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탈피-1
혜주가 적어준 '동민장'이라는 곳을 도착하고 20분째 찾고 있지만... 이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도통 찾지를 못하겠다...
눈에 띄지 않는 골목 속에 숨어있어 찾기 힘들 거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눈에 띄지 않을 줄은 정말 몰랐다. 결국 눈에 보이는 복덕방으로 들어간 나는 그제야 동민장이 노가다꾼들이 주로 이용하는 하루 6천 원짜리 하숙집과도 같은 장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설마 대한민국, 그것도 서울 하늘아래에 하루 숙박비가 6천 원짜리 방이 어디 있겠냐는 생각에 복덕방 주인의 농담이라 여기고 그려준 약도를 따라 골목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복덕방에서 알려준 골목길은... 점점 경사가 가파르게 변해 간다... 거의 산행을 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차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구불구불한 길의 연속이었다.
이런 길을 근 이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를 최소 두개 이상씩 하면서 다녔을 혜주를 생각하니... 왜 그렇게 허리가 얇아졌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땀을 흘리며 양복 상의를 벗고는 겨우 도착한 허름한 '동민장'이라는 간판을 찾았다. 입구부터... 내가 봐오던 화려한 모텔이나 호텔의 유리문과는 너무 다른 철문으로 만들어진 들어가기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위협을 준다. 혜주는 이런곳은 어떻게 찾은 건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들렸고 카운터라고 하기엔 좀 어색한 가장 바깥쪽의 문이 조금 열렸다...
60대 후반의 할머니가 익숙하게 앉은 채 얼굴만 내밀고는 내 행색에 의아한 듯 물어본다.
"뉘슈~??"
"아,... 저 여기 혜주...장혜주 방이 있다고 해서요..."
"혜주는 왜요?"
"아뇨... 혜주..."
"헤주는 왜 찾는데? 혜주 작은 아버지가 기다리다가 같이 시골 내려 갔슈..."
"예??..."
아마도 여기까지는 들어오지 않은 채... 그럼 혜주가 어디서 강간을 당할 뻔 한건지... 이 아주머니가 혜주의 작은아빠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건 최소한 그 놈이 여길 들어왔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는 급하게 혜주의 방을 묻게 된다. 설마... 설마 혜주가 어렵게 모은 돈을...
"할머니!!... 혜주방 어디에요? 지금 혜주 병원에 있어요... 그 나쁜 새끼 때문에 병원에 있다고요...방 어디에요?"
"무...무슨 소리여?"
"그 새끼 인간도 아니에요. 아마... "
"그런데 댁은 뉘신데..."
"저...저는...혜주 약혼자요... "
말도 안 되는... 그러나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인터넷 란제리 쇼핑몰 사장? 은행원??
아무것도 혜주와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었기에 급한 대로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뱉어내게 되었다. 역시 할머니는 날 의심하듯 쳐다보기 시작했고,, 그제야 내 양복 상의주머니에서 혜주의 학생증이 있다는 걸 기억하게 되었다. 분명히 할머니가 문을 안 열어줄거라며 혜주가 힘없이 종이에 하숙집 이름을 적으며 같이 건네준 학생증을 서둘러 꺼내 보여준다.
그리고 의심을 덜기 위해 내 명함도 보여 주게 된다...
한참을 확인하듯 학생증과 내 명함을 뚫어져라 보던 할머니는 갑자기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이고... 이를 어째... 그...그럼 증말로 지금 혜주 고것이 병원에 있단 말여?"
"예... 그 나쁜놈이 혜주한테 못된 짓을 하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빨리 문 열어주세요...지금 돈도 훔쳐 갔을지 몰라요..."
"그랴... 쪼매만 기두려..."
할머니가 방안으로 들어가서 열쇠를 찾는 동안... 복도가 내 목소리로 소란스러웠기에 방문이 열리며 여기저기서 건장하거나 왜소한... 삶에 찌든 모습이 역력한 남자들이 한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은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서있다는 것이 신기한 듯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듯 벽에 기대거나 문만 열고 날 구경하듯 쳐다보고 있었기에 난 할머니가 빨리 나오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눈이 어두운 할머니는 한참을 열쇠더미에서 혜주의 방 열쇠를 찾는 듯 짤랑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 나오질 않고 있다...
"어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입에 이쑤시개를 물고 있는 이마에 가로로 길게 흉터가 있는 작지만 보기에도 탄탄해 보이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넌 뭐냐?"
"예?"
"넌 뭔데... 울 혜주를 찾는 거냐고..."
"야...약 혼자요..."
"약혼자??"
"예..."
"뭔소리다냐... 혜주 고 어린것이 무슨 약혼자가 어디 있냐고!!... 너 뭐하는 놈이야..."
"약혼자 맞...아요..."
"콱!!~~"
점점 다가온 남자는 나보다도 훨씬 작았지만... 키가 문제가 아니었다. 쭉 늘어선 10개정도의 방에서 나온 남자 중 보스정도의 포스를 느낄 수 있는 남자의 기에 이미 나는 짓눌려 있었기에 손을 올린 남자의 모션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하는 남자들에... 당장이라도 나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혜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혜주의 얼굴만 떠오르지 않았다면... 난 이미 이 자리를 피해 내 안락한 안식처인 집으로 향하고 있었을 텐데... 빨리 혜주의 방에 들어가 통장을 찾아야 된다는 생각에 대지도 않는 용기를 부리게 된다...
"당...당신 뭐야!! 나 혜주 약혼자 맞아!"
"이게 그래도... 너 울 혜주 어쩌려고 온 놈 맞지??!!"
"무...뭐?...이.새끼가 너 안비켜!!"
