자 아닙니다. 뱉은 말은 꼭 책임지는 남자입니다!"

연신 웃으며 나에게 자신의 진실성을 어필하는 이 기흥이라는 남자의 얼굴이 내겐 너무도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귀찮은 일에 더군다나 혜주와 냉정중이라 좋은 기분일리 없는 내 상황에서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저렇게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게 날 더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다.

"지금 가정에 아이는 없으신가요?"

"...예?"

"부인분도 계시고 아이도 있을거 같은데요."

"하나 있습니다. 아들놈으로..."

"그 아이는요? 당연히 키우셔야 할텐데, 그럼 심대리 아이도 똑같이 사랑해 줄 자신 있으신가요?"

"그거야 당연하죠...어차피 제 아이인데요."

"알겠습니다. 그럼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럼 여기서 나가서 간단히 술이나 한잔 하시죠.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인데..."

"전 인연을 믿지 않아서요..."

"믿지 않다뇨... 김대리님도 앞으로 저랑 잘 사귀시면 도움이 분명히 될텐데요. 서로 상부상조 하시죠!"

"... 아니요. 됐습니다."

"아쉽군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거 같은데..."

"아!... 그럼 정보는 이혼서류를 본 후에 드려도 되는거죠?"

".예???"

갑작스러운 내 말에 이 남자가 반색을 하며 얼굴이 굳어졌다. 순간 당황한게 분명해 보였다.

"당연한거 아닙니까. 심대리도 지금 기흥씨 하나만을 보고 모든걸 포기하려고 하는데.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시고 살림을 차리셔야죠. 제가 알기론 임신 2개월부터 4개월까지가 가장 중요한 때라고 하던데요..."

"그...그거야... "

"아이가 뱃속에 있을때... 여자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기흥씨가 많이 도와주셔야죠."

"지...지금도...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있습니다."

"저녁에는 가정으로 돌아가시잖아요. 여자는 저녁에 가장 외로움을 많이 탄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민감한 임산부는 더 그렇고요."

솔직히 억지였다. 엄연히 한 가정의 가장인 기흥이라는 남자의 아내에겐 어떻게 본다면 심대리야 말로 천하의 나쁜년일지 모르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한번도 못 본 기흥의 아내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는 심대리의 편을 들 수 밖에 없었다...

정작 보는 입장이 바뀐다면 이건 기흥씨라고 지금 내가 부르고 있는 남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혜주를 생각하며 내게 내 스스로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뻔뻔하게 굴 수 있는 남자가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그 남자의 모습에서 단지 날 아빠로 생각하며 아무것도 모를 혜주에게 차갑게 대하는 내 모습을 보는 듯 보였기에... 나도 모르게 오기를 더해 남자를 쏘아 붙이기 시작했다.

"..."

"정리한다고 예전부터 말씀하셨다면서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무...뭘요?"

"기흥씨 집에다가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남편분한테 직접 듣는것보다는..."

"야!!! 이...이새끼가!!"

내 말을 듣던 기흥이라는 남자가 버럭 화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서는 당장이라도 내 멱살이라도 잡을 듯 날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왜그러시죠?"

"지금 말이라고... 누...누가 이혼을 한데!! 너 지금 협박하는거야?!!! 남의 가정 박살낼려고 협박하는 거냐고!"

"어차피 깨질 가정아닌가요?"

"이...이새끼가!!"

결국 기흥이라는 남자는 내 멱살을 잡고는 날 힘으로 일으켜 세웠다.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는 콧바람까지 뿜으며 주위의 시선은 부담스러운지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이어갔다.

"너... 속옷이나 파는 주제에 누구한테 협박질이야. 너 사회에서 매장 한번 당해볼래!!"

"지금 그 말씀은... 심대리랑 결혼할 생각도, 지금 부인분과 이혼할 생각도 없다는 건가요? 그러면서 심대리 뱃속에 소중한 생명을 넣어놨단 말입니까?"

"이...이 개새끼가..."

'퍽!~~'

남자의 주먹이 내 얼굴을 뭉갰고, 나는 그대로 의자에 힘없이 넘어지며 앉게 되었다. 맥이 빠진다... 잠시나마 이런 놈이 심대리의 희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내 자신이 너무 순진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그리고 내가 혜주에게 하는 행동이 이 남자와 뭐가 다른지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기에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여전히 씩씩대며 날 노려보던 남자가 나에게 침을 뱉으며 말을 한다.

"재수가 없을라니까. 누가 그딴년하고 살림 차릴 줄 알아!.엔조이면 엔조이 답게 놀아야지... 그년은 무슨 생각으로 피임도 않해서 임신이나 쳐 해가지고... 가뜩이나 짜증나 죽겠는데 어디서 개뼉다구 같은 새끼가!"

"참... 당신도 지저분하게 사는군..."

"무...뭐?? 이새끼가 덜 맞았나?"

"심대리님... 이게 당신이 좋아하고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남자란 놈입니다... 이제 아시겠어요?"

"무.뭐라고?!! 이게 실성했나!! ...어!?..."

뒷자리에서 심대리가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이 상황을 파악한 기흥은 얼굴이 더 일그러지며 나와 심대리를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니죠?!!... 다 거짓말이죠??"

"..."

