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변화 3 (4/19)

4. 변화 3

"김대리님 지금 부장님이랑 얘기하는 저 깐깐해 보이는 여자가 이번에 여의도 지점에서 온 유과장이라는 사람이죠?"

"그럴걸..."

"참나... 과장 순번 김대리님 아니에요? 무슨 진급심사를 이따위로 한데요..."

"내가 능력 없으니까 그렇지 뭐..."

"아니! 김대리님은 화 안 나세요? 이럴땐 답답해 죽겠어요."

"윤대리가 뭐가 답답해..."

"어휴..."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전표를 정리하고 있는 내 모습에 혀를 차는 윤대리의 마음과는 달리 솔직히 다 귀찮을 뿐이다. 이번 승급에서도 미끄러진 내 처지가 여러 사람들에게 처량해 보여 입방정의 도구가 될지는 모르지만... 정작 난 별 상관없었다. 과장이라는 호칭을 받게 된다면 그만큼의 일을 회사에서 나에게 요구할게 뻔한데...

2개월 전 장혜주가 내게서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나는 예전과 같은 삶을 살기 시작했다. 아니... 몇 가지 달라진 건 있었다. 보미와의 관계는 지속하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던 상황은 똑 같았지만 매주 수요일마다 보미가 혜주를 대신해서 내 매장에 저녁에 방문을 한다.

모델의 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본격적으로 인터넷이 보급되는 시기로 인터넷의 변화는 별천지와도 같았고, 이 시기에 어떻게 보면 남들보다 한발 앞선 외국모델 사진을 그대로 인터넷에 올리는 일반적인 란제리 인터넷쇼핑과 차별화를 두게 된 내 매장은 목요일에 사진을 업데이트시키기 무섭게 하루에 많게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방문하는 인기 쇼핑몰이 되었고, 배너라는 특이한 광고형식의 제안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가 적던 감상평을 보미가 적기 시작했을 때부터의 반응은 정말 생각이상으로 폭발적이었다. 보미의 성격상 적나라하게 적어 내려가는 단점은 오히려 물건들이 더 잘 팔리는 역효과의 시너지를 창출해 냈다.

다만 일이 많아질수록 내가 할 일이 더 많아졌기에 예전보다 더 무기력해졌고 오히려 보미와의 육체관계를 꺼리게 되었다.

그렇게 2개월동안 생각지도 않은 금욕시간과 함께... 보미는 다른 남자를 사귀게 된다.

그러던 중 진급심사에서 떨어진 건 정말로 나에겐 행운일지 모른다. 미리 말하지만... 난 돈을 쓸 일이 거의 없다. 혼자 살고 있는 오피스텔도 아버지에게 결혼자금 대신에 미리 받은 돈으로 내 명의로 되어있었고, 차도 없었으니 유지비도 들어가질 않았고 연예도 귀찮아서 여자를 안 만나니 쓸 돈도 없었다. 하지만 매장에서 한 달 동안 번 돈은... 2000만원이 넘는 금액으로 처음 삼구가 보내준 물건이 이제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할 정도로 지갑은 오히려 풍족해지고 있었다.

열심히 내 할일만 하면 은행만큼 편한 직종도 없었다... 추심과 압류에 관한 보조 뛰는 일만 없다면 말이다...

그런 내 귀차니즘과 우유부단은 위에서도 알고 있는 듯 이번 심사에서도 과장이 되지 못한 나였고. 정작 년차가 되질 않은 직원들로 인해 여의도지점에서 트레이드형식의 좀 특이한 인사가 이뤄졌다.

얘기가 다 끝났는지 부장이 일어나서는 퇴근 후에 환영회를 하자는 말과 함께 간단히 유송희 과장이라는 여자를 우리에게 인사 시킨다.

물론 난 참가할 필요성도. 이유도 없었기에 부장에게 가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퇴근 후 그냥 매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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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켜고 들어선 매장에는 빈 박스들이 수북했다.

혜주가 말끔히 치우고 간 매장 안은 2개월이라는 시간동안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이제는 어디에서도 혜주에 대한 추억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컴퓨터를 켠다.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는 어제 먹다 남은 이온 음료를 입에 대고 마시기 시작했다.

넥타이를 손으로 당겨 풀고는 대충 목에 메단채로 내 쇼핑 홈의 운영자 아이디로 로그인을 한다.

또... 주문이 60개 넘게 몰려 있었다...

대충 체크를 해보니 이번 발주에 대한 발송을 마치면 거의 모든 제품이 품절에 이르게 된다.

나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되었다...

택배 운송장 뭉치를 들고 하나씩 받아 적기 시작하는데... 거의 모든 주문자들이 남자이름이다.

내 씁쓸한 미소의 이유가 이것이다. 주문한 이걸 자기 아내나 여친한테 입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투자하는 돈이나, 시간의 허비가 그만큼의 가치가 있을지 의문도 들었지만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의 육체에 만족 못하고 이런 보조적인 헝겊쪼가리들을 걸치는 의미를 모르겠기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물론 먹고 좋은 떡이 맛도 있다지만...

내겐 그 먹기 좋은 떡 조차 없었기에 그저 사치로 느껴지고 있었다.

사실 이 일을 부업으로 하며 요 근래 한 달 동안의 판매량을 보고 난 적자니 놀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달에 20개 남짓 나가던 물건이었기에 아직은 이런 문화에 길들여지지 않은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했었던 나였는데 말이다. 감상평과 모델하나 투입했다고 이렇게 매출이 달라질지는... 60장이 넘는 송장을 작성하며 손목이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 때려치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루 중 이시간이 가장 싫었다...