'퍽!'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미는 작은 키의 남자를 내가 손으로 밀려고 했을 때... 갑자기 복도의 천장이 내 눈에 들어온다. 왼쪽 뺨에 충격이 전해져 온건 머리가 바닥에 닿은 후였다.
내가 어떻게 넘어진 줄도 모르고 나는 손에 힘이 빠져서 일어나려 끙끙 거리게 된다...
"너 같은 놈이 한둘인 줄 알아?!!"
"무...무슨..."
"울 예쁜 혜주 노리고 접근하는 놈이 한둘인 줄 아냐고 이 새끼야!! 욱!"
'쿵'
'울 예쁜 혜주'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허리를 들며 그대로 남자의 얼굴에 머리를 박아 버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폭력행위다...내가 이상해진 건 분명했지만... 도저히 이놈의 입에서 혜주의 이름이 나오는걸 참고 있을 수 없었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을 거 같은 끔찍하기까지 한 물컹한 살의 느낌이 내 이마를 통해 전해진다. 내 이마가 상당히 아팠는데... 이 남자는 넘어지지도 않은 채... 손으로 코를 가리곤 다시 나를 발로 걷어차기 시작한다. 사정없이 내 복부와 얼굴을 향해 들어오는 발에 맥없이 막으며 맞고만 있고 있을 때... 드디어 열쇠를 찾은 할머니가
나오다 말고는 소리를 버럭 지른다.
"뭐하는 겨!!"
"어머니... 이 새끼 또 그런 새끼라니까요... 혜주 노리고 찝쩍대는 그런 놈 말여!"
"야이 미친넘아! 너 혜주한테 몇 번이고 안 들었냐!! 그 김 머시깽이 은행원 아니냐!!"
"뭐...예???"
"예??"
엎어져 코피를 흘리고 있던 나도 할머니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게 된다... 혜주가. 내 얘길 할머니에게... 아니 여기 사람들에게 했다는 게... 가슴이 벅차오기 시작했다.
맞아서 아픈 게 아닌... 날 조금이라도 생각해준 혜주가 고마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맺히게 한다...
"뭐여... 그 은행쟁이여?"
"..."
"미안혀... 진작 이름을 말을 하던가..."
날 부축하는 손을 뿌리치며 할머니에게 열쇠를 받았다. 107호... 키에 적혀 있는 방번호를 찾아 서둘러 남자들을 헤치며 달렸고, 곧 혜주가 먹고 잤을 허름한 나무로 된 아이보리색 문 앞에 섰다. 왠지 모를 떨림을 억누르며 키를 꽂고 문을 연다.
겨우... 사람 둘이 들어가 잘만한 방안의 크기에... 이렇게 복도에 즐비할 수 있는 문의 구조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방안에는 가구라고는 달랑 면으로 된 지퍼 형으로 이루어진 70년대에나 있을법한 옷장이 다 였다.
원래 지저분했을 방은 혜주가 이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내서인지 전혀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다만...옷장이 열려 있었고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져 있는 이불과...혜주가 신주단지 모시듯 들고 나갔던 검은 가방이 열린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순간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애써 무시하며 가방을 열고 혜주의 허름한 양말을 찾아본다... 보이질 않는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는다...
방 밖에서 남자들이 내 행동을 구경하 듯 혜주의 방을 들여다보고 있었기에... 나는 곧 그 가방안에 바닥에 널려져 있는 혜주의 단 두벌의 옷 중 남은 한 벌을 챙겨 넣고... 샘플로 얻었을 듯 한 화장품들과 수건... 그리고 그제야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빈 허름한 양말을 찾아... 가방이 아닌 내 주머니에 넣고는 가방의 지퍼를 닫아버렸다.
아무 말도 없이 '동민장'을 나오는데 할머니의 근심어린 얼굴을 볼 수 있었다...이미 눈물을 조금 흘렸는지 주름이 무성한 눈가가 젖어 있었다.
내 삶에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행동을 하게 된다... 할머니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맞아서 쓰린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에게 얘기를 시작했다.
"할머니... 혹시 혜주 방값 밀린 거 있어요?"
"응? 아녀... 근데 많이 아프댜?"
"아니에요... 조금 아파요... 제가 이제부터 안 아프게 할 거예요...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그랴?? 증말이제?? 고것이 얼마나 불쌍한 줄 알면... 첨엔 이런데 들어올랴는 아라서 먼 사고를 쳤나 했는데... 그게 아녀... 얼마나 착하고... 고운데... 하루죙일 나가서 일만하고 잠도 거의 안 잔다니까...여기 와서도 이 써글것들 사람 만들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댜..."
"알아요 할머니... 죄송해요... 제가 일찍 찾았어야 하는데... 제가 죄송해요,...할머니..."
"아녀... 아니란께... 지금이라도 좋은데서 맛난 거 먹으면서 좋게 살면 되재..."
"예... 나중에 혜주랑 같이 인사올께요..."
할머니가 손을 놓지 않고 연신 눈물을 흘리며 내게 부탁하는 모습에... 혜주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새삼 알게 되었다. 그 영향력은 나만이 겪는 그런 것이 아님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내가 전혀 이상한 놈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어이~"
그렇게 어렵게 할머니가 손을 놔줬을 때...
아까 날 밟던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날 부른다.
"예?"
"미안하네... 진짜 혜주 남자친구인 줄은 몰랐어..."
"아닙니다... 그동안 혜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내가 혜주 고년 때문에 18년 동안 못 끊었던 담배를 끊었다는 거 아니냐...내가 고맙지..."
"크크... 김씨는 담배지... 난 술이여... 무슨 딸년도 아니면서 술만 좀 먹으면..."
"나는 계집질 안한지 이 개월이라니까! 고것이 얼마나 쌍심지를 켜고 노려..."
