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219』 >
『해외편 - 219』
월드 시리즈는 월드 시리즈만의 긴장감이라는 게 있다.
소위 강팀과 약팀이 맞붙는다 하더라도 월드 시리즈라는 큰 경기에서 일어나는 변수는 어느 누구도 예상을 하기 힘들다.
가장 흔한 변수는 역시 선수들의 실력 변화다.
시즌 내내 리그를 지배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어도 월드 시리즈 무대에서는 처참할 정도의 성적으로 무너지는 선수들이 생각 외로 많이 발생한다. 반대로 시즌 내내 별 볼일 없는 활약을 하다가도 월드 시리즈 무대에서는 그 누구보다 대단한 활약을 펼치는 선수들이 깜짝 등장한다.
그게 바로 월드 시리즈의 매력이다.
뻔한 결과를 뻔하지 않게 만드는 무대.
월드 시리즈 1차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맥브라이드 단장은 긴장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단 한 명의 선수 때문이다.
LA 다저스의 월드 시리즈 진출에 혁혁한 공을 세운 에이스 차지혁.
2년 연속 사이영상과 시즌 MVP를 예약해놓은 차지혁이지만, 월드 시리즈 무대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차지혁이 무너진다면?
상상하기도 힘든 결과가 눈앞에 펼쳐진다.
모두가 40년 만의 LA 다저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원하고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그 중심에는 차지혁이 단단하게 서 있어야만 한다.
1차전에서 차지혁이 무너지면?
LA 다저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이 무척이나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변하기에 맥브라이드 단장은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간절하게 원했다.
시즌 동안 보여줬던 실력 그대로만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져주길 바란다고.
그렇게 시작된 월드 시리즈 1차전.
1회 말, 뉴욕 양키스의 공격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리에 앉자 있지도 못했던 맥브라이드 단장은 어느새 소파에 깊숙하게 몸을 묻은 상태로 그 누구보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TV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다저스의 선발 투수 척의 피칭이군요! 타순이 두 번이나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양키스의 타자들 중 단 한 명도 척의 공을 제대로 때려내지 못하고 있군요!
-오늘 어쩌면 아주 진귀한 기록이 작성될지도 모릅니다.
-진귀한 기록이라니 무슨 말인가요?
-1956년 10월 8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시 알고 있습니까?
-음… 너무 오래된 일이지만, 저는 확실하게 알고 있죠. 메이저리그 역사에 단 한 번 뿐인 월드 시리즈 퍼펙트 게임이 달성된 날이 아닌가요?
-하하하! 맞습니다! 재밌는 사실은 바로 그 경기가 뉴욕 양키스와 브루클린 다저스의 월드 시리즈 5차전이었습니다. 그 날 경기에서 양키스의 선발 투수 돈 라슨(Don Larsen)은 97개의 공만 던지면서 다저스를 퍼펙트 게임으로 제압했습니다. 그리고 양키스는 통산 17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하게 됩니다.
-양키스에게는 자랑스러운 경기였지만, 다저스에게는 악몽과도 같았던 경기였겠군요.
-그러니 재밌다는 겁니다. 72년 만에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지 않았습니까? 물론, 아직까지 6회 밖에 끝나지 않았기에 퍼펙트 게임을 말할 순 없지만, 다저스의 선발 투수가 척인 것을 생각해보면 양키스 팬들에게는 거북한 말이겠지만 퍼펙트 게임을 충분히 기대해 볼만하지 않겠습니까?
맥브라이드 단장은 캐스터와 해설자의 말을 들으며 자세를 조금 바꿔 앉았다.
몰랐다.
아니, 어느 누구도 6회 밖에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퍼펙트 게임을 떠올리지 않았을 거다.
일반적인 시즌 경기라면,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투수가 차지혁이라면, 자연스럽게 퍼펙트 게임에 대한 기대를 해봤겠지만.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다면…….”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맥브라이드 단장이었다.
40년 동안 지겹도록 따라다녔던 LA 다저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크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정말이지… 저런 대단한 투수가 어째서 한국과 같은 작은 나라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방송국에서도 퍼펙트 게임에 대한 기대를 높이기 위해서인지 집중적으로 차지혁의 얼굴을 화면에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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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엄청난 환호성과 야유로 뒤덮였던 양키 스타디움이 고요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꿀꺽.”
누군가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소리가 천둥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축제.
월드 시리즈라는 최고의 축제 무대가 이렇게 고요할 수 있을까?
“후우우.”
로진백을 들었다 놓으며 크게 숨을 토해냈다.
‘차라리 시끄러운 게 낫겠어.’
수만 명의 관중들이 모두 기립해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아니, 신경이 쓰였다.