다 적고 난 나는...핸드폰을 들어 삼구에서 전화를 걸었다...

[오~~ 친구!!!]

"엉! 뭐하냐?"

[세컨이랑 놀고 있지!!]

"팔자 좋구나...야! 물건이나 보내..."

[아 맞다!!]

며칠전의 통화에서 물건을 보내라고 진작 얘기했지만 삼구 이놈은 두세 번 더 확인을 해야 일을 하는 놈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기대도 하지 않고 있다.

"맞기는... "

[크크크... 어이!~~ 김싸장!! 돈 두 많이 버는데... 너 이러다가 진짜 은행 때려치는거 아니냐?]

"누누이 말하지만... 이 매장을 팔아버리면 벌였지, 은행을 왜 때려치냐!!"

[이대로면 3달 일하고 너 연봉 나오잖아! 그럼 때려칠만 하지... 보자... 지금이 12시니까...분명히 송장 적는 거 지금 끝내고 나한테 전화하는거지?!! 너 그거 과로다...]

"그렇지 않아도 이거 때려치울까 생각중이다..."

[허!!...야! 왜 때려쳐 인마!!. 남들은 그런 대박치면 눈에 핏줄세우면서 따라올 텐데...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야지.]

"에휴... 그리고 너 계좌번호 불러봐 이제 수익도 제대로 생겼으니까 애초에 말했던 2:8로 나눠야지"

[2대 8 ??]

"그래 인마... 나 2고 너 8이라며. 보내 줄테니까 계좌번호 불러봐."

[참나... 넌 바보냐?!]

"뭐가?"

[그러니까 네가 아직도 그러고 사는 거다...]

"..."

[농담으로 한 말을 진담으로 죽자고 달려드냐... 그리고 일은 너 혼자 다하면서 보내긴 뭘 보내!!]

"됐다... 내가 무슨 돈 쓸일 있냐..."

[참나... 보미라도 뭐좀 사주던가... 사이트 사진보니까... 진짜 꼴릿하게 찍었더만...]

"200이나 주는데 당연한 거 아니냐...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맞다... 야! 나 부탁좀 하자...]

"뭐?"

[돈은 됐고,, 그 사진 원본좀 보내라.]

"응??"

[이 엉아가 하는 일이 뭐냐?!]

"몰라. 네가 언제 한번이라도 말했냐?..."

[너 친구 맞냐?]

"친구는..."

[성인용품 총판 하는 거 아니냐... 한국에...]

"그랬냐?"

정말로 처음 알았다...하긴 일본이 그쪽으로 워낙 진보적인 나라니...

[너 이 새끼... 나 처음 일본에 올 때 술자리에서 뭐 들었냐?]

"술이 떡이 됐는데 그게 기억나냐...하옇튼 사진 보내 줄 테니까... 물건이나 보내...그리고 계좌번호는 메일로 찍어 놔라."

[안 받는다니까!!]

"알았으니까... 물건 값이라도 줘야 될 거 아니야..."

[아... 그건 그렇내...크크크... 알았어... 그럼 피곤할 텐데 잠이나 자라.]

"그래..."

[야...야!!!]

핸드폰 통화종료 버튼으로 손을 옮기는데 다급하게 날 부르는 삼구의 목소리에 다시 귀에 가져댄다.

"왜?"

[너 혹시 혜주 소식 들었냐?]

"..."

[못 들었구나... 궁금해서 물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도망갈 여자가 아닌데...]

"싱겁긴... 좋은 시간 보내라..."

통화종료 버튼을 누른다.

내가 잠시나마 혜주에게 마음이 흔들렸던걸 삼구가 눈치 챘는지... 일주일에 한두 번 통화할 때마다 혜주의 소식을 물어보며 내 머릿속에 다시 상기 시키는 삼구다...

잠시 잊었던 혜주를 떠올려본다.

내 성격 때문일까... 혜주의 얼굴이 불과 이개월 만에 흐릿해진 채 잔상만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돈을 들여서 혜주를 찾아볼까도 생각했었다. 요즘 세상에 사람 하나 찾는 건 돈이면 다 해결되겠지만,, 그렇게 억지 미소를 내게 보이며 도망가듯 떠난 혜주를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말이다... 믿음을 바라며 단 삼일동안이었지만 내 매장에서 안식을 찾았을 혜주에게 난 귀찮아질 거 같다는 생각에 애써 얽히길 거부하며 쫓아버리듯 몰아붙인 기억밖에 나질 않는데...

불을 끄고 매장을 서둘러 나오게 된다. 어둑한 반지하의 매장 안이 내 기분마저 우울하게 만들기 시작했고, 이러다가 우울증까지 생길 거 같다는 생각에 요즘 난 매장에서 일만 끝나면 서둘러 나오게 됐다.

저번보다도 더 화려하고 많은 양의 란제리들이 매장 앞 계단에 쌓여 있었다.

이걸 언제 다 카메라에 옮길지 걱정이 앞섰다. 물건이 많아질수록 귀찮아 지는 것도 많았기에 남들 같으면 매상에 반기며 물건을 들여놓겠지만... 난 그런 놈도 아니니...

힘겹게 물건을 장장 2시간에 걸쳐서 옮겨 놓고 담배한대를 물었다. 입에 담배를 물고 박스를 하나씩 풀기 시작하는데... 한 박스만 이상하게 포장이 견고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거기에 여러 가지 성인용품이 들어있다는 걸 확인했을 때에는 기가 찼다...