남자들이 한마디씩 얘기를 할 때마다... 혜주가 이개월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눈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 혜주가 병원이 아닌 내 매장이나 집에...집에 있었다면 이 남자들과 술을 마시며 혜주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나는 사람들과 극도로 친해지는걸 꺼리는 남자다...
그리고 이런 시간조차 아까워했을 남자였다. 그러나 혜주의 얘기를... 이개월간 혜주가 어떻게 지냈다는 걸 들을 수 있다면... 내 모든것을 버리고 이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얘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내 호주머니에서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그제서야 입맛을 다시듯 멋쩍어 하며 하나둘씩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핸드폰을 열고... 본 전화번호는 당연히 수이의 번호였다.
서둘러 받게 된다...
[여...여보세요...]
"네... 도착했어요."
[있어요? 지금 찾으셨어요?]
"으...응?? 응... 통장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해요..."
[정말요?? 정말 있어요?]
"응... 오늘은 편히 쉬고 내일 병원으로 가지고 갈게...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요..."
[예... 혜주야~ 있...뚜~뚜~~뚜~]
거짓말을 한다.
내가 남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혜주를 당장 피할 수밖에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이대로 혜주에게 빈 양말을 가지고 갈 자신이 도저히 생기질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우선 내 통장에서 1200만 원 정도를 찾아 은행에 다니는 특권을 이용해 새로 혜주에게 통장을 만들어 준다면... 모든 이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 작은아빠라는 사람에게서 받을지 못 받을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비록... 강간 미수라는 끔직한 상황을 겪은 혜주지만... 이렇게라도 다시 만났기에 나는 여기저기 터진 얼굴과 복통을 감수하며 미소 짓고 아까 어렵게 올라온 골목길을 전혀 힘들이지 않고 내려가고 있었다.
택시를 잡으려고 도로가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또 수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저기... 저 수인데요...]
"예? 왜요?"
[혜주가... 지금 퇴원한다고 박박 우겨서...]
"예??"
[제가 병원비 낼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고집 부려서요...]
"씨바...?...죄...죄송해요... 혜주보고 거기 꼼짝하지 말고 있으라고 해요. 제가 갈 때까지 만약에 퇴원 어쩌고 하면 당장 이 통장 버려버린다고 전해주세요."
[예?? 예...]
좋은 기분을 망치는... 혜주의 행동에 나는 택시를 타고 집이 아닌 병원으로 다시 향한다.
통장에 대해서 어떤 핑계를 댈 가를 고민하는데... 애속한 택시는 너무나 빨리 병원에 도착하게 된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괜히 응급실 입구 앞에서 담배를 하나 물어 불을 붙인다.
아무리 나라도 이 늦은 시간에 당장 통장을 새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기에... 난 대학입시때 논술시험을 볼 때보다 훨씬 고뇌하며 머리를 짜내고 있다.
그렇게 연달아 두개비의 담배를 끄고 한 개비를 더 입에 물때... 응급실 입구에서 나오던 수이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 오셨어요?"
"바. 방금이요..."
"근데 왜 안 들어오세요?"
"자...잠깐 담배 좀 피느라..."
"어...얼굴은 왜 그러세요?"
"예?? 아!~~ 아니에요 그냥 넘어졌어요..."
"저기요... 혜주가 통장으로 돈 좀 찾아와야 된다고 해서요..."
"예. 예???"
"저것이 카드같은게 있을 리 없잖아요...CD기에서 통장 넣고 비밀번호 누르면 돈 찾을 수 있다고..."
"지...지금 무슨 통장 인식 CD기를 어디서 찾아요... 우선 제가 계산 할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고 해요..."
"예?? ...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강간까지 당할 뻔했고, 거기다가 1년 동안 모은 소중한 혜주의 돈이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정말로 생각하기 싫었지만... 혜주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서둘러 계산을 하기 위해 응급실의 접수창고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혜주의 가방을 나도 모르게 부여잡고는 응급실의 접수창고로 향한 나는... 내가 왜 계산을 해야 되는지 잠시 행동을 멈추게 된다.
계산을 한다면...그건 퇴원을 한다는 말인데... 아무리 좋은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지금 당장 그 거지소굴 같은 델 보내긴 죽기보다 싫었고, 그렇다고 다시 매장으로는...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내 집으로 데려갈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망설이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지금 당장이라면 통장에 대한 거짓말도 뻔히 들킬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서 혜주가 누워있는 침대로 향한다.
젊은 의사가 수이한테 뭐라고 설명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게 된 나다...
"쇼크로 인한 일시적인 실어증으로 인한 언어장애일 수도 있고요. 검사결과로는 구음장애는 아닌 듯 보이니까... 시간을 두고 더 지켜보죠..."
"으으~~"
혜주는 뭔가 말하려는지 또 수이한테 쪽지를 달라고 손짓한다. 소리를 낼 때마다 고통스러운지 일그러지는 얼굴이...보기에도 안쓰럽게 느껴진다...
말하지 못하도록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나였지만... 힘겹게 글을 쓰고 있는 혜주의 손만 바라보게 된다.
'오늘 퇴원할게요...'
"안됩니다. 검사를 더 해야 정확한..."
"으윽!!"
머리를 세차게 흔들다가... 통증에 얼굴을 감싸는 혜주다...
"선생님 며칠정도 더 입원해야 되죠?!!"
"예?? 누...누구"
"약혼자요... 혜주 약혼잡니다."
"아! 예... 많이 놀라셨죠... 다행히 강간검사에서는...죄송합니다. 따로 나가서 얘기하시죠..."
의사는 나를 데리고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내가 듣게 된 혜주의 상태는 심각했다. 영양실조 초기에... 폭력으로 인한 다발성 쇼크로... 음성장애의 일종인 실어증증상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의사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강간 미수로 그칠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이럴 때일수록 약혼자 분이 옆에서 지켜줘야 한다는 의사에 말과 함께 말이다...