옆에 앉은 사람과 잡담도 나누고, 시원하게 맥주도 들이 키고, 치킨과 핫도그를 씹어 먹으며 이 축제를 즐겼으면 싶었다.
72년 만이라고 했다.
LA로 이전을 하기 전, 뉴욕에 둥지를 틀고 있었던 다저스, 당시에는 브루클린 다저스로 불렸던 때에 지금은 허물어지고 새로 지어졌지만 어차피 이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건립되어 있던 구 양키 스타디움에서 다저스는 양키스에게 월드 시리즈 5차전에서 퍼펙트 게임을 당하는 굴욕을 맛봤다.
그것도 돈 라슨(통산 성적 81승 91패)이라는 평범한 투수에게 당한 퍼펙트 게임이고, 메이저리그 최초이자 아직까지도 유일무이한 월드 시리즈 퍼펙트 게임이라 다저스의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라 했다.
그런데 그런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를 지울 수 있는 순간이 온 거다.
타석에 들어서는 7번 타자 조지 호프메이어를 바라보며 나에게 집중되는 모든 시선과 관심을 애써 털어내기 위해 가볍게 제자리에서 두 번 점프를 했다.
연타석 삼진을 당한 조지 호프메이어의 표정에는 비장함이 보였다.
경기 종료까지 남아 있는 3개의 아웃 카운트 가운데 하나를 자신이 소모해야 할지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인지, 어떻게든 퍼펙트 게임이라는 최악의 비참함을 피하기 위함인지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서서 타격 자세를 잡고 있었다.
‘설마 맞아서라도 출루에 성공하라는 작전이 나온 건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여겨졌다.
월드 시리즈에서 퍼펙트 게임으로 패배하는 쓰디쓴 굴욕을 당하느니 비겁하다는 말을 듣더라도 어떻게든 1루로 출루하는 게 양키스 입장에서는 나을 것 같긴 했다.
다만, 문제는.
쇄애애애애액!
퍼- 어엉!
“스트라이크!”
타자의 몸 쪽을 과감하게 찌르고 들어가는 98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에 조지 호프메이어가 이를 악물었다.
운이 나쁘다.
오늘처럼 내가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공을 던질 수 있을 정도로 볼 컨트롤이 좋은 날이 과연 얼마나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이런 날에는 웬만해선 안타를 맞지 않는다.
더불어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볼넷도 주지 않고, 몸에 맞는 공 역시 나올 수가 없다.
쐐애애애애액!
퍼- 어어엉!
“스트라이크!”
두 번째 공도 몸 쪽으로 붙이는 스트라이크를 던짐으로써 어리석게 홈플레이트에 바짝 다가서서 제대로 된 타격보다 운을 기대하는 행동에 대한 따끔한 일침을 내려줬다.
그리고 세 번째도.
몸 쪽.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98마일의 공이 102마일로 올라갔다는 것 정도뿐.
부- 웅!
“스윙! 타자 아아아- 웃!”
이걸로 이제 남은 아웃 카운트는 2개.
그래,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남은 두 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지 못해서 안타를 맞으면 무척이나 억울할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서 던진다.
두 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을 수 있다면 제로백 슬라이더만 던져서라도 타자를 잡는다.
각오를 다지고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결의와 투지를 다지며 타석에 들어서는 세일 바스케즈 8번 타자를 바라봤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 소리와 거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우레와도 같은 박소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메이저리그 역사에 단 한 번 밖에 없었던 월드 시리즈 퍼펙트 게임을 내가 두 번으로 늘려놓은 거다.
지금까지 많은 퍼펙트 게임을 만들었지만, 오늘만큼 기쁜 적이 없었다.
“지혁아……!”
형수가 울고 있었다.
덩치가 산만한 녀석의 얼굴은 온통 물기 투성이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콧물인지, 침인지 알 수 없는 물기가 흥건한 얼굴로 나에게 안겨왔다.
“수고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절대 오늘 경기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지 못했을 거다. 고맙다, 형수야.”
“끄흐윽! 지, 지혁아아-!”
다른 때였다면 꼴사납다고 당장 밀쳐냈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나 역시 괜히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가가 따끔거렸다.
꿈이라도 꿔봤을까?
월드 시리즈 무대에서 선발 투수로 퍼펙트 게임을 한다는 걸.
월드 시리즈 무대에서 선발 투수와 포수가 같은 한국인이라는 걸.
정말이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료 선수들 역시도 몇몇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양새만 놓고 본다면 월드 시리즈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보일 것 같았지만… 뭐, 어때.