이 삼구 놈이 본업으로 날 전환시키려는 게 분명해 보였다...

다 귀찮아졌기에 그냥 물건들을 놔두고는 컴퓨터를 켜보지도 않고 매장의 불을 끄고 나와 버렸다.

오늘도 하루 업무가 끝이 났다.

내일은 수요일이니 일찍 가서 할일이 많다. 보미 오기 전에 찍을 사진의 속옷들을 골라야 되고, 아직 상자들도 다 그대로 있으니 어느 정도 정리와 청소도 해 놔야 한다.

혜주가 있다면 그런 건 다 알아서...

하옇튼 서둘러 퇴근준비를 하기 시작했는데... 새로온 유과장이라는 사람이 내게 다가오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김대리님..."

"응??..."

날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에 평소처럼 반말로 대답을 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유과장이 바로 내 뒤에 서 있었다. 내가 일하는 지점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직급이 높은 여자는 없었기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짧은 대답을 했을 뿐이다. 그런건 유과장이 오기전의 상황이었지만...

"아!~... 과장님... 죄송합니다... 전 심대리가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실수할 수도 있죠. 처음이니까... 오늘 시간 어떠세요."

"예? 오늘은 선약이 좀 있어서요..."

유과장은 내가 알기론 나와 비슷한 연배로 알고 있다. 내가 보는 보미와는 비교하기가 그렇지만 몸매도 나름 관리를 잘한 듯 보였고, 얼굴도 곱상한데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이다. 일명 골드미스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센스 있는 옷과 말투로 전입 온지 일주일 만에 이미 상당수의 직원들을 포섭한 듯 보였다.

유과장이 허리를 숙여 내게 바짝 다가와서는 날 깜짝 놀라게 한다.

"오늘도 그 야한 속옷 팔러 가시나요?"

"예??"

내가 투잡을 하고 있는 건 회사 내에선 절대 비밀이었다.

회사 내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알고 있지 않는 비밀을 온지 일주일밖에 안된 유과장이 알고 있다는 것에 난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쳐다보고만 있게 되었다.

"오늘 시간되시나요?"

"...자...잠깐이라면요."

"좋아요. 그럼 끝나고 잠깐 보시죠."

"...예..."

가방을 챙기면서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아직 인원조정도 계획에 없었고, 그렇다고 들어온 지 일주일밖에 안된 유과장이 내 약점을 잡고 뭘 이용할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날 희생양으로 삼아 무능력한 직원의 본보기로 삼으려는 게 맞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이건 최후의 통첩과도 같은 밀담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젊은 연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나와 앞에 앉아 있는 유과장에게는 좀 낯선 패스트푸드점의 이층에 앉아 커피를 한잔씩 테이블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이 여자도 커리어우먼답게 회사 앞 스타토끼로 들어가려는 걸 내가 빠른 발걸음으로 여기로 인도했다. 못마땅한 표정부터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분명히 내가 돈을 내야 할 것이 뻔했고, 잘리는 마당에 돈 만원을 왜 쓰냔 말이다... 두 명이니까 2만원이 넘은 돈을... 그래서 여기 와서 천이백원짜리 커피를 주문해서 앉아 있는 것이다.

유과장은 내가 내려놓은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고는 커피를 쳐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이게 자판기 커피랑 뭐가 다른 거죠?"

무슨 말을 저따구로...

"많이 다르죠... 위생 면에서도..."

"예... 제가 김대리님과 이렇게 따로 만난 건 그 속옷 판매건 때문만은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유과장의 본론에 커피를 마시다가 입천장을 딜뻔했다... 그 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면 뭐가 또 있단 말인가...나는 그 짧은 시간에 대출건, 고객 유치건, 아니면 요즘 말이 많은 펀드건??... 그런데 펀드는 내 소관이 아닌데...라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유과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회사에 특별히 투잡에 관한 제재가 있긴 하지만. 알아보니 지금 발전중인 부업으로 회사에 손실을 입힐 정도는 아니시더군요. 평소와 다른 근무태도도 보이지 않고요..."

"..."

"그래서 그건 우선 저만 알고 있기로 했습니다."

"우선이라고 하시면... 상부에 언제든지 보고 할 의향이 있으시다는 건가요?"

"예. 그건 김대리님이 하시기 나름이죠."

"... 솔직히 은행에서 잘려도 전 상관없는데요."

무리수다...

오히려 매장을 그만 뒀으면 그만 뒀지... 은행을 나갈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이 유과장의 말투에서 본능적으로 내 매장 건에 대한 약점으로 다른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무리수를 두고 있다. 방금 한 말대로 내 매장의 일개월간의 매출도 확인했다고 하면 내 말에 신빈성도 알고 있을 거고 그렇기에 '우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나를 떠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사하셨다면 아시겠지만 제 일 년치 봉급이 지금대로라면 매장에서는 3개월이면 충당할 수 있거든요."

"예. 그러시겠네요. 근데 이 커피는 너무한 거 아니에요?"

"예??"

갑자기 무슨 커피 얘기를...한 가지 주제에서 자꾸 벗어나는 말상대를 특히 업무상 얽힌 사람이라면 더 극도로 싫어하는 내 성격상 유과장은 정말 낙제점의 상대였다.