힘없이 응급실로 들어가려 할 때... 혜주가 문을 열고 나온다... 얼굴은 퉁퉁 부어서... 날 쳐다보는... 아니 노려보는 혜주의 눈빛에 몸이 굳어진다...
"왜?,, 여긴 왜 나왔어..."
"..."
아무 말 없이 혜주가 손을 내민다... 손목과 손에도 그 작은아빠라는 놈에게 격렬하게 반항을 했는지... 여기저기 상처가 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의미모를 혜주의 손짓에... 나는 가만히 손만 바라보고 있다... 혜주가 내가 여전히 들고 있던 가방을 채갔다. 서둘러 가방을 뒤지는 혜주의 행동에 나는 말까지 더듬으며 말을 한다.
"?...혜주야... 통장은 내가 따로 숨겨놨어..."
"..."(가방을 뒤지던 혜주가 행동을 멈추고 날 바라본다.)
"진짜야... 또 잊어버릴지 모르니까..."
혜주는 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손을 내민다...
있을 리 없는 통장을 꺼낼 수도 없었기에... 난 최대한 표정의 변화 없이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기 시작한다. 다시 손을 세차게 흔들며 통장을 원하듯 내게 들이민다... 혜주의 눈빛에는 원망과 함께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그런 혜주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나다...차라리 악덕 사업자나... 뻔뻔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에는 어느 정도 익숙한 나였지만... 이런 눈빛은...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지,.진짜야... 오는 도중에 그...거기 뭐냐... 지하철 안전금고에 넣어놨어... 걱저.?..."
이미 혜주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고, 눈칫밥만 몇 년을 먹고 산 혜주였기에 내 거짓말을 쉽게 간파한 듯 맺히던 눈물은 곧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힘없이 주저앉아...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혜주가 쓰러지듯 옆으로 누웠다...
"혜...혜주야..."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 수이가 달려와 혜주를 부축해보지만... 이내 실신한 듯 혜주는 눈을 감고 있다. 그제야 나도 정신을 차리고 혜주를 안아 올려 다시 응급실로 뛰듯 들어갔다. 혜주를 침대에 눕히고 급히 간호사를 찾는데... 달려온 간호사는 무슨 간단한 검사를 하더니... 우리보고 걱정하지 말란다...
잠시 혼절한 듯 보인다고... 지금 정신이 많이 불안전한 상태니... 충격 좀 주지 말라는 훈계까지 하고서야 간호사가 돌아간다...
"작은 아빠가... 가져간거에요?"
"..."
"진짜 무섭다..."
"걱정 마세요... 지금 경찰서에 있다고 했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럴까요?..."
"예... 낮에 들고 나갔으니 찾을 시간도 없었을거에요... 아마 통장 그대로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혜주 좀 다독여주세요... 지금 제가 옆에서 지켜주기엔 혜주가 너무 힘든 거 같아서요..."
"근데...무슨 약혼자에요?"
"예...예??"
"아까... 선생님한테..."
"..."
"혜주가 사장님 말씀을 은근히 하던데... 그런거에요?"
"아...아니에요... 근데... 혜주가 저에 대해서 뭐라고 했어요?"
"..."
"욕했죠?"
"이거 말해도 되는지..."
"왜요? 진짜 욕했어요?"
"...변태에... 야한 거 좋아하고... 사업장에서... 여자랑..."
"..."
"근데... 아빠 같아서 좋았데요... 비록 변태 갔지만..."
"아...아빠..."
"..."
차라리 듣질 말 것을... 오빠나...삼촌도 아니고 아빠라니...갑자기 몸에서 기운이 쭈~~욱 빠지면서 긴장됐던 몸이 풀어져선 철제 의자에 주저앉게 되었다...
"사.사장님..."
"휴..."
"근데... 얼굴은 진짜 왜 그러신 거예요?"
"넘어져서요..."
"정말로요?"
"예...그것보다... 그 경찰서가 어디에요?"
"OO경찰서요..."
"혜주 좀 잘 보살펴주세요... 다녀올게요."
"예..."
경찰서란 곳을 태어나서 처음 와봤다... 그것도 자정이 넘은 시간에 강력반이라고 적혀 있는 삭막한 공간에는 더군다나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내가 들어갔을 땐... 텅 비어있는 간이 유치장 안을 먼저 볼 수 있었고, 텅 빈 강력반 사무실 안에 즐비해 놓여있는 책상들 중에 한자리만 사람이 차지하고 앉아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안 봐도 저 놈이 그 작은 아빠라는 놈이란 걸 알 수 있었기에... 나는 곧바로 달려가 그놈의 멱살을 잡으며 들어 올렸다.
내 행동은... 지금 내가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아니... 당연한 행동이겠지만... 나라면... 방관자인 나에겐 의도하지 않은 너무도 폭력적인 행동인 것이다.
"너...넌 뭐야!!"
"이... 이 새끼!!"
내가 주먹을 날리려고 팔을 뒤로 뺏을 때... 갑자기 앉아 있던 남자가 날 저지한다...
"누구세요?!!"
"너... 너!!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니가 사람이야!! 어떻게 조카를..."
"누구시냐니까요?!!"
날 잡은 형상의 강압적인 행동에 잡고 있던 멱살마저 놓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이 남자를 노려보며 씩씩 대고 있는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형사가 내 손에 수갑을 채우곤... 그 남자로부터 떨어진 자리의 책상에 날 채워놓고는 겁을 주며 진지하게 묻기 시작했다...
"누구세요?"
"혜...혜주 약혼자요..."
"장혜주씨요?"
"예..."
"진정하실 수 있으세요? 안 그러면 수갑 못 풀어드려요..."
"..."