뻔히 자신의 귀로 직접 들었으면서...이런 산파극이나 찍으려는 심대리가... 이제는 한심스럽게 보이기 시작한다...

난 이자리가 정말 싫어지기 시작했고, 옷에 묻은 침을 휴지를 꺼내 털며 일어나 그냥 나가려 했다. 이제는 둘이서 해결할 일이니 헤어지건 계속 만나건...그건 심대리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마 저런 말까지 듣고 다시 만난다고 한다면... 그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자리를 뜨려고 했을 때... 심대리가 내 팔을 잡고 늘어졌기에 어부정한 자세로 서 있게 되었다.

심대리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아무 말도 못하는 기흥이란 놈의 얼굴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김대리님... 저 집에 좀 데려다 주세요... 도저히... 여기에 못 서있겠어요..."

"... 가요 그럼..."

따귀라도 한대 날릴것이지, 심대리는 그냥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는 기흥을 남겨두고 내 팔에 부축을 받듯 기대어 커피숍을 나왔고, 나는 택시로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 준 후 심대리가 벨을 눌러 나온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에게 자세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는 좀 유심히 지켜보라는 말을 하곤 그대로 매장으로 그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심대리의 눈빛에는 나와 더 있고 싶다는 말을 하는 듯 보였지만... 어머님이 있었기에 그냥 돌아올 수 있었다.

10시가 넘어서야 매장의 불을 켜고 들어가 양복을 벗고는... 피곤함이 밀려와 잠시 소파에 앉아 있는다. 그리고... 이 삭막한 매장안이 왜 편해지는지 이유도 모른 채 소파에 눕는다.

오늘도 역시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었고, 물건들도 다 보냈는지 쌓여있는 상자가 하나도 없었다.

내 안락한 침대에 누워 있을 혜주에게 묘한 질투감이 느껴지면서... 문득 혜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애써 고개를 저으며 벗어놓은 양복상의에서 담배를 꺼내기 위해 테이블에 손을 얹었을 때... 문득 하얀 종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담배를 입에 물고 무심히 그 쪽지를 열며 라이터를 켠다. 익숙한 혜주의 필기채에 담배에 불을 붙이는것도 잊은 채 잠시 종이를 쳐다보게 되었다.

-아저씨. 집에 들어오세요. 바보같이. 주인이 왜 자기 집을 나가요!!. 제가 나갈테니 집에 들어오세요.

처음엔 아저씨가 다른 여자랑 그러는거 보고... 속이 많이 상했는데... 아저씨 말 듣고나서 생각해보니까...제가 혼자 착각한거 같아서 죄송해요. 저 걱정마세요. 저 장혜주에요!... 장혜주!!. 오뚜기가 언니하면서 인사하고 도망갈만큼 얼마나 혼자 잘 일어나는데요. 그러니까 전 걱정않하셔도 되요.

그리고... 너무 이여자 저여자 만나지 마시고, 이번에 새로 만나시는 분한테 올인!하세요.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아저씨!!! 정말 감사했어요.-

나는 멍하니... 혜주가 적어 놓은 종이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곤 서둘러 옷을 들고 매장의 문도 잠그는걸 잊은 채 집으로 향했다. 만가지 생각이 교차하며 달리는데 방해를 했지만...

어느새 집에 도착했고,,, 보이는 창문엔 불빛하나 없었다...

집에 들어가가기가 두려웠다. 혜주는 혜주일 뿐인데... 아무리 남자친구가 있고, 마음속으로 딸,,아니 친여동생으로 사랑해주자고 몇번이고 되새기기만 했던, 정작 행동하지 못한 내 자신을 원망하며...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번호키를 누르고,,

문을 연다.

컴컴한 거실과 방어느곳에서도 혜주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거실에 들어와 불을 켜고 맨 처음 내 눈에 들어온건.,. 신문지로 덮혀 있는 밥상이었다.

아마도 혜주가 날 위해 마지막으로 준비한 상차림이 분명했고, 나는 차마 그걸 열어볼 수 없었다. 그 신문지를 젖히는 순간... 눈물이 흐를거 같았기에... 나는 멍하니 침대가 있는 안방으로 향했고, 잘 정리된 침대에 눕는다... 혜주의 향기가 내 코를 간지르듯 이불과 배게에 묻어나 있었다...

그리고... 힘들게 차라리 잘된거라고 세뇌시키듯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이상 여자때문에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예전의 자유로운 삶을 살면 되는거다라는 말까지...

혜주는 좋은 남자와 행복하게 살면 되는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그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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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신거에요?"

"아무것도 않했는데요..."

"아무것도 않했는데... 심대리가 자진납세하듯 자수하고 사직서를 내요?"

"사직서요??"

"예...오늘 퇴근하는데 고객정보하고 같이 사직서를 제출하던데요."

"..."

지금 난 유과장과 유과장이 그렇게 싫어하는 1000원짜리 커피를 앞에 두고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렇게 혜주가 사라지고 며칠이 지났지만 연락이 없었고 몇번이고 전화기를 꺼내 수이에게라도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내겐 더 이상 '용기'라는 단어조차 남아있질 않았다.

간단한 얘기를 나누던 나와 유과장은 이제 곧 본사로 다시 돌아간다는 유과장의 말과, 그리고 이별주라도 한잔 하자는 부탁과도 같은 권유에 못이겨 유과장이 이끄는 술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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