이건 내 우유부단함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 버릇이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나지만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말투는 그런 범규를 벗어나는 예의 없는 태도라고 배우고 커왔기에 몇 안 되는 확실한 규칙 중에 하나다.

"하시고 싶은 말이 뭐죠?"

"김대리님 여직원들한테 은근히 인기 있는 거 아세요?"

"..."

"모르시죠? 퇴근 땡하면 곧바로 그 야한 속옷 팔러 가시니까... 모르실거에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제가 봐온 김대리님이라면 성격상 자기한테 피해만 안주면 그냥 무시하시는 거 같은데... 지금 펀드관련 업무 중 김대리님과 친한 펀드 담당인 심영윤대리님 곤란한 일을 버리고 계셔서요."

"미스 심하고는 별로 안 친한데요..."

"그래요? 제가 보기엔 친하신 거 같던데... 아니면 심대리가 김대리님한테 마음이 있나보죠..."

"아닐걸요..."

"역시 사람하고 얽히는걸 별로 안 좋아하시네요... 일주일동안 지켜보니까 티가 나던데."

"그래서 지금 저보고 심대리를 조사라도 하라고 하시는 건가요?"

"하신다면 자세히 말씀드리고요. 아니면 그냥 없었던 걸로 하죠."

"예... 없었던 걸로 하세요. 그럼 전 할일이 많아서요.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날 멀루 보고 저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만남으로 유과장이 자신만만하고 무서울 게 없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고, 나에 대해서도 빠삭하게 조사할 정도로 능력있다는건 알겠지만 날 굳이 조사과에 보고할 의향은 없어보였기에 나는 그냥 유과장을 남겨두고 혼자 그대로 나와 버렸다.

매장에 가서 할일도 많은데 이런 귀찮은 일까지 생겨 짜증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어이없다는 듯 날 쳐다보고 있는 유과장의 시선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 짜증으로 인해 곧바로 매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수북이 쌓여 있는 상자들에 한숨이 나온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결정을 할 자신도 없는 나였기에 화를 누르며 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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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바꿨다.

정확히 말해서 카메라가 바꼈다... 보미는 적극적이었고, 내 20만 원짜리 카메라로는 자신의 아름다운 몸매가 반감되어 나온다며 투덜대더니 달랑 영수증 하나 가지고 와서는 내게 청구를 하고 있다.

어제 일로 어색해진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유과장의 시선을 애써 피했고 다른 날보다 배는 피곤함을 느끼며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나의 매장에는 이미 문 앞에서 상자를 들고 기다리고 있던 보미를 만나게 되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오늘따라 보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듣기 싫어진다... 평소라면 은근 매력으로 느낄 애교있는 말투였는데...

몸이 피곤해서 그런지 보미의 말투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어!...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그건 뭐냐?"

"아~~ 큭큭... 아무리 봐도 내 사진이 내 몸매를 제대로 표현 못하는 거 같아서, 이거 사왔어..."

"돈도 많다..."

"내가 돈이 어디 있어. 일시불로 샀으니까. 내놔!"

"뭐??"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상자를 열어 묵직해 보이는 카메라를 보미가 손에 든다. 날 피사체로 사용한 보미가 카메라의 전원을 켜곤 찍기 시작한다. 난 사진 찍히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누군가의 삶에 내 모습을 남긴다는 건 나에겐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어머니가 떠나가고 난 이후엔 집에는 더 이상 사진이란 게 없어졌다.

"찍지마라..."

"풋... 내 사진은 만날 찍으면서...근데 자기는 왜 꼭 없는 사람처럼 굴려고 해? 어떨 때 보면... 나한테도 꼭 벽을 치고 있는 거 같던데..."

"그런 게 어딨어... 나 피곤하다 얼른 찍고 집에 가자."

"자기 왕따지?"

"응...뭐???"

"분명히 왕따 당하고 있는 게 확실해...그치?? 누가 회사에서 괴롭혀?"

"뭐?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내가 너 때문에 웃는다."

"자기야... 왕따 당한다고 괜히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그래... 알았으니까 영수증이나 내놔."

"쿡쿡... 꼭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자!~~"

보미는 확실히 남자를 다룰 줄 아는 여자다. 지금 사귀기 시작한 자신보다 나이가 2살 어린 대학원생과도 그럭저럭 지내며 한시도 남친 없이 살았다는 말을 증명하고 있다.

젊은 놈의 체력에 완전히 빠져있었기에 나한테 들이대지는 않고 있었지만... 보미의 행동은 언제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취할 수 있는 빈틈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 대학원생 남친은 보미의 이런 이중적인 생활을 아직은 모르는 듯 나에겐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나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게 편하니까.

어느새 내 시선 앞에서 옷을 서슴없이 다 벗어버린 보미는 어제 내가 꺼내놓은 샘플들을 이리저리 만져보기 시작한다.

브래지어. 팬티 세트를 올려선 자기의 몸에 대보기도 하고, 별로인 듯 던져버리곤 다시 전신스타킹을 꺼내 입어보기도 한다. 언제 봐도 저 가슴은 정말로 예술인데...

내 시선을 눈치 챈 보미가 미소를 짓는다. 음흉한 미소를...

"자기 왜 그렇게 쳐다봐?"

"..."

"왜? 꼴렸어?"

"큭... 하옇튼 여자가..."

"여자는 왜?? 음~~ 자기 꼴렸구나..."

"그래 꼴렸다!"

"우리 한번 할까??"

"무,,뭐??"

"자기 근 두 달 동안 한 번도 안 뽑았지?... 혹시... 딸딸이 쳤어??"