"그럼 잠시만 열 좀 식히세요... 출동 다녀와서 지금 조서 꾸미고 있으니까요..."
남자는 날 그대로 놔두곤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앉는다...
"그러니까... 18시 30분경에 조카가 말을 안 들어서 훈계하다가 폭력까지 가했단 말씀이죠?"
"예..."
"그럼... 과실 치상은 인정하시는 건가요?"
"예... 근데 고것이 두 동생을 남겨두고 지만 살겠다고 몸을 팔고 당겼다니까요..."
"무...뭐.!!! 야 이 씨발넘아!! 이 쳐 죽일 새끼!! 너 시발 일루 안와!!"
나는 듣다가 분이 터져선 수갑이 채워진 책상이 들썩일 정도로 발악을 하기 시작한다. 도저히... 듣고 있을 수 없는 남자의 말에 난 손과 발을 공중에 휘저으며 그 남자의 몸에 닿기만을 기도 한다...
"아저씨!! 좀 가만히 있어요!!"
"형사아저씨... 저거 다 거짓말이에요! 저 새끼가... 우리 혜주 때리고 강간까지 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거기다가 1년 동안 잠도 안자고 밥도 안 먹고 모은 돈 다 훔쳐 갔단 말이에요!!"
"아!! 정말 조용히 하라고요!!"
"저 씨발넘이... 야!!"
"아저씨!! 아저씨도 조서 한번 꾸며볼래요?!! 이거 지금 공무집행방해인거 몰라요?"
"저...저 새끼가 말도 안 되는 말을..."
"조사하면 다 나오니까... 좀 조용히 하라고요."
"..."
씩씩대며... 겨우 진정하려 애를 써본다...
"그래서... 지금 저 사람도 얘기하는 강간은 하지 않았다?"
"강간이요? 이 세상에 지 조카 강간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습니까... 병원에 물어보세요, 고년 지금 성관계 증거가 있나... 아! 있을지도 모르겠네...1년 동안 집나가서 몸 팔고 다닌다고 소문나서 얼마나 동네 창피한데..."
"야!!!"
"꽝!!!!!"
내 고함소리에 더 이상 참지 못했는지... 형사가 보고서를 책상에 세게 내려치며 일어난다.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와선... 날 노려본다... 대한민국 경찰이 공정하다고 했던가... 지금 이 순간에는 그런 개뿔 뜯어먹는 소리는 엿이나 먹으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진짜!,,, 어차피 죄가 있으면 벌을 받을 것이고, 죄가 없다면 풀려나는 게 법인데... 지금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후~~ 이거 풀어봐요...저 새끼는..."
"당신 진짜 약혼자 맞아? 딱 보니까 30중반은 되어 보이는데!!. 장혜주 22살하고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그건..."
"당신 직장 어디야?"
"대민은행입니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입니까!! 나 처넣고 싶으면 당장 넣어요!...대신 저 새끼도 같이 한방에 넣으라고요!! 한방에 같이 말이에요."
"말로 해선 안 되겠네... 야!! 한순경!!"
형사가 다른 순경을 부른다... 아마도 날 다른 곳으로 인도하려는 듯 보였기에... 나는 최소한 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형사에게 고개를 숙이며 얌전히 있겠다는 말을 애원하듯 하게 되었다... 참기 힘들었지만...저 새끼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에 대해... 남아서 반론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날 자제하게 만들었다...
"다시 한 번 소란피우면 진짜 이송시킬꺼에요..."
"예..."
"그럼... 강간은 없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그냥 다시 시골로 가자니까 그년이 욕을 하잖아요... 어떻게 지 불쌍한 동생들은 생각도 하지 않고..."
"이거 지금 장혜주씨 입원해 있는 병원에 물어보면 다 결과 나와요! 거짓말 하면 죄가 추가된다는 거 아시죠?"
"알죠!! 물어보세요. 제가 따귀를 좀... 세게 때린 건 인정하지만... 무슨 말도 안 되는 죄를... 거기 혜주가 묵고 있는 하숙집 같은데 가보셨어요?"
"예.,사건 현장이 밖이다 보니 거기선 별다른 얘기가 없던데요."
"당연하죠... 전부 범죄자 같던데... 거기 있는 놈들도 다 털어봐야..."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할 거고요... 그럼 옷은 왜 찢으셨어요?"
"찢긴요...집에 가자고 부탁까지 했는데...욕을 하니까...때리고 끌고가다보니 그렇게 된 거지... 아니! 어느 부모가 자식 잘못되는 꼴 그냥 지켜보고 있겠습니까... 제가 제 사랑하는 조카에 손찌검까지 했을 때... 제 가슴은 얼마나 아팠겠냐고요..."
손이 떨려온다...
만약 내가 혜주를 몰랐다면...혜주가 이개월 동안 묵고 있던 그 하숙장의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나도 이 남자가 지껄이고 있는 거짓말에 동조까지 할 정도로... 남자는 혜주를 비뚤어졌지만 정말로 사랑하는 작은 아빠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나는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이럴 땐... 내 방관자적인...그리고 제삼자로서 상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버릇이 도움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고, 이남자의 입에서는 계속 가족폭력에 대한 주장을 이어갈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형사님... 그럼 그 통장에 대해서 물어보세요... 혜주가 일 년 동안 어렵게...두세개씩 알바를 해서 모은 돈 말이에요..."
"알바? 훗... 하긴 몸 파는 것도 알바일지 모르겠네..."
"이...새끼..."
내가 형사에게 말을 하자 비아냥거리듯 받아치는 이놈의 뻔뻔함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수갑만 채워있지 않았다면...
"그럼 그 통장 얘기는 뭡니까?"
"그게 왜 그년 통장이에요... 내가 모아둔 돈 홀라당 가지고 튄 년한테... 그거 다 쓰고 몸 팔기 시작한 거라니까...그리고...가뜩이나 집안형편 어려워서 지금 빛이 얼만데..."