내일 경기에서도 또 멋지게 승리하고 다음 경기에서도 승리하고 그 다음 경기에서 승리해서 정말로 LA 다저스를 월드 시리즈 우승 시켜 버리면 그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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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2차전에서는 뉴욕 양키스의 저력이 드러났다.
시즌 내내 좋은 활약을 보이며 2차전 승리의 70%이상을 예상했던 딜런 아담스가 6이닝 6실점으로 마운드를 내려가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LA 다저스의 타자들 또한 양키스에서 선발로 내세운 카를로스 베일리를 상대로 5회 동안 5득점을 하며 화끈한 타격전을 보여줬다.
선발 투수들이 내려간 가운데 양키스와 다저스는 곧바로 필승조와 추격조를 마운드에 올렸다. 타격전으로 점수가 이미 많이 나고 있다지만 1점 차이의 아슬아슬한 상황이었기에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양 팀의 감독들이 상대팀 타선을 잠재우기 위해 최고의 불펜 투수들을 마운드에 올렸지만, 이미 뜨거워진 양 팀의 타선은 꺼질 줄을 몰랐다.
양키스는 다저스의 추격조를, 다저스는 양키스의 필승조의 투수들을 상대로 매 이닝마다 점수를 냈다.
8회가 됐을 때, 다저스가 드디어 동점에 성공했지만 곧바로 이어진 8회 말 공격에서 양키스는 또 다시 1점을 내며 달아났다.
쫓고, 쫓기는 긴장감 넘치는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9회 초 다저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양키스는 마무리 투수를 마운드에 올렸다.
셀비 글리슨.
제2의 마리아노 리베라로 불리는 셀비 글리슨은 현재 뉴욕 양키스의 수호신이며, 아메리칸리그 2년 연속 세이브왕에 오른 경력도 있다. 올 시즌에도 36세이브를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거뒀고, 블론 세이브는 고작 3차례 밖에 없었다.
셀비 글리슨의 주무기는 메이저리그 최정상급이라 평가를 받고 있는 투심 패스트볼이다.
97마일에 이르는 빠른 구속과 현란한 무브먼트는 한 타석만에 공략하기가 절대 쉽지 않았다.
아쉽게도 셀비 글리슨의 투심 패스트볼은 월드 시리즈 2차전 마무리 상황에서도 확실하게 위력을 떨쳤다.
3타자를 상대로 2개의 삼진과 1개의 그라운드 볼을 유도하며 뉴욕 양키스의 월드 시리즈 2차전 승리를 굳건하게 지켜냈다.
1승 1패.
겉으로 보면 LA 다저스의 뉴욕 원정 경기는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당연한 승리라 여겼던 1차전.
승리 확률이 높았던 2차전.
실질적으로 LA 다저스는 뉴욕 원정 경기에서 1, 2차전을 모두 승리하고 LA 홈 경기를 갖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믿었던 딜런 아담스가 무너져버리는 바람에 게레로 감독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하루 휴식을 갖고 11월 2일 목요일에 월드 시리즈 3차전이 시작됐다.
뉴욕 양키스와 LA 다저스의 선발 투수들은 모두 어깨가 무거웠다.
LA 원정 첫 번째 경기에서 패배하면 기싸움에서 확실하게 눌릴 수밖에 없는 양키스의 선발 투수 칼렙 콘웨이와 2차전의 패배로 3차전이 무척이나 중요해진 다저스의 선발 투수 존 로더키는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2028년 마지막 선발 경기라는 듯 투구를 했다.
두 명의 선발 투수들만큼이나 양 팀의 타자들 또한 필사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투수들은 조금이라도 정교하게 공을 던지기 위해 이를 악물었고, 야수들은 타구 하나를 잡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으며, 타석에 선 타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공을 골라내거나, 배트를 휘두르며 안타를 만들어냈다.
단단한 방패도, 날카로운 창도 없는 경기였지만 박진감과 긴장감은 대단했다.
원맨쇼로 끝나버린 1차전과 쉬지 않고 두드려대기만 했던 2차전보다 훨씬 재밌는 경기였다.
치고, 때리고, 필사적으로 달리고, 막고, 저지하고.
더그아웃에서 지켜보는 내내 손에 땀이 찰 정도로 경기는 열정적이었다.
양 팀의 선수들 모두가 필사적으로 경기에 임했고, 승부는 결국 정규 이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연장전으로까지 이어졌다.
연장 10회, 11회, 12회, 13회까지 이어지는 진땀나는 승부에 양 팀 선수들의 체력은 바닥을 향해 내달렸지만, 오늘 승리하는 팀이 남아 있는 월드 시리즈 경기에서 우위를 점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에 양 팀 감독들은 상황마다 선수를 교체해가며 끈질긴 승부를 연장시켰다.
< 『해외편 - 21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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