"어휴... 넌...말만 안하면 참 괜찮은데..."

"자기가 이상한거지... 이런 말 해주면 얼마나 좋아하는데..."

"누가? 혹시 지금 만나고 있는 그 놈이?"

"쿡쿡쿡... "

"어째... 넌 제대로 된 남자는 못 사귀는 거냐?"

"자기가 이상한거야... 요즘에 자기 같은 사람이 어딨냐!!~~ 하긴 자기하고 결혼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됐거든... 난 흥미 없어... 그리고 매일 바람피우는 여자, 어디 가슴 떨려서 같이 살겠냐?!"

"피~~~"

"됐고 사진 찍자... 빨리 골라. 어차피 거기 있는 거 다 찍어야 돼."

"음~~~ 이거 어때?"

보미가 손에 든 것은 하얀색 원피스였다.

원피스라고 하기엔 좀... 구멍이 많다... 아니 아주 굵은 망사로 된 짧은 미니스커트식 원피스라고 하는 게 낫겠다... 내 시선을 음미하듯 천천히 다리를 들어 원피스를 입기 시작한 보미는 일부러 크게 허벅지를 들며 내게 자신의 중요한 부위를 노출시킨다. 언제나 그렇듯 잘 정리된 보미의 털과 그리고 계곡의 갈라진 틈이 보인다.

날 계속 쳐다보며 옷을 입는 모습은 지금 머릿속에 혜주라는 이름이 각인되어 있지 않은 예전의 나였다면 당장 달려들었을 정도로 내 자지를 크게 발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원피스의 어깨끈을 어깨와 팔이 이어지는 곳에 걸치고는 포즈를 잡기 시작한다.

한 손으로 어깨 끈을 살짝 들어 유두가 그 구멍사이로 삐져나와 들린 모습은 음란하며 뇌쇄적이다. 하얀색 하이힐을 신고 있던 다리를 자연스럽게 포개 모은다.

본격적인 사진촬영 작업이 시작 된다.

낯선 '찰칵'거리는 카메라의 소음과 플래시의 강한 빛이 어색했지만 보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포즈를 잡으며 섹시함의 끝장을 보여주려는 듯 포즈를 잡고 움직이며 사진기에 반응을 한다.

몇 번이고 보고 만졌던 보미의 몸이지만... 새로 건너온 란제리와... 바뀐 카메라 때문인지... 아니면 긴 금욕의 시간을 보내서인지...사진을 찍는 내내 발기 된 자지가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사각팬티에 쓸려 이리저리 움직이게 된다.

내 반응에... 보미도 반응을 한다.

점점 포즈가 섹시함에서 음란함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네 번째 의상으로 갈아입은 보미는 지금 밴드 스타킹과 오픈형 팬티, 가터벨트로 이뤄진 분홍색의 의상을 입고 상체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다리를 벌리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카메라의 셔터소리가 커진다는 나만의 느낌에 보미의 손이 서서히 그 갈라진 팬티를 가리기 시작한다.

부끄럽다는 그런 감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런 감정을 느낄 보미도 아니었고, 그 손이 곧 보미의 음핵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걸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내 생각이 잘못 된 걸 알게 되었다...

손가락이 좌우로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에 꼴려 있는 자지가 더 꼴리기 시작한다...

내 시선을 의식하듯 눈을 살짝 감고는 천천히 뒤로 뒷걸음질을 치고는 벽에 걸려 있는 흰색 배경 면에 엉덩이를 붙인다.

다리를 <>로 약간 벌린 보미는 내게 보여주려는 듯 손가락을 약간 세워선 보지의 입구를 서서히 앞뒤로 문지른다...

"사진 찍자..."

"...음~~ 자기야... 나 하고 싶어..."

"그냥 사진 찍자..."

"... 자기 진짜 이상해!!"

급기야 짜증을 낸다. 이내 손을 빼고는 이 상황이 창피한 듯 얼굴을 붉히며 보미가 설치해둔 배경에서 씩씩대며 걸어 나왔다.

날 노려보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익숙지 않은 사진기의 찍힌 장면들을 재생하려 노력하고 있다.

"자기!!"

그제야 얼굴을 돌려 발가벗고 있는 보미를 쳐다본다.

"혹시 그 아이 좋아했어?"

"뭐? 누구?"

"그 계집애 말이야!! 그 여자 만나고 나서 정말 이상해졌잖아..."

"...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나 갈래!!"

옷도 걸치지 않고... 그냥 나가버린다...여자가 저러고 나가면...이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보미니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보다 요즘... 보미 말대로 난 내가 생각해도 정신이 좀 이상한 놈이 된 듯 하다... 아직도 혜주의 잘 기억나지 않는 얼굴에 죄책감을 느끼는 건지... 몸의 반응대로라면 방금 보미의 음란함에 동조하며 같이 뒹굴었을 텐데.

끝내 혜주에게 아무것도 못해줬다는 죄책감에 보미의 맛있는 몸을 거부하게 된 이중적인 정신을 가진... 좀 이상해진 게 분명했다...

어차피...

인터넷에 올릴 네 컷은 준비 됐고, 나머지는 마네킹에 입히고 찍으면 된다...라는 생각에 적막감이 흐르고 있는 매장의 촬영장에 마네킹을 세우곤... 박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오늘 잠을 잘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래도 잠은 자지더라...

금요일 저녁에 난 또 유과장에게 불려 커피숍에 앉아 있게 되었다.