"무...뭐?..."(참고 또 참았다... 뚫린 입으로 어떻게 말을 하는지 들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얼마나 힘들까해서 150만원씩 꼬박꼬박 올라와서 직접 전해줬더니...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50만원은 나한테는 미안하니까...동생 통장으로 넣어줬더구만..."
"그래요?"
"그럼요...제가 그렇지 않아도 매달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끊은 차표를 다 가지고 있어요... 얼마나 설득을 열심히 했는지... 형사님도 생각해보세요... 젊고 반반한 여자애가 서울에 올라와서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먼저 죽은 형님한테 미안해서 없는 살림에도 이상한 곳으로 빠질까봐 매달 돈을 줬더니만...괘씸해서 돈 다시 다 챙겼구만..."
"알겠습니다... 그래도 우선 상해죄는 신고로 접수된거라서요. 가족폭력도 엄연히 범죄입니다..."
"그건 저도 반성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 못나서..."
"야!!! 이...이...쳐 죽일 놈..."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너 이 씨발놈아... 그 돈 내놔!! 그거 내놓으라고!!"
"아저씨... 진정하시고 어차피 삼자대면까지 할 거니까... 요즘 경찰이 얼마나 수사를 잘하는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혜주 지금 충격 받아서 실어증까지 걸렸단 말입니다!! 저새끼가 강간하려고 해서... 말도 못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단 말이에요..."
"참나... 그거 다 쑈라니까..."
"이...개새꺄!!!"
사람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저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나는 채워진 수갑이 조여와 상처를 내며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책상을 끌며 이 남자를 잡으려고 기어가듯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뭐가 들었는지 엄청나게 무겁게 느껴지는 책상인데도... 내 발악에 가까운 몸짓에... 어느새 이 남자의 발목까지 손이 닿을 듯 했다...
그때... 형사가 나와선 나를 저지하며 일으켜 세운다... 내 무력한 존재에 나는 힘을 써보지만... 뜻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어!...아저씨 손목뼈 다나가요...진정하시고 앉으세요."
"저...저 새끼를..."
"알았으니까 진정하시라고요... 이러다가 신경까지 다쳐요..."
"...흑흑..."
결국 눈물이 흐른다...
눈앞에서... 저 악마 같은 인간에게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하는 내 존재 자체가 정말로 싫어졌다...
"그...돈이...그 돈이 어떤 돈인데... 너...너 같은 게..."
내 흐느낌은 절규가 되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저 목을 꺾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소심하고 내성적인 내 성격인데도 살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정도로 분노하며 그와 정비례하는 감정의 묻힘이 날 힘없이 주저앉게 만들었다...
흐느끼며 앉아 있는 내 옆을... 형사가 그 남자를 데리고 간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는데... 형사가 다가와선 수갑을 풀어준다...
그리곤 담배를 하나 꺼내 내게 권한다... 나는 담배를 받지 않았다...
"너무 걱정 마세요...내일 날 밝는 대로 나가서 사전면담하고... 증거 수집해서 병원으로 피해자분 만나러 가겠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약혼자라는 분이 정신 차리셔야죠...
이런 모습 보이면 피해자분이 어떻겠습니까..."
"피해자가 아니고... 혜주... 장혜주입니다..."
".,...알겠으니까 얼른 병원에 가보세요... 응급차라도 불러 드릴까요?."
"아니요... 어차피 혜주 있는 병원으로 갈겁니다..."
혜주를 피해자라는 말로 듣기 싫었다...정말 피해자가 될 거 같다는 생각에... 나는 형사의 말을 수정해준다...
내 팔에서는 뼈가 보일정도로 깊게 파인 상처로... 아픔보다는 슬픔이 팔을 통해 전해졌다... 피를 흘리며 힘없이 걸어 나가는데... 도저히 안 되겠는지... 형사가 수건을 가져와 내 팔을 감싸줬다...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힘없이 도로옆 인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꼭 불안해하며 걱정했던 일은 모두...들어맞는다... 지금 느끼고 있는 불안이 그래서 더 싫었고,, 날 미치게 한다...
이런 감정이입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아직 아무것도 결론 나지 않은 상황에서 얼마나 허무하고 쓸데없는지를 충분히 현실에서 느꼈던 나였기에... 나는 혜주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
혜주의 몸 상태가 갑자기 떠올랐다... 지금 정신을 차렸을지... 아니면 아직도 기절해 있을지...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아직도 부어있는 얼굴에 사정없이 뺨을 날리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탄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2시가 넘어가 이제는 간호사들도 별로 없는 아까보다 더 한산한 응급실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훌쩍이는 혜주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깨어났나 보다...
나는 애써 표정에 미소를 지으며 혜주가 누워 있는 침대로 향한다... 옆에서 측은하게 혜주를 쳐다보고 있던 수이가 날 발견하곤 혜주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힘을 주어 걸어갔고, 철제의자를 바짝 침대에 대어 혜주의 옆에 앉았다...
"형사가 걱정하지 말래... 죄 짓은 사람은 꼭 죗값을 받는다더라... 법치국가잖아 대한민국!!"
"..."
"정말요? 그 나쁜 놈 경찰서에서 봤어요?"
"응... 뻔.뻔하게 말을 하긴 하는데... 이렇게 증거도 다 있는데 뭐..."
혜주가 눈물을 짓던 부은 눈을 비비며 날 쳐다본다... 저 가냘픈 손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스물둘 꽃다운 여자의 손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혜주의 내려놓은 손위로 손을 옮겨본다... 아까 날 피한 혜주였기에... 난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또 흠칫 놀란 혜주가 손을 뺀다...
"미...미안... 힘들지?..."