이번엔 미쳐 선수를 못치고 유과장의 들을 보며 스타토끼에 따라 들어왔다.

짐짓 진중한 표정으로 직원들 앞에서 날 호명하며 불렀기에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시계의 시간이 9시가 가까워져 배가 고파서 죽겠는데... 한마디도 하지 않고 30분 째 커피만 홀짝이고 있는 유과장으로 인해 화를 내며 나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몇 수십 번을 해봤지만... 나도 솔직히 유과장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궁금해지는 오기가 생겼다.

"김대리님은... 성격이 원래 그래요?"

이제야 대뜸 내 성격을 물고 늘어지는 유과장의 냉랭한 말투에 황당했다...

"예?"

"아니. 여자가 한마디도 안하고 있으면 먼저 말하는 게 매너 아니에요?"

"..."

"여자 친구 없어요?"

"그러는 유과장님은요?"

"전 없어요."

"저도요."

"저하고는 다르죠. 보니까 여자 친구 못사귀는거죠?"

"예??"

이 여자의 자존심에 감탄을 보낸다... 날 얼마나 알고 있다고...

"어제 김대리님이 운영한다는 그 쇼핑몰을 봤어요."

"..."

"우선 그런 아이디어는 괜찮네요... 모델을 사서 직접 제품을 찍어서 장단점까지 올리는... 그건 칭찬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 정도면 은행이라는 직장 때려치울 만 하시겠네요."

"..."

"그건 그렇고, 생각해 보셨어요?"

"뭘요?"

"심대리 건이요!! 홈페이지는 그렇게 똑부러지게 만드시면서 어떻게 은행 안에서는 그런 수동적인 태도만 보이시나요? 그러니 만년 대리죠."

"..."

참 남자 자존심 뭉개는데 일가견이 있는 여자다. 계속 다리를 꼬은채 커피를 마실 때를 제외하곤 팔짱을 끼며 의자에 기댄 채 날 바라보는 시선에는 분명히 날 경멸하는 눈빛과 멸시의 눈빛이 복선대게 깔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내 뱉는 말은 도저히 듣고 있을 수만은 없게 만든다.

"지금 심대리의 뒷조사를 저한테 부탁하시는 거 맞죠?"

"부탁이라... 김대리님은 여기 대민은행 직원 아니신가요? 사실 이렇게 의사를 묻는다는 것도 웃긴 일이죠."

"웃기시다면 윤대리한테 지시하시죠. 그 친구도 심대리랑 친하니까요."

"친하다고 심대리의 집까지 찾아 갈 순 없잖아요..."

"집이요?"

"예..."

심대리가 얼마나 큰 사건을 벌이고 있는지 약간은 궁금해진다. 은행이라고 해봐야. 일개 여직원의 횡령에 이렇게 조심스럽게 접근할리도 없었고, 그렇다고 집에 가서 굳이 찾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다 전산 상에 남아 있을 테니 말이다.

"집까지 찾아가야 되는 건가요?"

"예... 할 의향이 있으시면 자세히 말씀드리고요."

"그런 스파이 짓까지 하면... 저한테 무슨 이득이 있죠?"

"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입을 가리며 크게 웃는 유과장의 행동에 약간 긴장하게 된다. 웃음소리가 웃음소리로 들리지 않았기에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과 함께 유과장을 노려보게 된다.

"역시 김대리님도 야망이란 게 있긴 하군요."

"..."

"솔직히 김대리님 하는 거 보고 전혀 그런 쪽엔 관심 없어 보였고,, 그래서 심각하게 위에 보고를 해야 되는지 고민했으니까요."

"고민이요?"

"제가 일을 해보니... 남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더군요...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와, 안주하려는 자요. 안주하려는 사람은 더 이상 회사에 필요가 없거나 묻혀가는 그런 무능력한 남자가 대 부분이죠. 또 여자라면 모르지만..."

"..."

"그래도 다행이내요... 그 정도의 협상을 요구할 정도면 우선은 안심입니다."

"안심이요? 오히려 반대 아닌가요?"

유과장의 말 주변에 우선 한발 물러선 나였기에 계속 유과장 말의 꼬투리를 잡게 된다.

"협상을 요구하는 자는 그에 합당한 제시를 한다면 일처리에도 능숙할 수 있으니까요. 무조건적으로 지시를 따르는 사람은 우선 책임 회피부터 하게 되는 게 보통이고, 거기다가 위기상황대처 능력도 떨어지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거래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공범이 될 수 있는 거죠."

'공범'이라는 단어가 정말로 혐오스럽게 내 귀에 들렸다... 은행 일을 하면서 대출건의 일을 도와주다가 몇 번이고 봤던 불법보증건이나 무담보등의 권력에 투합 하는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지만 우선은 표정변화 없이 유과장의 말을 계속 듣고 있다.

"그래서요. 제가 만약 협조한다면 뭘 해야 되죠?"

"간단해요."

"간단이요?"

"예. 심대리의 집에 들어가서..."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말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지만... 금요일 이 시간에 울릴 리 없는 핸드폰이었기에 난 유과장의 핸드폰인 줄 알고 가만히 앉아 있었고, 이내 말을 끊고 날 노려보는 유과장의 시선에 내 핸드폰을 황급히 꺼내 들게 되었다.

처음 보는 낯선 번호다...

"죄송합니다. 잠시 만요."

유과장에게 양해를 구하며 핸드폰을 받는다. 역시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예. 김민호 입니다."

[안. 안녕하세요...]

"누구시죠?"

[저...저기...]

가만히 듣고 있는데 말을 더듬는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핸드폰에 찍혀 있는 번호를 확인해본다. 017...35...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번호인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저... 혜주 친구 수이인데요.]

"...혜주요??"

내 귀를 의심하게 되었다... 갑자기 이제 와서 혜주 친구라니...

[혹시... 지금 안 바쁘세요?]

"아뇨... 지금 바쁜데요. 미팅중입니다."

내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전화기를 말과 함께 끊어버리곤 다시 유과장을 쳐다본다...유과장과의 대화 내내 혜주의 얼굴을 잊으려고 노력해본다. 이제 와서 겨우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내 20년간 행동을 바꿔버린 삼일동안의 혜주와의 시간이 두려웠고, 무섭게 느껴졌기에... 나는 전화를 그렇게 끊어 버렸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만약 혜주를 진정으로 원하게 된다면...아니... 내가 나이 사십이 됐을 때 20대 후반의 혜주일 텐데 가뜩이나 귀찮은걸 싫어하는 내가 그런 혜주에게 맞출 수 있을지도 걱정이고, 망설이게 한다. 내가 연예인도 아니고... 그리고 혜주 같은 여자에겐 나같이 무심하고 귀차니즘에 빠져 있는 남자보다는 애정이 많은 남자가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했기에 나는 혜주에 대해서 더 이상 듣기를 거부했다. 다행히...더 이상 전화기는 울리지 않았다.

유과장의 제안은 간단하면서도 조금은 내게 무리한 요구인 듯 느껴졌다.

심대리를 꼬셔서 집에 찾아가 숨겨둔 고객의 정보를 확인하라는 것이다. 사건의 내역조차도 사실 좀 의아하다. 심대리가 펀드 담당보저였기에 고액 고객들의 신상에 대한 정보를 유출해 집에 보관하고 있다는 정황증거가 잡혀있는 단계이니 만약 정황증거가 아닌 사실이라면 자연스럽게 설득을 해서 돌려놓게 만들라는 것이다.

직접 잠입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내 말에 유과장은 아직 그럴 상황은 아니란다... 결정적으로 그렇게 잠입했을 때 찾지 못하고 허탕을 친다면 더 낭패를 볼 수 있고 지금 현 시점은 단지 정보 유출만 있을 뿐, 이것도 물론 큰 범죄지만 그것보다 그걸 어떻게 사용할지가 더 두려워하는 듯 느껴진다.

그건 나도 어렴풋 느끼고 있었다. 은행에서 고객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다는 뉴스가 이슈가 된다면... 더군다나 고액고객들의 정보라면 은행에 가해질 이미지 타격은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유과장의 걱정스런 말보다는 혜주의 일로 머릿속에 꽉 채워졌기에 심각함보다는 그냥 그런가 보다라는 식의 무책임한 대답으로 유과장을 대하게 되었다.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하게 해야죠...지금 삼자처럼 김대리님이 말 할 입장이 아닌 거 같은데요..."

"예?"

"김대리님이야 그만 둔다고 하면 쇼핑몰이라도 운영하죠...이 일이 외부로 유출된다고 하면 이미지 쇄신차원에서 본사로부터 아마 직원들의 대대적인 인사이동 및 퇴사가 이뤄질 텐데... 다른 직원들은요? 아마 반은 전부 목이 날아갈걸요!"

"..."

"아무리 개인주의에 내 일만 아니면 괜찮다는 식의 성격소유자라도 그냥 넘길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 유과장님은요? 전입오신지 한 달도 안되서 이런 일 터지면 크게 문제 생기는 거 아니에요?"

"저요? 호호호호... 지금 저 걱정하시는거에요? 아니면 협박하시는거에요?"

"양자 다입니다."

"전 이미 이 일에 대한 정황증거 때문에 여기 강동지점으로 배속 받은 거예요. 어차피 전 이 일 해결되면 본사로 다시 복귀합니다."

"...그럼 이 일만 잘 해결되면 제 일에 참견 안하신단 말인가요?"

"그걸로 협상하죠. 쇼핑몰건도 일체 묵인해준다는 걸로요. 그리고 지금처럼 하시던 일만 계속 하시면 됩니다."

"생각해 볼 시간적 여유는 있나요?"

"글쎄요... 한시라도 빨리 결정해주신다면 저희가 수월하겠는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전 좀 바쁜 일이 생겨서요,"

나는 더 이상 궁금증을 못 이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내게 유과장이 어처구니없는 말을 뱉어냈다. 아니... 여자로서는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김대리님!"

"...예?"

"근데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

"상사로서 대접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의자를 빼줄려고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도망가듯 가버리면 여자한테 상처 준다는 거 모르세요?!"

"... 죄송합니다... 급한 볼일..."

"제가 노처녀라고 무시하는거에요?"

"노처녀요?"

나도 모르게 유과장을 위아래로 훑어보게 되었다. 노처녀라... 솔직히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기에 유과장의 말에 무의식적인 대답을 하게 된다.

"오히려 20대의 일반 모델보다 훨씬 매력 있고 찍고 싶은 란제리 모델같이 보이는데요...그럼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너무 급해서요."

나는 나오자마자 핸드폰에 찍혀 있는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연결 음이 들려왔고 곧 아까 목이 매여 말을 하던 수이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까 전화 받았던 김민호인데요..."

[... 예...]

"무슨 일로 전화 했죠?"