내 말을 들으며... 혜주는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내 손목을 쳐다본다... 아차!...방금 전까지 수갑이 채워져 피가 홍건이 젖어 있는 수건을 잊고 있었다...
"으으응~!"
"아...아냐... 이...것도 넘어져서 그...그런 거야."
"으으!!!" (혜주가 내 손을 낚아채서 잡고는 떨리는 손으로 수건을 푼다...)
"괘...괜찮다니까..."
손을 빼보려고 했지만...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신경이 다쳤는지... 손을 쉽게 뺄 수가 없었다...
수건이 풀렸고,, 선명히 드러난 수갑자국과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는 피가 혜주와 그리고 수이를 놀라게 했다...
"으으윽!!" (혜주는 자신의 상처도 잊은 채... 내 손을 부여잡고는 피를 멈추게 해보려 노력한다...)
간호사를 부르려는 듯 혜주가 소리도 못 내고 입만 벌린 채 웅얼댄다... 들려오는 탁한 혜주의 신음소리만 응급실 안에 펴진다... 혜주는 눈물을 쏟으며 안절부절못하곤...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크게 소리를 내려 애를 쓴다...
"괜찮다니까... 목 아프잖아... 내가 알아서 할..."
"윽윽!!"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혜주가 날 쏘아본다... 모든 게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듯 눈빛에 괜한 원망을 담고는 날 노려본다...)
손목을 너무 꽉 누르고 있는 혜주의 손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나 보다... 혜주는 이내 손에 조금 힘을 빼고는 수이보고 얼른 간호사를 데려오라는 듯 목을 젓기 시작했고, 오랜 친구인 수이는 알아들었는지 놀라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고는 간호사에게 달려간다.
12바늘을 꿰맸다...
마취도 하지 않고... 신음소리도 흘리지 않은 채... 혜주의 옆이 떠나기 싫어 괜히 때를 써서 이동식 카트에 손목을 대고 바느질을 했다...
그런 내 모습에 혜주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하루 동안... 내가 겪을법한 10년 치 사고와 사건을 겪은 듯 피곤한 몸에... 진통제를 맞고는 그대로 혜주를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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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와이셔츠를 그대로 입고... 나는 혜주 앞에 서 있는 형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이의 중요한 수강이 있다는 말을 들은 내가 보내 버렸다. 가길 꺼려하는 수이였지만 형사들이 왔을 때에 듣게 될지도 모르는 충격적인 사실을 아직 완전히 알지 못하는 수이에게 들려주기 싫다는 생각으로 보낸 것이다.
혜주는 날 도망치듯 떠날 때 친한 친구에게도 자신의 속사정을 다 얘기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을 했기에 내 배려 같은 행동이었고, 어느새 진정이 많이 된 혜주도 수이를 보며 부은 얼굴로 미소를 보내며 가라는 시늉을 했다.
예상대로... 형사들은 혜주가 말을 하지 못하자 수사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듯 보였다.
혜주가 적는 글씨를 보며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그리곤 의사와 얘기를 나눈 어제 수갑 채운 형사가 날 따로 불렀다...
"은행 다니신다면서요. 오늘 금요일인데 출근 안하시나요?"
"월차 냈습니다... 어떻게 되나요?"
"그게..."
"..."
"증인도 없고... 오늘 피의자가 부인이 제출한 열차표도 상당부분 맞아 떨어지고요... 의사분도 강간은 없었다고 말씀하시는데..."
"무,,뭐라고요?"
"진정하시고 들으세요."
"..."
"그 하숙집 같지 않은 곳에 가봤더니... 정말 여자 혼자 살기에는 많이 힘들어 보였습니다. 처녀성 검사를 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 그동안의 성관계 증거지... 강간이나 혜주씨가 돈을 훔쳤거나 그동안의 그 작은아버지와의 연관성을 찾기는 힘들고요..."
"그...그럼... 이게 단순 가정폭력이라는 말입니까?"
"물론 장혜주씨가 직접 작은아버지를 고소한다면 상해죄로 엮을 수 있겠지만... 그 작은아버지가 혜주씨의 두 동생을 돌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서... 그것도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입니까... 그 놈이 우리 혜주를 강간하려고..."
"근데 증인이 없단 말입니다... 산동네라서 근처에 CCTV도 없고,.,, 단순히 피해자와 그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형사입건하기에는 저희도 곤란하다는 거죠...거기다가 안면도 없는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작은 아버지 아닙니까..."
"...그...그럼 돈은요? 돈은 찾을 수 있습니까?"
"그게... 어제 차압 걸린 통장으로 바로 날려버려서..."
"예??"
"장혜주씨가 입금시켰다는 증거가... 아르바이트한 곳에서 곧바로 입금한 증거라도 있으면 되는데... 전부 혜주씨 본인이 한날에 전부 입금하고 계좌 이체를 한거라서... "
"그거야 혜주가 일한곳에가서 물어보면 되지 않습니까?! 당연히 아르바이트해서 받은 급여일하고 날짜를 조회해보면..."
"근데... 그 돈이 꼭 그 돈이라는 증거도 찾을 수 없단 말입니다... 저도 지금 선생님 하시는 말씀 들으면 속이 답답해 미치겠는데...어쩌겠습니까... 이 망할 놈의 법이 증거 우선인데..."
"..."
"그럼... 그 동생들을 제가 데려오면요!... 그러면 혜주가 상해죄로 고소할 수 있는 거죠?"
"그게..."
"또 뭐요!! 또 뭐가 있는데요?!!"
"답답하신 건 충분히 알겠는데...지금 보호자로 되어있는 작은아버지의 호적에 동생 중 한명이 올라가 있습니다..."
"예??"
"그것 때문에 강제적으로 데려올 수도 어렵고요..."
"..."
어이가 없고... 기가 찼다... 아무리 법이 우선이라고는 해도... 뻔히 당한 강간미수에... 훔쳐간 돈도 증거가 없어 찾기 힘들 거라는 말이... 어제 참았던 분노가 괜한 짓이었음을 증명했다.
어제 바로 그놈의 목을 비틀었어야 했는데... 내가 멍하니 형사를 쳐다보고 있자니... 형사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병원을 빠져 나갔다...
혜주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나가서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겨우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인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발밑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를 보고 있는데... 수이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숨을 헐떡이며 내 앞에 멈춰선 수이가 겨우 진정하며 물어보기 시작했다.
"형사 왔었어요? 뭐라고 해요?"
"..."
"왜요? 그 놈 돈 다 썼대요?"
"수이씨... "
"예??"
"제가 혜주 잠시 맡아도 될까요?"
"..."
"지금 혜주씨 집도 그렇고... 그 하숙집에는 다시는 못 보내겠어요..."
"그럼 사장님이 어쩌시려고요? 정말 결혼이라도 하실거에요?"
"아니에요...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럼요?"
"혜주 낳을 때까지만... 지켜주고 싶어요... 아무것도 못해주는데... 너무 불쌍하잖아요..."
"...형사가 뭐래요? 안 좋데요?"
"예... 잘해야... 가족폭력이라내요..."
"예?!! 그게 말이 되요?"
"그러니까요... 혜주 망가지면 어떻게 해요..."
"아저씨는요? 아저씨 때문에 혜주 망가지면요... 혜주가 그렇게 아저씨의 이상한 가계에서 뛰쳐나오고 얼마나 울었는지 아세요?!!"
"..."
"아저씨도 똑같아요... 어른들은 다 똑같아요..."
"..."
수이가 눈물을 흘리며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수이의 눈물을 보면서... 그 때의 생각이 떠올랐다... 혜주가 그렇게 매장을 나가버리고... 아무렇지 않게 이개월동안 바쁘다는 핑계를 대던 나였기에...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일어나서 응급실로 걸어 들어간다...
혜주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수이를 보며 잠시 서있던 나는 혜주에게 바짝 다가갔다.
내 모습에 당황한 듯 날 쳐다보는 수이는 아랑곳하지 않고...나는 혜주를 바라보며 속에서 나오는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진심인지...흥분인지 모를 감정으로... 아니 가슴속에서 너무도 그리워하는 혜주의 얼굴을 쳐다보며 나는 울먹이듯 얘기를 시작했다...
"혜주야... 미안... 정말로 미안해... 우리 결혼하자...내가... 지금 상처 다 치료해줄께... 결혼하자..."
혜주가 날 빤히 쳐다본다...
감동을 바라거나...기쁨의 눈물을 바라는 프러포즈가 아니었다. 단지... 지금 혜주가 닥친 현실에서 구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슴에서 우러나는 진심어린 내 고백이었다.
수이는 옆에서 연신 눈물을 흘리며 혜주를 바라본다...
가만히 날 바라보던 혜주가... 천천히 노트를 집어 들고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응급실안의 간호사들의 속닥거리는 소리도 내가 오로지 신경을 쏟고 있는 혜주의 손에 들려있는 볼펜심이 굴러가는 소리에 묻혀 내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혜주가 천천히 노트를 내게 보여준다...
'저 동정 받을 바에는 여기서 죽어 버릴래요.'
"아...아냐... 동정 아니야... "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볼펜을 휘갈긴다...
'지금 저 동정하는 거 맞아요...그런 아저씨 다시는 안 볼래요...'
가슴이 답답하고...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그때... 수이가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아는지 혜주를 설득시키며 날 도와준다...
"혜주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원룸도 위험하잖아...그렇다고 그런 일 당한 하숙집으로 다시 돌아갈래? 아저씨가 지금 너무 감성적으로 변해서 결혼이라는 얘길 한 거지... 네 말대로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으니까... 당분간만 아저씨한테 신세좀 지자..."
혜주가 다시 글을 적는다...
'싫어!. 나 혼자 어떻게든 살 수 있어...'
"야!! 이 계집애야!! 너 지금 돈 하나도 없는 알거지야... 몸이라도 성하면!! 너 어쩜 이리 이기적이니... 너 그렇게 혼자 또 나가서 일한다고 돌아다니면... 내가 공부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렇다고 우리 집에 있을 수도 없잖아!! 방금 말했잖아 그 나쁜 놈이 또 들이닥치면!!...너 어떻게 할 건데!! 넌 이런 내 부탁도 못 들어줘?!! 못된 년...진...진짜... 못됐어..."
끝내 수이가 어제부터 겨우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려 대성통곡을 한다...
혜주를 안고는 엉엉 울기 시작한 수이였기에... 혜주는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는다...
결국...수이의 도움으로 혜주는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에 들어오기로 결정을 한다. '당분간만'이라는 글을 노트에 적으며... 끝내 협상 같은 글로 내게 신세지는걸 싫어하는 눈치였다.
이틀 만에... 집에 들어왔을 때... 혜주와 수이를 집 앞에 세워두고는 성급히 들어가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내가 맡아도 퀭한 이 노총각 냄새를 빼지는 못하더라도 방바닥이라도 치워야 했기에 혜주와 수이를 문 앞에 세워둔 채 땀을 흘리며 아픈 손도 잊고는 청소를 급하게 한다...
대충 치웠을 때... 문을 열고 어색한 미소로 혜주와 수이를 반긴다...
내 엄청난 땀을 보고... 혜주가 부은 얼굴로 살짝 미소를 띠어 준다...
그 비열하고 악마같은 새끼가 경찰서에서 쉽게 풀려날 줄은 전혀 모른 채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혜주를 위한 뜻하지 않은 내겐 행복한 동거기 시작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