[혜주가... 혜주가요...]

"혜주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지금 병원인데요...]

"병원..."

[예... 아무한테도 연락할 사람이 없어서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병원이라뇨 과로해서 쓰러지기라도 했어요?"

[아뇨...]

"사고 났어요? 혹시 일하다가 다친거에요?"

[아뇨...]

"그럼요? 왜 갑자기 병원인데요?"

[여기 세브란스 응급실인데요...우선 오셔서...]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멍하니 핸드폰을 들고 있던 나는 택시의 지붕위에 보이는 노란색 표시등을 보고 손을 뻗으며 도로가로 나가게 되었고, 그 차는 내 바로 앞에서 급정거를 했다.

'끼익~~~~~'

"야!! 너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죄...죄송합니다... 지금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주세요."

"..."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는지... 욕을 하려던 기사가 아무 말 없이 날 태우곤 운전을 시작한다.

생각보다 거리가 먼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시계가 10시를 거의 가르키고 있었다. 나는 전화통화 내용대로 곧바로 응급실로 달려갔고, 문을 막 열려고 하는데 간호사가 어떻게 왔냐고 물어본다. 물론 장혜주를 만나러 왔다고 대답을 했다.

응급실 안에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혜주를 찾고 있는데... 보이 질 않는다...

천천히 걸으며 침대를 확인하는데... 커튼이 쳐져 있는 안쪽의 침대에 혜주가 있다는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나는 떨리는 손으로 커튼을 서서히 젖히고 들어갔다.

탐스런 가슴이 혜주가 분명했다. 저 작은 유두와... 잘록한 허리에 어울리지 않는 탄력적인 유방은... 환자복에서 내 매장 세면대에서 입고 있던 티로 갈아입고 있었는지. 얼굴을 티로 가린 채 팔을 위로 올리고 상반신을 노출시키고 있는 혜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제서야... 혜주의 갈아입는 걸 도와주던 낯선 여자가 놀라선 날 쳐다보고 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안녕하세요... 김...김민호입니다..."

"..."

"혜주 맞죠?"

"저기... 지금 옷갈아 입는거 안보이세요?"

"...죄송합니다..."

얼굴이 빨개진 채... 나는 커튼밖으로 나온다... 너무 여자의 가슴에 익숙해졌나보다... 혜주의 살은 여전히 하얗고 부드럽게 보였다. 약간은 앙상해보이는 갈비뼈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큰 상처가 몸에 없다는 걸 확인했기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옆에 있는 철제식 의자에 앉게 된다.

몇초간이 몇분처럼 느껴졌을 때... 혜주의 친구인듯한 그 낯선 여자가 커튼을 조금 열고 날 부른다...

"죄송합니다... 근데 혜주 어디가..."

봐선 안될걸 본듯 한... 내 표정에 혜주가 방금 멈췄는 듯 보이는 눈물을 다시 흘리기 시작한다.

얼굴의 양볼이 많이 부어... 혜주의 약간은 젖살이 붙어 있던 가름한 달걀같은 얼굴이 호빵처럼... 아니... 뭘 입에 물고 있 듯 빨갛고 심하게 부어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혜주라고는 도저히 못 믿을 정도로... 그리고 입술도 찢어졌었는지... 입과 코 여기저기에 피가 묻어 있었다...

나는 몸이 굳어진 채... 혜주에게서 눈을 때지 못하고 있는다.

누구에게 맞은게 분명해 보이는 혜주의 얼굴을 천천히 손을 내어 쓰다듬으려 할 때... 혜주가 겁을 먹고는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혜주야..."

"..."

"나 모르겠어? 아저씨야... 야한 란제리 파는 아저씨..."

"..."

내 말에 계속 눈물만 짓는 혜주였기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더 다가가고 싶은데... 날 거부하는 혜주다...

"죄송해요... 사장님이 전화했을 때... 그냥 혜주를 맡겼어야 하는데... 알바구한다고..."

"상관없어요...그게 문제가 아니고... 지금 혜주 어떻게 된거죠? 얼굴이 왜 이래요?"

"혜주 작은 아빠요... 계속 다른데서 숨어있었는데... 오늘 낮에 들이닥쳤대요... 혜주 알바 끝나고 들어오는거... 잡아서 강제로..."

"...그 새끼 지금 어딨어요... 그 작은 아빠란 놈 어딨어요?!"

"경찰서요... 우선 강간..."

"강간이요??"

"미수요... 강간미수로 경찰서에 있어요... 근데... 혜주가 말을 못해요... 머리 CT도 찍고 검사 해봤는데... 충격은 받았지만 이상은 없다고... 근데 우리 혜주 말을 못해요..."

혜주의 친구가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내가... 그 때 그렇게 혜주를 보내지만 않았다면... 아니... 찾기를 포기하지만 않았다면... 지금 여기에 이런 모습으로 있을 혜주가 아니었는데... 나도 입을 다문 채... 쥐고 있는 주먹에 더 힘이 실려 손톱이 살을 파고들정도의 부노로 떨게 되었다...그 작은아빠라는 놈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내 성격에 대한 분노인지도 모른 채, 응급실 침대앞에서 가만히 혜주를 바라보고만 있는다...

"으...으으으으~~"

혜주가 입을 뻐금거리며... 뭔가를 찾는다...혜주의 친구는 들고 있던 노트를 혜주에게 건네줬고... 혜주는 힘겹게 글씨를 써 나가기 시작했다.

'아저씨, 통장 좀 찾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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